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전라북도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장화리 뒤주는 쌀을 저장해 두던 용구로서, 1864년(고종 1) 정준섭(鄭峻燮)이 제작하였다. 전라북도 김제시 장화동 210-1(后長마을)에 있으며, 정종수(鄭鍾洙)가 소유하고 있다.
가로와 세로는 각각 210㎝로 정방형이며, 높이는 180㎝이고, 판재의 두께는 3.3㎝이다. 백미를 가득 채울 경우 70가마가 들어간다. 뒤주 문은 앞면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으며, 폭이 68㎝이고, 8개의 판자를 끼워서 사용하였다. 현재 1개가 분실되어 7개가 끼어져 있다. 재질은 괴목판이며, 네 개의 기둥이 일반 가옥처럼 원형에 가까운 주초(柱礎) 위에 세워져 있다.
정준섭은 구례군수를 역임했기 때문에 정구례(鄭求禮)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그는 조부 때부터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만석군(萬石君)으로 불리던 이 지방 토호였다. 따라서 그의 집은 매일같이 과객 또는 식객으로 늘 붐볐다. 이들을 대접하기 위해 식량을 풍족하게 준비해 둘 수밖에 없어서 대형 뒤주를 만들었던 것 같다. 뒤주에 저장해 두던 70가마의 쌀이 한 달 식량으로 부족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가옥 구성은 대문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사랑채와 곳간이 있고, 안쪽으로 안채가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대문·사랑채문·안채문이 있다. 뒤주는 예전에 곳간 옆에 있었지만, 현재는 안채를 바라보면서 전면(前面) 오른쪽에 자리잡고 있다. 정종수는 매년 이엉을 얹기가 불편하여, 한때 기와를 앉히기도 하였다.
민속문화재로 지정받던 해인 1976년 4월 현 위치로 옮기면서 뒤주에 이엉을 다시 얹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처마 부분에 각목을 덧댄 것과 윗부분을 부분적으로 약간 보수한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주초 위에 세워져 있는 네 개의 기둥은 눈과 비로 인해 약간 틈이 갈라져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제외하고는 원래의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으며, 당시 이 지방 부호의 한 단면을 엿보는 데 도움이 되는 유물이다. 현재는 곡물 저장용 뒤주로 사용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