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화보(和甫). 최홍재(崔弘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호(崔灝)이고, 아버지는 필선 최유종(崔有悰)이며, 어머니는 허조(許稠)의 딸이다.
1460년(세조 6) 생원으로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간원정언에 제수되고, 1462년 경연에서의 뛰어난 강서(講書)로 가자(加資)되었다.
1464년 시(詩)·문(文)·사(史)에 능한 문신을 뽑을 때 시학문에 소속되고, 그 해 병조좌랑 재직중 사헌부로부터 “비목(批目)을 서리에게 위임시켜 무단히 출거(出去)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고신(告身)을 박탈당하였다.
1466년 지평으로 복직하고, 그 해 실시한 발영시(拔英試)에서 2등으로 합격하였다. 1469년(예종 1) 예문관전한에 승진되고, 곧 부응교 겸 경연시강관에 개수(改授)되면서 춘추관편수관이 되어 『세조실록』·『예종실록』의 편수에 참여하였다.
1475년(성종 6) 봉상시부정(奉常寺副正), 이듬해 문과중시에서 2등으로 급제하였고, 1477년『율려신서(律呂新書)』를 학습할 문신으로 선임되었다.
1479년 홍문관직제학으로서 연산군의 생모인 정현왕후(貞顯王后)의 폐위에 강력히 반대하였고, 곧 부제학으로 승진하였다가 주병(酒病)으로 죽었다. 기개가 높고 시명이 있었으며, 세조 말∼성종 초에 걸쳐 문한직(文翰職)에 있으면서 문운 융성에 공헌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