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산(慶山). 공민왕 때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375년(우왕 1) 간관으로서 우헌납 이첨(李詹)과 더불어 재상 이인임(李仁任)의 죄를 탄핵하고 처형을 요청하였다가 도리어 지영주사(知榮州事)로 좌천되었다.
1390년(공양왕 2)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를 거쳐 1392년 조선 개국 이후 간의(諫議)를 역임하였고, 1397년(태조 6) 병조전서로서 서북면선위사에 임명되어 축성에 적당한 곳을 찾아나섰다.
이듬해 풍해도도관찰출척사(豊海道都觀察黜陟使), 1399년(정종 1) 대사헌, 다음해에는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거치면서 불교가 인의(仁義)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니 왕이 이를 좋아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1401년(태종 1) 노비변정도감제조(奴婢辨正都監提調) · 경상도도관찰출척사, 1404년 승녕부윤(承寧府尹)을 지내고, 이 해 첨서승추부사(簽書承樞府事)로서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가 되었다.
1406년 2월과 1412년 1월에 거듭 경기도관찰사(京畿都觀察使)를 역임하고, 걸해(乞骸)하여 경산현(慶山縣)에 물러가 지내다가 1412년 10월 26일 사망하였다. 경상도 도관찰사에게 명하여 치제(致祭)하게 하고, ‘문평(文平)’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