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1월 북조선천도교청우당이 남조선천도교청우당을 흡수, 합당한 것으로서 ‘조선노동당’의 정강 · 정책에 전적으로 동조하는 우당(友黨)이다. 천도교청우당은 그 이름에서 보듯이 당초 천도교의 청년단체로서 1919년 9월 2일에 조직된 일이 있으나 이때는 정당으로서 활동한 것이 아니었다.
광복 후 1945년 9월 서울에서 김병제(金秉濟)를 당수로 남조선천도교청우당이 조직되자 북한에서는 1946년 2월 8일 김달현(金達鉉)을 당수로 북조선천도교청우당이 조직되었다. 북조선천도교청우당의 창당배경은 북조선민주당(현재의 조선사회민주당)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다당제를 앞세운 소련군정의 북한주민포섭정책의 결과이다.
즉, 정당으로 발족되기 이전인 1946년 2월 1일 천도교북조선종무원이 공식 인가된 뒤 그 교세가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급속히 확장되자, 이 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던 소련군정은 오히려 이를 포섭, 이용한다는 방침을 세우게 되었다.
물론, 천도교청우당의 창당은 당시 기독교세력이 중심이 된 북조선민주당의 발족에 자극된 천도교도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할 정당의 설립을 요구함에 따라, 이를 소련군정이 수락하는 형태를 띠었다.
그러나, 이 때 소련군정은 북조선민주당을 통하여 도시상공인과 기독교도들을 포섭하려 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천도교청우당을 통해, 농민들과 천도교도들을 포섭하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의도하에 소련군정은 천도교북조선종무원의 핵심인물이었던 김달현을 포섭, 정당을 창설하게 하였다. 발족 당시 김달현위원장을 위시하여 부위원장 박윤길(朴允吉) · 김정주(金廷柱), 7명의 정치위원, 13명의 상무위원으로 중앙당의 진용을 갖추었다.
창당 1년 후인 1947년 4월 1차 당대회에서 채택된 강령은 대체로 김일성(金日成)이 제시한 바 있는 ‘20개정강’에 기초한 주장들이었다.
1948년의 2차 당대회시는 민족자주의 이상적 민주국가 건설,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정신에 어울리는 새 윤리 수립, 회귀일체(回歸一體)의 신생활이념에 기초한 경제제도의 실현 등, 비교적 천도교적 색채가 농후한 강령으로 수정되었다.
그러나 그 해 9월 북한정권이 수립된 뒤 일부 간부진의 교체와 함께 당강령도 북한정권의 정책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다시 수정되었다.
즉, 1949년의 확대중앙위원회에서 수정된 행동강령 가운데 인내천(人乃天)의 신문화를 발양, 인간창조 및 민족문화의 발전에 노력한다는 조항 이외에는 천도교의 당적 성격에 상응하는 것은 전혀 없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헌법과 중앙정부정강을 준수, 실천하며……” 등 노동당의 방침에 철저히 순응하는 내용으로 일관되어 있다.
따라서, 같은 우당인 현재의 조선사회민주당과 마찬가지로 종교적 이념과는 관계없이 사회주의사회를 신봉하는 종교정당에 불과하였다.
당의 변천과정을 개괄하여 보면, 1950년 월북한 남조선천도교청우당을 흡수하여 오늘날의 천도교청우당으로 단일화되었다.
6·25전쟁 중 주로 지방의 일부 하급당원들이 중심이 되어 여러 지역에서 반공투쟁을 전개한 것이 계기가 되어, 천도교청우당에 대한 탄압정책이 시행되어 당세가 급격히 몰락하였고, 1958년 당수 김달현(당시 내각의 무임소장관)이 축출되고 박신덕(朴信德)이 새 위원장으로 피선된 뒤 1960년까지 모든 지구당이 해체됨으로써 중앙조직만 남게 되었다.
천도교청우당이 전개한 정당활동도 조선사회민주당의 경우와 같이 대남성명의 발표나 통일문제와 관련한 정당 · 사회단체 연석회의의 개최 주장시에 존재를 나타내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며, 1980년대에 들어와 통일전선전술에 비교적 자주 동원되고 있다.
즉, 1970년대와 1980년대의 남북적십자회담과 국회예비회담에 천도교청우당 이름으로 자문위원 또는 대표로 참가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1982년 8월 23·24일 6차 당대회에서 정신혁(鄭信爀) 위원장이 보고를 통하여 ‘주체사상’을 지도사상으로, 김정일(金正日)을 ‘위대한 계승자’로 받들며 ‘고려연방공화국창설방안’을 실현하기 위하여 한국정부를 전복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보아 천도교청우당은 앞으로도 노동당의 통일전선전술과 김정일의 후계자 옹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1979년 10·26사태 후 미국으로 망명한 최덕신(崔德新, 남한의 전 천도교 교령)이 수차에 걸쳐 평양을 방문하면서 북한의 통일방안 실현을 위해 앞장서게 되자 북한은 천도교에 대한 재정비와 함께 그들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게 되었다.
1982년 8월 23∼24일 평양에서 제6차대회를 개최하며 중앙위원장에 정신혁(鄭信赫)을 재선하고 중앙지도기관과 당강령 및 규약을 개정하였다. 제6차대회 보고에서 ‘북과 남, 해외의 각 당과 각 파 및 각계각층을 망라하는 민족대통일전선(民族大統一戰線)을 형성하기 위해 적극 노력할 것’을 강조하였다.
또한 동대회에서 채택된 ‘남조선과 해외 천도교인 등에게 보내는 호소문’에서는 연방제통일의 실현을 기해 연공합작, 민족대통일전선 형성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중앙위원회 위원장은 김달현 · 박신덕 · 전신혁 · 최덕신 · 유미영이 맡았고, 2016년이 유미영이 사망한 이후 2017년 11월 말 현재 공석이다. 11명의 부위원장과 서기장, 상무위원 등으로 지도부가 구성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