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임천(林川). 자는 백부(百符), 호는 지족정(知足亭) 또는 충헌(忠軒). 조익(趙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직장(直長) 조민원(趙敏原)이고, 아버지는 사헌부감찰 조찬(趙瓚)이다. 어머니는 생원 정참(鄭叅)의 딸이다.
1474년(성종 5) 생원시에서 1등으로 합격하고, 같은 해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면서, 권지승문원정자에 제수되었다. 1478∼1479년에는 통신사 이계동(李季仝)의 군관(軍官)이 되어 일본에 내왕하였다. 1479년 승문원저작으로 다시 문과중시에 1등으로 급제하고 형조좌랑에 발탁되었다.
이 해 건주위(建州衛) 정벌을 위하여 파견된 서정대장(西征大將) 어유소(魚有沼)의 종사관이 되어 서정에 참가했으나, 어유소의 파병(罷兵)과 관련된 전명(傳命)을 잘못하여 고신을 몰수당하고 외방에 유배되었다. 그 뒤 1481년 “문학에 뛰어난 인물이니 서용하라.”는 성종의 특지에 따라 서반직에 복직된 뒤 교리·형조정랑·지평·응교, 세자시강원필선·보덕을 역임했으며, 이와 함께 경연(經筵)의 시독관(侍讀官)과 시강관(侍講官)을 항상 겸대하였다.
이어 1495년(연산군 1) 창원부사로 파견되었다가 곧 사직하고, 지리산에 은거하여 학문에 전념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 세자시에 그의 풍간(諷諫)함과 집요한 진강(進講)을 혐오했던 연산군의 기휘(忌諱)로 이에 연루되어 참살되었다. 성종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으며, 충효와 시문으로 명망이 높았다. 『동문선』에 「언심견투(彦深見投)」라는 제목의 시 1수가 전한다.
1506년 (중종 1) 관작이 회복되고 통정대부 승정원도승지에 추증되면서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었다. 경상남도 진주의 신당서원(新塘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