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1983. 평안남도 대동 출신. 어려서부터 축구에 재질을 보였으며, 평양 종로국민학교와 평양 체신전문학교를 다니면서 배구·축구 선수로 이름을 날렸다. 1·4후퇴로 남하하여 육군특무부대인 CIC팀에 입적하였으며, 김용식(金容植)에 의해 대표선수로 발탁되어 1952년부터 10여 년간 국가대표선수로 활약하였다.
1962년부터는 육군방첩부대 축구단 코치로, 또는 국가대표급 선수로 망라된 양지(陽地)팀(1966∼1969) 및 국가대표팀 감독(1976∼1977)으로 축구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국가대표선수 중 최장신으로 제공권(制空權)을 독점하다시피했으며, 체력면에서도 주력이 뛰어나 육상선수에 도전할 만한 준족(駿足:빠르게 잘 달리는 사람)을 지녔다.
국제적으로는 걸음마 단계였던 1950년대 한국 축구를 아시아의 강자로 승격시키는 데 큰 몫을 한 그에게 ‘아시아 황금의 다리’, ‘동양 제일의 다리’ 등의 별명이 붙었으며, 일본·홍콩·동남아시아 등 가는 곳마다 아시아 축구팬의 동경을 한몸에 모았다.
24회에 걸친 해외 원정 중 70여 점을 득점한 그는 철저하고도 피눈물나는 체력관리로 자신을 키웠다. 날마다 이른 새벽에 남모르게 로드워크를 하거나 등산로 또는 운동장에서 크로스컨트리 연습에도 열중했으며, 팀 훈련이 끝나면 자신의 보충 트레이닝은 물론 후배들의 개인 지도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우리나라가 1954년 마닐라아시아경기대회와 1958년 동경아시아경기대회, 1956년과 1960년의 제1회 및 제2회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를 연거푸 우승한 것은 주전 골게터였던 그의 뛰어난 활약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은퇴 후 경평전(京平戰)에 평양축구팀 대표로 또는 조기축구회를 통하여 축구 저변화에 기여하였다. 대한축구협회 이사를 역임했으며, 1983년 10월 인천전국체전에 출전한 이북5도 대표팀의 감독으로, 입원중임에도 불구하고 몰래 빠져 나와 선수들을 독려, ‘볼과 함께 살다간’ 일화를 남기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