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기 ()

서울 암사동 출토 빗살무늬토기
서울 암사동 출토 빗살무늬토기
선사문화
개념
점토를 반죽하여 500℃ 이상의 고온에서 소성하여 만든 용기.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점토를 반죽하여 500℃ 이상의 고온에서 소성하여 만든 용기.
개설

지금으로부터 1만 2천년 전에 발명된 토기는 전 세계 각지에서 사용된 인류의 가장 보편적인 생활용기의 하나로서 인류 문화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빙하기가 끝나고 자연환경이 바뀌면서 인류의 생활내용도 급속한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데,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정착생활과 농경의 시작이다. 정착생활과 농경의 시작은 그것을 가능하게 한 공구와 도구가 제작되면서부터이다. 마제석기가 움집을 짓고 황무지를 개간하는 공구이었다면, 수확한 생산품을 저장하고 운반하며 조리하는 도구는 토기이었다. 자연환경이 바뀌면서 인류는 식물성 식료에 의존하는 비율이 전보다도 훨씬 높아졌고, 새로운 식물의 개발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토기의 발명으로 날 것으로 먹거나 구워서 먹는 방식에서 벗어나 음식물을 삶거나 쪄서 먹는 것이 가능하게 되어 날 것 또는 구울 수 없는 동·식물의 섭취가 가능하였다. 이것은 인류가 더 많은 자연물의 섭취를 가능하게 하였으며, 음식물의 메뉴를 증가시키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음식물을 연하게 하여 보다 쉽게 먹을 수 있고, 위의 소화능력을 향상시키게 되었다.

토기는 음식물의 조리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우물에서 물을 담아 부엌이나 일터까지 옮기거나 담아둘 수 있어 메마른 곳에서도 식수의 공급이 가능하게 되어 인간의 활동공간의 확장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토기는 물 이외에도 곡물·장신구·공구·옷 등의 안전한 저장과 운반도 가능하게 하였다. 그리고 토기에 여러 가지 무늬를 새기거나 장식품을 매단 토기를 만들어 제사나 성인식·혼례식 등의 물품으로도 활용되었다. 이와 같이 토기의 발명, 그리고 여러 가지 형태로의 분화는 토기제작 기술의 발달과도 궤를 같이하면서 동시에 사용 목적의 차이, 나아가서는 사회발전을 나타내는 지표가 된다.

토기 발명에 관한 제설

흙으로 만든 용기 즉 토기는 후기구석기시대인 지금으로부터 1만 2천년 전에 러시아령인 시베리아와 연해주, 중국의 황하와 양자강유역, 일본열도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출현하였다. 여러 지역에서 출토되는 토기가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하였는지, 아니면 어느 특정 지역에서 등장하고, 그것이 인근지역으로 전파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하지만, C14연대측정의 결과 거의 같은 시기에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는 현상을 중시하여 몇몇 지역에서 동시에 진행된 현상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토기제작은 점토를 가열해서 물에 용해되지 않는 소성물로 변화시키는 것으로써, “이것이야말로 확실히 인류가 화학적 변화를 응용한 최초의 사건이었다”고 평가할 만큼 인류의 획기적인 발명품이었다. 그런데 이 획기적인 발명품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에 대한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 몇몇 지역의 발굴조사와 민속지적 사례 등에 근거해서 몇 가지 가설이 제시되어 왔다.

첫째, 빵 만들기에서 힌트를 얻어 토기가 만들어졌다는 가설이다. 즉 소맥분에 적정량의 물을 붓고, 반죽하고, 띄우고, 성형하고, 최종적으로 굽기까지의 작업공정의 순서가 토기제작 과정과 일치하는데, 그것이야말로 토기발명의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 한다. 이와 비슷한 설로는 나무 열매를 분쇄하고, 물을 섞어 반죽하고 성형해서 굽는다고 하는 조리법이 계기가 되어서 토기제작의 출현을 재촉하였다는 설도 있다.

둘째, 토기가 발명되기 이전 시기에 주거지 바닥 일부를 파고 그 안에 점토로 만든 벽에 서서히 열을 가하여 점토가 굽히게 되어 그 형상이 마치 토기와 유사한 모습이었는데, 이것에 힌트를 얻어 토기가 발명되었을 것이란 가설이다. 이는 이라크의 간지다레유적에서 그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토기와 함께 화재를 입은 주거의 바닥에 점토로 만든 저장구덩이가 마치 토기의 모습을 띠고 있었는데, 화재 당시 불에 달궈진 점토 저장구덩이가 토기발명의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셋째, 앞의 가설과 달리 환경 및 생업경제의 변화와 토기의 이용에 대한 설이 제시되었다. 지금으로부터 1만 3천년경을 경계로 해서 급격한 온도상승을 수반한 기후의 온난화가 시작되면서 순록의 급격한 소멸, 삼림의 출현, 호수 등의 내수면(內水面)의 확대현상이 나타났다. 1만 3천년경 전에 유라시아 동부지역에 초현하는 토기도 기본적으로는 이와 같은 해빙기(급격한 온도상승의 시기부터 완신세로 될 때까지의 3000년 혹은 5000년간)의 기후변동과 그것에 수반한 식생·동물상 등 환경의 변화에 대응한 인류 적응의 결과로 추정된다. 즉 물로 삶거나 끓여 먹을 수 있는 식물의 범위가 넓어졌다든지, 이 시기의 유적에서 견과류의 출토 양이 눈에 띄게 증가하는 현상은 떫은맛이나 쓴맛을 우려내는 기술의 개발에 의한 밤·도토리·호두 등 견과류의 떫은맛이나 쓴맛을 우려내어 식료로 이용하거나 또는 식물의 이용을 중심으로 한 토기사용이란 가설도 가능하다.

이상으로 토기발명의 동기에 대한 몇 가지 가설을 살펴보았는데, 어떤 가설이 전적으로 맞거나 틀렸다고는 할 수 없으며, 해당지역의 환경적 요인 또는 생활의 지혜가 결부되어 토기가 발명되었다고 할 수 있다.

토기 제작과정과 기술

점토는 500℃ 이상의 열을 가하면, 점토 속에 있는 수분이 증발하여 흙 용기가 되는데, 점토에서 흙 용기로 되는 과정은 바탕흙의 선택과 반죽, 성형(형태 만들기), 문양·장식하기, 말리기, 굽기 등 일련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바탕흙의 기본재료는 진흙이며 여기에 석영·장석·운모가 혼입된 모래를 섞기도 한다. 물과 함께 반죽한 뒤 형태를 만드는데, 그것을 성형이라 한다. 성형은 도공이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디자인을 점토로 표현하는 작업이다. 해당 시기의 토기의 종류는 성형에서 모두 결정되는 만큼, 토기제작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과정이다. 그리고 성형기술은 토기의 형태를 결정하는 만큼 토기제작 기술의 진보를 나타낸다. 성형기술의 차이에 따라서 표현되는 토기의 종류도 달라지며, 또 생산되는 수량에도 많은 차이가 있다.

토기의 형태는 크게 보아 발형토기(鉢形土器)→옹형토기(甕形土器)→호형토기(壺形土器)→병형토기(甁形土器)로의 변화를 보여 왔으며, 이와 같은 형태의 변화는 곧 토기 성형기술의 진보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또 시대와 시기에 따라서 토기의 종류가 다양해지는 것은 토기 성형기술의 발달에 힘입은 바가 크며, 그것은 곧 토기의 용도가 다양해졌음을 의미한다. 토기의 형태를 만드는 방법은 손빗기·테쌓기·띠쌓기, 띠쌓기 후 회전판의 회전력을 이용한 형태 만들기, 녹로의 원심력을 이용한 뽑아올리기 등이 있다. 형태가 만들어지면 나무주걱이나 박자로 두드리거나 빗질 또는 물손질로 겉면을 다듬고 여러 가지 무늬를 새기거나 새기지 않은 상태에서 그늘에 말린다. 직사광선에서 급하게 말리면 토기의 모양에 변형과 뒤틀림을 가져오므로 그늘에서 충분히 말린다. 그 후 불에 구우면 토기가 된다.

토기와 도기

가소성(可塑性)이 있는 점토는 섭씨 500℃ 이상으로 가열하면, 점토의 수분이 이탈(화학변화)하여 흙의 성질을 잃어버리고 다른 물질로 바뀐다. 토기는 점토로 형태를 만들어 말리고, 불을 지펴서 구운 것이다. 온도가 200℃가 되면 점토의 결정과 결정 사이에 있는 수분이 증발하고, 500℃ 이상이 되면 점토의 결정 속에 있는 수분이 증발된다. 그리고 그보다 높은 열을 받게 되면, 점토 중의 탄소가 산화되고, 탄산염과 유산염이 분해되어서 건조된 점토와는 다른 질인 토기가 된다. 토기의 바탕흙인 점토의 차이와 가마의 구조에 따른 열의 강약 등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토기의 질은 서로 다르다.

입자가 거친 암석이 풍화된 점토를 바탕흙으로 사용하고 막음장치가 없는 가마에서는 보통 700∼850℃의 열을 올릴 수 있다. 이런 조건 하에서 만들어진 토기가 선사시대의 빗살무늬토기·민무늬토기와 초기철기시대 및 원삼국시대와 삼국시대의 연질토기이며, 구울 때 산소가 차단되지 않아 붉은색을 띤다.

암석의 풍화토가 자연적인 현상에 의해서 다른 곳으로 옮겨져 입자가 아주 고운 점토를 바탕흙으로 사용하고, 막음장치가 있는 가마에서 굽게 되면, 표면이 회색 또는 회흑색·회청색을 띠는 토기가 만들어진다. 고운 점토와 막음장치가 있는 가마에서 굽혔다고 하더라도 얼마만큼의 열을 받고, 그 열에 견딜 수 있는 바탕흙에 따라서 토기의 질도 다르게 된다. 바닥이 수평을 이루는 가마의 경우, 올릴 수 있는 열의 온도는 보통 850∼950℃이며, 이 온도에서 굽힌 토기가 와질토기이다. 850∼950℃에서는 바탕흙에 들어 있는 산화알루미늄(Al2O2)이나 규산(SiO2) 등이 용융되지 않으므로 토기 표면에 피막이 형성되지 않아 손을 대면 표면이 묻어난다. 이 와질 소성의 토기는 중국의 경우, 신석기시대 후반부터 만들어졌고, 우리나라에서는 중국 한나라의 도기를 수용한 낙랑도기의 영향을 받아 서기전 1세기 후반부터 생산되었다. 이 와질토기는 원삼국시대의 취사와 저장 용기와 분묘 부장품, 제사 용기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토기를 굽는 가마가 경사가 있는 산의 구릉으로 옮겨가면서 경사진 터널식의 가마가 등장하여 1100℃ 이상의 높은 온도를 낼 수 있었다. 경사 각도가 있는 가마의 설치와 1100℃의 높은 온도에서 견딜 수 있는 바탕흙의 사용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온도가 1100℃ 이상 오르면, 바탕흙 속에 들어 있는 산화알루미늄과 규산이 견고한 결정으로 바뀌면서 부피가 줄어들면서 도질토기가 만들어진다. 도질토기는 우리나라의 삼국시대와 일본열도의 고훈시대〔古墳時代〕에 생산된 아주 특이한 토기질이다. 도질토기는 서기 3세기 후반에 낙동강 하류지역에서 생산되기 시작하여 4세기 초에 가야는 물론 백제와 신라에서도 생산되고, 이후 점진적인 기술의 발전을 맞이하면서 통일신라시대까지 생산되었고, 고려로 진입하면서 도기로 대체된다. 도질토기는 바탕흙 속에 있는 산화알루미늄과 규산 등이 용융되면서 점토 밖으로 흘러나와 토기의 표면에 피막을 형성하는데, 그것을 자연유라 한다. 표면에 피막이 형성되어 표면이 묻어나지 않고, 아주 단단하고, 반짝거린다.

토기문화가 가장 발전한 삼국·통일신라시대에 입자가 고운 점토를 바탕흙으로 사용하고, 인공 유약을 만들어 표면에 덧바르는 연유도기(鉛釉陶器)가 고급 용기로 생산 소비되었다. 연유도기는 바탕흙에 모래 또는 돌 알갱이가 거의 들어있지 않는 아주 고운 점토로 형태를 만들고 말린 후, 900℃ 내외에서 1차로 굽는다. 초벌구이 때, 온도가 지나치게 상승해버리면 표면이 단단해져 유약의 용착이 어렵다. 초벌구이가 된 도기는 표면 색상이 백색 또는 회백색을 띠며, 표면이 손에 묻어나기도 한다. 초벌구이한 도기에 인공으로 만든 유약을 바르고 가마에 넣어 800∼850℃로 온도를 올려 굽는다. 도기에 사용된 유약은 연유계통으로 800∼850℃의 열을 받으면, 유리질화 되어 표면에 피막이 형성된다. 900℃ 이상의 열을 받게 되면, 연유는 소결되어 버린다.

이 연유도기는 중국의 경우, 전국시기(戰國時期)부터 생산되고, 이후 자기의 보조적인 역할을 하면서 지속되었고, 당나라 시기에 당삼채(唐三彩)라는 시유도기(施油陶器)의 발전기를 맞이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4세기 후반에 고구려에서 생산되었으며, 6세기에 들어오면 백제에서도 생산되기 시작하였다. 신라에서는 7세기 초에 생산되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인 8세기대에는 도기의 생산량이 증대되었다. 삼국시대의 연유도기는 중국 도자기의 기술을 수용하여 도질토기 제작기술 및 형태 등의 전통기술과 융합하여 만들었다.

기능과 용도

토기의 종류로는 옹·발·시루·항아리·항아리받침대·굽다리접시·컵형 토기 등 매우 다양할 뿐 만 아니라, 인간 생활의 진전에 따라 해당 시기에 사용되는 종류와 형태도 매우 다양하다. 선사시대에는 토기의 질이 동일하였으나 역사시대가 되면서 질이 다른 토기가 생산되었다. 질이 다른 것은 곧 토기의 바탕흙이 다름을 나타내며, 또한 가마의 구조 및 굽는 온도의 차이를 나타낸다. 나아가 토기의 질에 따른 토기의 용도에도 차이가 나타나게 된다. 뿐만 아니라 토기의 종류가 많아지는데, 그것은 토기의 기능이 분화되었기 때문이다. 토기의 기능이 분화되었다는 것은 생활의 내용이 더욱 더 윤택해졌음을 나타낸다.

토기의 기능과 용도는 같을 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다를 수 있다. 기능은 시각적인 느낌과 용량 등에 의해서 판단될 수 있다. 발·옹·호·고배 등의 용어는 기능을 고려해서 붙여졌다. 용도는 실제의 사용 장면에 의해 구분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발 또는 옹에 곡물이 담겨 있을 경우, 그것을 저장용 토기라 할 수 있고, 부뚜막 위에 놓여 있거나 또는 그 옆의 장소라든가 숯 또는 재가 있는 곳에서 출토되었거나 음식물을 끓인 흔적이 남아 있으면 자비용(煮沸用) 토기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토기의 용도는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대다수는 생활토기나 제의용에 포함된다. 토기는 원래 의도된 용도에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여러 가지 목적 또는 여러 가지 용도를 겸용하는 것도 있다. 또 본래의 용도를 벗어나서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도 있다. 일상토기는 운반용·저장용·가공용·조리용·식기·벼루·등잔 등으로 구분되고, 제의용 토기는 제례의식용·공헌용·부장용·매장용으로 구분된다.

자비용의 토기는 음식을 끓이거나 삶거나 데치거나 쪄서 익히거나 구울 때 사용하는 토기로서 옹·발·시루·부형토기·아궁이형 토기 등이 있다. 지역과 시기에 따라 자비용으로 사용된 토기의 질이 다르다. 운반용의 토기는 발굴을 통하여 확인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민족지적 조사 또는 토기의 형태를 통해 유추 가능한 예가 있다. 예를 들면, 하천 또는 우물의 물을 사용하는 장소까지 운반하기 위해서는 물을 담는 용기는 필수적인데, 이때 사용할 수 있는 용기로는 목기·토기 등이었다. 저장용의 토기로는 항아리와 완이 있다. 신석기·청동기시대에는 발 또는 옹에 곡물을 저장하였다. 삼한·삼국시대에는 항아리가 저장용기로 많이 사용되었다. 서기 2∼3세기의 마을유적인 강릉 안인리 2호 주거지와 3∼4세기의 마을유적인 양양 가평리 주거지에서 출토된 일부의 항아리에는 불에 탄 곡물이 담겨져 있었다. 경주 황성동 2차 나지구 3호 주거지에서 출토된 와질단경호(瓦質短頸壺) 안에는 탄화된 곡물이 들어있었다.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큰 항아리의 표면에는 “십구팔옹(十口八甕)”이란 글이 새겨져 있다. 이 문장은 원래 “열사람의 식구가 겨울을 나려면 여덟 개의 항아리가 있어야 한다(十口之家八甕過冬)”라는 내용을 줄여서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곡물 또는 여러 가지 물건과 액체를 저장하는 용기로서는 발·옹·항아리 등 주로 규모가 큰 토기를 이용하였다.

제의용 토기는 제례의식용·공헌용·부장용·매장용 등 다양하게 구분되는데, 토기의 형태만으로서 추정하는 것은 어렵고, 유구에서의 출토 상황에 근거해서 판단한다. 제례의식용은 항해나 풍요를 기원하거나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장소에서 출토되거나 무덤에서 제사를 지내는 부위에서 출토된 토기를 들 수 있다. 부장용은 주검과 함께 관·곽·실 등의 매장시설 안에 넣은 토기를 말한다. 공헌용은 특별한 목적의식을 행하거나 또는 행한 후에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바친 토기이다. 공헌용의 토기와 제례의식용의 토기를 구별하는 것은 쉽지 않다. 다만 제례의식용의 토기는 의식을 행하면서 사용한 토기를 지칭하며, 공헌용은 의식을 행하면서 신에게 바쳐지는 토기 또는 특정 행위를 기념하기 위해 매납한 토기가 해당된다. 매장용은 시신을 보호하는 관으로 사용된 토기로서 옹관이 이에 해당한다.

토기의 활용

토기는 선사·고대인에게 있어 생활을 꾸려나가는 기본적인 도구이고, 또 오늘날의 고고학자에게는 과거사회를 복원하는 기본적인 자료이다. 토기는 깨어지기 쉬운 소모품으로서 생산과 소비의 순환이 빠르기 때문에 다른 물질자료보다 형식변화가 빨리 진행된다. 토기의 형식학적 연구를 통해서 시간의 척도를 만들고, 제작기법이라든지 문양의 종류와 시문기법의 계통을 밝힘으로써 문화의 계보를 구명하고, 제작기법의 변화와 토기의 유통을 조사해서 교역 등 사회구조를 해명하기도 한다.

토기는 형태적 변화가 풍부하고 출토 양이 많으며, 전 세계의 모든 지역 모든 집단에 공유된 가장 보편적인 생활도구의 하나였다. 토기는 기능의 변화에 의해, 때로는 기능과 무관하게 변화하기도 하는 등 다른 어떤 도구보다도 변화가 빠르게 나타난다. 또 쉽게 파손되고, 파손되면 재사용이 불가능하므로 많은 양이 폐기되어 어떤 다른 유물보다도 많이 남아 있다. 그래서 과거의 문화를 복원하는 소재로서 토기가 가장 일반적으로 취급되어 왔다. 그 중에서도 해당 지역의 문화흐름을 이해하는 기본 토대인 시기구분 설정의 제1의 자료로 활용된다.

발명 당시의 토기는 바리의 한 종류에 국한되었으나 이후 시기가 지나면서 새로운 종류가 나타나고, 기존의 형태가 사라지는 과정을 되풀이해왔다. 새로운 종류의 등장과 기존 형태의 소멸은 해당집단의 생활문화의 변화뿐만 아니라 집단 간의 문화내용의 차이도 드러낸다. 모든 고고자료 중에서 이러한 변화가 가장 빨리, 구체적으로 전개되는 유물이 토기이다.

물질자료는 기술자의 독창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집단의 경험의 누적과 인정에 의해서 창출된다. 토기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토기는 생활도구이지만, 기능과 직접 관련을 가지지 않는 요소들도 많이 있다. 손잡이의 단면을 띠 모양으로 한 것과 둥글게 한 것, 물결무늬를 직선적으로 새긴 것과 곡선적으로 새긴 것, 다리에 구멍을 뚫은 것과 뚫지 않은 것 등 다양한 차이가 있다. 우리가 대가야토기, 소가야토기, 금관가야토기라고 부르는 것은 각각의 지역에서 출토되는 토기에 어떤 형태로든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고구려토기·백제토기·가야토기·신라토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유물은 유구와 달리 제작 장소를 이탈해도 원래의 기능을 상실하지 않으므로 유통구조를 형성한다. 일상생활의 도구로서 토기는 선사·고대사회의 지역 사이의 교류관계를 추적하는 유용한 자료이다. 신라토기가 가야로, 가야토기가 신라와 백제로 유입된 사례가 많이 있으며, 그러한 사실을 통해 집단과 집단, 지역과 지역, 나라와 나라 사이의 교류관계를 설정하는 소재로 활용된다.

의의와 평가

한반도에서 가장 시기가 올라가는 토기는 제주도 고산리유적에서 출토된 원시무문토기와 융기문토기, 압인문토기이다. 고산리유적에서 출토된 토기는 일본 죠몽〔繩文〕시대 초창기 및 시베리아·연해주 일대의 토기 출현기의 문화상과 유사성을 지니고 있어 그 시기가 서기전 1만년 이전까지 소급될 가능성도 있다. 신석기시대에는 평안도·황해도·경기도·충청도 등의 서북한지역과 중서부 지역, 남해안지역, 동해안지역 등 광역단위별로 각기 다른 토기문화가 전개되다가 서기전 3700년경부터 서북한지역의 바닥이 뾰족한 빗살무늬토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서기전 1200년경이 되면, 북한 지역에서 빗살무늬토기가 사라지고 문양이 거의 없는 무늬없는토기가 사용되면서 곧이어 남한 각지로 파급된다. 무늬없는토기는 점토띠를 나선형으로 감아올려 성형하였고, 좁고 편평한 바닥과 아가리가 오므라드는 옹형토기가 대부분이다.

서기전 4세기 후반부터 서기 2세기 후반까지인 초기철기시대와 원삼국시대 전반기에는 무늬없는토기의 일종인 점토대토기와 와질토기, 그리고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낙랑토기 등이 제작 사용되었다. 점토대토기란 아가리에 단면 형태가 원형 또는 삼각형의 점토 띠를 붙인 토기를 지칭하며, 아가리가 밋밋한 홑 구연의 토기도 많이 있다. 점토대토기는 원형점토대토기에서 삼각구연점토대토기로 변화한다. 삼각구연점토대토기를 끝으로 선사시대 토기는 막을 내리고 새로운 질의 토기가 전개된다. 서기전 1세기 후반부터 한강 이남 지역에서는 낙랑토기 제도술의 영향을 받아 천정이 있는 밀폐된 가마에서 회백색 또는 회흑색의 와질토기가 생산되었으며, 종래의 선사시대의 토기요소를 계승한 적색의 연질토기(경기 및 영서·영동지역의 중도식토기 포함)가 사용되었다. 와질토기는 테쌓기한 후 회전력을 이용하여 성형하고, 새끼줄 또는 격자모양의 무늬를 새긴 도구로 표면을 두드려 단단하게 하였다. 이 시기에는 항아리·바리·시루·뚜껑·컵형토기 등 다양한 종류의 토기가 생산되었는데, 기능에 따라 토기의 종류가 다르고, 마한과 진·변한 지역의 토기 종류에도 차이가 나타나는 등 이전 시기보다 지역적 특성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3세기 후반 이후가 되면, 굴가마〔登窯〕에서 1,000℃ 이상의 고온에서 도질토기가 생산되고, 고구려·백제·신라·가야 등 삼국의 각 정치체를 단위로 특징 있는 토기가 생산되었다.

7세기 후반 신라의 삼국통일을 계기로 삼국의 토기가 신라토기로 흡수 통합되면서 성립한 통일신라토기는 생활에 사용된 토기, 무덤에 부장하기 위한 토기, 통일신라시기에 유행하는 화장을 한 후 뼈를 담는 뼈단지〔藏骨器〕등으로 구분되며, 생활토기가 주류를 이루었다. 통일신라토기는 표면에 도장을 찍은 여러 종류의 문양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통일신라토기를 제작하는 방식은 녹로에 의해 한꺼번에 뽑아올리는 방식이 유행하였고 앞 시기의 띠쌓기 방식을 활용함과 아울러 회전력을 혼용하여 토기를 성형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 선사시대 및 고대의 토기는 시대구분의 척도가 되며 일상생활과 아주 밀접한 생활용기로서 생활문화를 보다 풍요롭게 발전시켜 오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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