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이나 채권 등 각종 증권이 거래되는 시장인 증권시장은 유가증권을 통하여 자금이 수급되는 직접 금융방식에 의한 금융시장이다. 이 시장은 새로 발행되는 주식이나 채권의 매매가 이루어지는 발행시장과, 이미 발행된 주식이나 채권이 거래되는 유통시장이 있다.
증권발행시장에서는 자금에 대한 수요자가 증권의 발행자이고, 자금의 공급자는 증권의 매입자 또는 응모자이다. 따라서, 증권발행시장은 증권의 발행자, 일반 투자가를 비롯한 증권 수요자, 그리고 인수발행을 담당하는 업자들 사이에 성립한다.
협의의 증권시장인 증권유통시장은 이미 발행된 주식이나 채권을 고객의 요청에 따라 증권업자가 대신하여 증권거래소에서 매매해 주는 시장이다. 이러한 증권유통시장이 발달하면 증권이 높은 유동성을 갖게 되어 그만큼 새로운 증권의 발행을 용이하게 하며, 증권발행시장의 발달을 촉진하게 된다.
증권의 유동성이 높아지면 증권유통시장이 바로 단기금융시장과 장기금융시장을 연결하는 구실까지도 수행하게 된다.
증권시장은 자본주의경제의 발전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것이므로 우리 나라에서는 자본주의의 역사가 짧은 관계로 증권시장의 역사도 비교적 짧은 셈이나 경제 발전에 따라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우리 나라 사람에 의해 처음으로 유가증권이 발행된 것은 1899년 대한천일은행(大韓天一銀行)이 주식회사 조직으로 설립된 때라고 한다. 채권으로는 1905년 조선 정부가 <국고증권조례 國庫證券條例>를 발포하고 200만 원(圓)의 단기국채를 발행한 것이 처음이라고 한다.
그러나 주식은 발행인 인수형태에 그쳤고, 국채는 사실상의 중앙은행인 제일은행(第一銀行)이 전액을 인수함으로써 일반 투자자에 대한 증권의 매매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1906년경부터 각지에 농공은행(農工銀行)이나 사업회사가 설립되면서 주식담보 금융의 길이 열리고 증권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증권의 거래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주식회사 납입자본금은 1911년 85개 회사에 1379만 원(圓)이던 것이, 1919년에는 251개 회사에 1억 106만 원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1920년까지 일정한 거래장소가 없는 주식의 매매거래는 기업의 생산자본과 밀접하게 관련되지 않아 투기를 조장하게 됨으로써, 1920년에 이르러 주식회사제의 ‘현물취인시장(現物取引市場)’이라는 조직적인 거래소의 설립을 허가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 증권거래제도가 확립된 것은 1931년 <조선취인소령 朝鮮取引所令>에 의해 조선취인소가 발족되면서부터이다. <조선취인소령>에는 유가증권의 거래방법, 시장시세 결정방법, 공중 보호를 위해 허위매매를 금지하는 사항 등이 규정되어 있다.
1943년에는 <조선취인소령>을 개정하여 주식회사제인 조선취인소를 공공기업의 성격을 띤 영단제(營團制)의 특수법인 조선증권취인소(朝鮮證券取引所)로 개편하였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서 일제강점기의 주식자본은 거의 일본인이 독점하였고, 광복 후 적산기업이 정부관리하에 들어가 정부 소유주식(귀속주식)으로 고정화된 여건 아래에서 공식적인 주식의 유통이란 생각할 수 없었다.
다만, 전시중 주식의 산만한 사적 거래로 인한 공정가격체계의 문란을 방지하자는 의도에서 증권회사의 점두거래를 허용하였다.
1951년의 1·4부산피란 당시에는 4개의 증권회사가 있었는데, 이들의 거래대상은 토지개혁의 보상으로 교부된 지가증권과 전시 재정 적자를 보전하기 위해 발행된 건국국채를 매매하는 데 그쳤다.
전재 복구와 경제 부흥이 본격화한 1955년경부터는 투자 재원을 조달하기 위하여 이미 1953년 11월에 설립된 대한증권업협회에서 증권시장의 개설을 추진하였다.
이리하여 비로소 1956년 3월 일제강점기의 <조선증권취인소령>에 의거한 영단조직의 대한증권거래소가 개소되었다. 개소 당시 상장회사 수는 12개 회사였지만, 주식이 분산되지 않아 국채를 주종으로 하는 국공채 위주의 시장으로 끝나고 말았다. 1961년 상반기까지는 채권거래가 70%를 차지할 정도였다.
1962년부터 시작된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실시를 전후하여 우선 투자 재원 조달책으로 증권시장을 통한 내자동원 역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에 1962년 1월 처음으로 자주적인 <증권거래법>을 제정하고, 이 법에 의거하여 주식회사 조직의 대한증권거래소가 1962년 4월에 개소되었다.
그러나 개소 이후 1개월이 조금 지나서 증권거래소 주식 자체가 투기적인 주력주로 등장하여 거액의 매수와 매도 불능이라는 파국적인 사태를 초래하였다. 이 5월 증권파동은 그 뒤 끝없는 충격을 주어 증권시장 불신의 근본 요인이 되었다.
한편, 거래소의 주식회사 조직을 계기로 이전의 국공채 위주의 시장에서 주식시장으로 전환하였다. 1961년말 경부터 1962년에 걸쳐 증권거래소 주식의 거래를 중심으로 하여 주식거래비율이 90%를 넘게 되었다. 또 영리 위주의 주식회사제를 시정하고 투자자 보호와 공정관리를 위해 1963년 5월 공영제의 한국증권거래소로 개편되었다.
결국 1962년의 5월 증권파동은 모든 투자자를 이탈하게 하여 1968년 11월 <자본시장육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될 때까지 증권시장이 침체됨으로써 1967년의 증권거래량은 100억 원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증권시장 발달의 역사는 당연히 경제 발전의 각 단계에 대응하는 것이며, 특히 정부의 자본시장육성책에 의존하고 있다. 사실 1968년 11월 <자본시장육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될 때까지 증권시장의 체제는 유통시장에 한정되었으며, 그나마도 미비하기 짝이 없었다.
발행시장은 1968년 이전에는 사실상 존재하지도 않았다. 주식 공모는 전무하였고, 약간의 신주를 발행하는 경우도 구 주주 인수 또는 무상증자에 의한 것이며, 국공채 발행조차 강제인수 또는 첨가소화에 의한 비자율적인 것이었다.
우리 나라의 증권시장이 유통 및 발행 양면에서 현대적인 의미를 갖게 된 것은 1972년 12월 <기업공개촉진법>이 제정된 이후의 일일 것이다.
이전의 투자 재원 조달방식은 마침내 과다한 외채 의존현상과 기업 재무구조의 악화를 초래하여 기업의 건전한 육성을 위해 자기금융 확대와 더불어 자본시장 육성을 당위의 정책 의지로 다시 제기하였다. 그래서 1968년에 <자본시장육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 이래 증권세제가 확립되었다.
또한 1969년에는 증권거래제도의 개선과 <증권투자신탁업법> 제정 등에 의한 증권투자신탁회사 설립 등 거의 혁신적인 유통시장 및 발행시장의 육성조처를 계속적으로 단행하였으며, 자본시장의 기틀을 정비하였다.
그리고 1972년부터 시작되는 제3차 경제개발계획의 중화학공업화정책에 대비하여 자립 기반에서 기업의 활성화와 확고한 내자동원책의 체제를 구축해야만 했다.
발행시장 육성은 매우 시급한 과제로 제기되었다. 이와 같은 정책목표를 위하여 1972년 8월에 경제 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조처인 8·3긴급조치로써 사채 동결과 금리 인하를 단행함과 동시에, 곧이어 12월 30일 <기업공개촉진법>을 제정하였다.
기업공개정책은 내자동원책, 국민의 간접적인 기업 참여, 증권 저축적인 재산 형성 등 정책목표를 넘어 우리 나라의 자본주의체제를 독점자본주의로 재편성하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기업공개는 결코 순탄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그만큼 우리의 반봉건적·폐쇄적인 가족 경영하의 기업은 공개와 주식 분산을 기피하였다. 그 대부분은 기업가정신보다도 장사치의 고리대와 상업자본적인 속성을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업공개촉진법> 제정 이후에도 1974년 기업공개와 건전한 기업풍토 조성을 위한 5·29대통령긴급조치를 발표하는 등 자본시장 수용태세를 확립하였다.
5·29대통령긴급조치 직후 1974년 6월 자본시장 종합대책을 발표했는데, 그것은 본격적인 기업공개에 대비하여 증권거래소의 기능 강화, 투자신탁의 확대, 주식이동관리제도, 유가증권 신고의무의 추가, 세제상의 특혜 방침 및 기업공시제도 등 다방면에 걸친 종합 대책을 강구한 것이었다.
뒤이어 1975년 8월 8·8기업공개보완조치를 취하여 5·29대통령긴급조치의 미비점을 보완하고, 특히 대기업의 강제적 공개 방침을 천명하였다.
이에 따라 9월에는 6개 대형 증권회사가 자진 공개하였고, 10월에는 재무부에 의해 제1차 공개대상법인 104개 사가 선정되었다.
이상과 같은 다각적인 자본시장육성시책 이외에 일반 금융·경제시책에서도 간접적으로 시중 자금의 증권시장 유입을 촉진하는 다음과 같은 여러 조처가 취해졌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먼저, 1965년 금리현실화조처 이래 1972년 8·3긴급조치에 이르기까지 6차에 걸쳐 실시된 금리인하조처는 직접 금융자산과 간접 금융자산 간의 수익구조를 변화시켜 유가증권 투자를 촉진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또한, 1972년의 8·3사채동결조치와 부동산거래로 발행하는 재산소득에 대하여 중과하는 것을 목표로 한 1974년의 양도소득세제도 등으로 인하여 금융자산의 대체적인 투자대상으로 오랫동안 번창해 오던 사채시장과 부동산시장의 기반을 일시 약화시켜 시중 유통자금의 상당 부분을 증권시장에 유입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더불어 주목해야 할 점은 화폐·금융 시장의 연계관계이다. 1973년 4월의 제2금융권 형성 발표에 이어 8월 <단기금융업법>이 제정되고 단자회사가 설립되어 단기자금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단기자금시장, 즉 화폐시장은 콜시장·할인시장·정부단기증권시장 및 외환시장 등으로 구성되어 금융기관을 포함하여 자금 수급을 신속하게 조정하는 기능을 한다.
콜시장은 금융기관간에 배타적인 동업자 콜시장을 형성하여 아직 그 기능이 미흡하다. 1974년 8월에는 한국투자신탁주식회사가 발족했고, 1975년 12월에는 <종합금융회사법>이 제정되었다.
이것은 머천트뱅크(merchant bank)제도를 도입한 것으로, 민간 장기금융기관을 육성하려는 목적을 가졌으나, 당면한 외자도입 창구, 증권의 인수 및 모집, 증권투자신탁업 등의 기능을 하고 있다. 이들 제2금융권이 증권의 인수 및 모집에 의한 증권투자로 자본시장의 폭은 불충분하지만 점차 넓혀지고 있다.
한편, 1976년 12월 이전의 증권시장육성책에 따르는 모든 제도적 보완을 체계화하여 전면적으로 <증권거래법>을 개정하는 동시에 1977년 2월 증권관리기구로서 증권감독원과 증권관리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우리 나라 경제는 1980년대를 맞이하여 개방체제하에서 국제화와 자유화 조처를 넓히게 되었다.
이미 1978년에 제1차와 제2차에 걸쳐 무역자유화조처를 취하였고, 이에 대응하여 외환 부문에서도 지정통화의 대폭 자유화, 외화여신제, 결재방법의 간소화, 해외여행 경비·해외지사 경비의 한도 인상, 인허가 업무의 외환은행 위임 등 경상거래의 대폭적인 자유화를 기하였고, 드디어 자본자유화조처의 제일보를 내딛게 되었다.
물론 자본자유화시대가 도래했다고 하더라도 우리 나라의 여건은 아직도 자본유입기라고 볼 수 있으므로, 그것은 외국인의 국내 투자 자유화조처라고 말할 수 있다. 즉, 그것은 외국인의 국내 주식·사채에 대한 투자, 외국 증권업자의 국내 진출과 국내시장에서의 증권매매를 의미한다.
그 다음으로는 자본유출기로 내국인의 해외 투자 자유화이며, 외국의 주식·사채에 대한 투자, 우리 증권업자의 해외 진출과 해외시장에서의 증권매매 순서로 진행될 것이다.1981년 1월 정부는 다음과 같은 자본 자유화 4단계계획을 발표하였다.
제1단계에서는 국제 투자신탁의 제한적 허용, 외국 증권회사의 국내 사무소 설치 허가, 증권관계기관의 수용태세 정비, 제2단계에서는 외국인 증권투자의 제한적 허용, 제3단계에서는 외국인 증권투자의 본격적 허용, 국내 기업의 해외 증권발행 본격화, 제4단계에서는 내국인의 해외 증권투자 허용 등의 계획을 밝혔다.
이 방침에 따라서, 자본자유화의 첫 조처로 1981년 11월 국제 투자신탁의 형식으로 대한투자신탁주식회사와 한국투자신탁주식회사에서 각각 1500만 달러의 외국인 전용 수익증권을 발행하였다.
한편, 국제화에 대비하여 증권업의 체질을 강화하고자 <증권거래법>의 개정을 단행하였다. 즉, 유가증권신고제도를 개선하고 공시주의로 일원화하여 자율적인 선별투자 풍토를 조성하였으며, 내부자 거래 규제, 부당권유 행위 금지제도의 실효성 제고, 증권회사간의 부당한 공동행위 규제, 증권회사 임원의 자격요건 강화, 외무원제도 개선, 국내외 증권업자의 상호 진출 및 외국 증권업자의 국내 영업활동에 대한 근거 정비 등을 마련하였다.
자본시장자유화의 박두에 대비하여 1983년 7월 정부는 1968년의 <자본시장육성에 관한 법률>, 1972년의 <기업공개촉진법>에 버금가는 자본시장기능 확대방안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자본시장의 근대화에 직결되는 조처로 증권업의 종합 금융업화를 목표하는 혁신 조처라고 볼 수 있으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즉, 자본금 200억 원 이상의 증권회사에 한하여 회사채 지급보증, 신종 기업어음(CP)의 인수·매출, 어음 중개업무, 증권을 담보로 3개월 이내의 단기신용공여 등을 허용하였다. 이것은 기존 은행, 종합 금융 및 단자회사와의 업무 경합을 의미하며, 이 밖에도 고객 예탁금의 이용료 지불 등으로 금융업과 같이 여수신을 가능하게 하였다.
또 국제 투자신탁의 설립을 허용하였으며, 해외점포 설립의 자율화, 해외에서의 증권인수 및 매출 등 해외 기채(起債)를 허용하였다. 1981년 자본자유화조치가 시작된 이래 1990년대에 들어서는 외국 자본의 국내 유입 뿐만 아니라 국내 자본의 해외 투자도 매우 활발해졌다.
자본시장이 자유화되면서 우리 금융기관의 해외 진출 대상국도 다양해졌는데, 동남아 지역만을 본다고 하더라고 80억 달러라는 대규모 자본이 투자되어 있는 상태이다. 이 밖에도 중규모 기업의 공개 유도, 시가발행제도의 도입, 고객 예탁금 사용 제한의 완화 등 증권업의 자율화정책을 표명하였다.
앞으로 자본자유화가 가속화될 전망이므로 국내 증권업계의 경쟁력 제고가 더욱 필요해졌다. 상장기업도 점차 증가하여 1989년에는 상장기업이 626개 업체에 이르렀고, 주식거래액은 81조1995억 원이며 채권거래액은 5조1490억 원이다.
또한 1992년 1월부터는 비거주자 외국인이 국내 주식에 직접 투자할 수 있게 됨으로써 증권시장의 국제화시대를 맞게 되었다. 1992년의 하루 평균 주식거래 금액은 3093억 원, 하루 평균 채권거래 대금은 2400억 원이었다.
1997년과 1998년의 상장기업 수와 거래종목을 비교해 보면, 9월 말을 기준으로 1997년에는 777개 사에 955종목이었고, 1998년의 경우에는 760개 사에 936종목이다.
1997년과 1998년 9월 말 증권시장에서의 주식량과 거래액을 보면, 1997년의 경우 하루 평균 2800만 주가 거래되었고 거래액은 4000억 원 수준이었으며, 1998년의 경우는 거래량이 7200만 주에 거래액은 5000억 원으로 나타나 있다.
주가지수는 1998년 1월 400선이 붕괴되어 이후 계속 하락세를 거듭하고 있으며, 1998년 9월 말에는 300선까지 붕괴되었다.
1997년 초의 주가지수가 약 1000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경제 위기 이후 우리 나라 직접 금융시장의 열악한 환경을 잘 알 수 있다. 1998년 5월 이후 환율이 안정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식시장이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기업·산업 전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