자원은 인간에게 유용하게 쓰이는 각종 재화와 용역을 가리키는 경제용어이다. 자원은 크게 자연자원과 인문자원으로 나눠지며, 자연자원은 다시 생물자원과 무생물자원으로, 그리고 인문자원은 노동력·기술 등 인적 자원과 제도·조직·자본 등 문화적 자원으로 나눠진다. 토지와 물, 광물은 기초자원이라 하여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자연자원은 그리 풍부하지 못한 실정이며 경제발전은 주로 인적 자원과 기술적 자원에 힘입은 바 컸다. 현대에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새로운 자원이 계속 개발 중이며 우리도 개발경쟁력 강화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인간은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현재보다는 향상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여 여러 형태로 자연계와 접촉하여 유용한 물자를 얻고 있다.
자원은 인간이 어떠한 목적을 위하여 채취하고 만들어 내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능력이나 욕망의 목적에 따라 그 종류와 양이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유동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는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 왔던 자원이 중요하지 않은 경우가 생기는가 하면,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 새롭게 중요해지는 경우도 있다.
자원은 인간의 욕망의 대상이기 때문에, 공기와 같이 언제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거나, 해수 중에 존재하고 있는 금과 같이, 비록 욕망이 강하다 하더라도 얻을 수 있는 수단이 강구되지 않은 것은 자원의 범위에서 제외된다. 이처럼 자원과 인간의 능력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자원은 크게 자연자원과 인문자원으로 나눌 수 있으며, 자연자원은 다시 생물자원과 무생물자원으로, 그리고 인문자원은 노동력 · 기술 등 인적 자원과 제도 · 조직 · 자본 등 문화적 자원으로 나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인간생활에 가장 유용한 자원은 토지와 물, 그리고 광물이다. 이 중 토지는 우리들이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터전이며, 물은 이 토지 위에서 동식물을 살게 하고 우리들의 생활의 기반을 형성해 주며, 광물은 생활을 풍족하게 해주고 있다.
그래서 이 세 가지를 기초자원이라고 하며, 이러한 기초자원을 바탕으로 초목 · 야생동물 · 수상동물 등이 서식하고 있는데 이를 천연자원이라 부른다.
이러한 기초자원 · 천연자원에 대하여 인간의 능력이 작용하여 비로소 눈으로 볼 수 있는 형태의 자원, 즉 식량자원 · 공업원료자원 · 에너지자원 등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자원을 제1차자원이라고도 부르며, 이것은 다시 제2차와 제3차로 가공되어 인간생활의 유용한 물자가 되는 것이다.
인간은 그 능력을 바탕으로 하여 새로운 자원을 개발해 내고 있다. 그러나 지구상에 존재하고 있는 몇몇 특수자원을 제외한 대부분의 자원은 편재하여 있고, 또한 그 부존량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개발될 경우 언젠가는 고갈되어 자원 위기를 맞게 될 것이 분명하다.
자원은 또한 과도하게 이용하면 인간은 물론 생태계에 영향을 주어, 잘살기 위한 자원개발이 오히려 못살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므로 개발에 앞서 보전문제를 깊이 생각하여야 한다.
수자원은 토지 · 광물 자원과 같은 기초자원 중의 하나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 물의 수요가 크지 않았던 1960년대 초까지만 하여도 자원으로서의 그 가치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경제성장과 산업구조가 고도화됨에 따라 종래의 자유재로서의 수자원은 오늘날 경제재로서 중요한 의의를 지니게 되었으며, 수자원에 대한 개념도 그 이용과 개발기술에 따라 많이 변화하고 있다.
우리 나라 수자원의 원천인 강수량은 연평균 1,274㎜로 세계 평균 970㎜의 1.3배이나, 1인당 강수량은 약 2,900톤으로서 세계평균 2만6800톤의 11%에 불과하여 국제기구에서도 물부족국가로 분류하고 있다. 더구나 강수량이 연도별, 계절별, 지역별로 변동이 심하여 수자원개발 및 관리에 많은 어려움을 주고 있다.
연도별 강수량의 분포를 살펴보면 1939년 770㎜에서 1990년 1,640㎜로 2.1배나 차이가 나고, 특히 계절적 변동은 더욱 심하여 우기인 6월에서 9월 사이의 4개월간은 연강수량의 3분의 2가 집중되는 반면, 갈수기인 11월에서 다음해 4월까지의 6개월간은 연강수량의 5분의 1에 불과하다.
강수량의 지역적 불균형도 비교적 심하여 경상북도 내륙지방은 연평균 강수량이 1,000㎜에 불과한 반면에 제주도의 경우는 1,600㎜에 이르고 있다.
그 결과 하천유출량의 극심한 불균형을 야기시켜 한강 등 5대 주요 하천의 하상계수는 보통 300 이상으로 매우 커서 수자원의 고른 확보가 상당히 어려운 실정이다.
한편, 지반 침하나 해안가 염수 침입방지 등을 고려한 연간 지하수 개발 가능량은 130∼140억톤으로 추정되나 대수층의 발달이 빈약하여 대규모 지하수개발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이러한 수자원의 특성으로 인하여 겨울과 봄철에는 비가 부족하여 가뭄이 발생하고 있다. 따라서 다목적 댐을 축조하여 여름철에 물을 가두고 광역상수도를 통해 넓은 지역에 안정적인 용수를 공급하는 수자원정책은 우리 나라의 국토개발 및 관리에 있어 절대적인 중요성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 나라는 수천 년 동안 쌀농사 중심의 단일경작 농업사회로 일관해 오면서 농업과 관련된 물 관리에 많은 노력을 경주해 왔음은 『삼국사기』 · 『고려사』 · 『증보문헌비고』 등 옛 문헌을 통하여 확인되고 있다.
멀리 삼국시대로부터 고려 · 조선시대에 이르는 동안 한발로 인한 기근이 잦아 이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리시설사업을 전개하여 왔다.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벼농사가 시작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A.D.33년(다루왕 6)에 벼농사가 시작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벼농사에는 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가뭄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저수지와 같은 저수 시설이 필요하였다.
우리 나라 최초의 저수지는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의 벽골제이다. 길이가 1,800보(3,240m)에 이르며 당시의 토목공사로는 상상 이상의 대규모였다. 당시의 토목공사 중 유지(留地)에 관한 설계법은 일찍이 일본에까지 전달되어 한인지(韓人池)라 불리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저수지 축조 등 수리시설의 확충사업은 진전을 보지 못하고 기존 시설을 보수하는 정도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토지 국유지 확립의 추진과 더불어 개간사업은 활발하였었다.
1256년(고종 43) 원나라 군대를 피하여 강화로 대피해 온 군 · 민의 식량공급을 위한 강화의 제포 · 와포 · 초포의 간척사업은 기록상 우리 나라 최초의 서해간척사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은 농업이 국가를 지탱하는 유일의 산업이었으므로 관개를 중심으로 하는 수리행정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태조실록』에 의하면 1395년(태조 4) “권농의 요체는 제방을 축성하는 데 있으니 수령은 모두 권농의 직책을 겸직하며 이를 우선한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건국 초기부터 하천제방을 수축하고 설수를 모아 장마와 한해에 대비하였음을 알 수 있다.
1442년(세종 24) 측우기의 제작으로 농업과 치수사업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치수사업의 형태도 고려시대에는 협곡을 나무나 돌 등으로 막아 유수하는 이른바 보(洑)가 주축을 이루었으나, 1485년(성종 16)에는 종래의 보나 제언에 의한 저수방식을 지양하고 천방관개방식(川防灌漑方式)으로 전환하기에 이르렀다. 합덕지를 비롯한 밀양의 수산제 신수공사, 충주의 달천 방축공사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하천법과 같은 제언사목(堤堰事目)이 1662년(현종 3)에 제정, 공포됨으로써 치수사업의 조직적이며 과학적인 기틀이 마련되었다. 정조시대의 전국 제언기록을 보면 경기 229개 소, 충청 503개 소, 전라 943개 소, 경상 520개 소, 황해 26개 소, 평안 55개 소, 강원 65개 소, 함경 24개 소로서 총 3,375개 소의 크고 작은 저수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의 치수사업은 자원 수탈과 자국의 식량기지화를 목표로 추진되었다. 식량기지화를 위한 저수지 등 수리시설의 확충은 물론 전국에 걸친 수력댐 건설 등이 그것이다. 이를 위하여 1911년부터 3차에 걸친 전국적인 수력조사가 행하여졌다.
특히 1920년과 1925년의 대홍수로 수해가 격심하자 한강을 비롯한 6대 강에 홍수방어를 위한 하천개수사업을 시행하게 되었고, 또한 4차에 걸친 수력조사를 통하여 전국적으로 163개 소의 수력지점과 616만3800㎾의 발전가능량을 확인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1926년 수로식 발전으로 부전강수계의 20만㎾와 1938년 장진강 수계의 32만5000㎾ 시설용량의 수력발전소가 건설됨으로써 유역변경에 의한 고낙차지점개발의 실현을 보게 되었다.
1945년의 광복에서 1961년의 5·16군사정변에 이르기까지는 정치 및 사회경제적 혼란기였기 때문에 수자원개발사업도 한발에 대비한 중소규모의 저수지 축조 정도에 불과하였고, 본격적인 수자원개발시대가 열린 것은 1961년 이후부터이다.
1962년부터 추진된 경제개발5개년계획 및 1965년부터의 식량증산7개년계획과 수반하여 당시 농림부 주관하에 전천후 농업용 수원개발사업이 전국적으로 수립되었다.
건설부에서는 1965년에 전국 하천의 물수지도를 기초로 한 수자원종합개발10개년계획을 수립하고 이의 구체화를 위하여 한강 · 낙동강 · 금강 · 영산강 유역 조사를 1966∼1971년에 실시하였다.
이를 기초로 1971년 4대강위원회를 설치하고 1981년을 목표연도로 한 4대강유역 종합개발계획을 수립하여 본격적인 수자원개발사업을 추진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1971년에는 「하천법」을 제정하여 합리적인 하천관리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이보다 앞서 1966년에는 「특정다목적댐법」을 제정, 용수를 판매하여 수자원을 관리할 수 있게 하였다.
동시에 전력 · 농업 · 도시용수 등 다목적 수요증대에 대처하는 대규모 댐건설 촉진의 길을 열어 소양댐 · 충주댐 · 대청댐 · 안동댐 등 대규모 다목적댐건설의 실현을 보았다.
수자원은 인간의 식수와 세척용으로, 농업 및 공업생산의 생산요소로, 그리고 수력발전 등의 에너지원으로서의 주요한 의의를 가진다. 전통적으로 농업사회에 있어서는 도시발전이 미약하기 때문에 농업용수로서의 중요성이 가장 높았으나, 고도산업사회에 있어서는 도시의 발전과 수반하여 생활 및 공업 용수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발전용수는 지형적인 제약이 커 개발에 한계가 따른다.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상수도가 설치된 곳은 부산으로 고종 때이며, 서울 · 평양 · 목포 등에도 거의 같은 시기에 상수도가 설치되었다. 1910년 이후 대부분의 도시는 상수도 시설을 갖추게 되었는데, 1945년까지 79개 도시에 상수도가 설치되었으나, 저수지에 의한 것은 많지 않았고 대부분 하천에서 직접 취수, 공급하였다.
이때는 수요량이 많지 않아 수질오염의 염려도 없는 때여서 하천수 취수에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경제개발의 본격적인 추진과 더불어 인구는 도시로 집중하였고, 이에 따라 상수도의 공급도 기존도시에서는 확장, 신도시에서는 신규 수요가 발생하여 크게 증가하고 있다.
공업용수도 1960년대 이전까지는 사용량이 적어 각 도시의 상수도에서 공급을 받거나 소규모의 공업전용 수도를 설치하여 공급하였다.
그러나 공업화가 본격화된 1960년대 이후에는 공장집단인 공업단지가 등장함에 따라 그 수요가 급속히 증가하고 있어 대규모의 공업전용 수도의 건설을 통하여 공급되고 있다.
농업용수도 천수답이 수리안전답으로 전환되고, 또한 영농기술의 개선 등으로 그 수요는 계속 증가추세에 있다. 이러한 도시화 · 공업화의 진전에 따른 생활 및 공업용수와 농업용수의 수요증대는 수자원에 대한 생각이나 그 이용방법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종래에 추구하여 왔던 자연상태에서의 이수(利水) 측면에서 이 · 치수를 겸한 다목적 댐이 요구되었고, 수요지와 공급지 간의 용수수급 불균형과 거리가 원격화됨에 따라 점차 광역 이수 및 유역변경방식에 의하여 용수를 공급하기에 이르렀다.
1994년 현재 생활용수 62억 톤, 공업용수 26억 톤, 농업용수 142억 톤, 유지용수 64억 톤 등 총 301억 톤이 소요되고 있는 데 비하여 용수공급능력은 하천수 172억 톤, 지하수 26억톤, 댐 등에서 127억 톤 등 325억 톤으로서 약 8%의 예비율을 확보하고 있다.
2011년의 예상 용수수요는 1994년 대비 1.2배가 증가한 367억 톤에 달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를 용도별로 보면 생활용수는 생활 수준의 향상과 인구증가 및 도시화의 진전에 따라 종래의 식수 위주로부터 도시지향적인 수세식 화장실의 보급 확대, 세차용수 등 각종 수요의 증대로 약 1.8배가 되는 45억 톤에 달하게 될 것으로 예측된다.
농업용수는 경지면적이 한정되어 있어 크게 증가하지 않을 것이나 경지이용율의 제고, 수리간척 및 야산개발과 초지조성, 신품종 등의 확대로 약 152억 톤에 이를 것으로 예측된다.
이러한 용수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하천수에서 167억 톤을 공급하며, 신규댐 개발 등을 통해 댐에서 199억 톤을 공급하고 지하수 개발로 31억 톤을 공급할 계획이다.
광물은 일정한 화학성분과 물리적 성질을 가진 무기물로서 결정질(結晶質)로 되어 있는 물질이다. 유용한 원소나 광물이 농축된 암석의 군(群)을 광상이라 하고, 광상 중에서 채굴이 가능하고 경제적 가치가 있을 때 광물자원이라고 한다.
광물자원의 특성은 희소성과 편재성에 있다. 광물이 경제적 가치를 지니려면 일정률 이상으로 광상에 집중되어 있어야 하고, 또한 채굴 및 제련 기술도 수반되어야 한다.
광물자원의 개발과 이용은 인류의 기원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석기시대에 석기를 만들어 생활에 이용한 것은 광업의 효시라 할 수 있다.
한반도에서 금속을 처음으로 사용한 시기는 기원전 10세기경으로 추정되며, 북방계통의 청동문화는 기원전 3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청동검 · 동경(銅鏡)과 같은 유물이 출토됨으로써 당시의 주조기술은 상당한 수준에 도달한 것을 알 수 있다.
김해와 몽금포의 패총에서 출토되는 철기를 통해서 1∼3세기에 철의 선광과 사용이 보편화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라 · 백제 · 고구려 등 삼국에서는 4∼10세기에 철 · 구리 · 금 · 은 · 아연 등을 채취하고 가공하는 기술이 널리 보급되었다.
금속장식품 · 금동불상 · 범종 등의 유물을 볼 때 광물자원의 개발과 이용 기술은 세계적인 수준이었다고 평가된다. 백제의 임성태자(琳聖太子)가 일본에 야금술을 전하고, 백제는 철을 생산하여 일본에 수출하였다.
고려시대에는 광물자원으로 구리 · 철 · 은이 개발되었다. 구리는 동종(銅鍾) · 향로 · 동경 · 청동활자 · 화포 등을 제조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철은 철전(鐵錢) · 군기(軍器)를 만드는 데 이용되었다. 은화주조도 고려 후기에 나타난다.
금속류의 수입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을 볼 때 구리 · 철 · 은 등은 국내에서 채굴하여 자급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원나라가 고려로 하여금 군수물자를 만들게 하고 철을 공납하도록 한 데다가, 고려 중기 이후 거듭되는 전란으로 금속광의 채굴에 대한 무관심과 개발기술의 부족으로 광업은 불황기를 맞게 된다.
조선시대 금 · 은의 채취는 명나라에의 세공을 목적으로 행하여졌다. 태종 때에는 산금장려책을 펴 단천 · 수안 · 안변 등의 지역에서 개발에 힘썼으나 채굴기술의 낙후로 생산량은 보잘 것 없었다.
명나라와의 관계가 소원함에 따라 금 · 은 채굴은 1430년경부터 금지되었다. 중종 때에는 은이 부족하여 1만5000냥을 수입하였고, 효종 · 숙종 때 은점(銀店)을 허가하여 채굴을 독려하였으나 채굴기술의 낙후로 생산량이 미약하였다.
대원군은 1886년(고종 23)에 금 · 은 채굴금지법을 폐기하고, 징세를 목적으로 민간인에게 채굴권을 주는 「사금개발채례(砂金開發採例)」을 반포하였다.
그 뒤 조선이 산금국으로 유망하다는 것이 외국에 알려지자 광산에 대한 열강의 채굴권 확보 경쟁이 일어났다. 영국상사가 1885년에 처음으로 채굴허가를 신청하고, 일본이 처음으로 채굴권을 얻었으며, 잇달아 미국 · 소련 등도 채굴권을 획득하여 금 · 은 · 구리 등의 광물을 개발하였다.
조선에서 가장 활발하게 개발되었던 광물은 구리이다. 구리는 활자 · 화포 · 주전 제조에 사용되었기 때문에 수요가 많았다. 세종 때에는 창원 · 수안 · 장연 등지에서 채굴하였다. 그러나 생산량이 항상 수요에 미치지 못하여 일본으로부터 수입하였다.
철의 생산은 세종 때에 가장 활발하여 울산 · 안동 · 합천 · 용궁 · 산음 · 무주 · 영덕 · 무안 등 전국의 17개 소에 철장(鐵場)이 있었고, 이곳에서 제련하였다.
전문적인 장인(匠人)은 드물고 농민들에 의해서 농한기 부업으로 채굴, 제련하여 경제성이 낮았다. 따라서, 철 생산량은 부진하였으며, 특히 선조 때에는 사직과 문묘의 제기(祭器)도 만들 수 없을 정도로 부족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광업이 전반적으로 부진하였다. 그 이유는 명나라에 대한 조공을 회피하기 위해서 금 · 은 채굴을 금지하였으며, 장인의 신분지위가 낮아 전문적인 광업종사자가 거의 없었고, 채굴과 제련 기술의 축적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광업의 부진으로 고려 때보다 오히려 금속공예기술이 낙후되었으며, 중국이나 일본보다 금속가공이나 군기(軍器)개발이 뒤떨어지게 되었다.
일본은 조선을 강제로 점령한 뒤 전국적으로 광상조사를 실시하고, 이 조사를 토대로 1914년부터 금광을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외국인의 광업권 취득을 제한하기 위해서 「조선광업령」을 선포하고, 진남포제련소 · 노량진선광제련소 · 겸이포제철소를 건설하여 지하자원을 채굴, 선광하고 본국으로 반출하였다.
1918년에 지질조사소를, 1922년에는 연료선광연구소를 각각 설립하여 광물과 석탄의 과학적 탐사를 실시하였으며, 이때부터 금 · 철 · 석탄의 채취량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1930년대에 선광을 목적으로 흥남제련소와 장항제련소가 준공되었으며 등록광구수는 3,800개 소나 되었다.
광복이 되면서 일본인이 경영하던 광산의 소유권 귀속문제가 발생하고, 남북분단으로 광물자원이 많이 분포되어 있는 북한지역을 실지(失地)하고 전력공급이 중단되어 광물자원의 개발은 침체되었다.
1950년 이후 유엔한국재건위원회(UNKRA)의 원조로 대한석탄공사의 무연탄생산이 활발하여지고, 1953년 「한미중석협정」의 체결로 중석 수출의 길이 열려 광물자원개발이 활성화되었다. 1960년 이전에는 우리 나라 전체 수출액 중 지하자원이 차지하는 비중이 단일품목으로는 제일 높았으며, 중석 · 형석 · 활석 · 흑연 등의 자원개발이 활발하였다.
1960년대에는 광물자원을 개발, 촉진하기 위하여 법령을 정비하고, 광물의 국내소비가 증대함에 따라 광업의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석탄개발조치법」 · 「광산보안법」을 제정하고, 광물자원의 탐사와 개발을 도모하기 위하여 국립광업연구소 · 국립지질조사소 · 광업진흥공사가 각각 설립되었다.
우리 나라는 광물의 종류가 많아 “광물의 표본실”이라 불린다. 지금까지 발견된 종류는 300여 종에 이르는데 유용광물만도 140종이나 된다고 한다. 그러나 지하자원으로서 실제 개발되고 있는 광물은 약 30여 종에 불과하고 그나마 매장량이 풍부한 것은 한정되어 있다.
지하자원으로서 산출되는 광물은 금속광물과 비금속광물로 크게 나누어지는데 금 · 은 · 동 · 연 · 수연 · 철 등 주요 금속광물의 광상은 화강암의 관입(寬入)과 관련하여 형성된 경우가 많고, 활석 · 형석 등과 같은 일부 비금속광물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화강암의 관입과 관련된 금속광물의 광산은 광산규모가 작은 것이 일반적이다. 금속광물로서 매장량이 많은 것은 석탄과 석회석이다. 그러나 산업용으로 중요한 유연탄인 역청탄은 생산이 미미하다.
주요 지하자원은 남한보다 북한에 많이 매장되어 있다. 현재 개발되고 있는 30여 종의 광물자원 중 북한지역 내 부존량이 풍부한 것은 철(94%), 니켈(85%), 아연(95%), 마그네사이트(100%), 석회석(98%), 유연탄(100%), 무연탄(89%), 금(67%), 은(67%), 동 등이고 남한지역에 부존량이 풍부한 것은 휘수연(94%), 망간(86%), 형석(93%), 남석(99%), 규사(83%), 고령토(95%) 등이다.
광물의 탐사와 개발기술이 점차 과학화되고, 중화학공업의 발달로 광물원료의 수요가 확대됨에 따라 국내광물의 생산량과 이용효율이 높아지고 있다.
산림자원이란 산림의 존재로 인하여 우리 일상생활에 필요한 용재와 연료 등을 얻고, 또한 국토보전 · 수원함양 · 자연순화에 도움을 주는 자원이다. 우리 나라의 산림면적은 남북한을 통틀어 전국토 면적의 73%인 16만2000㎢이고, 남한만을 볼 때에는 66%인 6만6000㎢로서 산림국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산세가 험준하고 지질이 화강편마암으로 구성되어 있어 황폐하기 쉽고 비옥도가 낮을 뿐만 아니라, 강수(降水)가 하절기에만 집중하는 등 기후조건도 유리한 편이 아니다.
또한 예로부터 땔감을 산림에서 취해 왔고 전쟁과 사회적 혼란의 연속으로 산림정책이 문란하여 산림면적이 넓음에도 불구하고 산림자원은 매우 빈약한 실정이다.
우리 주거형태는 일찍이 목조건물이 주류를 이루면서 산림자원의 주산물인 목재의 이용이 많았고, 우리 나라의 지리적 위치상 한랭한 동절기간이 길어서 임산연료는 국민생활에 절대적 필수품이 되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산림에 대한 왕조의 시책은 왕토사상의 기본국기에 의하여 산림을 모든 국민의 연료채취장으로 하였으며, 개인의 독점을 금하여 국민 전체의 공동이용대상으로 삼아왔다.
이러한 관습은 고려 이래 조선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전래되어 오다가 조선 중기부터 사유화가 크게 늘어나기 시작하였으나, 조선 후기 정조 때까지만 하여도 임정(林政)을 강화하여 바다에서 30리 안에 있는 곳에서는 개인소유의 산이라고 하더라도 벌채를 금하는 송금절목(松禁節目)을 발표하였다. 고종 때에도 종래의 봉금정책(封禁政策)과 남벌단속을 강화하였기 때문에 삼림은 대단히 울창하였었다.
이렇게 천혜적으로 부존되었던 산림자원이 한말에 이르면서 열강의 이권쟁탈의 제물이 되어 삼림벌채가 남발되기 시작하였다. 1896년 울릉도와 두만강 · 압록강 유역의 벌채권이 미국과 러시아에 넘어가 1903년부터 러시아는 한성조선목상회사로 하여금 삼림벌채를 시작하게 하였다.
1904년에는 러일전쟁을 유리하게 이끌던 일본이 이 지역에 대한 삼림벌채권을 요구하고 나섰으며, 이에 따라 러시아에 허가하였던 벌채계약을 파기하고 1906년 우리 나라와 일본 양국이 압록강과 두만강 연안의 삼림을 공동으로 경영한다는 ‘삼림협동경영약관’이 조인되었다.
일제하에서는 식민지정책의 일환인 「산림법」(1908) 및 임야조사실시(1917∼1924) 등으로 산림자원이 수탈되기 시작하였으며, 제2차세계대전중에는 「조선목재통제령」을 발하여 조직적인 수탈이 자행되었다. 또한, 수탈농정이 실시되면서 소작인들이 화전민으로 전락하여 도처에서 산림개간을 위한 벌채가 성행하였다.
이러한 문란상은 광복 후에도 벗어나지 못한 채 표류하다가 6·25전쟁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틈타 산림은 극도로 황폐화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북한으로부터 공급되던 열원(熱源)인 전기 · 석탄 등이 일시에 중단되고 6·25전쟁 직후 피해복구를 위하여 목재의 수요를 국내재에 의존하게 되면서 과잉벌채가 자행되어 산림자원은 순식간에 파괴일로를 걷게 되었다.
이렇게 무질서한 산림남벌을 막고 산림보호에 관심을 기울여 임정질서를 확립하고자 1951년에 「산림보호임시조치법」이 제정되었고, 1961년부터 임업발전을 위한 각종 시책의 기반이 될 「산림법」이 제정되었다.
그 뒤 산림청의 발족과 임업경영의 기반이 되는 영림계획제도가 채택되고 대단위 조림사업이 시작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1960년대의 임정시책은 산림보호가 첫 과제였고, 농촌연료해결책과 황폐지 복구시책이 뒤따랐다.
이와 같은 시대적 · 사회적 요청에 따른 정책 구현을 위하여 거시적 기획하에 전국민이 참여하는 제1차 치산녹화10년계획을 1973년부터 시행하여 4년이나 앞당긴 1978년에 목표를 달성하였다.
1979년부터는 제2차 치산녹화10년계획이 시작되어 산림개발 기반조성을 위한 산림자원 증강정책이 추진되었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녹화우선사업은 많은 결실을 맺었다.
산림의 자원량은 단위면적당 임목축적량으로 나타낸다. 우리 나라는 임목축적량이 1988년 현재 31㎥/㏊로서 서독 · 스위스 등 유럽 대부분의 나라가 80㎥/㏊ 이상이고 이웃의 일본이 약 87㎥/㏊임과 비교할 때 매우 빈약하다.
우리 나라의 산림을 임상별로 보면, 침엽수림이 약 50% 정도이고 혼료림과 활엽수림이 각각 26%와 18%를 차지하고 있어 온대성 식물군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소유별로 보면, 국유림과 사유림의 비중은 22:78로서 사유림이 월등히 많으나, 임목축적량에 있어서는 58:42로서 사유림이 국유림보다 빈약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사유림의 경영규모가 영세하여 경영의욕이 저하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산림의 남벌이 국유림보다 심하였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의 임업생산액은 국민총생산에 대하여 약 1%에도 못 미치는 상태에 있다. 이는 산림자원의 중요한 기능이 목재생산에 있는 데도 임업생산에서 목재생산의 비중은 12%에 불과하고 약재 · 버섯류 등 임산부산물 생산이 88%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토면적의 66%를 차지하는 산림지역의 국민경제 기여도가 1%에도 미달한다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관심사이며, 따라서 금후의 산림자원의 개발방향은 국토보전 · 수원함양 · 공기순화 등 공익적 기능의 강화와 더불어 용재생산 · 초지농업확대 등 생산성 향상을 도모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해양자원이라 함은 해저지질광물자원 · 해양생물자원과 해양물리학적 자원 · 해양화학적 자원 등 해양에서 생성되고 해양에 부존되어 있는 모든 자원을 말한다.
해저지질광물자원은 해저표면층과 해저구성지층으로부터 개발, 채취되는 것으로,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경제적 가치를 가지는 자원으로서 석유 · 가스 등의 에너지자원과 해저표면에 발달하는 광물자원이 있다.
해양생물자원은 크게 동물자원인 어패류와 식물자원인 조 · 해조류 등이 그 대종을 이루고 있으며, 이 중에서도 동물성 단백질 공급원인 어패류는 중요한 식료자원이다.
해양화학적 자원은 바닷물의 구성성분 자체로서 물 이외에 여러 가지 화학적 성분을 말하는데 소금을 비롯하여 마그네슘 등이 해수로부터 추출되고 있고, 그 밖에 담수(淡水) 등이 있다.
해양물리학적 자원은 조류의 힘, 파도의 힘, 해류의 힘, 온도차에 의한 힘 등 모두가 바닷물의 물리적 작용에 의한 동적인 힘으로서 에너지자원으로 이용될 수 있다. 우리 나라는 3면이 광대한 해양으로 둘러싸여 있어 이와 같은 각종 자원이 거의 무진장으로 부존되어 있을 것으로 예상되어 여기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해양자원의 조사와 이용실태를 자원유형별로 살펴보면, 먼저 해양광물자원의 경우 과거 40여 년 전까지만 하여도 주로 수산자원 이용에 국한하였으나 1950년대부터 차츰 변화하여 해저광물자원의 개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에 들어오면서 미국 등지에서 해양자원 개발정책에 박차를 가하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으나 그 역사는 일천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우리 나라에서는 해저 석유와 가스류에 대한 탐사와 조사가 1966년 국립지질광물연구소에 의하여 처음으로 이루어져 포항지역의 해저에 대한 탄성파 탐사를 실시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1970년부터 외국 해저탐사진에 의하여 서남해의 7개 광구에서 석유탐사가 진행중에 있으나 그 결과는 미지수이다. 다만, 서해 대륙붕 해저에는 상당한 두께의 제3기배사구조가 발달되어 있어 석유부존의 가능성이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밖에도 해저에 부존하는 광물자원은 표사광상과 골재자원을 들 수 있는데, 지질학적으로 보면 우리 나라의 대륙붕은 빙하기까지만 하여도 대부분이 육지화되었던 지역으로서 쇄설광물자원이 서남해의 얕은 해저에 광범위하게 매몰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사광상(砂鑛床)은 한강을 비롯한 5대 강이 유입하는 연안에 발달하여 사금 · 규사 · 사철 등이 주성분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서해안과 남해안 및 동해안의 얕은 해저와 조간지대에 대한 탐사와 연구개발을 장기적 안목에서 실시하여야 할 것이다.
해양화학적 자원은 무궁무진하나 그 개발은 소금 · 마그네슘 등에 불과하다. 그 중 소금은 인간생활에 필수적인 식료품으로서, 그 기원은 인류역사의 태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 황제시대(黃帝時代)에 이미 소금의 생산이 알려져 있고, 고대 그리스인 또한 제수(祭需)로 이용한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이, 소금은 인간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서 중요한 재화로 이용되어 왔다. 우리 나라는 1350년대에 소금에 대하여 세금을 거두었으며 조선 초부터 염전매제(鹽專賣制)를 실시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우리 나라는 암염이 없고, 서해안은 간만의 차가 심하고 일조시간이 충분하여 일찍부터 천일염이 발달하였다.
근대적인 천일제염법이 1907년부터 도입되어 1910년에 광량만에서 처음으로 소금을 산출하였으며, 차츰 근대적인 기업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 뒤 일제강점기에는 민간의 염전개발이 금지되기도 하였으나 1962년에 들어와 염전매제가 폐지되어 완전한 민영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주로 천일염법에 의한 영세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어 장차 늘어나는 수요를 충당하기 위하여 기계제염방법의 이용이 확대되어야 할 것이다. 그 밖에 광물자원 이용으로는 마그네슘을 일부 생산하는 정도이다.
우리 나라의 서해안은 조석간만의 차가 큰 지역으로, 조력발전의 유망지로 알려져 1976년부터 조력발전 가능성에 대한 조사가 실시되어 아산만 · 가로림만 · 천수만 · 서산만 · 안흥만 등이 유리한 지역으로 판단되었으나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조사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앞으로 이들 지역에 대한 면밀한 조사를 통한 개발을 검토하여야 할 것이다.
해양생물자원은 동물자원으로서 어패류와 식물자원으로서 해조류가 그 주종을 이루는데, 이들 자원의 이용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도 선사시대의 패총 · 패각 또는 고기뼈로 만든 도구, 그물추 등이 발견되고 있음을 볼 때 오래 전부터 단백질 공급원으로서 이용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우리 나라 연안은 세계3대 어장의 하나로 각종 어족자원이 풍부하여 연안어업을 중심으로 수산업이 활발하였다. 이러한 수산업도 한말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제의 수탈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1880년대부터 우리 나라의 어장이 일본인에게 개방되기 시작하여 1883년에 통어권을 허가하였고, 1889년에 조일통어장정이 의정되었으며, 1911년에 「어업령」이 제정되면서 본격적인 수탈이 자행되었다.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수산업의 생산고는 늘었으나 그 이익은 대부분 소수의 일본인에게 돌아갔다.
한편, 1920년대부터 종래의 포획하는 어업에서 기르는 양식어업으로 관심을 돌려 1928년에 진해수산시험장의 부속양어장이 준공되어 양식어업에 대한 노력이 경주되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에 들어오면서는 본격적인 양식어업이 이루어져 연체동물과 해조류 등이 대량생산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우리 나라 어업의 구조적 변화의 특성은 천해양식업과 원양어업의 비약적인 발전이다. 우리 나라 연안의 수산자원 분포를 보면, 동해는 꽁치 · 명태 · 오징어 · 새우 · 방어 · 전복 · 미역 등이며, 남해는 겨울철 외해의 수온이 10∼15℃를 유지하고 여름에는 28∼29℃로서 어족자원의 서식환경이 매우 좋아 고등어 · 갈치 · 멸치 등 여러 가지 어류가 풍부하다. 더욱이 이 지역은 수심 · 해저지형 · 조석 등의 조건이 패류 · 조류, 특히 해태양식에 적합하여 이의 양식이 활발하다.
충무 · 거제를 중심으로 한 굴양식과 진주만 · 득량만의 피조개 · 우렁쉥이, 안흥 및 남해 일원의 보리새우 등 갑각류의 양식이 성행하고 있다. 서해에서는 조기 · 새우 · 전갱이 등이 많이 잡히고 광대한 조간대와 천해가 있어 굴 · 반지락 · 백합 · 맛 등이 다량 생산되고 있다.
이러한 어장을 배경으로 우리 나라 수산업은 크게 발전하고 있고, 남태평양 등 원양어업에도 힘을 기울이고 있으나, 최근 세계연안국들이 자국의 어족자원 확보를 위하여 200해리 수역설정 등 각종 규제조처를 취하고 있어 원양어업의 앞날이 밝지만은 않다.
국내어장의 경우도 간척사업과 해양오염 등으로 인하여 수산업이 큰 타격을 받고 있다. 이러한 여건과는 반대로 국민의 수산물에 대한 수요는 증대되고 있어 수산업 발전을 위한 다각적인 연구 · 검토가 있어야 할 것이다.
에너지자원은 인간생활에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힘 · 열 · 빛을 얻기 위한 기본적 자원이다. 에너지자원은 크게 노예나 역축(役畜)을 이용한 근육에너지자원, 수력 · 조력 · 풍력과 태양열 · 지열 등을 이용하는 자연에너지자원, 석탄 · 석유 · 가스 등을 이용하는 화학에너지자원, 그리고 원자력과 같은 핵융합에너지자원으로 구분된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우리 생활에 중요한 역할을 해 온 에너지자원은 소 · 말 등의 역축이다. 이들은 논밭의 갈이와 물품의 운반에 이용되었으나 1960년대 이후부터 경운기 및 자동차의 보급으로 그 중요성은 크게 줄었으며, 다만 지형상 완전기계화농업이 불가능한 일부 산간지역에서는 아직도 역축을 이용하고 있다.
자연에너지자원 중 수력의 이용은 대체로 5, 6세기경으로 추정되는 물레방아 등의 이용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근대적인 수력의 이용은 1924년 총 출력 1만3570㎾의 금강산수력발전소 건설에 의한 전력개발로부터 비롯된다.
일제는 우리 나라를 강점한 뒤 수력개발을 위하여 1911년부터 네 차례에 걸친 수력지점조사를 실시하였고, 1944년에 끝난 4차 조사 결과 총 163개 지점에서 6163만8000㎾의 수력발전이 가능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조사에서 북한지역에 108개 지점, 남한지역에 55개 지점이 수력발전 적지로 나타나 지형상 북한지역이 유리함을 보이고 있다.
1948년 5월 북한측의 예고 없는 단전이 단행되어 남한은 갑작스러운 전력부족난에 당면하였다. 이에 대처하여 정부는 시설투자비가 적게 드는 화력발전소의 건설을 우선하면서, 한강 · 낙동강 · 금강 등에 소양댐 · 안동댐 · 충주댐 · 대청댐 · 합천댐 등 대규모의 다목적댐을 건설하는 등 수력발전소의 건설을 계속하여 왔다.
풍력의 이용은 범선에서 가장 활발하였으며 곡식을 고르는 데도 이용되었다. 신라시대 혜초의 인도기행도 풍력을 이용한 범선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오늘날에 와서는 바람이 많이 부는 제주도에서 풍력발전을 시험중에 있어 새로운 풍력이용방법이 개발될 전망이다.
우리 나라의 서해안 일원은 평균조차가 6m 정도로서 조력발전에 천혜적인 조건을 가지고 있다. 1970년대부터 10개 지점에 대한 조력발전 타당성 조사가 실시되었다.
화학에너지자원 중 무연탄은 비교적 풍부한 부존량을 보이나, 유연탄은 국내에서 생산되지 않고 있다. 광복 전 남북한을 합친 무연탄 매장량은 총 13억5000만 톤으로 조사되었고, 이 중 북한에 80% 이상이 매장되어 있었다.
남한의 무연탄은 강원도의 태백 · 영월 · 정선 · 삼척, 경상북도의 문경, 전라남도의 화순 등지에 주로 분포되어 있고, 최근에 확인된 매장량은 15억 톤에 이르며 가채매장량은 6억 톤에 달하고 있다.
석유는 아직까지 국내 부존이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이미 1880년대에 석유사용기록을 가지고 있다. 1920년대에는 일제에 의하여 국내 최초의 원산정유공장이 건설되었고, 6·25전쟁 후 남한에서는 1960년대에 울산정유공장이 건설되면서 석유의 대량소비가 시작되었으며, 공업화와 함께 석유의존도가 심화됨에 따라 원유처리시설이 늘어나고 있다. 또한, 국내에서도 석유부존 가능성이 있는 서남해안의 대륙붕탐사를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가야 할 것이다.
천연가스는 석유와 거의 비슷한 부존상태를 가지고 있으며, 역시 국내 부존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최근에 와서 석유가격의 불안정과 천연가스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데 기인하여 수요가 급증하고 있으며 용도도 다양화하고 있다.
원자력개발은 1955년 이후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고, 최초의 원자력발전소는 1978년 경상남도 고리에 건설되었다. 이후 1988년까지 총 9기의 원자력발전소가 건설되었으며, 발전시설용량은 760만㎾에 이르고 있다.
태양열의 경우는 난방과 발전의 분야에서 실험단계에 있으나 무궁한 무공해 에너지자원으로서, 실용화에 대한 기대는 다른 어떤 에너지자원보다도 크다.
이와 같은 에너지자원들을 토대로 한 국내의 에너지 소비구조를 살펴보면, 1962년에는 무연탄이 총에너지소비량의 35.7%, 신탄은 51.78%를 차지하여 국내 에너지자원에 의하여 주도되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25년이 지난 1987년에는 급속한 공업화의 추진과 함께 해외의존 에너지원인 석유와 유연탄의 소비수요가 급격히 증가되어 총 에너지소비량의 47.1% 및 15.4%를 차지하고 있다. 최근에는 원자력발전이 중요한 에너지자원으로 대두되고 있다.
인구는 일정한 지역 안에서 사회집단을 구성하여 생활하고 있는 인간의 수를 말하며 옛날에는 인구라 하지 않고 호구(戶口)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인구는 경제생활과 두 가지 측면에서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첫째, 인구는 생산요소의 하나인 노동력의 모체이며, 광의로는 자원의 공급이란 점이다. 이런 관점의 인구는 단순히 양적 측면뿐만 아니라 질적 측면에서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지역의 인구 구성에서 양질의 노동자 구성비가 높을 경우 자원적 의미는 더욱 크다고 말할 수 있다.
둘째, 인구는 각종 생산의 소비자로서 일정한 구실을 한다는 점이다. 소비자 관점의 인구는 유효수요의 창출과 시장확대에 공헌하며 규모의 경제에 이익을 가져다 주는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한 지역의 인구는 노동력이란 생산요소의 역할과 소비시장 규모를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집단인 것이다. 그러나 인구가 과잉일 때는 경제활동을 오히려 저해하게 된다. 따라서 과잉인구는 인구문제, 자원문제를 야기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인구가 갖는 자원으로서의 역할은 성별, 연령별, 직업별 등의 구조가 그 기본이 된다. 그 중에서도 연령별 인구 구성이 매우 중요한데, 대개 0∼14세는 연소층 인구, 65세 이상은 노령층 인구, 15∼64세는 생산층 인구라 부른다.
생산층인구비중이 두터울 때는 노동력 자원은 견실한 것이 된다. 그런데 최근 평균수명이 늘어남에 따라 노령화지수가(老齡化指數)가 크게 높아지고 있다. 한편 소비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하는 절대인구도 계속 증가하고 있다.
역사적 자료에 기초한 조선시대의 인구 추정에 의하면, 조선왕조 창건 당시(14세기 말) 우리 나라의 인구는 약 500만∼550만 명 정도였으나 조선 말기인 1900년경에는 약 1700만 명으로 증가하였고, 1925년 최초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1902만 명에 달했다.
그 뒤 광복이 되기까지 약 20년간은 인구가 크게 증가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일제의 압박으로 인한 우리 국민의 해외이주자가 350만 명이나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을 합친 광복 당시의 남북한 총인구는 약 2900만 명에 이른다.
그 뒤 남한의 인구는 해외동포의 귀국, 6·25전쟁 후의 수많은 북한동포의 이주, 그리고 전쟁 후에 흔히 있는 베이비붐의 영향으로 급속히 증가하여 1960년에는 광복 당시의 남북한을 합친 인구와 비슷한 약 2495만 명, 그로부터 10년 후인 1970년에는 약 650만 명이 증가한 3144만 명, 또 10년 후인 1980년에는 약 600만 명이 증가한 3742만 명, 그리고 1995년에는 약 4485만 명에 달하였다. 면적상으로는 198개 독립국가 중 99위인 우리 나라는 인구면에서는 22위의 인구대국으로 부상하였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의 하나는 훈련이나 숙련을 거쳐 기술을 습득하고 생활에 활용하는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기술이란 인간이 이용하는 물건을 제작, 사용하는 방법이나 지식의 총체이며, 좁은 의미에서는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원리 및 원칙과 그 성과를 응용하여 산업을 개발하고 사회복지를 증진하는 것이다.
경제적 의미에서 기술은 생산요소의 일부이며, 기술의 진보는 기존의 생산기능을 변화시켜 생산활동을 촉진하고 신제품을 출현하게 하여 생활을 편리하고 윤택하게 만든다.
기술은 원리나 방법, 시설물의 유형, 이용 분야 등의 기준에 따라 분류할 수 있다. 이용분야별로는 정보산업기술 · 재료관련기술 · 산업요소기술 · 에너지 · 자원기술 · 공공기술로 분류하며, 여러 가지 기술을 상호 결합하여 복합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기술발달로 세계문화에 일대 혁신을 가져온 역사적 사건들을 살펴보면, 선사시대와 고대에 있어서는 석기와 불의 이용, 청동기 · 철기의 사용, 관개와 연금술의 개발 및 문자의 사용 등이고, 중세에서는 인쇄술 · 항해술 · 증기기관의 발명 등이며, 산업혁명 이후에는 전기 · 석유의 사용, 엔진기관 개발 등이고, 현대에는 핵기술 · 우주과학기술 · 컴퓨터 및 사무자동화 등의 이용이다.
우리 나라 전통과학기술의 발전과정을 살펴보면, 기원전 1000년경에 청동기를 사용한 흔적이 나타나고, 기원전 4, 3세기에 철기가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었으며, 이를 발전시켜서 1, 2세기경에는 삼한(三韓)에서 철판을 제조하는 기술이 발달하여 철제품을 낙랑과 일본에 수출하였다.
신라 · 백제 · 고구려의 고분에서 출토되는 공예품과 철칼은 삼국시대의 뛰어난 주조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천체를 관찰하기 위한 첨성대, 정교한 건축기술을 보여주는 석굴암, 합금주조기술의 소산인 범종(梵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인 『다라니경』 등의 유물을 볼 때, 당시의 천문 · 건축 · 주조 · 인쇄기술이 매우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저수지와 철기를 활용한 도작농법(稻作農法)도 삼국시대에 사용되었다. 고려시대의 기술은 신라 기술의 전통을 토대로 송나라 문화를 도입하여 독특하게 발전하였다. 고려시대의 발달된 기술을 대표하는 것은 목판인쇄기술 · 금속활자제조기술 · 자기(磁器)제조기술 등이다.
팔만대장경판은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뛰어난 최고(最古)의 목판이다. 금속활자제조기술은 신라시대 이래의 청동범종주조기술과 토착적인 먹과 종이 제조기술을 바탕으로 목판인쇄의 번거로움을 극복하기 위한 창의적 기술이다.
고려청자는 송나라 자기의 영향을 받았지만, 비색(翡色) · 문양 · 기형(器形)의 우아함으로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조선시대에 두드러지게 발달한 과학기술로는 금속활자인쇄술 · 강수량측정기술 · 천문관측기술 · 도자기제조기술 · 군사기술 · 의약제조기술 등이 있다.
금속활자 제조기술은 고려의 금속활자 주조방법을 계승, 발전한 것으로, 조선시대에는 총 25회에 달하는 금속활자의 주조가 있었다. 특히, 태종 · 세종 때에는 금속활자를 개발, 보급하는 데 주력하여 당대의 어느 지역의 인쇄본보다 깨끗한 금속활자본을 제조하였다.
세종 24년(1442)에는 측우기(測雨器)와 수표(水標)를 발명하였으며, 그 뒤 400년 동안 규칙적으로 전국의 여러 지역에서 강우량을 측정하였다.
세종 때에는 경복궁에 대간의대(大簡儀臺)라는 천문관측소를 세우고 간의(簡儀) · 수운혼천의(水運渾天儀)와 각종 해시계를 설치하였으며, 자격루(自擊漏)라는 물시계, 옥루(玉漏)라는 천상시계(天象時計) 등 기계를 사용하여 기상과 시간을 계측하였다.
한편, 자기제조기술은 고려자기의 제조기술을 전승하고 청나라의 자기제조기술을 도입하여 특유의 백자(白磁)를 제조하기에 이르렀다.
조선 초기 이래로 화포 · 화차 · 거북선 등의 제조로 군사기술의 개발과 이용도 활발하였다. 특히, 거북선은 연안해전용 공격형 선박으로 15, 16세기에 건조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의약기술은 15, 16세기에 정리되고 체계화되어 『향약본초(鄕藥本草)』 · 『의방유취(醫方類聚)』 · 『동의보감』 등 의학서적이 출간되었다. 15세기에 출간된 『농사직설』을 보면, 당대의 집약적 수전농업(集約的水田農業)의 기술보급내용을 알 수 있다.
조선의 과학기술은 대체로 15세기 이전에 활발히 개발, 보급되었지만 그 뒤로는 임진 · 정유의 양란과 주자학의 융성으로 인해 그 기반이 흔들렸다.
17, 18세기에 들어와 청나라를 통한 서구 근대과학의 자극으로 인하여 실학파를 중심으로 선진기술을 보급하고 과학적 개량을 추구하였으나, 기술을 천시하는 시대적 상황과 그들의 사회적 신분의 한계에 부딪혀 기술개발과 축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영조 · 정조 시대에 과학기술의 재정비를 시도하였으나 청나라를 통하여 전래되는 서구의 근대과학에 압도되어 전통기술은 답보상태를 거듭하였다. 19세기 말부터 일제의 침략과 통치로 고유의 기술이 위축되고, 서구의 과학기술은 체계적으로 도입, 수용되지 않았다.
1960년 이전에는 농업 중심의 산업구조와 해외경제교류의 미약으로 체계적으로 발달하지 못하였으나, 1962년부터 고도경제성장과 수출지향의 경제개발계획의 실행으로 과학기술진흥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1964년에 「과학기술촉진법」이 제정되고 과학기술처가 발족되었으며, 1966년에 한국과학기술연구소가 설립되어 과학기술진흥의 초석이 되었다.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과학기술은 정부의 주관 아래 해외기술을 도입하고, 모방 · 소화하는 데에 치중하였다. 1970년대에는 해외기술을 선별적으로 도입하고 이를 개량하여 기술축적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80년대에는 민간연구소의 활성화에 따라 기업의 사내 기술축적과 실용화가 정착되고 있다.
정부출연 과학기술연구기관은 과학기초연구 이외에도 에너지 및 자원에 관한 기술, 기술집약산업과 수출전략산업 · 방위산업, 그리고 공업용 소재 개발 등에 관한 기술연구 분야에 치중하여 성과를 거두고 있다.
기업부설연구소는 신제품개발과 기존제품의 개량에 관한 기술개발에 집중하고 있으며, 특히 기계 · 금속 · 전자 · 화공 · 섬유 부분에 대한 연구활동이 활발하다.
또한 정부출연연구소 · 민간연구소 · 대학의 연구 부문에 대한 협력과 기술개발을 촉진하기 위하여 대덕연구단지가 총 면적 27.8㎢의 부지 위에 세워졌다.
산업 분야별 과학기술개발의 현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전기 · 전자 분야의 첨단기술은 반도체 · 컴퓨터 · 통신 분야로 나눌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 반도체를 처음으로 조립한 것은 1974년의 웨이프가공이다. 1983년에 64KDRAM을 독자적으로 개발한 데 이어서 256KDRAM에서 1MDRAM의 개발과 실용화단계에 도달하였다. 1988년에 4MDRAM의 개발도 성공하였다.
컴퓨터 분야에서는 1982년부터 연구개발단계에 돌입하여 1980년대 후반에는 16∼32비트의 개인용 컴퓨터를 생산하게 되었고, 주변기기인 터미널 · 프린터 · 모뎀과 중형컴퓨터를 조립, 생산하는 수준의 기술을 보유하게 되었다.
통신분야에서는 1980년대에 TDX-1교환기 · 팩시밀리 · 비디오텍스 등을 상용화하고, 자료와 음성통신을 종합적으로 처리하는 종합정보통신망(ISDN)의 개발이 진행중에 있다.
전기 · 전자 분야의 기술은 공정에 따라 회로설계 · 가공 · 조립 기술, 시험 · 검사 기술 등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이 중 가공 · 조립 기술은 개발수준이 선진국에 가깝지만 회로설계기술은 낙후되어 있다.
기계 분야 중에서 공작기계기술은 1960년대까지는 관련산업 부문의 영세화와 생산량의 왜소로 기술축적이 미미하였으나, 1973년부터 정부의 중화학공업육성책과 대기업의 참여로 활성화되고 있다.
NC공작기계는 1977년에 처음으로 생산된 이래로 보급이 급속하게 증가되고 있으며, 로봇의 생산도 1985년부터 시작되어 용접용 및 조립용 로봇이 국산화되고 있다. 그리고 FMS와 CAD · CAM의 기술은 도입단계에 있다.
자동차 제조기술은 1975년에 고유의 상표를 부착한 자동차가 보급된 이래로 소형 및 중형 자동차의 조립생산기술을 보유하고 설계기술의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한편, 항공산업분야의 기술은 소형비행기의 조립과 헬리콥터 동체 조립, 그 밖에 B747기 및 MD-11기종의 부품을 생산하는 단계에 이르고 있다.
금속소재 생산기술도 급속하게 확산되어 범용철강의 조업기술은 세계적 수준에 도달하였으며, 특수강 · 핫코일 · 전자기산업용 소재의 생산기술도 보유하게 되었다. 비철금속소재 중 리드프레임소재를 독자적으로 개발하여 상품화한 데 이어 형상기억합금의 개발도 실험단계를 거치고 있다.
비금속광물과 화학 분야에서 파인세라믹은 원료를 외국으로부터 수입, 가공하는 단계이나 기업부설연구소에서 소재의 국내기술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합성수지와 엔지니어링 플라스틱의 공정기술은 외국으로부터 도입하고 있으나, 고강도섬유인 아라미드섬유와 탄소섬유의 제조기술은 국내에서 자체개발에 성공하였다.
정밀화학분야에서도 정제황산알루미늄, 카세트테이프용 산화철, 일부 항생제와 형광안료, 농약 부문에서 국내기술의 축적과 상품화가 성공을 거두고 있다.
생명공학 분야는 1980년 이후 국내에서 기술연구활동이 시작되었으며, 짧은 연혁에도 불구하고 인체활성물질과 항생 · 항암물질 · 인슈린 · 인공종자 · 미생물비료 · 백신 · 인터페론 · 바이오화장품 등을 개발하였다.
우리 나라 기술개발의 과제는 국민총생산의 5% 수준까지 기술투자를 확대하고, 민간대기업이 기술개발에 적극 참여하도록 유도하며, 중소기업에까지 기술의 확대 · 보급을 꾀하는 한편, 기술 · 기능 인력을 장기적으로 확보하는 대책을 마련하고, 연구기관 · 학교 · 기업의 산학협동을 도모하고 산업기술정보체제를 확립하는 데 있다. 아울러 국제기술협력을 강화하고 기술용역 수출을 확대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