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국가민속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된 진주하씨 묘 출토 유물은 현재 국립대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진주하씨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던 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郭再祐)의 종질 사촌 형제의 아들인 곽주(郭澍: 1569∼1617)의 둘째 부인이다. 정확한 생몰 연대를 알 수 없으나 1652년 언간이 확인됨에 따라 17세기 중기에 생존하였던 인물임을 알게 되었다. 출토된 유물은 장옷[長衣]과 중치막[中赤莫], 저고리, 바지, 이불, 베개, 돗자리, 머리 빗는 도구를 담아 두던 빗접과 그것을 쌌던 보자기, 나무틀만 남은 삽(翣) 2점 등, 총 81점이다. 그 외에 남편인 곽주와 그의 시어머니 등이 쓴 편지와 종자분급기(種字分級記), 서간문 등 168(172)점이 있다.
장옷은 4점이 출토되었다. 지정 당시 ‘장의(長衣)’라고 명명하였으나 이 명칭은 남자들의 소창의(小氅衣)와 혼동될 가능성이 있고 또 출토 언간에 여자들이 착용하는 ‘장옷’ 명칭이 보이기 때문에 ‘장옷’이라는 명칭으로 변경하였다. 아청색 무명 솜장옷(안감 소색무명) 1점과 무명 겹장옷 1점, 삼베 홑장옷, 모시 홑장옷이 각각 1점씩이다. 안섶과 겉섶에 각각 들여 달린 목판깃이 달렸으며 겉섶과 안섶이 두 조각인 이중섶이고 겨드랑이 아래에 작은 사각접음 무와 사다리꼴 무가 달린 점 등, 전형적인 장옷의 구조이다. 예외적으로 무명 겹장옷과 모시 홑장옷의 안섶은 한 조각으로 만들어졌다. 안감은 소색의 무명으로 되어 있으며 솜을 두텁게 두었다. 뒷길이는 102㎝이고 화장은 95㎝, 뒷품은 사다리꼴 무 부분까지 포함하여 68㎝이다. 소매는 통소매형으로 진동과 수구가 30㎝인데 소매 끝에 소색의 거친 무명 끝동이 넓게 달려 있다. 겨드랑이 아래에는 1변이 5㎝인 사각접음 무와 사다리꼴 무가 달려 있다.
중치막[中赤莫]은 1점이 출토되었다. 지정 당시 ‘창의’로 명명되었던 옷인데 ‘창의(氅衣)’란 광수에 뒤트임이 있고 막힌 옆선에 삼각무가 달려 있는 옷, 즉 ‘대창의(大氅衣)’를 의미하므로 ‘명주솜누비중치막’으로 변경하였다. 중치막은 남자들의 대표적인 편복용 포(袍)이므로 진주하씨와 관련된 남자의 옷으로 볼 수 있다. 이 유물은 여러 조각으로 찢겨져 있었는데 관 속의 공간을 채우기 위하여 찢어서 사용한 편의(片衣)로 추정된다. 뒷길이는 118㎝이고 품은 46㎝, 화장은 84㎝이다. 겉섶은 두 조각으로 구성된 이중섶이다. 그리고 옆트임의 시작점에는 찢김을 방지하기 위한 쌍밀이 단추장식이 달려 있다.
저고리[赤古里]는 적삼까지 합하여 모두 9점이다. 겹저고리가 2점이고 모시 적삼이 1점, 무명 적삼이 6점이다. 모두 목판깃이며 안깃은 들여 달린 것 4점과 반쯤 들여 달린 것 1점, 내어 달린 것 4점이다. 옆선은 사선인데 모두 막혀 있으며 겨드랑이 아래에 별도의 무가 달린 것은 1점뿐이고 그 외에는 모두 무가 없다. 9점의 저고리 중 뒷길이가 가장 긴 저고리는 뒷길이가 63.5㎝이고 화장이 73.5㎝, 뒷품이 54㎝인 ‘무명 겹저고리’이다. 9점의 저고리 중 겨드랑이에 무가 별도로 달린 유일한 저고리에는 1변이 4㎝인 사각접음 무와 커다란 사다리꼴 무로 구성된 두 조각 무가 달려있다.
치마[赤亇]는 ‘무명 홑치마’가 2점이다. 1점은 길이가 85.5㎝이고 다른 1점은 길이가 94㎝인 11폭 치마이다. 전체 너비는 406㎝이며 선단 장식은 0.3㎝로 감침질되어 있다. 주름너비는 3㎝, 주름깊이는 4.5㎝이다. 허리말기의 길이는 90㎝이고 너비는 5㎝인데 양 끝에 길이가 다른 허리끈이 달려 있다. 끈 너비는 5㎝이고 길이는 94㎝와 51㎝이다.
바지[袴]는 모두 17점이 출토되었는데 밑트인 바지가 3점이고 ‘속곳류’라고 명명되었던 밑막힌 바지가 14점이다. 밑트인 바지는 3점 모두 무명 겹바지이다. 2점은 좌우 가랑이 밑에 커다란 사다리꼴 무가 달렸으며 바지부리가 좁아지는 형이다. 나머지 1점은 가랑이 밑에 삼각무가 달렸으며 바지통은 조선 전기에 흔히 볼 수 있는 원통형이다. 밑트인 무명 겹바지 1점은 길이가 98㎝이고 바지통이 51㎝이다. 사다리꼴 무의 밑변은 13㎝이고 그 윗변은 2㎝이며 높이는 40.5㎝이다. 허리말기의 너비는 11.5㎝이고 길이는 91㎝이다. 허리에는 앞뒤 중심을 향한 주름이 앞에 4개, 뒤에 4개 있다. 허리끈은 파손되어 치수를 알 수 없다. 다른 바지의 경우, 끈 너비가 3∼3.5㎝이고 길이는 61.5∼82.5㎝ 이다. 밑막힌 바지는 14점이나 되는데 소재는 삼베 2점과 무명 12점이다. 유물의 형태는 조선 말기의 단속곳이나 속속곳과 같다. 삼베 홑바지의 길이는 88㎝이며 바지부리는 71㎝이다. 좌우 가랑이 사이에는 사다리꼴 무가 달려있는데 밑변이 14㎝, 윗변이 2㎝이고 높이는 44㎝이다. 허리말기는 너비가 12㎝이고 길이가 90㎝이며 끈은 4㎝ 너비에 78.5㎝ 길이이다.
버선[襪]은 모두 18켤레가 수습되었다. 관(棺)과 금정(金井) 사이에 이불과 함께 넣어져 있었다. 거의 비슷한 크기이다. 발길이는 22.5∼26.5㎝이며 버선 높이는 25∼30㎝, 버선목은 16.5∼19.5㎝이다.
이 외에 ‘요’와 ‘이불’, ‘베개’, 그리고 학성 이천기 일가 묘에서 발굴된 것(국가민속문화재, 1979년 지정)과 구조가 동일한 소모자 2점, 돗자리 1점, 80×86㎝ 크기의 유지(油紙) 2장을 30×30㎝로 좌 · 우 · 상 · 하로 접어 만든 ‘빗접’, 현 · 훈(玄 · 纁)으로 추정되는 ‘옷감’, 파손된 옷감 등이 있다. 그리고 보고서에 ‘멱목’으로 분류되었던 유물은 빗접을 쌌던 아청색 ‘무명 홑보자기’로 확인되었다. 크기는 47×48㎝로, 옷감 2조각을 이어서 만들었으며 1×11.5㎝의 끈을 네 귀퉁이에 달았다. 한편 ‘빗접’으로 지정되었던 유물 중에는 빗접 외에 나무틀만 남은 ‘삽(翣)’ 2점이 포함되어 있었다.
언간류는 168점이 지정되어 있으나 추후 확인된 자료까지 포함하여 총 172매이다. 이중 한글로 쓴 것이 167매이고 한문으로 쓴 것이 5매이다. 소렴할 때의 작업 지시문을 제외한다면 내용상 모두 편지라 할 수 있다. 종자분급기(種子分給記), 노비명부, 양조법(釀造法), 제물명(祭物名)을 적은 것은 문서로 볼 수도 있다.
전체 편지 중 연대가 가장 빠른 것은 1602년에 곽주가 장모에게 쓴 편지다. 수신자가 ‘합산ᄃᆡᆨ’으로 명기되어 있다. 필사 연대가 나타나 있는 것으로서 가장 나중의 것은 하씨의 필적으로 판단되는 것인데, 그 말미에 ‘임진동지초여ᄃᆞ래날 스다’라고 되어 있다. 하씨 소생의 아들 중 가장 빠른 ‘의창(宜昌)’이 1613년에 태어난 사실을 고려하면 ‘임진(壬辰)’은 1652년이 된다.
진주하씨 묘에서 출토된 복식류와 언간 등, 다양한 유물들은 17세기 중기 복식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17세기 초에는 당코깃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17세기 중엽까지도 목판깃 여자저고리가 착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귀한 자료이다. 또한 부녀자의 주변 생활을 한글로 쓴 170여 점의 서간문들은 당시 언어와 경상도 지역의 생활문화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