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1476년(성종 7) 작.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160㎝, 가로 105㎝. 종손가에 봉안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종손가에 전해 오는 바로는 이 초상화는 세조가 하사한 영정이라 한다. 회화적 표현 및 형식으로 보아 손소 초상(보물, 1995년 지정) 및 장말손 초상(보물, 1969년 지정)과 함께 적개공신(敵愾功臣) 책록 후에 그려진 공신도상이다.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났을 때 그 토벌에 공을 세운 공신들은 적개공신으로 책봉되었다. 그 공훈의 일환으로 공신상들이 제작되었던 것은 1476년(성종 7년)이었다. 왕이 충훈부(忠勳府)에 명하여 공신들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는 기록이 『양민공유사(襄敏公遺事)』에 전해 온다.
오자치에 관해서는 『세조실록』과 『성종실록』에 약간의 기록이 남아 있다. 그는 이시애의 난이 벌어지자 사도병마도총사 귀성군(龜城君)이준(李浚)의 휘하에서 공을 세워 적개공신 2등 나성군(羅城君)에 책록되었다. 활을 아주 잘 쏘았고, 아버지가 연로하시게 되자 나주로 돌아갔으며, 그 일을 손소의 예에 따라 시행했다는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정확한 생몰 연대나 초상화에 얽힌 자세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초상화의 전체적인 형식은 좌안7분면(左顔七分面)의 의자에 앉은 전신상이다. 오사모(烏紗帽: 사모)에 아청색(鴉靑色) 포(袍)를 입고 두 손을 마주 잡은 공수(拱手)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백피혜(白皮鞋)를 신고 있다. 화폭은 조선 초기에 제작된 다른 초상화들과 마찬가지로 3폭이 결봉(結縫)되어 있는 연폭(聯幅)으로 되어 있어 고식(古式)을 보인다.
흉배는 직금흉배이며, 당시 무관 1, 2품용인 호표무늬를 보여준다. 타원형의 양각이 수평으로 부착된 사모, 목 위에 곧게 선 직령, 손잡이 끝부분만이 몸체 양쪽으로 살짝 드러난 교의자의 표현, 공수자세의 팔 사이로 드러난 흰 소매, 끈이 리본 모양으로 의자에 묶인 점, 단령의 외곽선이 각이 지고, 치맛자락의 트임 사이로 직령과 붉은 포가 드러난 점 등은 적개공신상인 〈장말손 초상〉〈손소 초상〉과 유사한 점을 띠고 있다. 조선초기 공신도상의 전형을 잘 드러낸 중요한 작품이다.
안면 처리에 있어서는 얼굴색을 살색으로 칠한 후, 갈색 선으로 윤곽을 잡았으나 선염(渲染: 한쪽을 진하게 칠하고 다른 쪽으로 갈수록 차츰 옅게 하는 일) 기법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입술은 살빛보다는 약간 토황빛 나는 색으로 칠하여 가라앉은 듯한 침착한 느낌을 준다.
의습(衣褶: 옷주름) 처리에서는 단령(團領: 깃이 둥근 공복)의 외곽선이 상당히 규각적(圭角的: 뾰족한 모양)으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단령의 옆 부분 트임 사이로 내비치는 안감과 첩리(帖裏: 철릭)의 형태 역시 빳빳하게 처리되어 있다. 바닥에는 채단(彩緞: 카펫)이나 돗자리가 깔려 있지 않아 아직 인물이 들어앉은 공간이 표현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