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관 ()

불교
인물
『천태사교의』를 찬술한 고려 광종 때의 승려로, 광종의 명으로 오월에 가서 나계(螺溪), 의적(義寂)과 함께 천태학을 연구함.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970
주요 저서
천태사교의
내용 요약

제관(諦觀, 미상~970)은 고려 광종 때의 승려로 천태종의 조사이다. 960년(광종 11) 광종의 명으로 오월(吳越)에 천태 관련 서적을 전해 주었으며, 그곳에서 10여 년 동안 나계(螺溪), 의적(義寂)과 함께 천태학을 연구하였다. 천태학의 입문서라 할 수 있는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를 저술하였다.

정의
『천태사교의』를 찬술한 고려 광종 때의 승려로, 광종의 명으로 오월에 가서 나계(螺溪), 의적(義寂)과 함께 천태학을 연구함.
주요 활동

960년(광종 11) 제관은 광종의 명을 받고 중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 때 광종은 “교승(敎乘) 가운데 『지론소(知論疏)』 · 『인왕소(仁王疏)』 · 『화엄골목(華嚴骨目)』 · 『오백문론(五百門論)』은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였으며, 또 "중국에 가서 스승을 구한 다음, 어려운 질문을 던져 대답하지 못하면 곧바로 책들을 거두어 가지고 올 것"을 당부하였다.

중국에 간 제관은 나계사(螺溪寺)의 의적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고 10여 년 동안 함께 천태학을 연구하였다. 그때 자신의 유일한 저술인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를 지었으나, 상자에 감추어 두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제관은 끝내 귀국하지 못하고, 어느 날 앉은 채 죽었다. 죽은 뒤 그가 쓰던 상자에서 빛이 났으므로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상자를 열어 보니 『천태사교의』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학문과 저술

『천태사교의』는 천태 지의(天台智顗, 538∼597)가 제시한 교판론(敎判論)과 수행론(修行論)을 간결하게 정리한 책이다. 곧 천태학의 요지를 교(敎)와 관(觀)의 2문(門)으로 보고, '오시팔교(五時八敎)'의 개요를 간추려 해설하면서, 관심(觀心)의 25방편(方便)과 10승관법(乘觀法)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천태종의 교판서이자 교상(敎相)의 핵심과 관심((觀心)의 요체를 설명한 교학서이다.

이후 『천태사교의』의 주석서가 70여 종, 주석에 대한 주소가 130여 종 간행되었다. 대표적인 주석서로는 송나라 고승 종의(從義)가 엮은 『천태사교의집해(天台四敎儀集解)』 3권, 원나라 때의 승려 몽윤(蒙潤)의 『천태사교의집주(天台四敎儀集註)』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의천(義天, 1055~1101)이 중국에 가서 지자 대사(智者大師)의 탑 앞에서 “옛날 제관이 교관(敎觀)을 전하였으나, 지금 대를 이을 자가 끊어지게 되어 제가 법을 위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찾아와서 대도(大道)를 구하나이다.”라며 기원하였다. 의천의 주도로 창립한 천태종에서는 제관에게 천태종의 조사라는 칭호를 주었다.

참고문헌

원전

『불조통기(佛祖統記)』

단행본

논문

강남석, 「제관의 『천태사교의』와 천태 사상」(『한국종교사연구』 9, 한국종교사학회, 2001)
김영길, 「고려 제관의 도송에 관한 고찰」(『한국불교학』 3, 한국불교학회, 1977)

인터넷 자료

기타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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