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청년운동은 그 뿌리가 깊어, 고구려의 조의선인(皂衣仙人)운동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뒤 신라의 화랑도운동, 한말의 호국구민운동, 일제강점기의 민족해방운동, 그리고 광복 후의 민족통일운동 및 민주화운동으로 그 맥이 이어지고 있다. 청년운동은 각각의 국가와 사회적 상황에 따라 그 형태와 성격, 그리고 목적을 달리하고 있다.
한국의 청년운동은 한국 사회의 변천 과정에서 나타나는 특수성(정치체제와 외세)을 배경으로 전개된 하나의 교육적·정신적·문화적 혁신운동이었으며, 민족의 자주·자립 정신의 함양과 국민국가 내지 통일국가 수립에 그 목적을 두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의 청년운동은 장기적이면서도 지속적인 한국 청년들의 집합행동으로서 사회적인 상황을 개선 내지는 개혁하고자 했으므로, 한국 사회변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해 왔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한국이 외세로부터 지속적인 영향을 받아 온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볼 때, 한국청년운동의 핵심은 대개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그 하나는 외세에 대한 저항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외세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정치 및 사회 체제에 대한 개혁이다.
한말 한국 청년들은 청·러시아·일본의 외세에 대항했고, 또한 수구사대사상을 배척하기 위해 갑신정치운동을 전개하였는 바, 그 사상적 맥락은 독립협회운동, 신민회운동, 3·1운동, 4·19혁명까지 이어졌다. 따라서 이러한 한국청년운동을 한말, 일제강점기, 그리고 광복 후로 구분하여 시기별 특성을 고찰하면 다음과 같다.
(1) 한말의 청년운동
병조호란 후 조선왕조는 사실상 청나라의 식민적 지배체제하에 있었으며, 수구파의 쇄국노선은 청나라와 조선의 종속관계를 심화시켰다. 이러한 사회적·정치적 상황하에서 개화파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김옥균(金玉均) 등의 청년들은 1884년(고종 21) 12월 수구사대사상을 배척하고, 개국 진취의 자주적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이 청년운동은 비록 실패했지만 그 사상적 맥락은 뒤에 유발되는 청년운동, 즉 독립협회운동·신민회운동·3·1운동, 그리고 4·19청년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개국 진취의 자주독립을 지향했던 갑신년 청년정치운동은 근본적으로 사대외교를 거부하고 사회적 불평등과 사회부조리를 제거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운동의 내용을 보면, ① 청나라에 대한 조공의 허례를 폐지할 것, ② 문벌을 폐지할 것, ③ 전후 탐관오리 중 심악(甚惡)한 자는 치죄(治罪)할 것, ④ 지세법을 개혁하여 간리(奸吏)를 두절하고 궁민을 보호하여 국용(國用)을 유족하게 할 것 등이었다.
이러한 청년들의 호국구민운동은 외척 중심의 사대당 정부에 의해 탄압당했다. 국권이 청나라에 이어 또다시 러시아에게 유린당할 때 서재필(徐載弼) 등의 청년들은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국파민멸(國破民滅)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라는 대중집회를 마련하여 국난에 대한 문제를 토론하였고, ≪독립신문≫을 발간하여 국민계몽운동에 앞장섰다.
이들은 또한 만민공동회에서 결의된 내용을 국가에 건의하기도 했는데, 그 건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외국인에게 의뢰하지 않고 관민(官民)이 합심하여 황권(皇權)을 굳게 한다. ② 광산과 철도·삼림·차관·용병 및 조약체결은 각 부 대신과 중추원 의장이 연서, 확인한 것이 아니면 무효이다. ③ 재정은 탁지부에서만 관할하고 다른 부에서는 간섭하지 않으며, 국가의 예산을 공개하도록 한다.
④ 국가의 중대 범인은 따로 공판하여 피고에게 충분한 설명을 하도록 기회를 주어 자기 자신이 승인한 뒤 죄를 주도록 한다. ⑤ 칙임관은 대황제폐하께서 정부에 자문한 뒤 과반수 이상이 된 뒤에 채용하도록 한다. ⑥ 전에 독립협회에서 내놓은 정부개혁안을 실시하도록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은 정책 과정에서 감안되지 않았고 오히려 독립협회운동은 금지되었다. 따라서 회원들은 체포되어 유배당하거나 처형되었고, ≪독립신문≫도 폐간되었다.
한말 청년운동에서 나타난 특징은 국민주권주의론이 대두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청년운동에서 국민참정을 선명하게 요구한 것은 사실이지만, 군주 주권에 대한 부정은 보류되었다. 따라서 한말의 호국구민운동은 군주체제를 유지시키면서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고, 외세의 침입으로부터 다만 주권을 보유하는 데 목적이 있었을 뿐, 주권이 국민에게 돌아올 때 애국주의적 민족주의가 적극화된다는 사실에는 인식이 부족하였다.
그러므로 당시의 청년운동은 청·러시아·일본 등 외세의 침략 앞에 주권을 지키는 것과 군주체제를 유지하되 관의 부패성을 개혁하는 호국구민운동이 주류를 이루었을 뿐 민족주의를 본궤도에 올리지는 못하였다.
(2) 일제강점기의 청년운동
한국의 자주적 근대화운동이 배아될 무렵, 일제는 교묘한 방법을 통하여 한국 침략을 목적으로 하는 개항을 무력으로 강요하였다. 청일전쟁·러일전쟁 이후 일제는 열강(영국)의 지원하에 청나라와 러시아의 세력을 한국에서 배제하는 데 성공하였고, 드디어 한국과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였다.
이로 인하여 일제는 한국 강점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고, 근대적 식민정책방법인 직접 통치로 한국의 사회·경제적 수탈뿐만 아니라 한국의 일본화(교육제도 개정, 일본어 의무화, 한국어 사용금지 등)를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일제는 첫째 한국의 사회적·경제적 수탈을, 둘째로는 지구상에서 한민족의 말살정책을 강행하였다. 일제에 의한 한민족의 말살정책은 3단계로 나누어 시도되었다. 첫번째 단계는 무단통치(1910∼1919), 두번째 단계는 문화통치(1919∼1929), 세번째 단계는 전략통치(1930∼1945)로 구분할 수 있다.
한국사회의 구조적·제도적 개혁이 일제에 의해 완전 일본화가 지향될 무렵, 한국의 청년들은 한말부터 축적한 민족운동의 역량으로 항일투쟁에 앞장섰고, 주권 회복을 위하여 투신하였다. 주권 회복을 위한 방법으로 청년들은 조직을 통해 단결하였고(신민회·대동청년단·청년학우회 등), 민족적 자주역량을 기르기 위해 산업·교육·사회 제 분야에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청년단체의 조직을 통한 제 운동 상황은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중국의 신한청년당, 일본의 조선독립청년단, 만주의 대한독립청년당, 미주의 흥사단 등 국외에서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무단통치하에서 국내의 청년운동은 한말, 일제의 한국 침략방법의 일환으로 제정된 <신문지법>과 <보안법>에 의해 억압되었고, 더욱이 청년들의 항일 세력이 증대되자 일제는 헌병과 경찰을 동원하여 무력으로 탄압하였다. 위협적인 한국청년운동을 근절시키려는 일제는 한국 청년들의 애국계몽단체인 대한협회·서북학회 등을 강제 해산시켰고,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하던 ≪황성신문 皇城新聞≫·≪대한매일신보 大韓每日申報≫를 강제 폐간시켰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국내의 청년운동은 지하화되어(신민회) 소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반면 국외에서는 간도·연해주의 독립의군부와 청년독립운동단체인 광복회·조선국권회복회·조선국민회·대한인국민회 등이 조직되어 더욱 체계적인 독립운동에 임하게 되었다. 특히 국내의 청년운동이 일제의 야만적인 탄압으로 자체적 역량을 발휘하지 못할 때 도쿄(東京)의 유학생 청년들은 1919년 2월 8일 2·8독립선언을 함으로써 일제강점기 청년운동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적의 수도인 도쿄에서 한국청년들에 의해 발표된 2·8독립선언은 세계 만방에 민족자결의 선봉적 실천의지와 민족의 존재성을 인식시켰을 뿐 아니라, 1919년 국내에서 거족적인 3·1운동이 발생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 일제의 지속적 탄압이 고조될수록 한국 청년들(종교단체·농민·학생 등)의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는 비례적으로 더욱 증가했으며, 그 결과 거족적인 3·1운동이 가능하였다.
3·1운동은 일제의 악랄한 침략성을 전세계에 폭로시키는 한편, 한민족의 독립 결의를 명확히 하고 지속적인 민족독립운동에 대한 국민적 저력을 결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3·1운동이 비록 우리의 주권 회복을 달성시키는 결정적인 기능에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일제의 탄압하에서 제한된 집회·결사의 자유를 쟁취하는 전환점을 마련했고, 민족의 언론인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간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 결과, 주권회복을 위한 청년운동은 전국적으로 재정비될 수 있었고, 제한된 영역에서 다시 활기를 찾았다. 그러므로 한민족의 집합적인 항일과 주권 회복 운동력에 부딪친 일제는 동시에 병행하던 민족말살정책과 수탈정책을 표면상으로나마 수정하기에 이르렀고, 이른바 문화통치라는 새로운 지배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3·1운동을 계기로 청년층은 민족해방운동의 주역으로 등장하였다. 청년들은 1920년 6월 최초의 전국적 청년 대중단체인 조선청년회연합회를 결성했으며,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청년회를 조직하였다.
1920년대 초반의 청년운동은 주로 지식인층이 주도하는 문화계운동으로서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문화계몽적인 성격을 띤 1920년대 초반의 청년단체는 반일 독립과 근대 사회로의 이행이라는 기치하에 광범위한 청년층을 조직하고 계몽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국내에는 근대 교육을 받은 학생층을 중심으로 사회주의사상이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20년대 초반의 청년운동은 민족주의적 성격과 사회주의적 성격이 혼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 이후에는 양자가 분화되었고 사회주의 계열의 청년운동 세력은 1924년 청년단체의 전국적 대중조직으로 조선청년총동맹(청총)을 결성하였다. 청총의 주도하에 전국 각지의 군에는 청년동맹, 면에는 지부, 리에는 반의 이름으로 청년단체가 조직되었다. 이때까지도 청년운동은 민족 해방의 이념을 대중에게 확산시키고 대중을 조직화하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청년들은 1926년의 6·10만세운동, 1929년 11월부터 1930년 초에 걸쳐 일어난 광주학생운동,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벌어진 수많은 대중투쟁을 통하여 민족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에 민족운동을 둘러싼 주·객관적 정세가 변하고 당시 민족운동에 큰 영향을 미치던 국제혁명운동의 노선이 좌선회함에 따라 청년운동을 계급운동의 일환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그 결과 1930년과 1931년에 청총은 해소론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청총이 청년운동의 중추기관으로서의 위상을 상실하게 된 데다 이 시기에 일제의 가혹한 탄압이 가중됨에 따라 청년운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따라서 이 후의 청년운동은 조직을 매개로 하지 않은 채 소규모의 자연발생적이고 분산적인 움직임만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학생층을 중심으로 한 청년층은 1940년대 초부터 일본제국주의 패망을 예상하고 독서회, 징병 및 징용 기피, 소규모 무장대조직 등을 통해 독립과 건국을 준비하는 활동을 벌여 나갔다.
(3) 광복 후의 청년운동
8·15광복은 한국이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는 그 의의가 크지만, 연합국에 의한 타율적인 것이었다는 점에서 우리 민족에게 있어 또 다른 형태를 띤 역사적 시련의 출발점이기도 하였다. 즉, 광복 이후 한국은 미소의 분할 점령에 따라 군정과 민족 분단의 비운을 경험해야 하였다. 따라서 38도선을 중심으로 분단된 한국은 첫째로 미소 양대 세력의 냉전의 장이 되었고, 둘째로 한민족간의 이데올로기 대립의 장이 되었다.
한민족간의 이데올로기 대립은 8·15광복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국내외에서 싸워 왔던 각 정치 세력은 유일한 민족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다수의 이데올로기를 정치적 수단으로 삼았는데, 김구(金九)를 중심으로 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민족주의 이념, 이승만(李承晩)의 반공 이념, 여운형(呂運亨)의 사회주의 이념, 박헌영(朴憲永) 등을 중심으로 한 조선공산당의 공산주의 이념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민족해방을 위한 수단이던 이러한 이념들이 8·15광복 이후에는 건국과 통치의 이념으로 탈바꿈되었다.
그 결과, 광복 이후 그들의 각기 다른 이념을 통일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오히려 민족주의노선과 사회주의노선의 양대 세력으로 분리되면서 진보파의 활동이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당시의 이념적 분파현상은 사회주의(여운형), 민족주의(安在鴻), 그리고 재건파 공산주의(朴憲永)로 구분되어 있으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합류하여 좌익진영으로, 그리고 민족주의가 우익진영으로 독자적인 활동을 하였다.
이러한 정치 이념의 대립현상은 광복 직후 청년운동의 방향과 내용을 결정하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정국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청년단체가 조직되어 건국을 위한 기초 활동을 전개하였다. 해방 직후만 해도 청년들은 ‘해방, 단결, 치안 유지,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행동의 통일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미군 진주, 좌익의 인민공화국 수립 선포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정국이 좌·우익 대결로 굳어져 가자 청년운동은 내부 분열을 겪게 되었다. 그러면서 좌익과 우익의 대립이 극명하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좌익 계열의 청년단체는 전국청년대표자회의(1945년 10월), 조선청년총동맹(1945년 12월), 조선민주주의청년동맹(1946년 4월)을 거치면서 하나의 세력으로 통합되었고, 여기에 대응하여 우익계열의 청년단체도 독립촉성청년연합회(1945년 11월), 독립촉성중앙청년회(1945년 11월),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단체총연맹(1945년 12월), 반탁전국학생총연맹(1946년 1월), 전국학생총연맹(1946년 7월)을 결성하였다.
청년운동 내부에서의 극심한 이념 대립은 신탁통치정국을 통해 더욱 극명하게 드러났다. 애초에 청년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좌익 계열은 미군정의 탄압과 신탁통치정국에서의 우익 계열의 공세, 즉 찬탁=반민족이라는 공세에 밀려 합법 영역에서 소멸된 반면, 우익 계열의 청년운동은 임정봉대운동과 반탁운동을 통해 합법 영역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해 갔다.
특히 미군정이 종식되고 이승만에 의한 제1공화국이 출범한 이후의 청년운동은 대부분 학생운동으로 흡수되었으며, 좌·우익의 분열에 의한 사회적 혼란도 외세에 편승한 우익측의 승리로 정리되었다. 청년학생들의 이데올로기적 분쟁을 종식시키고 무제한의 운동을 통제하기 위해 1948년 10월 국회는 학도호국단 결성과 그 지도 요령을 결정하였다.
그 결과,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고 자발적으로 민족적 대열에 참여하여 청년 학생들의 의로운 기상을 표출시켰던 과거와는 달리, 1950년대의 학생청년운동은 사상의 순화 통일과 민족정기 확립을 위한 국가시책의 지원도를 높여 주는 효과로서의 모든 관제운동과 궐기대회에 일방적으로 동원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외세에 의한 민족의 분단과 6·25전쟁이 민족의 주체적 의지와는 무관하게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서 처리되고 있다는 사실과 외세의존적인 이승만 정권이 민족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독재를 자행하여 국민의 참정권마저 박탈한다는 사실을 통감한 청년학생들은, 이승만 독재 정권에 대하여 반민족적이고 비민주적인 구조적 모순을 정리해야 된다는 의지를 4·19혁명을 통해 표출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4·19혁명이 민족 문제 해결의 기본적인 이념을 제시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정치적·사회적 구조 변혁에까지는 그 영향이 미치지 못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4·19혁명 정신이 정치적·사회적 변혁과 연결되지 못하고, 사회적 혼란이 지속되던 상황에서 5·16군사정변이 발생했으므로 학생청년운동은 일단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군사 정권이 1964년 6월 3일 한일회담을 재개하면서 학생들은 한일회담 반대운동으로 그들의 4·19혁명 정신을 연결시켰다.
결국, 1960년대 학생청년운동의 핵심은 학원의 민주화, 신생활운동, 민족통일 반외세, 한일회담 반대로 이어졌고, 그것은 근본적으로 반외세 민족주의와 반독재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는 곧 분단 민족의 문제 해결은 외세가 자국의 이익을 우선으로 한반도정책을 구사하는 한, 그리고 외세와 결탁한 국내 독재 정권을 타파하지 못하는 한 진정한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학생청년운동의 정신은 1970년대로 연결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의 학생청년운동은 분단 민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또 다른 영역, 즉 노동자·농민을 지원하고 민중과 연계된 운동의 단초를 마련한 것이 특징이다. 반외세 민족주의와 반독재 민주주의를 운동의 기본 이념으로 삼고, 민중과 연계된 학생 청년들의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박정희(朴正熙) 정권은 긴급조치라는 제도적 탄압장치를 강구하게 되었고, 이러한 박정희 정권의 지속적인 탄압과 긴급조치는 결국 부마사태와 10·26사태를 초래하게 되었다.
10·26사태로 박정희 정권이 붕괴되고 전두환(全斗煥)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의 집권 과정에서 발생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1980년대 청년운동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1980년대 초기의 몇 년간은 정부의 탄압으로 학생청년운동이 적극 표출되지 못하였으나, 점차 운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정부의 탄압으로 각 대학교에서 제적된 학생들이 노동계에 진출하면서 청년운동과 노동운동이 접목되어 연대투쟁을 벌이게 되었고, 사회 전반에 걸쳐 민주화의 욕구가 팽배해지면서 정치권의 변화와 함께 통일운동도 병행되었다. 이러한 민주화는 출판·문화 운동과 함께 사회 저변으로 확대, 심화되어 가고 있다.
청년운동의 내용이나 표현방법의 연대별 차이점을 보면, 1960년 초에 태동한 4. 19유산이라고 일컫는 사회운동의 이념들 중 1970년대를 거치면서 청년운동은 민주주의 지향적인 성격을 강화시켰고, 후반에 이르러서는 국제관계(특히 미국과 일본에 의존된 한국의 경제 상황)에 대한 동의의 변화, 즉 ‘자주’와 민족의 독립성을 강조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 근대화 과정이 조화된 주체적 사회 발전을 지향하였다.
1980년대에는 국가 자체의 성립과 형성 과정에 대한 정당성 문제가 제기되면서 반민주주의에 대한 대항, 이론투쟁의 강화, 그리고 노동운동과의 연대를 통한 대중운동노선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청년운동의 방향을 보면, 첫째 ‘혁명적 주체’와 ‘청년학생운동의 역할’에 대한 재검토와 자기 반성이며, 다른 하나는 극도의 정치적 억압을 극복하기 위해 고도의 이념화된 사회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사회 제 영역에서 정부의 적극적인 정화작업이 진행되는 가운데에서도 권위주의적 정권에 능동적으로 대항한 집단은 유일하게도 학생청년운동이었으며,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서 이들은 동원 가능한 유일한 변혁 세력으로 자신들을 규정하고 ‘전국민주학생연맹’과 ‘전국민주노동자연맹’과의 연계(1980년 9월)를 통한 사회운동을 전개했으며, 그 결과 1985년 구로공단에서 2,000여 명의 학생운동 출신 직업활동가들에 의한 대대적인 ‘구로공단노동운동’이 가능했다.
당시의 대학은 이성의 보루이자 학문의 중심지가 아니라 이데올로기 생산의 주체이며 정치적 투쟁의 중심지로 자리하였다. 특히 1980년대 사회운동의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했던 학생들은 스스로를 계급을 초월한 전위 세력(Avandgarde)으로 규정하고, 1986년부터는 더 정교하고 광범위한 급진적인 이론작업을 시도한다.
그 배경을 보면 한국의 독특한 역사적 경험과 주체사상에 근거한 NLPDR(National liberation peoples’ democracy revolution)과 엘리트주의와 러시아 사회주의에 침잠했던 CA(Constituent Assembly)노선의 대립 속에서 이론적 논쟁의 가열화를 경험하는데, 그들 두 입장의 공통점을 보면 ‘자본주의의 부정’과 ‘민족에 대한 지향’을 들 수 있다. 1985년 5월의 인천사태와 1986년 10월 건국대학교에서의 농성사건, 그리고 미국 문화원 점거 등은 이를 반영하는 대표적인 하나의 예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금기시되어 왔던 미국의 영향력이나 주한 미군 그리고 한·미 군사협력에 대해, 또한 한국의 자본주의적 질서에 대해 학생운동권에서 문제점을 제기하기 시작하면서 극단적인 항의 행위방법을 동원하였다.
이와 같이 재야 및 학생운동은 1987년 6·29선언을 유도해 내는 데 선두적 역할을 담당했지만 ‘경제성장’, ‘반공’ 그리고 ‘안정’ 등 국가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사회의 진보 세력을 주변 세력화하는 데 성공한 듯 보이며, 그 결과 도시 중산층의 정치적 무관심, 노동운동가들의 이중의식, 소비지향적 물신주의, 가치관의 혼재, 이기주의와 개별화 등은 1990년대 초 한국 사회를 특징지울 수 있는 일반적 현상으로 볼 수 있다.
1980년대 말까지의 청년운동은 체제 내적 개혁을 목표로 하면서 한국의 사회적 이상형을 모색하려는 다각도의 실험적 노력으로 보인다.1980년대의 한국 사회는 2·12선거, 헌특위, 지방자치 등 정치권의 변화 예보, 이산가족 재회, 남북대화,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선언,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경기대회, 1987년 대통령선거 등 갖가지 사회적 변화양상을 보여 기존의 이론적 준거틀로는 분석, 설명, 예측할 수 없으리만치 극심한 혼란을 빚어냈고, 이에 민감한 학생청년 집단은 새로운 준거틀로 가치 형성을 모색하게 되었다.
특히 독일 베를린 장벽의 붕괴에서 시작된 동구 사회주의권의 몰락 및 그로 인한 동서 이데올로기의 해체에 따라 한국의 학생청년운동은 기존의 운동 방향과 내용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더욱이 1992년 문민정부가 들어선 데 이어 1997년 국민의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강력한 반체제운동의 성격을 띠던 1980년대까지의 학생청년운동의 위상은 축소되는 가운데 한편으로는 통일 문제, 수입개방 반대, 환경 문제 등 이전에는 주목받지 못하던 부문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역 주민의 생활에 기반한 새로운 청년운동, 즉 지역청년운동이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지금까지의 학생청년운동은 획일주의의 거부, 독재체제 거부를 통한 민주주의의 진전을 위한 분위기조성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지나치게 중앙으로 집결된 국가기구의 기능을 축소 내지는 분산시키고 극도로 위축된 사회를 소생, 팽창시킴으로써 민주주의의 강점, 말하자면 사회의 다양한 요구를 내외부의 억압이나 힘의 통제를 가하지 않은 채 표출시킬 수 있고 어느 집단이든 권력에 대한 가능성에 접근할 수 있어 극단적인 분열현상이 통제될 수 있는 사회적 갈등의 제도화를 확립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의 구성 단위가 스스로의 이익과 주장을 표출, 조절, 타협할 수 있는 유기적 의존관계를 형성하게 된다면 자본주의 역시 바람직한 방향으로 성숙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