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쪽은 완도군, 동북쪽은 명량해협(鳴梁海峽)을 건너 해남군, 서쪽은 황해, 남쪽은 제주해협(濟州海峽), 서북쪽은 신안군의 여러 섬들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5°53′∼126°23′, 북위 34°08′∼34°35′에 위치한다. 면적은 440.13㎢이고, 인구는 3만 2476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개 읍, 6개 면, 242개 행정리(98개 법정리)가 있다. 군청은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성내리에 있다.
남서로 뻗어 해남반도를 이룬 소백산맥의 지맥이 바다를 건너 이 군에 이른다. 진도(珍島) · 상조도(上鳥島) · 하조도(下鳥島) · 가사도(加沙島) 등 256개의 섬들은 지질시대에는 모두 육지에 연결되었으나 후빙기(後氷期) 해수면 상승의 결과 여러 개의 섬으로 분리된 것이다. 지질은 백악기의 반암과 응회암이 주종을 이룬다.
군에는 200∼400m 내외의 산지가 많으며, 대표적인 산으로는 첨찰산(尖察山, 485m) · 여귀산(女貴山, 457m) · 덕신산(德神山, 395m) · 지력산(智力山, 325m) · 백야산(白也山, 270m) · 돈대봉(敦臺峰, 231m) · 금골산 등이 있고, 이들 산지 사이에 좁은 계곡평야와 잔구가 나타난다.
하천으로는 인지천(仁智川) · 석교천(石橋川) · 진도천(珍島川) · 의신천(義新川) · 향동천(香洞川) · 고방천 등이 있다. 해안선은 총 602.95㎞로 리아스식 해안이므로 굴곡이 심하다.
도서로는 진도 · 상조도 · 하조도 · 가사도 · 동거차도(東巨次島) · 서거차도 · 대마도(大馬島) · 관매도(觀梅島) · 독거도(獨巨島) 등 유인도 45개와 무인도 211개로 이루어져 있다. 여름철 태풍과 겨울철 북서계절풍에 노출되어 큰 파도의 영향을 직접 받는 동거차도 · 서거차도 · 대마도 · 관사도 · 외병도 · 내병도 · 관매도의 해안을 따라 해식애와 파식대(波蝕臺)가 발달하였다.
이들 섬으로 둘러싸인 진도 본도의 만입지에는 간석지가 발달하였다. 남쪽 해상에 위치하여 부근을 흐르는 난류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기후는 온화하다. 그러나 북서쪽이 개방되어 겨울철에 계절풍의 영향을 직접 받기 때문에 인접해 있는 완도군보다는 다소 추운 편이다.
연평균기온은 12.7℃, 1월 평균기온은 -0.7℃, 8월 평균기온은 23.6℃, 연강수량은 1,232㎜이다. 봄철에 나타나는 짙은 안개는 부근 해상교통에 장애가 되기도 한다.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의 유물 · 유적은 발견된 것이 없으나 군에서 발견되는 고인돌 · 선돌 · 돌도끼 등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의 유물 · 유적들이 있어 일찍부터 사람이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마한의 여러 소국 중 초산도비리국(楚山塗卑離國)의 위치를 진도지역에 비정하는 견해도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백제시대에는 인진도군(因珍島郡)이라 하여 치소는 고군면 고성리에 두고 영현으로 도산현(徒山縣)과 매구리현(買仇里縣)을 거느렸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인진도군을 진도현으로 고쳐 무안군의 영현으로 하였다. 도산현은 뇌산군(牢山郡)으로 승격되고, 매구리현은 첨탐현(瞻耽縣)으로 고쳐져 뇌산군에 속하였다. 후백제의 견훤(甄萱)과 고려 왕건(王建)의 쟁패시 왕건의 수군이 진도와 고금도를 공격해 909년(효공왕 13)에 함락시킴으로써 왕건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940년(태조 23)에 뇌산군을 폐지해 이를 가흥현(嘉興縣)으로 하고, 첨탐현은 임회현(臨淮縣), 진도현은 외이현(外耳縣)으로 하여 이들 3현을 속현으로 두는 진도군을 독립시키고 고성에 치소를 두었다. 995년(성종 14)에 진도군을 옥주군(沃州郡)으로 바꾸었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1018년(현종 9)에 읍성을 고성에서 용장성(龍藏城)으로 옮겼다. 뒷날 남도포(南桃浦)에 진을 쌓고 수군을 두었으며, 1269년(원종 10)에 경상도 창선현(彰善縣: 지금의 창선도)에 있던 사고(史庫)를 이전하였다.
1270년에 삼별초군이 진도에 웅거해 관부를 설치하고 연호를 오량국(五狼國)이라 했으며, 한때 서남해안을 장악하고 몽고에 대한 항쟁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1271년에 삼별초군은 여몽연합군에게 패배해 잔여세력은 제주도로 옮겨가고 주민 1만여 명이 연합군의 포로로 잡혀가 섬이 황폐되었다. 임회면 · 지산면의 경계지대에 군마사육장이 설치되어 조선시대까지 중요한 목마장이 되었다.
고려 말기에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시달리다가 1350년(충정왕 2)에 주민을 육지인 영암의 월악(月嶽)으로 옮겼다가 다시 영암의 명산(命山)으로, 또 금산(金山)으로 옮기게 하였다. 이후 진도는 오랫동안 공도화(空島化)한 것 같다.
1409년(태종 9)에 해남현과 합해 해진군(海珍郡)으로 했으며, 읍터는 녹산역(鹿山驛)의 옛터에 두었다가 1412년에 영암의 옥산(玉山: 해남군 옥천)으로 옮겼다. 1414년에 주민의 진도 거주를 허락하고 10년간 면세조치를 취했다가 9개월 만에 다시 육지로 옮기는 등 곡절 끝에 1437년(세종 19)에 해남과 분리하여 독립되었다.
읍터는 옛 고성을 임시로 사용하다가 현재의 읍터로 옮겼으며, 지금의 지산면을 목장면(牧場面)이라 하여 감목관을 두고 4,000필 정도의 우마를 방목해 전국 최대 규모의 목장이 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에는 이순신의 활동무대가 되었으며, 정세신(鄭世臣) · 이대익(李大益) · 신여정(申汝禎) 등의 의병이 적을 물리쳤다. 1597년 정유재란 때의 명량대첩과 고금도해전은 유명하다. 1662년(현종 3)에 향교의 전패(殿牌) 분실사건으로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71년에 군으로 복구되었다.
1614년에 영국함대가 진도 연안을 정찰하고 간 이후, 서양의 군함들이 여러 차례 해안에 출몰하자, 1865년에 진도는 남해의 요새지라 하여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승격된 지 8년만인 1874년에 대원군이 실각하면서 다시 진도군으로 강등되었다.
한편, 진도는 조선시대의 대표적 유배지로서 노수신(盧守愼) · 김수항(金壽恒) · 이경여(李敬輿) · 정만조(鄭萬朝) 등 많은 인물이 유배되어 왔다. 또한, 허유(許維) · 허형(許瀅) 등 남종화풍의 대가들이 다수 배출되어 현재도 그 제자들이 화단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895년에 나주부 소속의 3등군으로 편제되었다가 1896년에 전라남도 진도군이 되었다. 1906년에는 명산면이 영암군으로, 삼촌면(三寸面)이 해남군으로 이속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안창(安昌) · 가좌(加佐) · 도초(都草)면이 무안군에 이속되었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서당학생인 정경옥(鄭京玉) · 박석현(朴錫炫) 등이 거사하려다가 발각되어 미수에 그쳤다. 1950년 6·25전쟁으로 8월 31일에 적에게 함락되었다가 10월 5일에 수복되었다. 1951년에 황해도 장연군 · 송화군 출신의 피난민 3천여 명이 정착하였다. 1962년에 진도개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1979년에 진도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82년 1월 1일에 신의면 구자리(狗子里)가 구자리(九子里)로, 신의면 침계리 수용소가 진설리로 개칭되었다. 1983년 2월 15일에 조도면 만재도리와 가사도리의 일부가 신안군에 편입되었다.
1985년에 진도대교가 가설되어 육지와 연결되었으며, 1987년 1월 1일에 임회면 염장리가 진도읍에 편입되었다. 1990년 8월 1일에 신안군 장산면 저도 등 도서 일부가 진도군에 편입되었다.
청동기시대 유물 · 유적으로 진도읍 교동리 · 쌍정리, 군내면 분토리 · 송산리, 지산면 인지리 · 관마리 · 삼당리, 임회면 석교리 · 봉상리 · 용호리, 고군면 고성리 · 오산리 · 지막리 등지에 고인돌 300여 기가 분포되어 있다. 조도면 신육리 · 창류리, 의신면 옥대리 · 만길리 등지에서 돌도끼 · 돌화살촉 등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성으로는 군내면 용장리에 삼별초군이 항몽근거지로 삼았던 용장성(사적, 1964년 지정), 임회면 남동리에 남도진성(사적, 1964년 지정), 1987년 전라남도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된 진도읍 성내리에 진도읍성, 의신면 금갑리에 금갑석성(金甲石城)이 있다.
또 진도읍 철마산에 1437년(세종 19)에 축성된 철마산성(鐵馬山城), 고려의 승화후 왕온(王溫)이 축성했다는 망금성(望金城) 등이 있다. 또한, 국방유적으로 군내면 녹진리에 강강술래를 했던 곳으로 전하는 이충무공 파왜철환지(李忠武公破倭鐵環址)와 고군면 원포리에 명량해전지(鳴梁海戰址, 일명 울돌목) 등이 있다.
불교 유산으로는 군내면 둔전리에 금골사와 금골산 오층석탑(보물, 1971년 지정) · 금골산 마애여래좌상(전라남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1972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된 임회면 상만리에 진도 상만리 오층석탑, 1972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군내면 용장리에 용장사 석불좌상, 1985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의신면 사천리에 쌍계사 대웅전 등이 있다.
그 밖에 군내면 둔전리에 해언사지 삼층석탑(海堰寺址三層石塔), 분토리에 석불과 석탑, 쌍계사에 월하당 부도(月下堂浮屠) · 정견당 부도(正見堂浮屠) 등이 있다. 의신면 침계리에는 전왕온(傳王溫)의 묘(전라남도 기념물, 1988년 지정)가 있다.
유교 유산으로는 진도읍 교동리에 진도향교(전라남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가 있으며, 건축물로는 의신면 사천리에 허유 · 허형 · 허건(許楗)의 작품이 보관 · 전시되어 있는 운림산방(명승, 2011년 지정)이 있다.
무형유산으로는 강강술래(국가무형문화재, 1966년 지정) · 남도들노래(국가무형문화재, 1973년 지정) · 진도씻김굿(국가무형문화재, 1980년 지정) · 진도다시래기(국가무형문화재, 1985년 지정) · 진도북놀이(전라남도 무형문화재, 1987년 지정) · 진도만가(전라남도 무형문화재, 1987년 지정) 등이 있다. 강강술래는 1966년, 남도들노래는 1973년, 진도씻김굿은 1980년, 진도다시래기는 1985년, 진도북놀이는 1987년, 진도만가는 1987년 국가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로 지정되었다.
또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요인 「진도아리랑」이 전승되고 이외에도 진도읍 쌍정리에는 1994년 전라남도 무형문화재(현, 무형유산)로 지정된 진도홍주가 있다.
천연기념물로는 진도의 진도개(천연기념물, 1962년 지정), 진도읍 수유리의 고니류 도래지(천연기념물, 1962년 지정), 의신면 사천리에 쌍계사 상록수림(천연기념물, 1962년 지정), 임회면 상만리의 비자나무(천연기념물, 1962년 지정), 조도면 관매리의 관매도 후박나무(천연기념물, 1968년 지정) 등이 있다.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진도읍 교동리에 진도향교가 있다. 진도군의 향교나 서원에 관한 기록은 확실하지 않으나 진도군이 1437년(세종 19)에 설치되었으므로 이듬해에 향교가 창설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1440년에 치소가 성내리로 옮겼으므로 향교도 이설되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고증할 근거는 없다. 향교는 여러 차례 이전하였다가 1656년(효종 7) 현재의 위치에 옮겨 세웠다. 한편, 서원으로는 진도읍 교동리에 1602년(선조 35)에 봉암서원(鳳巖書院)이 설립되었으나 점차 퇴락해 폐지되었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1909년에 진도초등학교의 전신인 4년제 진명학교(進明學校)가 동외리에서 개교했다가 1920년에 5년제 보통학교가 되었다. 1920년에 석교공립보통학교, 1922년에 의신초등학교의 전신인 의신개량서당, 1923년에 고성공립보통학교, 1925년에 조도공립보통학교, 1931년에 군내공립보통학교, 1932년에 지산공립보통학교 등이 설립되었다.
중학교는 1937년에 진도농업실습학교가 개교하였다. 이 학교는 1946년에 진도공립농업초급중학교로 인가되었으며, 1959년에 진도서중학교로 개명되었다. 고등학교는 1951년에 진도농업고등학교가 개교해 1968년에 진도실업고등학교로 개편되었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0개교, 중학교 7개교, 고등학교 4개교가 있다.
문화행사로는 진도문화원 주관으로 매년 10월 15일에 허유를 추모 · 기념하는 소치미술제(小痴美術祭)가 1968년부터 열리고 있다. 또 문화원과 민속놀이진흥회에서는 1974년부터 무형문화재의 전승을 위한 행사를 실시하고 있으며, 군민의 날인 4월 17일에는 옥주문화제(沃州文化祭)가 열린다.
영등제(靈登祭)의 행사는 고군면 금계리와 의신면 모도리 사이의 바다가 갈라져 갯벌이 노출되는 현장을 구경하면서 민속행사로 행해진다.
이 고장에 전승되고 있는 대표적 민속놀이로는 살냉이놀이를 들 수 있다. 이 놀이에는 상평통보 스물 일곱닢과 목침 · 토시가 사용된다. 상평통보의 뒷면에는 1∼10까지의 숫자가 새겨져 있는데, 1∼7까지는 각각 서푼이고 8·9·10자는 각각 두푼으로 모두 27푼으로 되어 있다.
세 사람이 목침을 가운데 놓고 둘러앉으면, 꼬쟁이(엽전을 나누어주는 사람)가 엽전을 고루 섞어 그 중 1·2·3자를 골라 엎어놓고 각자 집도록 하여 그 순위를 결정한다. 가장 낮은 숫자를 집은 사람이 선이 되는데, 꼬쟁이는 선으로부터 오른쪽 순으로 상평통보를 너푼씩 나누어 준다.
놀이꾼들이 각기 패의 숫자를 확인하면 선을 잡은 사람이 자기의 엽전을 목침 위에 탁 치고 이때 자기가 내놓는 숫자를 알리는 노래를 부르는데, 1∼10자까지 각 숫자에 해당하는 노래가 있어 놀이의 흥을 북돋아 준다.
이때 만약 다른 사람들 중 선과 같은 숫자의 패를 가진 사람이 있으면 선의 엽전을 잡게 되어 나머지 사람들로부터 ‘방(벌금)’을 받게 되나,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자신에게 가장 불리한 엽전을 토시에 하나씩 집어넣어야 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세 판을 해서 가장 많은 점수를 얻은 사람이 놀이에서 이기게 된다. 이 놀이는 어느 때나 살냉이꾼이 모이면 술이나 돈을 걸어 놓고 노래를 흥겹게 부르며 하지만, 주로 여름에 성행한다.
이 고장의 대표적인 동제로는 임회면 굴포리와 군내면 용장리의 당제, 군내면 덕병리의 장승제를 들 수 있다. 임회면 굴포리에서는 깨끗한 제관 한 명을 선정 해정월 보름날 제를 지낸다. 제일이 되면 마을사람들이 사방을 다니며 굿(농악)을 친 뒤 제관이 할아버지신 · 할머니신 양위 앞에 상을 차리고 잔을 올린다.
그 뒤 제관이 마을에 내려오면 거리제와 샘굿이 벌어진다. 거리제는 마을 한가운데 술상을 차리고, 그 주위를 돌면서 굿을 치는 것이고, 샘굿은 공동우물을 돌며 흥겹게 노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제가 모두 끝나면 ‘광대‘라는 가면을 만들어 쓰고 이집 저집 다니며 굿을 치고 밤새껏 즐긴다.
군내면 용장리의 경우에는 사직신(社稷神) · 성황신 · 세자대군신과 오방신장(五方神將)을 위하는 당제를 정월보름에 거행한다. 제물로는 돼지를 현장에서 직접 잡아 쓰며, 밤 12시경 잔을 올리고 오방신장에게 음식을 조금씩 바친다. 2시경 제가 끝나면 음복을 하고 공동우물로 내려와 간단한 샘굿을 한 뒤 부유한 집들을 돌면서 필요한 재물을 얻는다.
이 고장에는 벽파진 할아버지 당신에 대한 유래담과 「쌀굴전설」 · 「고막뫼전설」 등의 지명전설이 다수 전하고 있다. 옛날 벽파진에서 나룻배 사공이 손님을 싣고 감부섬 앞 바다로 노를 저어가던 중 갑자기 벽파부두에 한 백발노인이 나타나 급한 사정이 있으니 좀 실어 달라고 간청하였다.
사공이 수고를 무릅쓰고 벽파진으로 되돌아왔는데 부두에 당도해 보니 노인은 온데 간데 없었다. 그 때 바다에서는 무서운 회오리바람이 일어나더니 거센 파도가 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은 노인신이 사람으로 변해 사공과 손님들을 구해 주었음을 깨닫고, 그를 당신으로 모셔 제를 지내게 되었다.
군내면 둔전리 북서쪽에 금골산(金骨山)이 있는데, 이 산 중턱에는 쌀굴이라 불리는 큰 굴이 있다. 옛날 이곳에 노승과 상좌가 살고 있었는데 굴벽의 구멍에서 매일 두 사람분의 쌀이 나와 식량걱정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손님들이 많이 오자 노승은 이들을 대접할 생각으로, 이 구멍에서는 두 명분 이상의 쌀은 나오지 않는다는 말을 믿지 않고 마구 구멍을 후벼 팠다. 이로 말미암아 이후로는 쌀이 한 톨도 나오지 않게 되었고, 노승과 상좌는 자신들의 무리한 욕심을 뉘우치면서 그 굴을 떠났다고 한다.
진도읍 남동리에는 고막뫼라는 둥근 모양의 산이 있는데 원래 이 산은 남동리 앞 바다에 있던 섬이라고 한다. 언젠가 이 섬이 둥둥 떠다니며 이동하는데 한 임신한 여자가 이를 발견하고 “섬이 떠내려가네.”하고 소리치는 바람에 섬이 그 자리에 멈추어 현재의 고막뫼가 되었다고 한다.
이와 유사한 전설로 「이음바위전설」도 전해온다. 이음바위는 지산면 길은리 동쪽에 있는 바위인데, 진도읍 포산리 지도마을과 마주보고 있다. 옛날 힘세고 재주있는 한 장사가 동서로 갈라진 포산리와 이곳을 연결하기 위해 손바닥에 커다란 산더미를 얹어서 가고 있는데, 때 마침 지나가던 임신한 여자가 그 모습을 보고 웃자, 장사는 부정을 탔다고 크게 노하고 그 바위에 스스로 머리를 부딪쳐 죽었다고 한다.
이 고장의 유명한 민요들인 「진도아리랑」 · 「강강술래」 · 「들노래」 · 「뱃노래」 · 「살랭이 · 「상여소리」 · 「둥덩이타령」 · 「보리타작노래」 · 「맷돌질노래」 등이 전승되고 있다.
예로부터 진도사람으로 소리 한자리 못하면 진도가 고향이 아니라고 하고, 밭 매는 아낙네들이 지나가는 남자의 길을 막고 소리를 청해서 하지 못하면 창피를 준다는 말이 전해 오고 있다.
「진도아리랑」은 느린 박자로 시작해서 차츰 빨라지고, 흥이 높아지면 서로 얼싸안고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기도 하듯이 그 가락이 동적이고 흥겹다. 가사는 현장성을 반영해 부르기도 하므로 여러 가지가 있다. 후렴은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라고 부른다.
「진도아리랑」 몇 편을 들어보면 “아라린가 지랄인가 용천인가/ 얼마나 조먼은 저지랄이란 말인가.”, “바람아 불어라 석달열흘만 불어라/ 우리야 서방님은 명태잡이를 갔다네.”, “윤선아 병선아 오고가지를 말아/ 우리집 매눌아기 반봇짐 싼다.” 등 여러 가지이다.
「강강술래」는 남해안 일대에 널리 분포되어 있으며 팔월 한가위의 세시풍속놀이이지만 정월 대보름에 행해지기도 한다. 둥근 달 아래서 달 모양으로 빙 둘러서서 춤추며 노래하는 것은 풍요를 기원하는 제의의 한 형태라 하겠다.
“술래술래 강강술래/ 강강술래/ 술래가조먼 날마지종가/ 강강술래/ 달이조먼 달마지존냐/ 강강술래/ 달떠온다 달떠온다/ 강강술래/ 동해동천 달떠오네…….”처럼 끊임없이 이어진다. ‘고사리 대사리 껑자’, ‘덕석몰자 덕석풀자’, ‘청어영자 청어풀자’, ‘문치기’, ‘쥔쥐새끼놀이노래’ 등은 「강강술래」 놀이의 각 부분으로 불리는 유희요이다.
진도의 「들노래」는 부녀자들의 집단노동요로 주로 김을 매면서 부르는데, 한 사람이 앞소리를 메기면 여럿이 “지나아애 아애아어” 하고 뒷소리를 받는다. 이밖에도 논농사 농업노동요, 길쌈노동요 및 타령, 잡가 등이 두루 전승되고 있다.
2013년 기준으로 임야가 253.36㎢로 전체 면적의 약 59%를, 농경지는 129.23㎢로 전체 면적의 약 29%를 구성한다. 논이 55.8㎢, 밭이 73.4㎢로 밭의 면적이 더 넓다. 오랜 기간에 걸친 간척지의 확장으로 해안 부근에 비교적 넓은 평야가 많다.
봉암저수지 · 용산제 · 둔전저수지 · 사천저수지 등이 있어 인근 지역의 관개에 용이하다. 주요 농산물은 쌀 · 보리 · 잎담배 등이다. 진도읍을 중심으로 한 목축업, 군내면의 과수재배, 진도읍 · 임회면 · 군내면의 약초재배 등이 활발하다. 특히 군에서 생산되는 구기자(枸杞子)는 품질이 좋고, 약효가 아주 우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근해는 우리나라 유수의 어장으로 조기 · 갈치 · 민어 · 삼치 등이 많이 잡히며, 이들 어획물은 주로 목포항으로 입하된다. 또한, 넓은 간석지를 이용한 김 · 굴 · 미역 등의 양식업과 천일 제염업이 활발하다. 특히, 미역 · 김 · 꽃게는 특산품으로 각광을 받고 있고, 지초뿌리로 담근 홍주도 유명하다.
광공업으로는 군내면에서 명반석, 고군면에서 석회석 · 납석 · 고령토 등이 산출된다. 진도읍을 중심으로 소규모의 도정 · 제분 · 양조공업이 발달하였다. 상업활동은 군내에서 가장 크고 중심적인 진도읍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조선 말기에 진도에는 읍내장 · 고군장(古郡場) · 임회장(臨淮場) · 의신장(義新場)이 대체로 매 10일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개장되었는데, 그것이 점차 5일 정기시장으로 발전하였다. 1920년대에는 5일장으로 진도읍 읍내장이 2·7일에, 고군면 고군장이 5·10일에 열렸고, 임회장은 매 10일에 열렸다.
현재는 1개의 상설시장과 5개의 정기시장이 있다. 진도읍에 상설시장이 있으며, 정기시장으로는 진도읍 진도장이 2·7일, 고군면 고군장이 1·5일, 의신면 의신장이 1·6일, 임회면 임회장이 4·10일, 조도면 조도장이 3·8일에 개장된다. 이들 시장은 모두 가축시장을 겸하고 있는데 특히 소보다 돼지의 매매가 활발하다.
가장 규모가 큰 장은 고군장이다. 거래 품목은 농산물과 일용 잡화가 주종을 이룬다. 군은 섬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어업 종사자들은 대부분 자본이 영세하여 이 지방의 수산물은 주로 자본주인 목포의 객주들에 의해 타지방으로 나가게 된다. 따라서 섬 지방이면서도 해산물이 귀하고 값도 비싼 편이다.
교통은 주로 해상교통에 의존한다. 벽파진은 목포∼완도, 목포∼제주 항로의 기항지로서 제주 · 완도와 연결된다. 이밖에도 팽목항을 통해 조도면의 여러 섬과 연결된다.
도로는 18번 국도가 진도읍을 비롯하여 진도 본도의 주요 지역과 통하며, 기타 지역은 지방도와 군도로 연결된다. 또 1981년에 기공해 1985년에 완공된 길이 484m의 연륙교인 진도대교가 군내면 녹진리와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사이에 건설되어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하는 진도 일대는 수려한 해안경관과 많은 문화적 관광자원이 있어 점차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다. 진도의 입구인 군내면 녹진리에 진도대교와 고군면 벽파리에 충무공 전첩비가 있다.
진도읍 성내리에는 진도의 고유한 풍물과 민속을 전시하는 문화예술관이 있고 남쪽 해안을 따라가면 삼별초군이 쌓았던 남도진성이 있다. 의신면의 첨찰산 기슭에는 쌍계사와 경치가 수려한 운림산방이 있으며, 남동해안을 따라가면 한국판 ‘모세의 기적’ 또는 ‘신비의 바닷길’로 일컬어지는 진도의 바닷길(명승, 2000년 지정)이 있다.
진도의 바닷길은 고군면 금계리 회동마을과 의신면 모도리 사이의 바닷길인데 매년 음력 4∼5월에 간만의 차로 바닷물이 빠져 길이 2.8㎞, 너비 50m의 길이 나타나는데 마치 바다가 갈라지는 것처럼 보여 현대판 모세의 기적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다.
하조도 군도와 관매군도의 절경은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뛰어난 경치이다. 또한, 군내면 둔전리에는 ‘진도의 금강’이라는 금골기암(金骨奇巖)이 있다. 금골기암은 군내면 둔전리의 금골산(일명 상골산, 193m)에 있는 명승지로 이 산 일대는 예로부터 ‘옥주의 계곡’이라 불리는 곳이다.
면적이 약 6㏊로 바라보면 작지만 사방길이 험해서 올라가 보면 상당히 크다. 정면에서 보면 절벽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산중턱에는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는 전설이 담긴 암굴이 있다.
군의 중앙에 위치한 읍. 면적 44.32㎢, 인구 1만 895명(2015년 현재). 읍 소재지는 남동리이다. 본래 진도군 지역으로 진도군청이 있었으므로 부내면이라 하여 동외 · 용상 · 용하 등 26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명금면과 임일면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6개 리로 개편되었다. 1917년에 진도면으로 개칭되었으며, 1973년에 군내면의 4개 리가 진도면에 편입되었다. 1979년에 읍으로 승격되었다.
지형은 남산(南山, 239m) · 북산(北山, 292m) · 철마산(鐵馬山, 298m) · 춘산봉(春山峰, 221m) 등으로 둘러싸인 분지이며 소규모의 평야가 발달하였다. 주요 농산물은 쌀 · 보리 · 고추 · 마늘 · 소채류와 구기자 · 작약 등의 약용식물이 재배된다. 서부해안에서 장어 · 농어 등의 어획이 많고 김양식과 천일제염업도 활발하다.
교통은 진도∼해남 간의 국도가 읍의 중앙을 남북으로 지나며, 군의 주요지역을 연결하는 군도가 개설되어 있다. 산월리 쉬미항에서 목포를 연결하는 정기 여객선이 운항되고 있다. 문화유적으로는 교동리에 진도향교, 성내리에 진도읍성 등이 있으며 진도개와 고니류 도래지 등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성내(城內) · 쌍정(雙井) · 동외(東外) · 교동(校洞) · 남동(南洞) · 포산(浦山) · 수역(壽域) · 수유(水流) · 산월(山月) · 해창(海倉) · 염장(念丈) 등 11개 리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 중학교 1개교, 고등학교 2개교가 있다.
군의 동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48.48㎢, 인구 4,046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오산리이다. 본래 진도군의 옛 소재지가 되므로 고군내면(古郡內面)이었는데, 1895년에 고일면(古一面)과 고이면(古二面)으로 분리되었다가, 1914년에 다시 두 면을 합해 고군면으로 되었다.
면의 서쪽에 첨찰산과 덕신산이 있어 의신면과 경계를 이룬다. 그 밖에 가인봉(佳仁峰) · 죽제산(竹祭山) 등이 산지를 이루어 서고동저(西高東低)의 지형을 이룬다. 북동부에는 평야가 발달하였다. 주요 농산물은 쌀 · 보리 등이며 양계 · 양봉도 활발하다. 또한, 석회석의 채광량이 많다.
교통은 석현∼금계 간의 국도가 면내를 연결하며, 해상교통으로 목포∼제주선과 목포∼완도선이 벽파항에 기항한다. 문화유적으로는 고성리에 고진도성지(古珍島城址)가 있고, 벽파리에 충무공 전첩비, 원포리에 명량해전지가 있다. 관광지로는 금계리에 진도의 바닷길이 있다.
오산(五山) · 지막(芝幕) · 고성(古城) · 도평(道平) · 오류(五柳) · 벽파(碧波) · 내산(內山) · 석현(石峴) · 원포(遠浦) · 향동(香洞) · 금계(金界) 등 11개 리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분교 1개교), 중학교 1개교가 있다.
군의 북단에 위치한 면. 면적 63.95㎢, 인구 3,295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분토리이다. 본래 군내면 지역이었는데, 1895년에 군일면(郡一面)과 군이면(郡二面)으로 분리되었다가 1914년에 다시 두 면을 합해 군내면으로 되었다. 1973년에 수성 · 수유 · 산월 · 해창 등 4개 리를 진도읍으로 이관하였다.
면의 남쪽에 북산 · 철마산이 있어 진도읍과 경계를 이루고, 그 밖에도 금골산 · 고두산(高頭山, 252m) · 설매봉(雪梅峰, 247m) 등이 있어 산지를 형성한다. 면의 중앙을 동서로 흐르는 이십오천(二十五川)을 따라 하천 주변에 평지가 전개되어 있고, 북부의 해안 일대에 간척지와 염전이 발달하였다.
주요 농산물은 쌀 · 보리 · 참깨 · 잎담배 등이며, 수산물은 김과 낙지가 많이 난다. 광업으로는 덕병리에서 명반석이 산출된다. 교통은 국도가 면의 동부를 남북으로 지나며, 특히 녹진∼우수영을 잇는 진도대교가 있어 육지와 연결된다.
문화유적은 둔전리에 금골사와 금골산 오층석탑, 분토리에 석불과 석탑, 용장리에 용장사와 용장성 등이 있다. 세등리에 현풍곽씨(玄風郭氏)의 동족마을이 있다.
분토(粉土) · 녹진(鹿津) · 덕병(德柄) · 둔전(屯田) · 세등(細登) · 용장(龍藏) · 송산(松山) · 나(羅) · 월가(月加) · 정자(亭子) 등 10개 리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 중학교 1개교가 있다.
군의 남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66.31㎢, 인구 3,882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돈지리이다. 본래 진도군 지역으로 의신면이라 하여 사상 · 사하 · 영산 등 21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에 명금면이 병합되었다.
면의 동북쪽에 첨찰산 · 덕신산, 서쪽에 대곡산(大谷山,236m), 북쪽에 남산의 줄기가 뻗어 있다. 의신천 · 옥대천 · 청룡천 등이 면의 중앙을 흐르고, 하천유역에 의신평야 · 명금평야(明今平野)가 형성되어 있다. 면내에 무저도(無渚島) · 대삼도(大三島) · 중삼도(中三島) 등 무인도가 많다.
주요 농산물은 쌀 · 보리 · 참깨 · 유채 · 마늘 등이며, 특산물인 구기자도 재배되고 있다. 수산물은 주로 김 · 미역이 생산된다. 교통은 돈지리를 중심으로 국도와 군도가 면내 각 지역으로 연결되며, 초사∼모도 간의 도선이 있다.
문화유적은 금갑리에 금갑산성, 침계리에 전왕온의 묘, 사천리에 쌍계사와 석탑 · 범종 및 운림산방이 있으며, 천연기념물로 사천리에 쌍계사 상록수림이 있다. 칠전리에 밀양박씨, 초사리에 양천허씨(陽川許氏)의 동족마을이 있다.
돈지(敦地) · 침계(枕溪) · 칠전(七田) · 창포(昌浦) · 사천(斜川) · 옥대(玉垈) · 청룡(靑龍) · 연주(連珠) · 초사(草四) · 모도(茅島) · 거룡(巨龍) · 만길(晩吉) · 송정(松亭) · 금갑(金甲) · 구자도(九子島) 등 15개 리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분교 2개교), 중학교 1개교가 있다.
군의 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69.90㎢, 인구 3,831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석교리이다. 본래 고려시대에는 임회현이었으나 조선시대에 진도군에 편입되었다. 1889년에 서부를 임일면(臨一面), 동부를 임이면(臨二面)으로 분리했다가 1914년에 다시 두 면을 통합하여 임회면으로 되었다.
여귀산 · 백야산 등의 산과 여기에서 발원한 석교천 · 백동천(白洞川) 등이 있으며, 이들 하천 주변에 좁은 평야가 발달하였다. 남쪽 바다에는 죽도(竹島) · 사자도(獅子島) · 신도(新島) 등 섬이 많다. 주요 농산물은 쌀 · 보리 · 콩 등이며, 그 밖에 모란 · 구기자 등 약용식물이 재배된다. 수산물은 미역이 특산물로 유명하다.
교통은 진도읍과 연결되는 국도가 지나고 해상교통으로는 남동리 서망마을과 조도를 잇는 항로가 있다. 문화유적은 남동리에 남도진성, 상만리에 만흥사 · 오층석탑과 천연기념물인 비자나무가 있다.
석교(石橋) · 삼막(三幕) · 용호(龍虎) · 고정(高亭) · 사령(巳嶺) · 명슬(鳴瑟) · 봉상(鳳翔) · 상만(上萬) · 죽림(竹林) · 백동(白洞) · 굴포(屈浦) · 남동(南洞) · 연동(蓮洞) 등 13개 리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 중학교 1개 교, 고등학교 1개교가 있다.
군의 서단 해역에 위치한 면. 면적 57.20㎢, 인구는 3,181명(2015년 현재)이다. 면 소재지는 창류리이다. 본래 진도군의 지역으로 여러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제도면(諸島面)이라고 하여 관매 · 관호 · 동거차도 등 33개 리를 관할하였다.
1889년에 조도면과 가사면(加沙面)으로 분리되었다가 1914년에 두 면을 다시 통합하여 조도면이 되었다. 1963년에 마진도리를 신안군 장산면으로 이관했고, 1964년 가사도에 가사출장소를, 1966년에 서거차도에 거차출장소를 신설하였다. 1983년에는 만재도리와 가사도리의 일부가 신안군에 편입되었다.
이 면은 하조도를 비롯해 40개의 유인도와 많은 무인도로 되어 있다. 밭이 논보다 많아 주요 농산물은 보리이며, 유채 · 참깨 · 마늘 등의 특용작물의 재배가 많다. 김을 비롯해 많은 해산물을 생산하고, 해조류의 양식이 활발하다.
교통은 해상교통 위주인데 조도 · 옥도를 중심으로 진도 · 목포 · 제주 · 신안 · 해남 등지로 연결되며, 면내의 각 도서를 잇는 도선이 있다. 관매리에 천연기념물인 후박나무가 있으며, 면 일대가 다도해해상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창류(倉柳) · 신육(新陸) · 관매(觀梅) · 대마도(大馬島) · 소마도(小馬島) · 관사도(觀沙島) · 나배도(羅拜島) · 맹성(孟城) · 여미(礪尾) · 성남도(城南島) · 죽항도(竹項島) · 독거도(獨巨島) · 청등도(靑藤島) · 모도(茅島) · 옥도(玉島) · 진목도(進木島) · 눌옥도(訥玉島) · 외병도(外竝島) · 내병도(內竝島) · 가사도(加沙島) · 서거차도(西巨次島) · 동거차도(東巨次島) · 맹골도(孟骨島)등 23개 리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분교 4개교), 중학교 1개교, 고등학교 1개교가 있다.
군의 서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은 89.96㎢, 인구 3,631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인지리이다. 본래 진도군의 지역으로 나라의 목장이 있었으므로 목장면(牧場面)이라 하였다. 1895년에 지력산의 이름을 따서 지산면이라 하여 소포 · 안치 · 거제 등 30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에 16개 리로 개편되었다.
지력산(325m) · 삼당산(三堂山, 272m) · 석적막산(石積幕山, 220m) 등의 산이 많고 평야는 매우 적다. 거도(巨島) · 장도(長島) · 불도(佛島) 등 섬이 많다. 주요 농산물은 쌀 · 보리 · 참깨 등이며, 한우의 사육이 활발하다. 수산물로는 김 · 병어 등의 산출이 많다. 교통은 지방도가 면의 각지로 연결된다. 거제리에 현풍곽씨, 오류리에 평택임씨(平澤林氏)의 동족마을이 있다.
인지(仁智) · 관마(觀馬) · 삼당(三堂) · 고야(古野) · 앵무(鸚鵡) · 길은(吉隱) · 소포(素浦) · 거제(巨濟) · 보전(寶田) · 와우(臥牛) · 가치(加峙) · 가학(加鶴) · 심동(深洞) · 오류(五柳) · 송호(松湖) 등 15개 리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 중학교 1개교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