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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탑골공원(─塔─公園)

인문지리문화재 | 지명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에 있는 서울 최초의 근대식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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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명서울 탑골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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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에 있는 서울 최초의 근대식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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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탑공원·탑동공원(塔洞公園)·파고다공원이라고도 불린다. 조선시대 원각사터에 세운 서울 최초의 근대식 공원으로 1991년 사적 제354호로 지정되었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일제에 항거하는 민족봉화의 불이 붙여진 유서 깊은 곳이다.
고려시대에는 흥복사(興福寺)라는 사찰이 있었던 곳으로 1464년(세조 10) 불교에 대한 신앙심이 깊었던 세조가 원각사(圓覺寺)로 개명하고 중건하였는데, 이 공사를 위하여 동원된 군사는 2,100인이었고, 13인의 부장이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근처의 가옥 200여 호를 철거하여 3년 후에 완공된 사찰의 규모는 굉장한 것이었고 도성 안 제일의 대가람이었다. 원각사는 당우나 문루의 규모도 대단한 것이었지만, 특히 전국에서 동 5만 근을 모아 주조한 대종과 1468년에 완성하여 그 안에 석가여래의 분신사리와 새로 번역한 원각경을 안치하였다는 10층석탑이 있었다.
비교적 숭불정책이 시행되던 것이 성종 때 들어와서는 철저한 억불정책으로 바뀌었고, 그것은 연산군대에 들어가서는 더욱 가혹하여졌다. 원각사를 철거하자는 논의는 1504년(연산군 10)에 시작되었지만 당장에는 철거하지 않았고, 그 대신 기생과 악사를 관리하는 장악원(掌樂院)을 이 자리에 옮겨 전국에서 뽑아 올린 기생 1,200여명과 악사 1,000명, 감독 40명이 기거하는 연산군의 기생방이 되었으며, 그 이름도 연방원(聯芳院)으로 바뀌었다.
연산군이 실각한 뒤 이 건물은 잠시 한성부 청사의 일부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514년(중종 9) 호조에서 원각사의 재목을 헐어 여러 공용건물의 영선에 쓸 것을 계청하자, 왕이 이를 허락한 뒤 얼마 안 가서 이 사찰건물은 그 자취를 감추어 버렸고, 비와 10층석탑만 남아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명칭 유래
탑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이 일대가 탑골 또는 탑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파고다라는 이름의 유래에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즉, 이곳을 공원으로 설계하여 꾸미도록 건의한 영국인 브라운이 ‘탑이 있는 공원’이라는 뜻에서 파고다공원(Pagoda Park)으로 부를 것도 같이 건의하였을 것이라는 설과, 백탑(Pagtab)이라는 음이 변화하여 파고다가 되었다는 설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형성 및 변천
탑골공원이 언제 공원으로 개설되었는지에 관하여서는 정설이 없다. 『조선왕조실록』·『일성록(日省錄)』 등의 관찬기록에는 물론이고, 그 밖의 사료에도 전혀 그에 관한 기록이 전하여 오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파고다공원이 이 땅에 최초의 공원이고 1897년 총세무사 브라운의 건의에 의하여 꾸며졌다”는 기록은 적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일본인이 저술한 『경성부사』 제1권에 “고종시대 광무 초년에 …… 실로 경성에 있어서의 최초의 공원”이라고 기술된 것이 1897년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공원으로 둔갑하여 버린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최초의 공원은 인천 각국공동조계 안에 1889∼1890년에 개설된 만국공원이며, 파고다공원이 총세무사 브라운의 건의로 개설되었다면 그것은 아마도 1896년이나 그 전해인 을미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광무 초년, 즉 1897년 하반기에는 총세무사 브라운은 그 자리에서 해고당한 뒤여서 공원개설을 건의할 겨를도 없었고, 그러한 권한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공원이 된 당초에는 공지에 간단한 울타리를 두르고 수십그루의 나무를 심고 벤치를 갖추어 놓은 정도로 출발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1910년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공원의 관리권도 총독부로 넘어갔고, 총독부에서는 매년 평균유지비 2,171원 50전씩을 투입하여 정자·의자·화단·연못·회유도로·전등·수도·온실 등의 시설을 하였으며, 벚나무와 상록수를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한국군의 군악대를 조직, 육성하기 위하여 독일인 에케르트(Eckert, F.)가 내한한 것은 1900년 가을이었는데, 그 해 「군악대설치령」이 공포되었다. 파고다공원 서쪽 부지 일부에 군악대건물이 세워져 군악대가 이곳으로 옮겨 온 것은 1902년이었다.
1907년 7월 통감부의 명령으로 이 군악대가 해산되자, 이 건물은 폐옥처럼 방치되다가 1919년 9월부터는 경성도서관으로 사용되었다. 광복 이후까지 파고다공원의 면적은 1만 1,003㎡이었으며, 도서관 부지는 1,637㎡이었다.
탑골공원이 우리 민족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정신적 재산인 것은 이곳이 3·1운동의 발상지라는 점이며, 일제강점기에 시민들이 울적하여진 심정을 달래기 위하여 으레 이 공원을 찾았다고 한다.
광복 직후의 사건으로 특기할 것은 땅에 내려져 있던 백탑 상층 3개 층을 들어올린 일이다. 상층 3개 층이 땅에 내려앉게 된 원인에 관하여서도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탑을 일본으로 가져가려다가 3층까지 내리고는 너무 무거워서 그냥 두었다는 설과, 연산군이 한창 폭정을 할 때 창덕궁에서 내려다보면 탑의 상층부 3개 층이 반드시 눈에 띄는 것이 싫어서 내려놓았다는 설 등의 견해가 있으나, 모두 정설이 되지 못하고 있다.
상층부 3개 층은 1946년 2월 17·18일 양일간 당시 우리나라에 진주하여 있던 미24사단 소속의 공병대에 의하여 기중기로 상층에 올려지면서 원상태로 복원되었다. 이 공사 때에는 장안의 구경꾼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1967년에 시작한 이 지역의 재개발사업으로 종로도서관은 사직공원 옆으로 신축, 이전되었으며, 공원 서편에는 파고다아케이드라는 상가를 만들어 그 모습을 크게 바꾸었으나, 1980년대 초 이 아케이드는 철거되고 공원 내외부가 말끔히 단장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현황
현재 공원의 면적은 1만 5,720.9㎡이며, 경내에는 보물 제3호인 원각사비가 옛 모습 그대로 자리하고 있다. 이 밖에 3·1운동의 대표자 손병희(孫秉熙)의 동상과 1966년 5월에 제막한 높이 10m의 3·1운동을 묘사한 부조 등이 있다.
서울시내 공원 중에서 최초로 유료공원이 되었는데, 유료공원으로 지정된 이유는 공원이 서울 도심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이용자가 폭주하여 시설이 훼손될 염려에서였다. 1988년 시민의 휴식을 위하여 무료로 개방되었다. 민족정기의 산 교육장으로, 근대도시공원으로 지난날의 침침한 때를 벗고 활기찬 시민공원으로 되었으며, 파고다공원으로 불리던 것이 1991년 10월 11일 탑골공원으로 명칭을 확정하였으며, 2011년 7월 28일 ‘서울 탑골공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손정목
영역닫기영역열기 관련 멀티미디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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