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군 ()

대동여지도 중 강원도 김화, 철원 부분
대동여지도 중 강원도 김화, 철원 부분
인문지리
지명/행정지명ˑ마을
강원특별자치도 북서부에 위치한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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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강원특별자치도 북서부에 위치한 군.
개관

동쪽으로 화천군, 서쪽으로 연천군 · 포천시, 남쪽으로 포천시, 북쪽으로 평강군 · 김화군과 접하고 있다. 서울에서 원산에 이르는 추가령열곡을 서쪽으로 바라보는 한반도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다. 북위 38°05′∼38°20′, 동경 127°05′∼127°53′에 위치한다. 면적은 889.43㎢이고, 인구는 4만 8799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4개 읍, 7개 면, 109개 행정리(80개 법정리)가 있다. 군청은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갈말읍 신철원리에 있다.

자연환경

신생대 제4기 홍적세 때 열하분출한 현무암이 기존의 하곡 위를 흘러 퇴적된 200∼500m 정도의 높이를 가진 용암대지를 이루고 있다. 이 용암대지 위를 흐르는 한탄강의 상류지역은 전형적인 유년기의 침식곡을 형성한다. 침식된 하안에는 주상절리와 베개용암 지형이 발달해 있어, 곳곳에 수직단애의 하곡이 발달하고 기반암의 차별침식에 의한 기암절벽과 폭포 등이 많다.

그리고 현무암과 하성토로 이루어진 철원평야지대는 강원특별자치도 제일의 벼곡창지대이다. 군은 추가령통곡의 남쪽 중앙 부분에 위치하고 남동부지역은 광주산맥으로 연결되는 내륙고원지대를 이루고 있어 밤낮의 기온차와 여름과 겨울의 기온차가 큰 대륙성기후가 나타난다.

군의 남동부는 대체로 높은 산지를 이루며, 명성산(鳴聲山, 922m) · 광덕산(廣德山, 1,046m) · 대성산(大成山, 1,174m) · 적근산(赤根山, 1,073m) · 흰바우산(1,179m) 등의 높은 산이 솟아 있다. 또한 서부에는 임진강의 지류인 한탄강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며, 대교천과 역곡천 등도 흘러 강유역은 넓은 평야지대를 이룬다.

2004년 12월 기준 연평균 기온은 10.2℃ 이고, 최고기온은 33.4℃ 이며, 최저기온은 -10.9℃ 이다. 1월 평균기온 -5.3℃, 8월 평균기온 24℃이며, 연강수량은 1,250㎜이다. 마식령산맥과 광주산맥 사이로 흐르는 임진강 유역은 우리나라 3대 다우지역의 하나로 강수량이 많을 뿐만 아니라 여름철에는 집중강우로 홍수 피해가 심한 지역이다.

이와 같은 많은 양의 집중강우현상은 마식령산맥과 광주산맥 사이의 한강 하구로 진입한 열대성 저기압이 북동부를 남북방향으로 가로막은 태백산맥의 서부 산지지형에 부딪쳐 내리는 지형성 강우현상으로 생긴 것이다.

역사

신석기시대의 유물들과 청동기시대의 주거지가 이 지역에서 다수 발견된 것으로 보아 선사시대부터 이곳에서 사람이 생활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철원군(鐵圓郡) 또는 모을동비(毛乙冬非)라 하였으며, 삼국통일 이후 경덕왕 때 철성군(鐵城郡)으로 개칭되었다.

901년(효공왕 5) 송악(松嶽 : 開城)에서 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弓裔)가 904년에 국호를 마진으로 고치고 다음해에는 지금의 철원읍 홍원리로 도읍을 옮겼으며, 911년 국호를 다시 태봉으로 고치고 918년까지 통치하였다.

918년에 왕건(王建)이 고려를 세우고 이듬해 송악으로 천도하면서 이 지역을 동주(東州)라 하였다. 995년(성종 14)에는 단련사(團練使)가 파견되었다가 1005년(목종 8)에 혁파되었고, 1018년(현종 9)부터는 지주사(知州事)가 파견되었다. 김화군(金化郡)과 삭녕현(朔寧縣) · 평강현(平康縣) · 장주현(漳州縣) · 승령현(僧嶺縣) · 이천현(伊川縣) · 안협현(安峽縣) · 동음현(洞陰縣) 등 1개 군 7개 현을 속현(屬縣)으로 관할하였다.

고려 중기 이후 5도 · 양계(兩界)의 지방제도가 정비되면서 교주도(交州道)에 속하였다. 1254년(고종 41)에 직제가 떨어져 동주현(東州縣)으로 불렸다가 뒤에 목으로 승격되었으며, 1310년(충선왕 2)에 다시 낮추어져 철원부(鐵原府)로 개명되었다. 1390년(공양왕 2)에는 경기(京畿)가 확장됨에 따라 교주도에서 경기좌도로 이속되었다.

조선 건국 직후인 1394년(태조 3) 한양천도가 이루어지고 이에 따라 경기의 영역이 재조정될 때에도 역시 경기좌도에 속하였다. 1413년(태종 13)에는 규례에 따라 철원도호부(鐵原都護府)로 승격되었고, 1434년(세종 16)에 경기도에서 강원도로 이속되었다.

1746년(영조 22)에는 춘천부(春川府)에 있던 강원도병마방어사부(江原道兵馬防禦使府)가 옮겨와 춘천 · 회양(淮陽) · 이천(伊川) 등 3개 도호부와 금성(金城) · 김화(金化) · 낭천(狼川) · 양구(楊口) · 평강(平康) · 안협(安峽) 등 6개 현을 진관(鎭管)하였다.

1895년(고종 32) 부제(府制)의 실시에 따라 춘천부 철원군으로 되었다가 다음해에 다시 도제(道制)로 환원되면서 강원도 철원군이 되었다. 1919년 3 · 1운동이 발발하자 3월 2일과 3일에 천도교인들이 독립선언서를 군 전역에 뿌리고 민중을 계몽하여 만세운동을 선도함으로써 강원도에서 가장 먼저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3월 10일과 11일, 18일에는 철원읍내에서 만세운동이 계속되었다. 이 때 만세운동의 지도자들은 기독교인과 학생 · 청년 · 천도교인들이었다. 이렇게 만세운동의 분위기가 빨리 성숙될 수 있었던 것은 서울과의 교통이 편리하였을 뿐 아니라 군민들이 만세운동을 발전시킬 수 있는 민족적 저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1931년 철원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41년 10월 1일에는 경기도 삭녕군 내문면(乃文面) · 인목면(寅目面) · 마장면(馬場面)이 철원군으로 편입되어 1개 읍 9개 면의 행정구역을 이루게 되었다.

1945년 광복과 동시에 38선을 경계로 철원군 전 지역이 공산치하에 예속되었다. 1950년 6 · 25전쟁이 발발하자 이 지역은 치열한 전쟁터가 되었다. 특히 1952년 10월의 백마고지전투와 철의 삼각지대 저격능선전투에 참여했던 장병들의 애국적인 투지는 온 겨레의 거울이 되어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

철원은 국군의 북진으로 수복되어 군정(軍政)이 실시되다가, 1954년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으로 군정으로부터 행정권이 인수되어 이북지역의 6개 면을 제외한 3개 면을 관할하게 되었다.

1963년에는 옛 김화군 중 8개 면이 철원군에 편입되었고, 신서면이 경기도 연천군으로 편입되었다. 1972년 12월 28일철원군 북면 유정리 · 홍원리와 내문면 독검리가 철원읍에 편입되었다. 또한 전 평강군 남면 정연리가 갈말면에 편입되었고 1973년에는 서면 청량리와 도창리가 김화읍에 편입되었다.

1975년 철원 북방 13㎞ 지점에서 북한이 파놓은 땅굴이 발견되었다. 1979년 5월 1일갈말면이 읍으로, 1980년 12월 1일에는 동송면이 읍으로 각각 승격되었다. 1990년 6월 12일에 옛 김화군의 방통리 · 금곡리 · 율목리 · 노동리 · 진현리 · 수동리가 철원군에 편입되었다. 1992년 4월 30일 동송읍 이평리 일부가 철원읍 화지리로 편입되었다.

유물 · 유적

철원군의 지정유산은 총 20건으로 국가지정유산은 국보 1개, 보물 1개, 천연기념물 1개이며, 강원도지정유산은 유형문화유산 1개, 기념물 5개, 무형유산 1개, 문화유산자료 1개 등이며, 기타 8개의 등록유산이 있다.

선사시대 유적으로 최근 구석시대의 유적이 발견되었고,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주거지와 고인돌 및 유물들이 다수 출토되었다. 주거지는 철원읍 대마리와 김화읍 학사리에서 발견되었다. 여기에서는 간돌도끼 · 간돌칼 · 돌창 · 돌화살촉 등이 함께 출토되었다.

고인돌은 갈말읍 토성리의 철원지석묘군(강원도 기념물, 1976년 지정) 7기를 비롯하여 신철원리에 5기, 지포리에 5기, 문혜리에 1기가 있다.

토성리의 갈말읍 토성(강원도 기념물, 1977년 지정)은 초기 철기시대인 삼한시대에 조성된 것으로서 토성 안에서 민무늬토기와 김해식토기가 출토되었다.

산성지로는 철원읍 홍원리의 궁예성(弓裔城), 갈말읍 군탄리의 고석성(孤石城), 신철원리의 명성성(鳴聲城), 김화읍 읍내리의 성산성(城山城) 등이 있다. 봉수지는 소이산(所伊山) · 상사봉(上絲峰) · 적골산(適骨山) · 구수봉(九水峰) · 덕령산(德嶺山) · 중군봉(中軍峰) · 상해봉(上海峰) 등에 있었다.

불교 유산으로는 동송읍 관우리의 도피안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1962년 지정) · 도피안사삼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1984년 강원도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된 이평리의 동송읍마애불상, 상로리심원사(深源寺)의 경헌대사비(敬軒大師碑) · 취운당비(翠雲堂碑) · 석대암사적비(石臺庵事蹟碑), 김화읍 운장리의 석조미륵불입상 등이 있다.

현존 사찰은 도피안사 · 심원사 · 장안사(長安寺) · 부연사(釜淵寺) · 일광사(日光寺) · 보연사(普淵寺) 등이 있다.

동송읍 장흥리와 갈말읍 군탄리의 고석정 및 순담(강원도기념물, 1971년 지정), 동송읍 이평리의 칠성대(七星臺), 갈말읍 정연리의 창랑정(滄浪亭)과 군탄리의 석대(石臺), 김화읍 생창리의 열향정(列香亭), 근남면 잠곡리에 매월대(梅月臺), 서면 자등리에 충장사(忠壯祠) 등이 있다.

매월대는 세조가 단종을 내몰고 왕위를 찬탈하자, 김시습(金時習)이 관직에의 뜻을 버리고 방랑하다가 이곳에 와서 누각을 짓고 자신의 호를 따 매월대라 이름지었다. 충장사는 임진왜란 때 순국한 원호(元豪)의 위패를 모신 사우(祠宇)이다.

비석으로 1985년 강원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된 요동백김응하장군묘비는 원래 철원읍 월하리 향교골에 있던 것을 화지리로 옮겨놓은 것이다. 이 밖에 동송읍 하갈리여우산(如愚山)의 충무공김응하장군신도비와 이평리의 김언충(金彦忠)신도비가 있다.

또한 갈말읍 군탄리의 백시구(白時耉)신도비와 문혜리의 유명악(兪命嶽)신도비 · 유척기(兪拓基)행적비, 김화읍 생창리의 유림장군대첩비(柳琳將軍大捷碑) · 홍명구충렬비(洪命耉忠烈碑), 근남면 사곡리 초막동의 구은사사적비(九隱祠事蹟碑) · 박민환(朴敏煥)기념비 · 박창령(朴昌齡)신도비 등이 있다.

한편, 김화읍 청양리에는 6 · 25 때 철의 삼각지대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장병들의 전과를 후세에 전하기 위해 세운 전투전적비가 있다.

유적으로 철원읍 홍원리에 궁예가 도읍했을 때의 궁전지와 성지가 있는 풍천원(楓川原), 궁예가 물을 마시던 어수정(御水井)이 있다.

철원천통리철새도래지(천연기념물, 1973년 지정)는 두루미 · 백로 · 왜가리 등 철새가 도래하는 곳이다. 근남면 육단리에는 수령 500년의 소나무가, 갈말읍 토성리에는 수령 500년의 밤나무가 있다.

교육 · 문화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1568년(선조 1)에 창건된 철원향교(鐵原鄕校)가 철원읍 화지리에 있다. 또한 1666년(현종 7)에 철원읍 서쪽 일봉산(一峰山) 기슭 역촌(驛村)마을에 김응하를 향사하던 포충사(褒忠祠)가 있었다. 이는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이후에도 강원도내에 남아 있던 3대 서원 중의 하나였다. 6 · 25사변 때 불타고 현재는 철원읍 화지리에 묘정비만 새로 세워져 있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1909년 봉명공립보통학교가 최초로 설립되었고, 1913년 지금의 갈말읍 지포리 · 토성리 등에 일본어강습소가 설치, 운영되었다. 그 뒤 1912년 철원농업학교가, 1939년 철원고등여학교가, 1941년 철원중학교 등의 중등 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

교육기관으로는 2015년 현재 초등학교 16개교, 중학교 5개교, 고등학교 5개교가 있다.

1984년에 설립된 철원문화원은 각종 문화예술행사를 주관하고 있으며, 매년 10월에는 군 주최로 태봉제, 매년 7∼8월 서바이벌 경기대회, 철인3종경기, 래프팅경기, 번지 점프대회를 관광이벤트로 정착시켜 테마관광자원으로 활용 한탄강레포츠축제, DMZ평화마라톤축제 등이 거행된다. 기타 문화시설로는 공공도서관으로 철원도서관, 김화도서관, 갈말도서관이 있고, 문화공간으로는 복지회관, 청소년회관, 전수회관, 문화원이 있다. 체육시설로는 실내체육관, 종합경기장, 테니스장 등이 있다.

민속

이 고장의 대표적 민속놀이로는 석전(石戰)과 농악을 들 수 있다. 석전은 한탄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동송읍 오덕리와 철원읍 화지리 사이에서 정월 보름경에 행해졌던 놀이이다. 이 곳에서는 실용적인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어 주목된다.

예전부터 오덕리사람은 강을 건너 화지리에 가서 땔감을 해야 했고, 화지리사람은 오덕리에 농토가 있어 해마다 한탄강에 놓인 다리를 보수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두 마을에서는 석전을 한 뒤 그 돌들을 이용하여 지는 쪽에서 강의 다리를 손보았다 한다.

또한, 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이 고장에서는 예전부터 농악패가 구성되어 있어 모내기굿과 두레굿 등을 하여 농사의 고달픔과 단조로움을 달래었고, 마을에 행사가 있을 때에는 걸립을 돌아 기금을 마련하였다.

각 마을 단위로 산신당이나 서낭당이 있어 매년 제를 거행했으나 지금은 갈말읍 문혜리의 가루게 서낭당을 비롯한 몇 개의 서낭당이 남아 있을 뿐이다. 예전에는 관에서 주재하던 김화의 서낭제가 유명하였다 하나 이것도 전승이 중단되었다.

김화서낭제의 특색은 제단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참나무로 임시제단을 만들고 신위로 백마(白馬)를 모신다는 것이다. 제일은 백마신의 생일인 3월 17일인데 이 때 간단한 굿을 하고 단오에 또 한 번 큰굿을 거행한다. 제행 때에는 무당이 동원되어 춤을 추는데, 춤은 몸을 아래위로 움직이지 않고 팔만을 움직이는 수평무(水平舞)를 추었다 한다.

이 밖에 이곳의 토속제 중 두드러진 것으로 기우제가 있다. 철원은 넓은 평야지대로 되어 있어 농경이 성했으나, 한탄강이 지구대(地溝帶)로 되어 있고 하상이 낮아 한발이 심해 기우제가 성행하였다.

기우제 중 가장 알려진 것은 삼부연(三釜淵)의 기우제로 이곳에서는 개를 잡아 그 피를 흘려서 기우제를 지냈다 한다. 금학산과 용탕(龍湯)도 기우제를 지내던 곳인데, 특히 금학산은 산에 서린 안개의 상태로 일기를 점칠 수 있었다 한다.

설화 · 민요

이 고장에는 인물 · 지명 · 풍수전설 등 다수의 설화가 전해오는데 특히 이 곳이 역사상 궁예의 도읍지였으므로 그에 얽힌 전설이 많다. 인물전설로는 궁예 외에도 그의 부장으로 고려의 창업주가 된 왕건(王建)과 고려의 건국을 도왔다는 도선(道詵)의 이야기를 비롯하여 이 곳 출신인 김응하 장군, 한 때 고석정(孤石亭)에 은신하고 있었다는 임꺽정의 이야기가 있다.

또한 철원이 서울과 함경도로 통하는 길목이어서 함경도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부정한 공물을 털다가 후에 임꺽정과 합류했으나 변신술이 능해 끝내 조정에서 잡지 못했다는 이상근(李相根)의 이야기도 전한다.

지명설화로는 궁예가 망할 때 남은 군사를 이끌고 마지막 통곡을 했다는 「울음산전설」과 한탄이 서려 있다는「한탄강전설」을 비롯하여 산정에 있는 우물에서 용마가 나왔다는 「용정산(龍井山)전설」 · 「외동산〔浮來山〕전설」, 그리고 토성리(土城里) · 군탄리(軍炭里) · 자등리(自等里) 등의 지명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온다.

「말고개 설화」는 다음과 같다.

근남면 마현리에 있는 말고개는 5번국도로 철원군과 화천군의 경계에 있는 높은 고개인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유래가 전한다. 임진란왜란 때 왜군 장교가 군졸을 대동하고 말고개[馬峴]를 넘어 화천방면으로 가려 했다. 이 길을 따라 올라가는 노변(路邊) 부근에 있는 천불암 앞을 지나갈 때 말을 끌던 안내인이 “이곳은 신성한 곳이니 하마(下馬)하여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하였으나 왜군 장수는 이를 거절하고 강행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타고 가던 말의 말발굽이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왜군 장수는 이에 화가 나서 자기 애마의 머리를 장검으로 내리쳤다. 왜군 장수는 쓰러진 말의 피를 천불암에 뿌렸다고 한다. 그 때 안내인의 말을 무시하고 고개를 넘어가던 왜군 장교는 벌을 받아 계곡으로 떨어져 죽었으며, 그 후 왜군들은 수시로 이 말고개를 넘다 계곡으로 떨어져 죽었다고 전하여지고 있다.

‘월정리’란 지명과 관련된 설화는 다음과 같다.

"아주 먼 옛날 이곳 어느 산골에 이름 모를 병으로 고생하는 홀아비와 그를 지성으로 봉양하는 딸아이가 살고 있었는데 그 처녀는 아버지 병환을 낫게 해 달라고 밤마다 달님께 빌었다. 어느 날 밤 달님께 빌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 백발도사가 나타나서 ‘나는 달의 화신인데 너의 정성이 지극하여 집 옆 바위 위에 가보면 물이 고여 있을 것이니 달이 지기 전에 너의 손으로 천 모금을 길어 아버님께 드리면 병이 나을 것이다’ 고 일러 주는 것이었다. 처녀는 허둥지둥 꿈에 들은 곳을 찾아가서 물을 길어다 아버지의 입에 넣기를 기백번, 얼마 남지 않은 달은 서편으로 기우는데 가련하고 효성이 지극한 딸은 온 몸을 바위에 부딪혀 찢겨지고 피가 흘렀으나 가냘픈 손으로 드디어 천 번째 물짓기를 마치자 서천의 달도 지고 그 덕분으로 아버지 병환은 나았으나 그 효녀는 영영 회생되지 않았다.” 한다. 그 후 물이 고였던 자리를 달의 우물이라 불렀고 마을 이름 역시 월정리라 불리웠다 한다.

풍수설화로는 궁예가 철원에 도읍을 정할 때 금학산을 안산으로 정했더라면 300년은 갈 것인데 고암산(高巖山)을 안산으로 하는 바람에 30년을 넘기지 못했다는 「도참설화」와, 노승의 지시를 어기고 묘지를 파다가 붕어의 눈 형상의 지형을 건드려 그 뒤 집안에 대대로 눈병이 났다는「붕어명당이야기」등이 있다.

이 밖에도 도선국사가 도피안사의 불상을 소에 싣고 안양사로 옮겼다는「안양사의 불상전설」, 사냥꾼이 쏜 화살에 맞은 석불이 관음보살로 화하여 사냥꾼을 교화시켜 승려가 되게 하고 석대암(石臺庵)을 짓게 했다는「석대암전설」등의 불교설화가 전한다.

강원도는 대개 산간지방인데 이 고장에는 넓은 평야지대가 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강원도의 다른 지역에 비해 농업노동요가 다양하게 전승되고 있다.

「모내기노래」는 “여기저기 꽂아도 일자모로만 되었네/옳다 이젠 벼가 잘 되었네 그 벼를 비어갈제……”처럼 부르고, 「밭갈이노래」는 소를 몰면서 부르는 노래로 “이러이 소 어디 돌아를 가세 안소는 머리를 받고 마나는 바로만 가서 이러……”처럼 한다. 「꼴베는노래」는 “낫을 갈아 연포지목이 겨드랑 밑으로만 획획 떠러지누나……”처럼 부른다.

부녀자들의 노동요로 「삼삼는노래」가 있는데 “미수가리를 짊어지고 산양장을 것더가니/산양놈의 인심보아라/육칠월 짜른밤에 단잠을랑 다못자고/이삼저삼 삼을 적에 두무릎이 다썩었네……어린아이 젓달래고 큰아이는 밥달란다/뒷집김동지 거동보소 나를보고 헛웃음웃네……”처럼 다른 지방에서도 널리 부르는 노래이다.

「새몰이노래」는 “황새 따와기 논귀에 앉지마라/농부님네 속썩는다/참새 떼야 오조밭에 앉지마라/농부님네 속썩는다/까막 까치야 고초밭에 앉지마라/부인님네 속썩는다……”와 같다.

「손노래」라는 것이 있는데 “청계상 놋다리에/게어디서 손이왔소/경상도의 손이왔네/그무엇 하러왔소 · 예게곡게 싸워왔네/몇대간을 밟아왔소/쉰대간은 밟어왔네……무슨갓을 쓰고왔노/용당갓을 쓰고왔네……무슨버선 신고왔노/탈래버선 신고왔네……”처럼 손님과 문답하는 형식의 노래이다.

부모의 생신을 맞이하여 꽃의 생김새와 내력을 노래부르는 「꽃노래」는, “이 때저때 어느때뇨 우리부모 생신때라/우리부모 생신끝에 꽃노래나 짓고가지/쫓아가는 장미화는 가지가지 금빛이라/청송기생 살구꽃은 떼를 지어 회돌았네……”하여 복숭아 · 목단화 · 두견화 · 봉선화 · 작약화 · 할미꽃을 계속 노래하다가 끝에 가서 “사시장춘 무궁화는 우리나라 꽃이란다.”로 끝맺는다.

산업 · 교통

경지면적은 1만 3373㏊이고 논이 1만 1184㏊, 밭이 2,189㏊이며, 가구당 경지면적은 294a이다. 농가 수는 4,549가구이고 농업인구는 1만 2,989명이다(2015년 현재). 농가 감소로 농가당 경지면적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농업의 기계화 · 협업화로 영농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있다.

식량작물 총생산면적은 1만 1429㏊인데 식량작물 총생산량은 5만 4,101t이다. 이 중 벼재배 면적이 92.6%를 차지하고 식량작물 총생산량의 91.4%를 벼가 차지한다. 그 외 잡곡으로서 옥수수와 콩 · 팥 · 녹두 등의 두류, 그리고 고구마 · 감자 등이 생산된다.

근교농지역으로 발전하면서 채소류 생산면적과 생산량도 크게 늘어가고 있다. 채소류는 배추, 양배추, 시금치, 무, 당근 등이 재배되며, 과채류로는 토마토, 수박, 참외가 주로 생산된다. 농산물은 참깨 · 들깨 · 땅콩 등의 특용작물도 생산된다. 사과 · 배 · 복숭아 · 포도 등의 과실류 생산량도 연 207t이나 된다.

특히 축산업의 발전은 괄목할만하다. 한육우 · 젖소 · 돼지 · 오리 등의 사육호수와 사육두수가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2015년 현재 한육우의 사육호수는 515호에 사육두수는 1만 819마리이고, 젖소는 165호에서 9,645마리, 돼지는 87호에서 12만 9,300마리가 사육되고 있으며, 이밖에 산양, 토끼. 사슴, 닭, 오리, 칠면조, 거위, 꿀벌 등이 길러지고 있다.

2015년 현재 소유별 임야면적은 총 6만 3296㏊로 침엽수 1만 7686㏊, 활엽수 4만 1136㏊, 혼요림 3,289㏊, 무입목지 1,185㏊이다. 임산물은 용재, 연료, 농용자재, 종실, 버섯, 약용, 산나물 등이 주종을 이룬다.

어업은 14가구에 54명이 종사하고 있는데 분포지는 주로 한탄강 지역이다.

광업 밒 제조업 분야는 50개 사업체에 월평균 589명이 종사하고 있으며, 음 · 식료품 업체가 가장 많으며, 기타 출판인쇄업, 조립금속제품업, 고무플라스틱제품, 화학제품, 섬유제조업, 비금속 광물업 등이 있으며, 광물자원은 규조토가 소량 생산되고 있다.

갈말읍 군탄리에는 갈말농공단지, 김화읍 청양리에는 김화농공단지가 있다. 43개 업체가 있으며 단지면적은 약 278㎡에 이른다.

상업은 5일장으로 2 · 7일의 갈말읍 동막리 탄막장(炭幕場)은 소 · 돼지 등을 매매하는 우시장으로 성시를 이루었다. 광복과 6 · 25사변 이후 형성된 군내의 장으로는 3 · 8일에 개설되는 갈말읍 신철원리의 갈말장, 5 · 10일에 개설되는 동송읍 이평장, 1 · 6일에 개설되는 서면 와수장 등이 있다.

교통은 철도의 경원선이 군의 중앙부를 남북으로 통과하고, 서울과 철원을 잇는 3번 국도와 43번 · 46번 · 47번 · 58번 국도, 325번 · 463번 · 464번 지방도, 군도 등이 수도권과 철원군 각 지역을 연결하여 사람과 물자의 유통을 원활하게 하고 있다.

관광

주요 관광지는 한탄강의 국민관광지이다. 역사 · 문화 · 관광자원으로는 지석묘 · 토성 · 도피안사 등이 있다. 자연자원으로는 고석정 · 순담직탕 · 삼부연 · 매월대 등이 있다. 1975년북한의 남침용 제2땅굴이 발견되면서부터 전적지들을 연계하는 안보관광지가 각광을 받게 되었다.

신철원의 팔경은 고석정 · 순담 · 삼부연 · 직탕 · 매월대 · 도피안사 · 토교저수지 · 제2땅굴이다. 갈말읍의 한탄강 중류에 있는 고석정은 신라 진평왕 때 건립된 정자로 1977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다. 강의 중앙에 있는 고석바위는 조선 명종 때 의적인 임꺽정의 활동 근거지로 알려진 곳이다.

순담은 고석정과 인접해 있고, 한탄강의 맑은 물과 주변의 기암, 울창한 노송들이 어울려 아름다운 절경을 이루고 있다. 한탄강의 상류에 있는 직탕폭포는 일명 한국의 나이아가라 폭포라고도 한다.

갈말읍에 있는 삼부연폭포는 폭포의 물이 20m 높이에서 삼층으로 떨어진다. 이 때 떨어지는 물이 바위를 파서 가마솥 모양의 것 3개를 만들었다 하여 이를 삼부연이라고 불린다. 이 곳은 예로부터 시인 · 묵객들이 많이 찾는 명소이며, 도피안사는 신라 경순왕 5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로 문화유산이 많이 있다.

최근 한탄강 주변지역을 중심으로 체험관광이 성행하고 있다. 체험관광으로는 래트팅, 번지점프, 트래킹, 서바이벌게임, 4륜바이크 타기 등이 있다. 기타 테마관광으로는 한탄강주변 관광지, 철새탐조관광, 안보관광코스 등이 있다. 특히 안보관광코스로는 제2땅굴, 월정리역, 철의삼각전망대, 승리전망대, 백마고지위령비와 기념탑, 노동당사와 근대역사 건축물, 토교 · 동송저수지 등이 있다.

읍 · 면
  1. 갈말읍(葛末邑)

군 중앙부에 위치한 읍. 면적 173.17㎢, 5,001세대, 인구 1만 3,406명으로 남자 6,980명, 여자 6,426명이다(2015년 현재). 읍사무소는 신철원리이다.

본래 철원군 지역으로 갈말면이 되어 상사 · 동막 등 7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7개 리로 개편, 광복 후 공산치하에 있다가 1950년 수복되었다. 1954년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따라 민간인이 살기 시작했으며, 1959년지포리가 분리되어 강포리 · 신철원리로 나뉘었고 토성리가 분리됨과 동시에 지경리가 신설되면서 3개 이가 신설된 셈이다. 1972년 옛 평강군 남면 정연리를 편입, 1979년에 읍으로 승격되었다.

읍의 동쪽과 서쪽에 넓게 산지가 뻗어 있다. 북동쪽 근북면과 김화읍 경계에는 한탄강이 경계가 되어 흐르다가 하토동 · 신점동 부근에서는 읍을 남 · 북으로 나누면서 동송읍의 동쪽 경계와 갈말읍의 서쪽 경계선이 되어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른다.

서쪽에는 읍의 경계가 되는 한탄강 연안과 소규모의 지류 연안에 좁은 평야가 발달해 있다. 총면적 중 9.2%가 밭이고, 8.1%가 논, 67.6%가 임야이다. 가구당 경지면적은 2,05㏊로서 도의 1.51㏊보다 높고, 전국의 1.32㏊보다 넓다. 민통선 북방지역의 262㏊ 농경지는 출입영농을 통해 경작되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지포리와 군탄리를 중심으로 생산되는 쌀이다. 이 밖에 옥수수 · 사과 · 복숭아 등의 생산과 한육우 · 젖소 · 돼지의 사육과 양봉도 활발하다. 읍내에는 40개의 제조업체가 있다. 군탄리에 있는 갈말농공단지에는 화공 · 식품 · 전자 등의 13개 업체가 입주해 있다.

도로는 43번국도가 4차선으로 되어 포천과 김화읍으로 연결되고 이 외에도 지방도와 시 · 군도가 있어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문혜리에 유명악신도비 · 유척기행적비, 정연리에 창랑정, 군탄리에 순담, 신철원리에 삼부연폭포, 마그루드장군송덕탑, 군탄리에 육군대장박정희전역비, 강원 감사 이호민(李好敏)의 공을 기리기 위한 익영대(益詠臺), 토성리 고인돌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5개 교, 중학교 1개 교, 고등학교 1개 교가 있다.

신철원(新鐵原) · 지포(芝浦) · 강포(江浦) · 군탄(軍炭) · 문혜(文惠) · 내대(內垈) · 상사(上絲) · 지경(地境) · 토성(土城) · 정연(亭淵) · 동막(東幕) 등 11개 리가 있다.

  1. 김화읍(金化邑)

군의 중앙에 위치한 읍. 면적 87.74㎢, 1,282세대, 인구 3,395명으로 남자 1,741명, 여자 1,654명이다(2015년 현재) 읍사무소는 학사리이다.

본래 김화현 지역으로 김화읍내가 되므로 현내면이 되었다가 1895년에 군내면이 되어 상리 · 중리 등 18개 리를 관할하였다.

고구려시대에는 미여, 신라시대에는 부평군이라 칭하였으며 고려 태조 23년(940) 김화현으로 개칭되고 그 후 동주에 속현되었다가 1908년김화군이 금성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금성군을 김화군 내에 합병하여 김화군 김화면으로 개칭되었다.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초북면의 2개 리와 초동면의 3개 리가 통합되었다. 광복 후 공산치하에 있다가 1950년 수복되었다. 1954년 「수복지구 임시행정조치법」에 따라 민간인이 살기 시작했으며, 1963년철원군에 편입되었고, 1973년서면의 청양리와 도창리가 편입되었다.

산지가 많아 평야지역이 넓지 못하고 읍의 중앙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남대천유역에 농경지가 분포하고 있다. 총면적의 약 70%가 민통선 북방에 위치한 군사작전지역이기 때문에 입주영농과 출입영농을 하고 있다. 출입영농을 통해 287㏊의 논 · 밭이 경작되고 있다.

총면적의 66.5%가 임야이고, 논이 11.9%, 밭이 13.0%이며, 그 외에는 과수원 · 목장용지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 · 옥수수 · 콩 등이며 채소류의 생산이 많다. 또한 한육우 · 젖소 · 돼지 · 개 등의 축산업이 발달하였다. 6개의 제조업체가 있으며 청양리에는 김화농공단지가 있는데 화공 · 식품 · 잡화 등의 8개 업체가 입주해 있다.

문화유적으로는 생창리에 유림장군 대건비와 홍명구 충렬비, 저격능선전투전적비, 도창리에 정막금(鄭莫今)열녀문, 운장리에 삼신사지(三申寺址) 석불입상 등이 있다.

도로는 43 · 47번 국도가 포천시, 56번 국도가 화천군과 연결되어 있다.

교육기관으로 초등학교 3개 교가 있다.

학사(鶴沙) · 청양(淸陽) · 도창(道昌) · 생창(生昌) 등과 주민미거주지역인 읍내(邑內) · 암정(巖井) · 운장(雲長) · 용양(龍楊) · 감봉(甘鳳) 등 9개 리가 있다.

  1. 동송읍(東松邑)

군의 서중부에 위치한 읍. 면적 128.82㎢, 5,964세대, 인구 1만 5,659명으로 남자 7,958명, 여자 7,701명이다(2015년 현재). 읍사무소는 이평리이다.

본래 철원읍내의 동쪽이 되므로 동변면이라 불리면서 감소 · 대위 등 6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송내면과 통합되어 동변과 송내의 이름을 따서 동송면으로 개명되었다. 광복 후 공산치하에 있다가 1950년 수복되었다. 1954년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따라 민간인이 살기 시작했으며, 이 때 어운면의 양지리가 편입되었고, 1980년에 읍으로 승격되었다.

읍의 남서부에는 금학산(947m)을 비롯한 높은 산지가 있고, 북동부에도 산지가 있다. 읍 동쪽 경계를 따라 한탄강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면서 유역에 넓은 철원평야를 이루고 있다. 이 지역은 경지정리가 잘되어 도내 제1의 기계화 영농지를 이루고 있다. 청정환경에서 재배되는 벼는 ‘철원청결미’로서 상품화되어 소비자들에게 인기 있는 주식품이 되었다.

이 외에 원예농업 · 축산업도 성하여 채소 생산과 한우 · 젖소 · 돼지 · 닭 등의 사육이 활발하다. 총면적의 37.4%가 논으로 이용되고 밭면적은 12.4%, 임야가 29.1%, 기타는 목장용지 · 과수원 용지 등으로 이용되어 타 읍 · 면에 비해 논의 비율이 높음을 알 수 있다. 가구당 경지면적도 가장 넓은 2.92㏊이며, 기계화전업농이 51가구나 되어 군에서 가장 많다. 제조업체는 16개가 있다.

도로는 463번 · 464번 지방도로가 연천군의 3번 국도와 포천시의 43번 국도와 연결되어 수도권과의 연결 교통이 비교적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장흥리에 고석정 · 직탕, 승일교, 관우리에 도피안사, 양지리에 칠만암(민통선 북방) 등이 있는데, 이 곳들은 이름 난 관광지로서 관광객이 많다. 이밖에도 오덕리에 황신신도비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4개 교, 중학교 1개 교, 고등학교 1개 교가 있다.

이평(二坪) · 오덕(五德) · 대위(大位) · 장흥(長興) · 오지(梧池) · 상노(上路) · 양지(陽地) · 이길(二吉) 등과 주민미거주지역인 관우(觀雨) · 하갈(下葛) · 강산(江山) · 중강(中江) 등 12개 리가 있다.

  1. 철원읍(鐵原邑)

군의 서부에 위치한 읍. 면적 99.21㎢, 2,225세대, 인구 6,242명으로 남자 3,188명, 여자 3,054명이다(2015년 현재). 읍사무소는 화지리이다.

본래 철원읍내의 서쪽가에 있으므로 서변면이라 하여 관동 · 궁전 등 16개 리를 관할하였다.

고구려시대부터 철원 또는 모을동비라 칭하였으며 신라말 후삼국이 난립할 때 궁예가 도읍지로 정하고 국호를 태봉이라 정한 곳으로 태종 초에는 서변면이라 칭하였다. 1778년(정조 2) 당시 관동, 빙고, 상동, 중리, 하리, 월음, 환요산, 선창, 율지의 9개 동리였다. 그 후 다시 추령 제98호(1895. 5. 26)에 의거 부제 개편 당시 군, 면 폐합에 따라 관동, 궁전, 중내선, 상포, 화외선, 간촌, 상미요, 사방지, 율지, 리현, 당동, 중리, 하리, 월음, 화전, 천황지의 16개 리동을 관할하다가 1914년 (군, 면 폐합)에 따라 관전(관동+궁전, 내포), 내포 (중내선+상포), 외촌(하외선+간촌), 사요(사방지+상미요), 율리(율지+리현), 중리(가운데 동으로 그대로 둠), 월하(월음+하리), 화지(화전+천황지)의 8개 리로 개편하였으며 부령 제 103호 1931년 4월 1일부로 철원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50년 수복되었으며, 1945년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따라 민간인이 살기 시작하였다. 1954년민장면이 편입되었고, 1972년북면의 유정리 · 홍원리, 내문면의 독검리가 편입되어 읍이 되었다.

읍의 대부분이 철원 · 평강용암대지의 일부분으로서 철원평야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서쪽으로 흐르는 역곡천을 따라 논 · 밭의 농경지가 넓게 분포하고 있다. 논이 총면적의 21%, 밭이 26.5%, 과수원이 4.3%, 임야가 35.3%를 차지하고 있다. 1,803㏊의 논과 72㏊의 밭이 있으며, 벼농사가 압도적이다.

한육우 · 젖소 · 소의 위탁영농회사가 있다. 한육우 · 젖소 · 돼지 · 사슴 · 개 · 닭의 사육도 많고, 양봉에 의한 꿀 생산도 군에서 제일 많다. 광공업의 발달이 미약하다. 총면적의 97.3%가 민통선 북방의 군용지로 이용되기 때문에 입주영농과 출입영농을 병행하고 있다. 관내에는 7개의 제조업체가 있어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다.

전에는 도로교통과 금강산 전철이 경원선에서 분기되는 철도교통의 요지였으나 6 · 25전쟁 후 대부분 지역이 휴전선에 포함되면서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지방도와 시군도가 인접해 있다. 문화유적은 화지리에 충무공 김응하장군 조정비, 철원향교, 포충사(褒忠祠), 애국선열추모비, 관전리에 동주금융조합 건물, 철원감리교회 건물, 철원제2금융조합 건물, 월정리에 철의삼각전망대, 주민 미거주지역인 외촌리에 얼음창고, 독검리에 샘통과 철새도래지 등이 있다. 그리고 홍원리에는 풍천원 · 어수정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 교, 중학교 1개 교, 고등학교 1개 교가 있다.

화지(花地) · 월하(月下) · 대마(大馬) · 관전(官田) 등과 주민미거주지역인 사요(四要) · 외촌(外村) · 율리(栗梨) · 내포(內浦) · 중(中) · 중세(中細) · 산명(山明) · 가단(加丹) · 유정(楡井) · 홍원(洪元) · 독검(篤檢) 등 15개 리가 있다.

  1. 근남면(近南面)

군의 남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129.22㎢, 981세대, 인구 2,313명으로 남자 1,206명, 여자 1,107명이다(2015년 현재). 면사무소는 육단리이다. 본래 김화군 지역으로 김화읍의 남쪽이 되므로 남면이라 하여 풍동 · 양지 등 9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김화군과 금성군이 통합되자 금성군 남면과 상치되어 금성군의 남면은 원남면으로, 김화군의 남면은 근남면으로 고쳐져 6개 리로 개편되었다. 광복 후 공산치하에 있다가 1950년 수복되었으며, 1954년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따라 민간인이 살기 시작하였고, 1963년에 철원군에 편입되었다.

면의 남쪽에 있는 회목현 고개와 복주산 서쪽 기슭에서 시작하는 하천이 북쪽으로 트인 골짜기를 따라 흐른다. 하천양안의 300m 이하의 낮은 평지에 농경지와 취락이 집중해 있다. 면의 북쪽 끝에는 서쪽방향으로 흐르는 남대천이 있는데 사곡리 일대에서 지류들과 합류하면서 넓은 농경지를 만들어 놓았다.

이곳에는 주로 밭농사가 이루어지며, 주요 농산물은 옥수수이나, 양봉도 활발하다. 총면적 중 밭이 6.6%를 차지하고, 논은 6.4%, 임야가 82.2%를 차지한다. 한육우 · 젖소 · 개 · 닭의 가축사육이 성하고 양봉도 한다. 3개의 제조업체가 있다.

춘천과 김화를 연결하는 56번 국도와 지방도로가 남북으로 연결되어 교통이 편리하다. 문화유적으로 잠곡리에 매월대, 사곡리에 충렬사, 김화지구 합동 순의비, 구은사(九隱祠)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가 있다.

육단(六丹) · 잠곡(蠶谷) · 사곡(沙谷) · 마현(馬峴) 등과 주민미거주지역인 풍암(豊巖) · 양지(陽地) 등 6개 리가 있다.

  1. 근북면(近北面)

군의 북부 중앙에 위치한 면. 면적 24.09㎢, 58세대, 인구 139명으로 남자 72명, 여자 69명이다(2015년 현재). 본래 김화군 지역으로 김화읍 북쪽 첫머리가 되므로 초북면이라 하여 금곡 · 신촌 등 9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원북면의 지갑 · 사등 등 20개 리가 합쳐져 금곡 · 백덕 · 유곡 · 율목 · 두촌 · 성암 · 건천 · 산현 등 8개 리로 개편하였다. 광복 후 공산치하에 있다가 1950년 수복되었으며, 1954년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따라 민간인이 살기 시작하였고, 1963년철원군에 편입되었다. 인근 김화읍사무소가 근북면 주민의 행정을 관리하고 있다.

동쪽에 오성산 · 성재산(471m) 등이 솟아 있고, 서쪽에는 서방산(717m) · 왕재봉(608m)이 있다. 북쪽 방향에서 한탄강이 면 서쪽 경계를 따라 남류하며 관류한다. 한탄강과 그 골짜기에 발달한 넓은 용암대지와 평야는 벼농사지대로 이용된다. 총면적의 32.3%가 밭이며, 14.0%가 논면적, 22.6%가 임야면적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 · 옥수수 · 콩 등이다.

교통은 춘천 · 김화읍과 연결되는 5번 국도가 금곡리 · 백덕리를 지나면서 464번 지방 도로와 만나 김화읍 · 갈말읍과 연결된다. 또한, 금강산철도가 파괴된 채로 있으며, 유곡리 부근에는 잘 알려진 통일촌이 있다. 특히 동쪽의 오성산은 6 · 25사변 때의 격전지였으며, 중부전선의 요쇄지이다.

문화유적으로는 유곡리에 성재산성이 있다. 이 산성은 길이 447m, 높이 12m의 석성으로 고려시대에 외침을 막기 위해 축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유곡(楡谷) 등과 주민 미거주지역인 백덕(栢德) · 금곡(金谷) · 율목(栗木) 등 4개 리가 있다.

  1. 서면(西面)

군의 중앙 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74.28㎢, 2,586세대, 인구 6,565명으로 남자 3,366명, 여자 3,199명이다(2015년 현재). 면사무소는 자등리이다.

본래 김화군 지역으로 김화읍내의 서쪽이 되므로 서면이라 하여 수유 · 밀계 등 18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초북면의 험석 등 3개 리가 편입되면서 와수 등 4개 리로 개편되어 면을 이루었다. 광복 후 공산치하에 있다가 1950년 수복되었으며, 1954년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따라 민간인이 살기 시작하였고, 1962년철원군에 편입되었으며, 1973년청양리와 도창리가 김화읍에 이관되었다.

한탄강의 지류인 작은 하천이 면의 남쪽 광덕산(1,046m) 북서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면의 한 중앙의 북쪽으로 흐르다가 김화읍 학포리에서 남대천과 합류하여 한탄강으로 흐른다. 작은 하천연안 및 남대천과, 북류하는 면의 지류가 합류되는 면의 북쪽 와수리 일대에 평지의 농경지가 분포할 뿐 대부분 지역이 높은 산지지형이다.

총면적 중 논이 6.9%, 밭이 5.9%, 임야가 79.8%이고, 기타는 과수원과 목장용지로 이용되 있다. 가구당 경지면적은 0.72㏊로서 전국과 강원특별자치도의 평균치 보다 작은 규모이다. 그러나 다른 읍 · 면과 마찬가지로 경운기 · 트랙터 · 이앙기 · 콤바인 · 바인더 등 농기계로 농사를 짓고, 기계화 전업농이 9가구나 된다. 그 외 한육우 · 젖소 · 돼지 · 개 · 닭 등의 가축사육이 활발하다. 제조업체수는 4개이다.

도로는 면의 중앙을 남북방향으로 포천과 김화를 연결하는 47번 포장국도가 통과하고 있어서 교통이 편리하며, 자등리와 와수리에는 지방도로가 47번 국도와 연결되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 교, 중학교 2개 교, 고등학교 2개 교가 있다.

자등(自等) · 와수(瓦水) 등 2개 리가 있다.

  1. 근동면(近東面)

면적 20.38㎢, 주민미거주지역이다. 1945년 해방과 함께 38선을 기점으로 남북으로 나뉘면서 금성이 이북지역에 속하게 돼 공산치하에 들어갔으나 1950년 수복시 국군의 북진에 따라 김화군 일부지역에 수복되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조인되면서 금화군 13개 읍면 중 근남, 서면 등 2개면 전역이 수복된 채 근동면 일부 지역은 수복되고, 일부지역은 완충지대로 일부지역은 이북지역에 위치해 있다. 법정리로 광삼리와 방통리가 있다.

  1. 원남면(遠南面)

군의 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81.26㎢. 주민 미거주지역이다. 본래 금성군 지역으로 금성읍내의 남쪽이 되므로 남면이라 하여 하고개 · 봉화동 등 30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김화군에 편입되었고, 1950년 수복되었으며, 1962년철원군에 편입되었다.

면의 중앙을 동서방향으로 지나는 휴전선을 경계로 남부지역은 높은 산지를 이루며 적근산 · 삼천봉(815m) 등의 높은 산이 있다. 다른 지역과 이 면을 연결하는 주파령(注坡嶺) · 중치령(中峙嶺) · 주라치 · 수동령(水東嶺) · 승암고개 등이 있다. 특히 적근산은 휴전선 남방한계선에서 남쪽으로 2㎞ 떨어진 곳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금성천 본류가 원동면과의 경계를 따라 남동류하며 금성천의 지류로서 북서부에서 북동류하는 하천, 남부에서 북류하는 하천, 중앙을 지나는 하천 등이 있다. 이들 금성천의 본류와 지류의 양안에만 좁고 긴 농경지가 발달되어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이며 산간지역에서는 기장 · 조 · 옥수수 등의 생산과 임산물의 생산이 많다.

교통은 산간 오지로서 불편한 편이며, 화천군 상서면 산양리에서 이 면의 주파리를 지나 원동면 세현리를 연결하는 도로가 있다.

주민 미거주지역인 개야(開野) · 경상(慶祥) · 죽대(竹垈) · 백양(白楊) · 남둔(南屯) · 월봉(月峰) · 풍동(楓洞) · 주파(注坡) · 구룡(九龍) · 노동(盧洞) · 진현(榛峴) 등 11개 리가 있다.

  1. 원동면(遠東面)

군의 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57.53㎢. 주민 미거주지역이다. 본래 금성군 지역으로 금성읍내의 동쪽이 되므로 동면이라 하여 상방평 · 중방평 등 27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김화군에 편입되면서 원동면이 되었다. 1945년 광복 후 38선 북쪽이어서 북한지역이 되었다가 1950년 수복되었고, 1953년 면의 중앙에 휴전선이 지나게 되어 민간인이 살지 않게 되었다. 1962년철원군에 편입되었다.

면의 동북부와 남부는 높은 산지를 이루고 있으며, 백암산 · 교암산 · 흑운토령(黑雲吐嶺, 851m) 등의 높은 산이 있다. 북한강의 지류인 금성천(金城川)이 면의 서부 북쪽에서 남류하다가 중서부지역의 세현리 부근에서 원남면에서 흘러오는 금성천의 지류들과 합쳐 큰 하천을 이루어 동류하여 북한강 본류에 합류한다.

금성천의 지류를 따라 그 주변지역이 주요한 논농사지역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 · 옥수수 · 조 등이며, 그 밖에도 각종 임산물이 풍부하다.

교통은 내륙 오지에 위치하고 있어 대단히 불편한데, 원남면 주파리 후동(後洞)마을에서 이 면의 송실리의 용호동마을에 이르는 도로가 유일한 교통로이다. 주민 미거주지역인 등대(登大) · 송실(松實) · 용연(龍淵) · 세현(細峴) 등 4개 리가 있다.

  1. 임남면(任南面)

군의 동단에 위치한 면. 면적 22.61㎢. 주민 미거주지역이다. 면의 대부분이 미수복지역이며 면의 남부 일부지역만 수복되었으나 휴전선 남방한계선이 통과해 민간인이 거주할 수 없다.

면의 북서부와 남동부 지역은 높은 산지를 이루고 있으며, 면의 경계를 따라 높은 산들이 솟아 있다. 남북방향으로 길게 뻗은 면의 북동부와 남서부의 경계지역에는 북한강이 흐르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조 · 콩 · 옥수수 등이며, 삼림에서 임산물과 산나물이 많이 산출된다.

교통은 산악지대인 관계로 불편한 편이다. 주민미거주지역인 달전(達田) · 과호(科湖) · 좌패(佐佩) 등 3개 리가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철원군통계연보』(철원군, 2008)
『지방행정구역요람』(행정자치부, 2000)
『강원향토대관』(강원도민일보사, 1999)
『철원군연보』(철원군, 1996)
『강원도사』(강원도, 1995)
『한국관광자원총람』(한국관광공사, 1985)
『한국지명요람』(건설부국립지리원, 1983)
『한국지지』(건설부국립지리원, 1980)
『향토지』(철원군, 1977)
『강원총람』(강원도, 1975)
『태백의 읍면』(강원일보사, 1975)
『한국지명총람』(한글학회, 1967)
『강원도지』(강원도지편찬위원회, 1959)
철원군(www.cwg.go.kr)
철원군교육청(www.gwcwed.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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