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석빙고 ( )

청도 석빙고
청도 석빙고
건축
유적
국가유산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면에 있는 조선후기에 축조된 얼음 저장 창고. 석빙고.
국가문화유산
지정 명칭
청도 석빙고(淸道 石氷庫)
분류
유적건조물/정치국방/궁궐·관아/관아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보물(1963년 01월 21일 지정)
소재지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동천리 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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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면에 있는 조선후기에 축조된 얼음 저장 창고. 석빙고.
개설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1713년(숙종 39) 박상고(朴尙古) 등이 축조하였으며, 남한지역에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석빙고이다.

역사적 변천

『삼국유사』권1 제3노례왕(第三弩禮王)조에 따르면, 신라 제3대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재위 24∼57년)대에 처음으로 얼음 저장 창고(藏氷庫)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것으로 볼 때, 얼음을 저장하기 위한 창고를 지은 역사는 상당히 올라간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반빙제도(頒氷制度)와 조선시대의 장빙제도(藏氷制度)는 삼국시대 이래로 지속적으로 얼음을 저장하여 사용한 사실을 뒷받침하며, 빙고(氷庫)가 폐지된 것은 1898년(광무 2)이다.

빙고는 얼음이 가장 두꺼운 겨울에 얼음을 채취해 저장하였다가 여름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한 시설이다. 조선 초기까지는 나무로 만든 목빙고(木氷庫)가 많이 만들어졌지만 그 이후에는 돌로 만든 석빙고(石氷庫)가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현재 남한지역에는 6개의 빙고가 남아 있는데, 모두 석빙고이며 축조시기도 조선 후기로 내려온다.

내용

청도 석빙고의 앞에는 작은 비석이 서 있는데, 비석의 앞면과 뒷면에 석빙고의 축조와 관련한 내용이 새겨져 있다. 앞면에는 2월 11일에 석빙고를 짓기 시작하여 5월 5일에 일을 마쳤으며, 석빙고를 짓기 위해 5,451명이 하루씩 동원되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또한 석빙고를 축조하기 위해 시우쇠(正鐵) 1,438근(斤)과 회(灰) 384석(石)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뒷면에는 계사(癸巳)년 5월 초6일에 석빙고를 세웠고 박상고(朴尙古, 1654∼1718) 등이 석빙고의 축조를 담당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박상고의 활동연대를 통해 석빙고를 세웠다는 계사년이 1713년(숙종 39)임을 알 수 있다. 청도 석빙고는 남한지역에 현존하는 석빙고 가운데 축조연대가 가장 이른 것이다.

현재 청도 석빙고는 봉토와 천장이 완전히 유실되었고 천장과 봉토를 지지하기 위한 아치형태의 구조물인 홍예(虹霓)와 바닥시설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이로 말미암아 다른 석빙고와 달리 내부를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다.

청도 석빙고는 서향으로 배치되어 있고 얼음을 저장했던 빙실(氷室)의 평면구조는 장방형이다. 빙실의 크기는 14.85×4.76m이고 빙실 바닥에서 홍예까지의 높이는 가장 높은 곳이 4.22m이다. 봉토가 유실되어 출입구의 형태는 알 수 없다. 빙실로 내려가려면 전체 1.9m에 이르는 9개의 계단을 통해야 하는데, 현존하는 석빙고 가운데는 빙실을 가장 깊게 조성하였다. 계단 부재에 양 끝에 문지도리 홈자국이 남아 있다는 것을 통해 양쪽에서 여닫는 문이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빙실의 바닥은 깬돌(割石)을 깔아 편평하게 다졌으며 입구인 서쪽을 동쪽에 비해 조금 높게 하여 5° 가량 경사를 지게 하였다. 바닥의 중앙에는 배수로를 설치하여 얼음이 녹으면서 생긴 물이 외부로 빠져나가도록 설계하였다.

빙실의 벽체를 이루는 무사석(武沙石)은 다양한 크기의 자연석을 이용해 1.772.09m 높이까지 수직으로 쌓았다. 그 위에는 병렬로 4개의 홍예를 틀어 올렸는데, 홍예는 1921개의 다듬은 돌(鍊石)을 이용해 아치형태로 쌓았다. 현재 홍예와 홍예 사이에 걸친 장대석(長臺石)이 일부 남아 있고 석빙고 주변에 다수의 장대석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홍예와 홍예 사이에 장대석을 걸치는 형태로 천장을 마감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아울러 다른 석빙고와 비교해 볼 때, 청도 석빙고 역시 천장에는 환기 구멍을 두어 통기(通氣)가 가능하도록 하였으며, 천장 외부는 회를 일정한 두께로 시공한 다음 표면은 흙을 덮어 마무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징

청도 석빙고는 동천(東川)으로 불리는 작은 하천에서 불과 50m 가량 떨어진 지점에 위치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석빙고의 석재를 분석한 결과 크게 안산암류와 화강암류로 이루어진 사실이 확인되었는데, 이러한 암석은 석빙고 남쪽에 위치한 화악산 일대에서 쉽게 관찰된다. 따라서 청도 석빙고는 동천에서 채취한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화악산 일대에서 석재를 운반해 축조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청도 석빙고는 빙실의 평면이 장방형이라는 점을 비롯해 홍예와 장대석을 이용한 천장 마감, 빙실 내부의 배수를 위해 경사진 지형을 활용한 점 등 구조적인 면에서 다른 석빙고와 공통된다. 그러나 다른 석빙고의 무사석이 장대석으로 되어 있는 것과 달리, 청도 석빙고는 자연석을 이용하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의의와 평가

청도 석빙고는 현존하는 석빙고 가운데 시기가 가장 올라갈 뿐만 아니라 정확한 축조연대가 밝혀졌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빙고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다른 석빙고와의 비교를 통해 빙실의 규모에 따라 설계 때부터 빙실을 설치할 지하의 굴착 깊이, 천장의 두께 등을 조절하여 효과적으로 얼음을 저장할 수 있도록 고안된 사실도 밝혀졌다. 이러한 점은 청도 석빙고가 과학적으로 설계되었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조선 후기 과학기술의 우수성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오산지(鰲山志)』
『석빙고의 장빙원리와 자연에너지 활용기술』(이찬희, 국립중앙과학관, 2011)
『청도군지』(청도군, 1991)
「현존 석빙고의 규모와 형식」(김왕직, 『건축역사연구』22-2, 2013)
「조선후기 석빙고 홍예구조와 조성방법 연구」(김상협·조현정·김왕직·김호수·정성진·김덕문, 『대한건축학회논문집(계획계)』29-11, 2013)
「석빙고고」(손영식, 『건축역사연구』2-2, 1993)
관련 미디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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