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기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중추원참의, 전라북도지사 등을 역임한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칭
이칭
草本然基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1년(고종 28) 5월 2일
사망 연도
미상
출생지
경상남도 거창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일제강점기 중추원참의, 전라북도지사 등을 역임한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생애 및 활동사항

1891년 경상남도 거창에서 출생했다. 1911년 한성외국어학교 일어과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에 입학해 1914년 농과대학을 졸업했다. 귀국 후 조선총독부 농상공부 산림과를 시작으로 1923년 충청남도 논산군 속을 거쳐, 1924년 고등관으로 승진해 강원도 삼척군수가 되었다. 이어 1930년 강원도 원주군수, 1932년 고성군수, 1935년 강릉군수를 지냈다. 1938년 전라북도 참여관으로 승진해 전라북도 산업부장을 맡았으며, 육군병지원자훈련소생도 전형위원, 전라북도 지방미곡통제조합연합회 · 농회 회장, 전라북도 방공위원회 위원, 1939년 전라북도 임시국세조사위원회 부위원장, 조선유도연합회 이사, 1940년 전라북도 임금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

1941년 관직에서 물러나 1945년 6월까지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 참의로 활동했다. 이와 함께 1944년 국민총력조선연맹 사무국 근로부장, 1945년 대화동맹(大和同盟) 심의원 등으로 활동했으며, 1945년 6월 중추원 참의에서 물러난 직후 전라북도지사로 임명되어 해방 때까지 재직했다. 중추원 참의로 재직하면서 조선총독의 자문에 적극적으로 응했다. 특히 1942년 중추원 답신서에서는 “조선인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황국신민화를 이루는 것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서 징병제 실시를 진심으로 감사했다.

해방 직후, 반민족행위자로 지목되었으며, 1949년 8월 반민특위에 자수했다. 1950년 9월 한국전쟁 중 납북되었다. 상훈으로는 1928년 쇼와[昭和]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 1932년 조선 쇼와5년 국세조사기념장, 1934년 서보장, 1935년 시정25주년 기념표창, 1940년 쌍광욱일장, 기원2600년 축전기념장 등이 있다.

정연기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9·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6: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194∼212)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참고문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16: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현대문화사, 2009)
『친일인명사전』3(민족문제연구소, 2009)
『민족정기의 심판』(1949)
『친일파군상(群像)』(1948)
『대중인사록(조선)』(1943)
『조선연감』(1940∼1945)
『조선공로자명감』(1935)
『일본내각 관보(日本內閣 官報)』
『반민특위조사기록』조병상 편(曺秉相篇)
『조선총독부관보』
『조선총독부 소속 관서 직원록(朝鮮總督府及所屬官署職員錄)』
집필자
김희만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