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죽산 출신. 러일전쟁 이후 일본은 을사오조약·정미조약 등을 체결하고 국권을 침탈하더니 급기야 한국군마저 강제로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수수방관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1907년 8월 용인군 원산면 하사리에서 30여명의 동지를 이끌고 양지·양성군을 중심으로 의병모집에 힘써 150여 명의 의병을 규합, 스스로 의병장이 되었다.
같은 해 8월 25일 안성에서 개최된 의병회의에 부하들을 거느리고 참가하여 의진의 연합전선을 꾀하였으나 실패하였고, 8월 29일 일본군 40여명의 습격을 받고 패전하였다. 9월 이후 죽산·양지 등지에서 임옥녀(任玉汝)의병진과 연합하고 의병소모활동을 전개, 900여명의 의병을 거느리게 되었다.
이들 의병을 3개 부대로 나누었는데, 그 중 한 부대를 인솔하고 수원·안성·양지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1월 50여명의 의병을 인솔하고 당진주재소를 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그 뒤 4월까지 능촌(陵村)·사동(寺洞)·요봉골[料鳳谷] 등지에서 일본군과 접전하면서 전력이 약화되었고 부상까지 입어 일시 의병을 해산하였다.
같은 해 7월 19일 충청남도 해미군 적서촌(赤鼠村)에서 2척의 선박으로 입항할 때 신호 잘못으로 일본군에게 적발, 붙잡혔다. 그 해 9월 29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나 공소하여 11월 24일 종신유형에 처하여졌다.
1982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