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12월 조선질소비료회사의 직공으로서 정달헌(鄭達憲)을 고문으로 하고 김인덕(金仁德)·한주교(韓柱敎) 등과 함께 좌익이론을 연구하는 연구회를 조직하였다. 이를 연구회 뷰로(Bureau)로 확대하여 다시 1931년 1월 좌익노동조합결성준비회로 개칭, 조사부의 책임을 맡았다.
같은 해 10월 함흥위원회 화학부의 책임을 맡고, 조선적색노동조합 함남위원회 함흥위원회의 책임을 맡아 병기공창지대에 근거를 두고 프로핀테른(Profintern ; Professional international) 테제에 의한 적색노동조합운동에 종사하였다.
이 때 지하운동을 전개하여 일본경찰에서는 모스크바공산대학에 입학하기 위하여 출국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1935년 일본경찰에 적발되어 이른바 평양적색노조사건으로 6년형을 선고받았다.
광복 후 1945년 9월 원산시 인민위원회 위원장, 1946년 8월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 및 정치위원, 1948년 3월 노동당 부위원장 및 정치위원,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교통상을 역임하고 같은 해 10월 주소련대사로 부임하였으나 1953년 8월 반당·종파분자혐의로 숙청되어 행방불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