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희전문학교 학생 염태진(廉台振) 등 50여 명이 조선물산을 장려하여 자급자족 정신을 기를 목적으로 1922년 12월 조직하였다.
조선인이 생산하여 수출하는 것은 오직 백미(白米) 200만석(石)과 우피(牛皮) · 대두(大豆) 등 가격이 저렴한 농산물뿐인데, 조선인이 소비하는 것은 대부분 외부에서 수입하는 비싼 가격의 공산제품이었다.
그러므로 수입이 항상 지출보다 부족하여 과거 30년 동안, 특히 최근 10년 동안 조선민족의 부력(富力)은 거의 파산상태에 빠지게 되어 조선인의 유일한 재산인 토지 10분의 6이나 외인(外人)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래서 이대로 가게 되면 조선인의 경제는 파멸에 빠지게 될 것이 분명하므로 자활(自活)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동기에서 조직되었다.
이러한 목적에 따라, 첫째 조선인은 조선인이 만든 제품만을 사용하자, 둘째 조선인의 일용품은 조선인의 손으로 만들자, 셋째 조선인은 일치하여 토지를 저당하거나 매도하지 말고 매입하는 데만 힘쓰자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조선인의 일용품을 생산, 공급하는 길드식 대산업조합(大産業組合)을 결성할 것 등을 결의하였다.
이와 같은 움직임에 호응하여 지방에서 지회(支會)가 결성되기 시작하였다. 진주자작회가 같은 12월에 발기인회를 개최한 뒤 다음해인 1923년 1월 창립총회를 개최하여 회장에 김재홍(金在泓), 총무에 강달영(姜達永), 재무에 신현수(申鉉壽), 간사에 천석구(千錫九) 등을 선출하였다. 그리고 강연회 및 선전유인물 살포 등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2월 전라남도 무안군에서 자작회가 창립되어 나만성(羅萬成)을 회장으로 선출하고 소비조합부를 설치하는 등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또한 같은 달에 경상남도 의령에서도 자작회 발기총회가 개최되어 회장에 김기진(金基珍)을 선출하고 토산품 장려뿐만 아니라 금주금연운동도 전개하였다. 한편, 서울의 자작회도 판매부를 신설하여 조선물산을 다방면으로 주문,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하는 한편 강연회도 개최하였다.
이와 같은 적극적인 활동에 호응하여 1923년 1월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가, 다음달인 2월에는 토산애용부인회(土産愛用婦人會)가 각각 서울에서 조직되었다. 그 결과 조선물산장려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이 운동에 대중들이 크게 참여하여 토산물 애용, 외화배척, 금주금연운동, 저축운동 등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러나 운동 그 자체가 가진 한계 등으로 인해 1년이 못 되어 하강기에 들어가 1924년에는 침체에 빠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