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송광사 16국사 중 제6세 원감국사 충지(圓鑑國師 冲止)가 충렬왕(忠烈王) 원년(元年, 1275) 원 세조(世祖, 쿠빌라이)의 청에 따라 충렬왕의 명으로 1275년(충렬왕 원년) 가을에 원나라를 방문했다가 귀국 길에 받아온 것으로 사전(寺傳)되고 있다. 가로 51.5㎝, 세로 76.5㎝의 장지(壯紙)와 유사한 두꺼운 종이에 쓰여 있다.
1273년 삼별초의 마지막 저항지 탐라를 토평하려던 여몽연합군은 병량(兵糧)을 조달할 목적으로 수선사(송광사)의 전토를 관적에 기입하고 전세(田稅)를 회수하였다.
국사는 이를 돌려받기 위해 세조에게 청전표(請田表)를 올렸는데, 이 표의 문장에 감복한 세조는 그 전토를 돌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고려 조정을 움직여 국사로 하여금 원을 방문토록 하였던 것이다.
1275년 가을 원도(元都)에 이르니 세조가 친히 맞아들여 빈주(賓主)의 예로 접대하고, 사부(師傅)의 은(恩)으로 포상하여 온 나라가 그 덕을 우러르고 만민이 그 인(仁)에 귀의하였다. 귀국할 즈음, 금란가사(金襴袈裟), 벽수장삼(碧繡長衫), 백불(白拂) 한 쌍을 세조로부터 받았다.
이 문서의 글자가 파스파문자이며 티벳 밀교와 관련된 것이거나 아니면 귀국하는 국사의 신분을 보장하기 위한 여행증이라는 것이 종래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 문서에 대한 기록은 옛문헌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또, 파스파(1235∼1278)가 1269년에 만든 문자와 같지 않아, 위굴문자가 아닌가 하는 견해와 함께 정밀조사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이미 있었다.
그러나 이 문서에 쓰인 글자는 파스파문자나 위굴문자가 아니라 티벳문자이다. 마모가 심한 데다 네모 분명한 유두자(有頭字, 우첸, dbu-can)가 아니라 모서리 모양이 분명찮은 무두자(無頭字, 우메, dbu-med)로 쓰여 있어서 읽기가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파스파문자에는 없는 모음표시 요소 알리(ā-li)와 음절경계, 그리고 무엇보다도 산동장청대영암사대원국사법지비(山東長淸大靈巖寺大元國師法旨碑, 1341)의 글자체와 같다는 사실 등으로 판단할 때 13∼14세기의 티벳문자 자료임에는 틀림 없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