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광복은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통치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되찾은 사건이다. 국권이 강탈된 후 민족독립운동이 가열차게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국가의 건설을 위한 모색과 진전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광복은 연합국 측의 승리에 힘입은 바가 컸고 냉전질서가 심화되면서 남과 북에 체재를 달리하는 단독 정부가 수립되어 민족이 분열되는 결과를 피할 수 없었다. 군국주의적 일제의 침탈로 국가 재건은 거의 폐허에서 시작되었고, 정치·문화적 침탈도 심각하여 일제 잔재 청산 노력이 아직도 지속되고 있을 정도이다.
광복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빛을 되찾는다’는 의미이지만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일제에 의해서 나라를 빼앗기고 식민지통치를 받고 있는 상태는 곧 암흑이라는 인식에 대한 대치관념으로 통해왔다. 따라서, 광복은 나라를 되찾고 스스로를 다스리는 국가가 있는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오는 것을 의미한다.
광복이라는 관념은 우리가 일제에 의해서 강요당한 식민지화 과정이라는 민족적 모순에 대한 반제(反題)로서 발생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20세기 초엽, 조선의 마지막 국가였던 대한제국이 붕괴되기 시작할 때부터 시작해서 1910년 결정적으로 국권을 빼앗기고 그 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제2차세계대전에서 패하여 우리가 해방되었던 날까지의 시대에 대해서만 고유하게 적용될 수 있는 반일민족독립운동의 사상과 운동을 포괄하는 관념이다.
이와 같이 광복이라는 말은 논리적인 개념으로 정립되어온 어휘라기보다는 국권을 회복하였다는 의식을 표현하고 있다. 말하자면 민족독립의식이며, 국권회복의식이며, 자주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복합적 민족의식은 시대와 객관적 조건의 변화와 더불어 그 내용도 달라진다. 때문에 20세기 초엽부터 광복될 때까지 약 반세기 동안의 광복의식의 변화는 당연히 이에 따른 행동의 변화를 초래하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그 변화의 양상을 요약해서 말한다면, 19세기 말에는 무너져가는 국가의 재건을 목적으로 한 애국계몽운동과 독립협회운동 등이 있었고, 그 뒤 의병운동과 같은 반침략호국운동이 있었으며, 1910년의 강제합병 이후에는 대한제국의 부활을 목적으로 한 복벽운동(復辟運動)도 있었다. 이 복벽운동은 왕권국가 회복운동의 성격을 가졌다.
이때까지는 국권회복이란 왕권국가의 재기·연속을 의미했기 때문에 국권회복이라는 개념 속에 국체의 근대화문제는 아직 의식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이후부터는 한국인의 정치의식 속에서 ‘광복=왕권국가회복’이라는 의식이 종국적으로 청산되었고, 광복과 더불어 우리가 가져야 할 나라, 즉 정권형태나 정치·사회제도를 현대 정치사상에 입각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광복운동의 역사는 곧 이러한 현대 정치사상, 다시 말해서 시민적 민족주의사상 및 사회주의·공산주의 사상과 운동의 역사라 할 수 있다.
광복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는 반일독립운동은 엄밀하게 말해서 1910년 8월 22일 일본에 의한 ‘강제병합’ 때부터 1945년 8월 15일 광복 때까지 만 35년 동안 지속된 민족주의운동이다.
8·15광복이 일본패전의 당연한 귀결이었던 것은 분명한 객관적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 간의 한국민족의 광복운동이라는 주체적 요인이 없었더라면 일본의 패전이 바로 우리의 광복으로 귀결되었을지 의문이라는 것 또한 분명하다.
이것은 다만 우리 민족이 앉아서 연합국측으로부터 광복을 선물로 받은 것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우선 반일독립운동의 내적 조건의 발전과정을 살펴보면 1919년의 3·1운동이 민족독립운동으로서 결정적인 전환점을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다.
첫째, 3·1운동은 <독립선언서>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독립운동의 목적이 현대 국민국가건설에 있다는 것이 천명되었고, 둘째, 이 운동에 참가한 200만명이 외친 ‘독립만세’의 내용이 바로 그것이었다는 사실에서 이 운동은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은 현대적 국민국가 수립을 의미하게 되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3·1운동은 사실상 혁명이 아닌 반침략운동을 통해서 전민족이 실천적으로 정치적 근대화를 이룩하였던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무력으로 이 운동이 탄압되어 현대적 국민국가를 형성할 공간이 국내에서는 존재할 수 없게 되자 민족운동세력들은 독립정신의 실체적 형태로서의 정부를 해외에 세우려는 단계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이미 1919년에 접어들면서 구체화되고 있었다. 3·1운동 직전인 2월에 한국인들이 모여 살고 있던 노령(露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인단체인 전로한족회중앙총회(全露韓族會中央總會)를 대한국민의회로 바꾸면서 정권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 그 시초였다.
그러나 상해(上海)에서도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이 있어 이미 파리강화회의에 대표(金奎植)를 파견하는 등 활동을 계속해오다가, 3·1운동 직후 국내에서의 탄압을 피하여 상해에 모여든 사람들이 독립임시사무소를 개설하고 1,000여 명이 모여 4월 10일 <대한민국임시헌장>을 선포하고 국무원(國務院)을 구성하게 됨으로써 상해임시정부가 성립되었다.
이 정부는 국내외 11개 지방의 각 지방선거에서 선출된 대표들이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의 실질적인 구성원이었기 때문에 국민대표정권이라는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한편 국내에서도 일제의 극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3·1운동을 정권형태로 구체화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24명으로 구성된 국민대회 13도 대표자의 이름으로 국민대회취지서를 발표하고 1919년 4월 23일 임시정부선포문을 발표하였다. 정부조직은 7부 1국으로 되어 있었고, 13도 대표가 정부 구성원으로 되어 있었다.
이상과 같이 세 곳에서 3·1독립운동을 통한 정권형태의 태동을 보게 되었으며, 그것은 극히 자연발생적인 결과였다고는 하지만 당장에 문제가 제기된 것은 한민족의 통일된 정권형태를 만들어놓아야 한다는 기본적 과제였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이승만(李承晩)이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의 국무총리로, 상해의 국무원에서 행정수반인 국무총리로, 서울의 한성정부(漢城政府)에서 집정관총재로 추대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워싱턴에 사무실을 차려놓고, 한성정부를 대표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해나 블라디보스토크의 정부들만으로는 통합의 의미가 없고 당장에 통일정부를 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또한, 상해와 블라디보스토크의 두 정부 사이에도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세 정부는 모두 스스로를 임시정부로 규정하고 있었던 만큼 언젠가는 통합될 가능성은 있었다.
또 이 임시정부들이 모두 국가구조의 원리를 공화주의에 두고 있었었다는 사실은 그 뒤의 광복운동의 기본방향을 규정하였다고 할 수 있다. 세 정권형태의 활동은 지역사정으로 인해 크게 다를 수밖에 없었다.
우선 서울의 한성정부는 조선총독부의 철저하고도 가혹한 탄압으로 한국땅에서는 존재할 수 없게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상해의 임시의정원은 임시정부로서 연통제(聯通制)와 외교활동이라는 두 가지 방향에서 광복운동을 전개하였다.
연통제는 국내 및 간도지방의 연락조직이며, 이것을 통해서 국내와 간도지방에 대한 조직확대와 자금조달을 하였다. 외교활동으로서도 파리강화회의·태평양회의, 그리고 국제연맹에 대한 외교활동을 벌였고, 독립을 보장받고 국제연맹에 가입하고자 했으나 일본이 연합국의 일원으로 제1차세계대전에 참가하여 전승국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국제연맹으로부터 독립을 위한 활동은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 뒤로는 중국·미국·영국·소련에 대한 개별적인 설득을 벌여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인정받고 후원을 얻는 데 주력하였다. 이러한 외교활동은 정부수준뿐만 아니라 민간단체와 개인에 대해서도 전개되었다.
그런데 여전히 통일연합정부의 수립이 지연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중국·소련은 제각기 편리한 대로 독립운동세력과 능동적·피동적인 접촉을 계속하였을 뿐이다.
미국은 정부수준에서는 미국에 있었던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를 정식교섭상대로 삼고 있지 않았으며, 다만 중국과 소련만이 일본에 대한 지정학적 이유 때문에 독립운동에 대해 정부적 차원에서 관심을 표하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초기부터 손문(孫文)이 상해임시정부를 승인하고 한국인 청년을 중국의 군관학교에 수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차관이나 조차지(租借地) 제공 문제는 미해결된 채로 보류하고, 한국의 광복운동을 돕겠다는 태도만은 분명히 하였다.
이런 관계는 장개석(蔣介石)의 국민당정부시대에 와서도 계속되었고, 윤봉길(尹奉吉)의 의거(1932.4.) 이후에 비로소 광복군양성에 대해서 크게 지원하게 되었다.
한편, 임시정부와 소련정부와의 관계는 처음부터 소련정부의 전략에 따라서 좌우되었다. 그것은 당시 시베리아에 출병중인 일본군과의 싸움에 있어서 한국독립군을 양성하여 투입하려는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며, 그것도 피압박 민족의 해방이라는 명분 밑에서 이루어졌다.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의 주도로 1920년에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소련정부 사이에 공수동맹(攻守同盟)이 체결되었다.
그 주요 내용은 임시정부가 동양에서의 공산주의선전에 협력한다는 전제 밑에서 소련정부는 임시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된 때로부터 10년 이내에 상환한다는 조건으로 임시정부에 대하여 40만 루불을 한국독립운동자금으로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자금제공은 통일연합정부의 기초가 튼튼하지 못하였던 독립운동 내부에 분열과 반목을 초래하였으며, 결국 소련정부와의 관계까지 모호한 것으로 만들게 되어 정부수준의 관계는 해소되고 말았다.
그 뒤 독립운동세력의 재정립이 새로이 모색되던 차 1923년 1월에 해외동포사회의 70개 단체 대표 100여 명으로 구성된 국민대표회의가 열렸으나, 여기서도 의견이 양분되어 일부는 노령으로 떠났고, 남은 사람들이 임시정부의 대통령제를 폐지하여 이승만을 제외시키고 국무령제(國務領制)라는 집단지도체제로 전환하면서 정부형태라기보다는 독립운동단체의 성격으로 바꾸어졌던 시대도 있었다.
한편, 1894년부터 시작된 강압적인 일본의 ‘개화정책’ 요구에 대한 항거운동으로서의 의병활동이 3차에 걸친 탄압의 역사를 남기면서 1910년경에 이르러 무장항거의 한계점에 도달하게 되자 그 잔여세력이 간도·연해주 등지로 거점을 옮기게 됨으로써 독립전쟁의 연속성이 유지되었다는 사실은 광복운동의 역사에서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강제합병 직후부터 간도 삼원보(三源堡)에 항일단체인 경학사(耕學社)가 생겨 그 밑에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발전하여 독립전쟁의 기지 구실을 하였다. 이 학교는 1920년에 폐교될 때까지 약 3,500명의 수료자를 배출하였다.
이 밖에도 이동휘가 혼춘현(琿春縣) 사도자(四道子) 부근 일대에서 3,000여 명 이상의 독립군을 양성하고 있었고, 사관학교도 두고 있었다. 같은 시기에 김좌진(金佐鎭)도 간도 일대에서 1,600명 정도의 독립군을 양성하고 있었고, 연길현(延吉縣)에서는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러한 군대들은 그 지역의 지방행정까지도 하고 있었으므로 실질적으로는 지방행정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3·1운동이 임박할 무렵에는 이 독립군부대들이 국경을 넘어와서 일본군과 충돌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상해임시정부의 기록에 의하면 1920년 3월부터 6월까지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 32회나 교전이 있었다.
항일독립전쟁 중 가장 큰 전투는 1920년 10월 김좌진·나중소(羅仲昭)가 지휘하였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독립군과 일본군과의 회전이다.
청산리대첩이라고 기록되고 있는 이 회전은 1,600명의 독립군이 일본군과 10여 회에 걸쳐서 싸운 청산리전투였다. 일본군은 연대장을 포함해서 1,200여 명이 사살되고 독립군은 60명의 전사자를 낸 가장 큰 전투였다.
청산리대첩의 또 하나의 의미는 그 뒤 여러 독립군부대들이 통합하여 3,500명을 헤아리는 대한독립군단을 설립하게 한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데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일본군의 반격으로 우리 민간인이 무차별 학살되어 3,000여 명이 죽고 2,500여 호의 민가가 방화되고, 30여 개의 학교가 잿더미로 되는 참변을 당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사적으로 이미 통합된 조건 밑에서 독립운동단체들도 점차 통합되면서 만주라는 넓은 지역을 분할통치하는 형태로 유지되어갔다.
한편, 국내의 광복운동 양상은 기본적으로 군사적 측면이 결여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국내의 광복운동은 사회운동의 형태를 취하였고, 그것은 정당운동으로 발전하는 순간 일제의 탄압으로 와해되는 것이 고작이었다.
우선 노동조합운동은 그 자체가 처음부터 반일독립운동을 기본목적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 성격을 띠었고, 따라서 사회주의혁명투쟁과 노동운동은 많은 점에서 동일시될 수 있었다. 농민운동에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의 이러한 성격변화는 3·1운동 당시 보여주었던 민족적 단결이 1917년 러시아의 10월혁명의 영향으로 점차 분열되어 민족주의노선과 사회주의혁명노선으로 민족세력이 양분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이러한 민족 내부의 분열상을 타개하고 재통합을 기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 가운데 1927년 2월 신간회가 가장 큰 조직세력으로 등장하였으나, 1931년에 가서 일제의 탄압과 압력, 그리고 내부의 분열로 붕괴되고 말았다.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표면상 소멸됨에 따라 해외에서의 독립운동에 새로운 발전단계가 시작되었다. 1932년 11월에 5개 정치단체가 통합하여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설립시켰고, 1935년 7월에는 미주에 있는 독립운동단체까지 포함하여 민족혁명당으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1938년에 가서는 좌익계 독립운동단체가 통합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함으로써 민족진영과 좌익사회주의진영이 또다시 양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1939년에는 김구(金九)의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와 김원봉(金元鳳)의 조선민족전선연맹이 합쳐져 전국연합진선협회를 성립시키면서 민족적 통일기구를 일단 성취시켰다.
이것은 곧 김구가 주도하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1940)으로 발전하였다. 한국독립당의 정강은 그 전의 정당들의 정강을 종합한 것으로서, 이 정강은 그 당시 독립운동단체들의 기본방향을 말해준다.
국토와 주권을 완전히 광복하여 정치·경제 및 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하는 신민주공화국을 건설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1941년에는 임시정부가 일본의 패배를 명백하게 인식하고 <대한민국건국강령>을 제정하여 광복을 실현하기 위한 사전계획도 수립하였다.
같은 시기에 화북(華北)지방에서도 중국공산당 관할하에 조선독립동맹(朝鮮獨立同盟)이 설립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광복 후에는 일본인의 재산 및 토지는 물론 일제협력자의 기업체도 몰수하여 분배하고 의무교육을 실시한다는 강령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군사활동은 광복을 위해서는 실질적인 의미를 가졌다.
1940년 9월에 충칭(重慶)에서 광복군이 창설됨으로써 민족청년당(民族靑年黨)계의 조선의용대와 더불어 두 개의 군사조직이 중국 안에서 성립되어 국민당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었으며, 1942년 7월 연안(延安)의 조선독립동맹 산하에도 조선의용군이 생겨났다. 그러나 이 해 4월 김구와 김원봉이 광복군사활동의 단결통일에 합의하게 됨으로써 광복군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게 되었다.
일본군과 싸우는 각 전선에서 광복군이 활약하게 되었고, 태평양전쟁이 본격화됨에 따라서 영국군의 요청으로 1943년 6월 이후에는 인도·버마(지금의 미얀마)전선에도 투입되었다.
또한, 미군과의 합동작전을 위한 미군 전략정보처(OSS)의 특수훈련도 받는 등 국내투입계획도 진행되고 있었으나, 일본의 조기항복으로 이 계획은 시현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오랜 ‘정한론(征韓論)’의 배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대한정책을 구체적으로 표명하게 된 것은 1890년 11월 일본 최초의 제국의회(帝國議會)에서였다. 여기서 야마가다(山縣有朋)가 일본의 “이익선(利益線)의 ‘초점’은 바로 조선반도에 있다.”고 언명한 것이다.
그 뒤부터 일제는 사사건건 개입의 기회를 노려오다가 청일전쟁·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군사력에 의해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전락시켰다.
이러한 일본의 움직임에 대해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한다는 의미에서, 미국은 필리핀 영토에 대한 야심을 일본에 의해 방해받지 않게 한다는 의미에서 일본의 대한침략을 묵인하는 형편에 있었다.
일본이 한반도에서 군사적 독점권을 가지게 될 때까지 러·일간에 한반도 분할문제가 때때로 거론된 일은 있었지만, 그것은 그들의 국가이익을 나타내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제2차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일본의 패배가 날이 갈수록 분명해짐에 따라서 연합국측은 전후문제에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몇 차례에 걸쳐서 있었던 회담 중 최초의 회담이 카이로회담이었다.
1943년 11월 카이로에서 열린 이 회담에서 루스벨트(Roosevelt,F.D.)·장개석·처칠(Churchill,W.L.S.)은 이른바 카이로선언을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일본이 무조건항복을 할 때까지 공격을 멈추지 않겠다는 것과 일본이 제1차세계대전 후 탈취·점령·도취한 일체의 지역은 반환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으며, 한국에 관해서는 “앞의 3대국은 조선 인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자유독립하게 할 것을 결의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보듯이 그 시기는 ‘적당한 시기(in due course)’라고만 표현되어 있을 뿐 확정된 시점은 명기되어 있지 않았다.
1945년 2월 루스벨트·처칠·스탈린(Stalin,I.V.)이 얄타에서 또다시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은 비밀회담으로서 독일에 대한 전후처리문제, 소련의 대일(對日)참전문제가 논의되었고, 한국문제에 대해서는 대체로 3국이 카이로선언의 궤도 위에서 대책을 협의하였는데 미·소·중 3개국 대표 1명씩으로 된 신탁통치를 거론하였다.
미국측은 필리핀의 경험으로 신탁통치기간은 20∼30년이 적당하다고 하였고, 소련측은 그 기간은 짧을수록 좋다고 하였다고 미국의 외교문서는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간 논쟁은 미국이 소련의 아시아진출과 그 영향력을 고려한 결과라고 여겨지나 아무튼 일본 패전 후의 한국은 미·소가 주도하는 신탁통치방향으로 굳어져간 것은 사실이다.
5월에 독일이 패전하고, 7월의 포츠담선언에서는 카이로선언이 재확인되었다. 그리고 8월 9일 소련은 얄타협정에 의거해서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12일에는 웅기·나진, 14일에는 청진에 상륙하기 시작해서 38선 전역을 점령하고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는 즉시 모든 곳에 인민위원회를 조직해서 정권형태를 갖추어가기 시작하였다.
하지(Hodge,J.R.)중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미 제14군단이 인천에 상륙한 것은 9월 8일이었다. 이로써 일본군은 패전하게 되었고,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되는 구체적인 과정이다.
그러나 과연 이 해방이 빛을 되찾는다는 뜻을 가진 광복이었던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광복과 더불어 우리들에게 부과된 국토분단선인 38선이 새로운 차원에서 문제를 던져주게 된 것이다.
35년간의 일제식민지 통치는 한국사회의 정상적 발전을 기본적으로 왜곡시켰다. 제2차세계대전이 종말단계에 접어들자 한반도는 전쟁수행을 위한 인적·물적 동원과 수탈의 강요가 극에 달하여 황폐상태에 빠져들어갔다.
1942년 당시 한국인 총 인구는 2552만5409명이었으나, 이미 그때 일본에 거주하고 있었던 한국인은 약 160만 명이었고, 광복 당시에는 약 210만 명으로 늘어났다.
그 간에 약 50만 명이 증가하였고 이들 중 36만5000명 정도는 이른바 강제징용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국내에서 일본군에 각종 명목으로 징용된 사람도 약 414만 명에 이르고 있었다.
거기에 1938년 이후 일본군의 군속 및 군인으로 징발된 사람이 육해군 합해서 약 21만 명이 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가족을 부양해야 하였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일본군에 의한 징병·징용은 한국인의 가족형태를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은 전체사회를 공동화시켰고, 중심을 잃게 하였다. 거기에다 가혹한 식량공출제로 인해 극도의 식량부족현상이 나타났고, 68.1%를 차지하고 있었던 농민들조차도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생명을 유지해야 할 정도였다.
또한 한국인의 4.6%만이 제2차산업 부문에, 그리고 21.1%가 제3차산업에 종사하고 있었지만, 이에 반해서 일본인은 제2차산업에 18.7%, 제3차산업에 69.2%가 종사하고 있었다.
이른바 근대적 직업 분야는 일본인이 독점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거기에다 공업생산수단자본 부문에서 일본인이 90% 이상을 점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광복 당시의 한국인의 경제조건은 절대빈곤상태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전시식량배급제도는 도시거주자에게는 유일한 식량보급제도였지만 군량(軍糧)으로 소비되는 양이 많았기 때문에 한국인에게는 잡곡이 배급되는 경향이 심하였다. 뿐만 아니라 각급 학교의 학생들도 근로동원으로 기진맥진하고 있었다.
민족전체가 고혈은 고혈대로 수탈당하고 전쟁동원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지만 지금까지 정확한 숫자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일본정부의 후생성에 4만 명에 달하는 한국인 사망자의 명단이 있다는 사실만 비공식적으로 전해지고 있을 뿐 그 내용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잊을 수 없는 슬픔의 기억이 남아 있지만, 광복으로 일본인의 억압과 학대에서 벗어났다는 기쁨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이 광복의 기쁨은 한국민족 전체의 기쁨이었으며, 계급에 따라서 모순 갈등하는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광복의 날은 일찍이 민족시인 심훈(沈熏)이 <그날이 오면>에서 읊었던 바로 ‘그 날’이었다.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며는/삼각산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천지가 기쁨으로 요동하는데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이 목청이 터지도록 해방만세를 불렀던 것이 광복된 순간의 한국민족의 심정이었다.
실로 광복 때의 감격은 계급의 차, 지역의 차, 교육의 차, 빈부의 차를 넘어서 모든 사람이 얼싸안고 거리에서 춤추게 하였다.
농민들은 농민대로 징용과 공출에서 해방되었고, 노동자와 도시거주민들은 일본인의 명령과 멸시에서 해방되었고, 수많은 청년들이 일제의 군수공장이나 토목공사장에서 풀려났고, 학생들은 한국혼을 말살하려던 황국신민교육(皇國臣民敎育)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한민족의 생활공간인 한반도가 미·소 양군 때문에 두 쪽이 나고 38선이 생겨난 것을 보고 그 광복의 기쁨이 물거품과 같은 것이었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일본으로부터의 광복이라는 것이 미군과 소련군의 무력에 의해서 일본이 패전함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한국사람들이 사실적으로 실감하게 된 것은, 38선이 생길 때까지만 해도 분단은 일시적인 것일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38선 이북지역은 소련군이 점령하고 얼마 뒤 미군이 38선 이남지역을 점령하게 되는 것을 보고 나서였다. 광복을 가져온 주체는 우리가 아니라 미군과 소련군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광복 직후 가장 큰 변화를 보인 측면은 미·소 양군의 진주와 일본군 및 일본민간인의 철수, 그리고 총독부 대신 군정청이 설치되었다는 사실과 이에 따른 한국인들의 정치활동상황이지만, 여기서는 재정상태·식량사정·귀환동포문제, 그리고 생산활동면만을 일별하기로 한다.
우선 광복 후 국민경제의 혈액이라고 할 수 있는 화폐유통문제가 미군이 진주할 때까지 전적으로 일본인의 수중에 달려 있었다.
광복될 당시 조선은행의 화폐발행고는 49억7000여만 원이었는데 미군이 진주하기 전 일본에서 5억 원을 비행기로 운반해 들여왔을 뿐만 아니라 조선서적주식회사로 하여금 천원권 70억 원, 백원권 21억 원을 인쇄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과도하게 발행된 화폐가 어디에 사용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일본인들을 위해서 쓰였던 것은 분명하다. 이것이 후에 하늘 모르게 치솟았던 인플레이션의 한 요인이 되었다.
다음으로는 식량사정이다. 소련군에 의해서 만주가 점령되자 만주산 잡곡 수입이 차단되었을 뿐만 아니라 1944년의 흉작으로 이듬해 광복 후 9월과 10월 사이에 67만2000석의 식량부족이 예상되고 있었고, 일본의 패전으로 식량배급제도도 제대로 실시되지 못하였다.
거기에다 광복 후의 수송수단의 난맥상은 도시민의 식량사정을 더욱 어렵게 하였고, 곡가의 앙등을 촉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은 서울과 부산 같은 큰 도시에서 더욱 심하였고, 기타의 지방도시들은 식량원산지에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조금 덜하였다.
셋째로 귀환동포의 문제이다. 210만 명의 재일동포들 중 약 70만 명 가까이만 일본에 남고 모두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러한 인구이입은 38선 이남에 있었던 일본 군대 23만여 명과 한국 거주 일본인 약 75만 명 중 과반수(38선 이북은 제외)의 인구유출과 동시에 일어났다. 이 사실은 한국 내의 식량사정을 악화시키는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마지막으로 생산활동면이다. 광복 당시 38선 이남 지역의 경우 생산공장 9,323개, 노무자 30만520명이었는데, 광복 후 1년이 지났을 때에는 공장 5,249개, 노무자 12만215명으로 감소하고 있었다. 이것은 광복 후 146만4520명의 실업자를 발생하게 하였다.
여기에다 전쟁 종결로 발생한 전재 실업자도 63만 명 정도 생겼다. 생산고의 저하와 식량부족은 당연한 것이었고, 이것은 광복 후의 정치적 불안의 큰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상해임시정부의 활동, 특히 광복군의 활동에 있어서 국민당정부의 지원은 물론 영·미군과의 협동작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패전할 때까지 상해임시정부가 대일교전단체로서 국제적 승인을 받을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는 것이 광복 후 국내에서의 정치적 혼란의 원천이 되었다.
이미 1944년 8월에 여운형(呂運亨)의 주도하에 조선건국동맹이 결성되었고, 이것을 기초로 하여 광복 후에는 ‘조선인민공화국’을 조직하여 미군이 들어와도 여기에 행정의 일체를 넘겨줄 것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이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위원회의 구성원 중 54명(72%)을 박헌영계(朴憲永系)의 공산주의자가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조선인민공화국에 대한 미군의 행정권 이양이란 곧 공산당에게 행정권을 이관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들은 이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조선인민공화국은 전국 7도 12시 131군에다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에서는 1945년 10월 10일 성명을 통해서 조선인민공화국을 부정하였고, 11월에 상해임시정부 요인 14명이 환국할 때에도 미군정청은 ‘개인자격’으로서의 귀국이라고 못박았다. 이로써 미군정하에서는 일체의 한국인의 정권형태가 허용되지 않음으로써 한국인의 정치활동은 정당활동에 한정되게 되었다.
이러한 사정은 기본적으로 민족독립운동이 광복 이전에 통합, 단일화되지 못함으로써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한 탓이었으며, 광복 후에 미·소군의 진주로 과거의 민족독립운동세력들이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개의 구심력으로 인해 더욱더 선명하게 이데올로기적으로 분열되는 단계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러한 미·소의 영향력은 날이 갈수록 미국식 민주주의와 소비에트 공산주의의 두 개의 선택을 한국정치세계에 요구하게 되었다.
공산당은 광복 직후부터 재건과 조직확대에 전력을 기울여오다가 여러 분파의 주도권을 점차로 박헌영이 잡게 되었고, 여운형은 조선인민공화국을 단념하고 조선인민당을 만들었다.
우익 보수전통 토착세력은 김성수(金性洙)를 중심으로 한 한국민주당을 창당시켰고, 미국에서 돌아온 이승만은 독립촉성회를 장악하게 되었으며 김구는 한국독립당을 이끌게 되었다.
그러나 미군정이 실시되고 있는 조건 밑에서는 비록 정당의 형태를 갖추지는 않았으나 기독교인들이 미군정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실제로 미군정청의 주요 관직은 이들에 의해서 점유되었다.
동시에 미군정청이 총독부의 통치체제를 인수한 뒤 처음으로 행정고문 10명을 임명하였는데, 이들 중 6명이 한국민주당의 당적을 가진 사람들로서, 우익보수정당이 미군정청과 가장 밀접한 공개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도 광복 후의 국내 정치판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되었다.
광복 후 한반도 내의 정치정세는 기본적으로는 38선에 의한 국토분단과 이 문제 처리에 관한 모스크바3상회의에서의 한국신탁통치안 결정에 따른 좌우익의 분열과 투쟁에서 규정되었다.
1945년 12월 28일 AP통신으로 전해진 한국의 신탁통치에 관한 모스크바3상회의의 협정은 한국에 대해서 미·영·소·중 4개 국의 신탁통치를 실시하고 임시정부를 설립해서 장래의 독립에 대비하나, 그 신탁통치의 기간은 5년으로 하고 미소공동위원회는 한국독립에 기여하는 수단을 강구한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은 순식간에 전국민적인 반대여론을 불러일으켰다. 광복 후 3개월 동안 전개되었던 좌우노선의 정당간에 벌어졌던 갈등대립은 이 3상회의 결정의 보도로 일시에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데 민족적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극복된 것으로 보였다.
그 이유는 분명하였다. ‘즉시적 독립’이라는 것을 가장 큰 민족적 여망으로 생각해온 한국민의 정치의식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같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한국민주당에서부터 공산당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정당·사회단체들이 일제히 반탁(反託)을 표명하고 나섰다. 특히 공산당은 12월 28일 3상회의결정의 뉴스가 나오자마자 반탁 성명을 내고 그것도 부족해서 동맹정당 및 사회단체 15개 단체의 이름으로 공동성명까지 발표하면서 신탁통치를 반대하였다.
그러나 불과 며칠 뒤인 1946년 1월 2일 찬탁(贊託)으로 돌변하였고, 1월 3일에는 공산당 주최의 서울시민대회를 열고 반탁대회인 줄 알고 참석한 공산당 동조세력 앞에서 찬탁을 천명하는 방법으로 찬탁노선을 제시하였다.
물론 돌연한 노선변경은 평양에서부터의 지령에 의한 것이었지만 이것을 계기로 국내정계는 또다시 분열하여 반탁진영과 찬탁진영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공산당이 돌연 찬탁으로 돌아선 것은 기본적으로 평양의 지령에 따른 것이었지만 국내사정으로 보아서도 사실상 반탁동원에 있어서 우익보수세력이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탁노선으로는 공산당이 주도권을 잡을 가능성이 적었던 것이다.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 이후 국내 정치세계는 반탁과 찬탁으로 양분되었으나, 곧 그 분열은 국민들의 정치의식 속에서는 반탁은 민족주의적 태도로 정착되고 찬탁은 국제세력 영합적인 반민족주의적 태도라는 고정관념을 남기게 되었다. 그런 만큼 공산당측에서는 반탁세력에 대해서 온갖 비방을 서슴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1946년 1월 16일부터 서울에서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가 진행되자 38선 문제와 임시정부 수립은 미·소 양국의 합의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정치인이나 일반국민 사이에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이 틈에서 공산당은 소련대표의 주장에 장단을 맞추면서 우익반탁세력을 미소공동위원회의 초청대상에서 빼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워 반탁우익세력의 봉쇄를 기도하였다.
이에 미국측은 소련측의 요구에 맞서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대립이 계속되다가 5월 6일 드디어 미소공동위원회는 유회되고 소련측은 소련영사관과 더불어 철수하고 말았다. 1947년 5월 21일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되었으나 의견차를 좁힐 수 없었고, 반탁학생들의 시위와 ‘공위에 의한 정부는 괴뢰정부’라고 규탄한 배경도 있고 해서 10월 18일 무기휴회에 들어간 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재개되지 않았다.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휴회에 들어가고 미·소간의 동서냉전이 고조되어가는 분위기 속에서 1946년 6월 3일 지방유세중에 있던 이승만이 정읍(井邑)에서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선 이북에서 소련이 철회하도록 세계공론에 호소해야 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처음으로 단독정부수립을 시사하였다.
이승만은 귀경 즉시 72개 단체를 통합하여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만들고 자신은 총재로 앉고 김구를 부총재로 앉혔다. 이에 대처해서 미군정청으로서도 좌우합작노선을 추진하면서 입법의원을 출현시키려고 하였다.
입법의원은 미군정청으로부터 어느 정도까지 입법권과 인사권을 이양받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승만은 여기에 기대를 걸고 있던 차 12월 4일부터 1947년 9월 21일까지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오면서 귀국환영대회에서, 미국정책은 공산주의와의 합작을 단념했고, 따라서 남한과도정부를 수립해야 하며 이 일은 미군정과 협의해서 하면 되는 일이므로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고 선언하였다.
사실상 그의 미국여행기간중인 1947년 3월 12일 트루먼독트린이 발표되어 동서냉전이 본격화되고 있었다. 이 연설을 계기로 이승만과 김구는 결정적으로 결별하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특이한 사실은 공산당과 이승만 노선은 미·소의 동서대립이라는 국제관계 속에서 한국인의 전통적인 정치규범의식(민족주의적 가치관)이 억제되고 외부지향적 정치노선이 새로운 시대의 공식적 정치규범이 되게 하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승만 노선은 확실히 현실적 국제감각에 입각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38선 이북에서의 급속한 소비에트화 진행이 그것의 불가피성을 뒷받침해 주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미국은 이미 유회된 미소공동위원회에서는 한국문제를 다룰 수 있는 한계점에 도달하였다는 인식하에 한국문제를 미·영·중·소 4개국 외상회의에 넘겨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미 38선 이북에서 확고한 정권기초를 마련한 소련은 4개국 외상회의를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미국은 한국인의 독립염원을 감안하여 1947년 8월 17일 제2차 유엔총회에서 유엔한국위원단 감시하의 남·북한 동시 총선거를 제의하고, 정부가 수립되면 미·소 양군은 철수하고 그 정부의 권능을 인정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미국안이 가결되고 유엔한국위원단이 내한하여 총선거 준비를 서둘렀다.
그러나 소련측이 유엔한국위원단의 북한 입경(入境)을 거절하여 부득이 남한만의 선거가 불가피하게 됨으로써 이승만의 주장대로 정세가 돌아갔다. 이 선거가 1948년 5월 10일에 실시되었다. 이 5·10선거는 대한민국정부 수립의 기초조건이 되었다. 7월 17일에는 국회에서 간접선거로 초대 대통령에 이승만이 선출되었다.
이로써 1910년 우리나라가 일제에게 국권을 상실한 이후 38년만에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다. 정부수립 후 정부는 미군정으로부터 정권을 이양받아 세계 여러 나라에 정부수립을 공식 통고하고 외교활동을 개시하였다.
그 해 12월 12일 파리에서 개최된 유엔총회에서 48 : 6이라는 절대다수의 지지로 대한민국이 한반도에 있어서의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승인을 받았다. 그 뒤 추가승인국은 증가일로에 있었다.
그러나 38선 이북에서의 정권수립 과정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진행되었다. 소련군은 제2차세계대전 직후의 동유럽 여러 나라들의 위성국가화 모델에 따라서 38선 이북지대를 소비에트화할 의지를 확고하게 가지고 임하였다.
소련군은 소련에 거주하고 있던 일단의 한인 공산주의자들과 같이 이북에 진주하였다. 약 300명으로 알려지고 있는 이들 한인부대는 김일성(金日成)이 지도하고 있었다.
이 부대는 광복후 북한 지배구조의 원천적 핵심체였다. 그 뒤 중국에서 돌아온 연안파(延安派)도 여기에 합세하였다. 이와 같이 소련 점령군의 절대적 후원과 지시에 따라 귀국한 공산주의 집단이 북한을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토착공산주의세력이 지배에 참여하는 것은 처음부터 차단되었다.
소비에트식 정권형태의 핵심은 공산당인 것은 주지의 사실이거니와, 이미 서울을 중심으로 한 공산당 세력이 남한에서 공산주의운동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이상 소련군 사령부가 있는 평양에서 서울의 공산당에 종속하는 공산당을 유지한다는 것은 ‘1국1당주의원칙(一國一黨主義原則)’에도 위배될 뿐만 아니라 소련측에서도 북한지역의 소비에트화에 있어서 근본적인 약점이라고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1945년 10월 10∼13일에 열렸던 공산주의자 비밀회의에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설치하고 서울중앙당으로부터의 분리독립 공작을 시작하였다. 결국 서울 중앙당도 이것을 정식으로 승인하게 됨으로써 실질적으로 서울중앙당이 ‘분국’에 복종하는 결과가 되었다.
현재의 조선노동당이 그들의 노동당 창건일을 10월 10일로 하고 있는 것은 ‘분국’ 설치에서부터 노동당이 시작되었음을 공식화한 것이며, 이것은 1920년대 이후의 국내 공산주의운동사를 전면적으로 무시하는 뜻이 있었다.
‘분국’에서 ‘북조선공산당’으로 바뀌고, 또 종국적으로 ‘조선노동당’으로 낙착되었다. 1946년 10월에 박헌영이 북으로 도피한 이후로는 ‘남조선노동당’이 북으로부터의 지시에 전적으로 복종하게 되었다.
북한에서의 공산당의 ‘남조선노동당’에 대한 우위확보 과정은 정확하게 북한에 있어서의 정권형태의 확립과정을 반영한다.
이미 소련군 진주 직후부터 각급 행정단위에 인민위원회라는 소비에트정권의 기본구조를 소련군대의 무력적 보장 밑에서 배타적으로 조직하기 시작하여 1946년 2월 8일에는 대표자확대회의를 열고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만듦으로써 실질적으로 정권형태가 탄생하였다.
다만 남한에서의 사태진전에 따라 적절한 시기에 이 ‘임시’라는 표현만 떼어놓으면 명실공히 정권이 되도록 조처해 놓은 것이다.
또 이 정권형태가 현실적으로 정부의 기능을 과시하게 된 것은 ‘민주개혁’이라는 이름의 토지개혁에서였다. 이것은 빈농·고용농과 중농(中農)으로 하여금 부농 및 지주층을 포위공격하여 반발을 봉쇄시킴으로써 진행되었다.
1946년 5월에 시작한 이 토지개혁은 1만2100개나 되는 빈농과 소작인으로 구성된 농촌위원회가 주동이 되었고, 전농가 중 6.8%에 해당되는 지주층이 추방되었다.
불과 1개월 동안에 토지개혁이 끝났다고 하니 그 과격성이 충분히 짐작되는 일이다. 토지개혁에 이어 1946년 8월 15일부터는 주요 산업의 국유화가 시작되어 공업 분야도 인민위원회의 통제 밑에 들어갔다.
그리고 1946년 11월 3일에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공식화하는 절차로서 이른바 ‘북조선 도·시·군인민위원회 선거’를 실시하였는데, 이것은 이른바 흑백선거에 의한 것이었다.
흑백 두 개의 투표함을 두고 선거위원회에서 추천하는 단일후보를 선거하는 제도인 바, 투표참관인 앞에서 투표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1962년까지 계속된 선거방법이며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는 이러한 선거가 북한 정권의 ‘민주주의’적 기초가 되었다.
99.6%의 선거인이 투표해서 97%의 찬성(白函)을 얻었다고 발표된 이 선거의 목적은 오로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라는 간판에서 ‘임시’자를 떼는 데 있었다. 이 선거에서 곧 ‘북조선인민회의’가 구성되어, 입법과 행정의 주체가 간판만 바뀌고 성립되었다.
이른바 인민정권 수립이란 이러한 내용을 말하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수립이 선포되기 앞서 서둘러 7월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다. 이것은 바로 ‘북조선인민회의’를 이름만 바꾸어놓은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광복 직후부터 북한 전역에서 ‘보안대’라는 것이 조직되었는데, 1947년 9월에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상태에 들어갔을 때부터 소련으로부터의 무기원조를 받아 보안대가 급속하게 강화, 확대되어오다가, 1948년 2월 8일 이것을 정식으로 ‘조선인민군’으로 선포하고 북한 정권의 무력토대로 공식화하였다는 사실이다.
‘조선인민군’ 창설식에서 김일성이 연설한 한 대목은 이 군대의 기본목적을 분명히 하고 있다. “자기의 군대를 준비함으로써 통일적인 자주독립국가건설을 촉진시킬 중대한 민족적 과업” 때문에 ‘조선인민군’이 창설되었다는 것이다. 이 군대가 6·25전쟁을 도발하고 대한민국을 침공하는 선발대가 되었던 것은 이미 역사적 사실이 되고 있다.
광복과 함께 38선으로 인한 국토분단이라는 기본사실은 비록 38선의 남과 북에 미·소양군이 진주하여 실질적인 지배를 시작하였다고 하더라도 이 기본사실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은 한국인들이 하였던 것이다.
일차적인 반응은 물론 정치적인 성격의 것이었지만 그것을 실행한 결과, 즉 이차적 반응은 경제구조의 형성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는 광복 당시와 같은 경제조건이 그 뒤 어떻게 서로 다른 방향으로 변화하였는가를 약술한다.
광복 후 북한에서의 사회·생산관계의 변화는 ‘민주개혁’이라는 구호 밑에서 지주·반동분자·친일파라는 이름으로 반(反)공산당세력을 축출하고 그들이 소유하고 있었던 토지·공장·사업소 등 생산수단을 몰수하여 국유화하기 시작함으로써 광복 전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차원에서 시작되었다는 특징을 가진다.
그것은 정치적으로 사회적 차원에서의 전체적 숙청이며 경제적 차원에서 사자본(私資本)을 전멸시키는 의미를 가졌다. 광복 후 토지개혁이 시작되기 전 북한사회의 산업별 인구비율은 농업인구 74.1%, 노동자 2.5%, 사무원 6.2%, 기업가 2.2%, 개인수공업자 1.5%, 상업 3.3%로서 기본적으로는 농업사회였다.
따라서 토지개혁의 강행은 북한의 사회관계를 근본적으로 재편성한다는 뜻이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적으로 후진된 곳에서 그것은 기본적인 혁명과제가 된다는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 되고 있다.
1946년 봄부터 시작한 계속적인 사회주의화의 결과로 1957년에는 우선 농업에서 3.2%만이 개인경작에 종사하고 있을 뿐 49.9%가 협동조합으로 흡수되고 1958년에는 개인농업이 없어졌다.
노동자층이 28.7%로 증가하고 사무원도 14.9%로 증가하고, 그 대신 개인수공업은 0.3%로 감소하고 기업가는 0.01%, 상인은 0.4%로 소멸상태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계급구조의 변화는 북한사회의 경제구조에서의 변화를 수반하였는데 1946년에는 공업과 농업의 비중이 28.2%였던 것이 1957년에는 공업이 63.4%, 농업이 36.6%로 역전되었다.
그러나 북한에서 말하고 있는 경제발전의 시기구분에 따르면 제1단계를 1945∼1950년 6월(6·25)까지로 잡고 이것을 평화건설기라 하고, 제2단계를 전후인 1954∼1956년으로 잡고 이것을 전후복구건설기라고 하고, 그 뒤부터는 제1차 5개년계획 단계에 들어간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위의 계급구조와 경제구조는 평화건설기는 물론 전후복구건설기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다만 광복 직후의 사정을 아는 데만 참고가 된다.
그러나 광복 직후의 사회·생산관계에서의 기본적인 변화는 토지개혁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에서 이 문제는 보다 더 중요하다. 1948년 2월 5일에 <토지개혁에 대한 법령>이 발표되고 그 해 3월 5일부터 이 법령이 실시되어 3월 말까지 완료되었다. 이 기간 동안 100만325정보가 몰수되어 98만390정보가 분배되었다.
분배대상자는 고용농민, 토지 없는 농민, 일부 이주한 지주(전체 몰수면적 중 0.96%), 인민위원회 등이었다. 토지개혁이 끝나기도 전인 3월 23일에는 ‘20개정강’이라는 것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북한의 정치경제의 기본원칙을 밝힌 것이었다. 그 중 경제에 관한 것은 다음과 같다.
① 대기업소·운수기관·은행·광산, 그리고 산림을 국유화한다.
② 개인의 수공업과 상업의 자유를 허락하여 장려한다.
③ 친일·반동분자 및 계속적으로 소작을 주는 지주의 토지는 몰수하고 소작제는 폐지하고 몰수된 토지는 무상으로 분배하여 그들의 소유로 하며, 일체의 관개업은 국가에서 관리한다.
이 세 가지 경제정책은 반동세력의 제거에 목적이 있었으며, 그들의 경제적 토대를 박탈함으로써 무력화시킬 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에서 그들을 학대(투옥) 또는 격하시키는 데 있었다.
다만 ②에서 개인의 수공업과 상업의 자유를 허락한다고 한 것은 정치적으로 도시주민들을 불안하게 하지 않겠다는 것과 물자의 은닉을 방지하자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24일에는 <노동법>이 발표되었지만 기업 자체가 국유화되어 있는 현실 속에서는 <노동법>이 정하는 대로 실시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이에 대해서 합의하는 일은 국가에 대해서 항의하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바로 정치문제로 취급되었다. 그래서 노동현장에서는 공식적으로 분쟁이 일어날 수가 없었다.
동시에 농민들에 대해서는 6월 27일 ‘농업현물세에 관한 결정서’라는 것이 발표되었다. 그 내용은 토지세와 주민세를 부과하지 않는 반면에 각종 곡물수확고의 25%에 해당하는 현물세를 징수한다는 것이 골자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현물세 공납의 방법이 실제 수확고에서 25%를 징수하는 것이 아니라 예정수확고에 따라 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행정관료들이 다수확을 보고하기 위해서 과대예정수확고를 책정해서 보고하는 바람에 실제로 징수되는 것은 50∼70%까지 이르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불합리한 현물세 징수방법은 그 뒤 10년간 3차에 걸쳐서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문제가 남는다. ‘농업현물세에 관한 결정서’ 제2조에는 흉작이 드는 경우에도 평년작 수확고에 해당하는 현물세를 바쳐야 하며, 현물세를 제외한 양곡은 국가에 팔아야 하고 자유판매가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쌀장수가 성립될 수가 없었다.
다만, 협동조합이 생긴 이후로는 현물세양곡과 국가내수양곡, 그리고 협동조합기금을 다 제하고 난 나머지를 분배받게 되어 있어서 이것이 농민의 식량 부분이 된다.
그리고 1946년 8월 10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조문도 없는 간단한 성명서를 발표하여 친일파, 일본의 사인(私人) 또는 법인 등의 소유, 그리고 반동분자의 기업소·광산·발전소·철도·운수·체신·은행·상업 및 문화기관의 전부를 무상으로 몰수하여 국유화한다고 공포하였다.
이로써 북한의 전산업의 90% 이상에 달하는 1,032개의 공장·기업소·문화기관이 무상으로 몰수되었다. 이상과 같은 상황이 이른바 평화건설기의 기본적인 사회·경제의 변화의 특징이다.
광복 직후의 산업별 인구구성비는 북한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제1차산업인구가 92.2%, 제2차산업인구가 4.6%, 그리고 제3차산업인구가 21.1%였으며, 반면에 일본인은 제1차산업 8.2%, 제2차산업 18.7%, 그리고 제3차산업 69.2%였다.
이 제3차산업 인구라는 것이 실질적으로 식민지를 관리하는 인구였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광복 직후 이 사람들의 귀국으로 인해 발생하는 공백이 광복 직후 한국사회의 혼란의 씨가 된 것이다.
그러나 1945년 가을에는 전년의 흉작에 비해서 1205만 석의 쌀을 생산해서 풍작이라고 했고 그나마 공출제도가 자연히 해소되어 사람들에게 풍만감을 안겨주었다.
게다가 일본으로 반출하려던 곡물이 1945년 4월 이후 부관(釜關) 사이의 해상이 연합국에 의해서 봉쇄되는 바람에 300만 석 정도 적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고스란히 우리 땅에 떨어지게 되는 사정까지 합쳐서 광복되던 가을의 식량사정은 좋았다. 거기에다 미군정청은 그 해 10월 5일 미곡의 자유시장제도를 법제화했기 때문에 미곡은 완전히 상품화되었다.
그러나 미곡의 자유시장화정책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곡가의 앙등만 야기시켰고, 1946년 봄부터는 쌀문제로 한국인들이 미군정청에 항의하는 소동까지 벌어졌다.
미군정청은 쌀문제를 미곡도입이라는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하여 1946년 5월부터 1년 6개월 동안 약 55만 톤의 곡물을 수입하게 되었다.
미군정청의 식량정책 실패는 군정관리들의 행정능력의 부족을 증명했을 뿐만 아니라 미곡상인들의 모리행위를 조장한 결과가 되어 자유시장제도에 대한 국민의 편견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뜻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광공업 분야에서는 광복이 너무나 큰 진공상태를 가져다주었다. 1938년도 통계에 의하면 전체 5,414개 회사 중 한국인소유는 42.1%(2,278개)였다.
공칭자본도 총17억1313만 원 중 한국인의 자본 부분은12.5%로서 2억1882만 원에 불과하였다. 공업기술자의 수에 있어서도 전체 8,476명 중 한국인은 1,632명(19%)에 불과하였다. 그 밖의 분야의 민족별 비율도 대체로 이러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광복 전해인 1944년 6월에는 전시군수산업의 촉진으로 남한의 경우만 해도 공장수 9,323개, 노동자수 30만520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러던 것이 광복 1년3개월 만인 1946년 11월에 와서는 공장수 5,249개, 노동자수 12만159명으로 감소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광복과 더불어 다른 분야의 실직자를 합해서 46만여 명의 실직자를 배출해냈다.
귀환인구도 실질적으로 실직자로 간주한다면 아직 귀국이 모두 완료되지 않았다는 조건 속에서도 63만 명의 실직자가 있었다.
1948년 8월 말 현재 일본에서 150만 명, 중국 및 기타 해외에서 15만 명, 그리고 북한에서 65만 명 도합 230만 명이 귀국하여 일본인의 철수에도 불구하고 인구는 늘어났다. 그래서 1937만 명이라는 총인구를 갖게 되었다.
여기에다 일본인 철수 후 교통시설의 노후와 수리부족 등으로 수송능력이 광복 전에 비해서 20%로 감소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것은 수송의 마비현상을 가져왔고, 국민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것은 인플레이션 현상으로 나타났지만, 실은 그 진원은 총독부와 미국정책의 화폐정책에 있었다.
1945년 7월 현재 조선은행권 발행고가 47억 원이었던 것이 미군이 진주하기까지의 20여 일 동안 79억 원으로 증가했고, 9월 말에는 86억여 원에 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외에도 일본인은 미군이 진주하기 직전에 91억 원을 인쇄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어쨌든 막대한 화폐를 인쇄했으며 그것이 미군정청으로 넘어갔다고 하여도 결국 방출되는 것이기 때문에 물가는 급격하게 앙등되었다.
광복 전에는 민간보유통화량이 전체통화의 약 50%였던 것이 1946년 3월 현재 민간 보유통화량이 85%가 되었다고 하니 은행에서 모두 돈을 찾아갔던 것이다.
그래서 1946년 6월에 가면 1945년 8월을 100으로 잡아서 주곡이 485.6, 식료품 496.7, 작물 689.9, 연료 298.5, 비료 1,965.0, 공업원료 359.1이라는 놀라운 속도의 인플레이션현상을 보였다.
거기에다 광복 당시 북한에서 전체 발전량의 98%를 생산하고 있었고, 남한에서는 불과 7만9500㎾밖에 생산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 송전을 받더라도 수요량의 5분의 1밖에 안 되었다. 거기에다 북한은 석탄생산량의 92%를 차지하고 있었고, 각종 광물의 71%를 가지고 있었다. 금속 90%, 화학비료 83%가 북한에서 생산되고 있었다.
다만 남한은 미곡과 보리생산에서 75%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남한의 공업생산고는 1946년 말에 가면 광복 전의 60%선으로 하락하고 식량생산에서도 83%로 저하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 분야에서의 혼란한 생산성 저하현상은 살인적인 인플레이션현상이 지속되는 가운데에서도 미군정청을 통해 정부수립까지 3년 동안 무상경제원조 총 4억634만 달러가 제공되고, 그 중 49.2%가 식량·의류·직물과 같은 생활필수품이고 17.7%가 농업용품으로 배당되어 그나마도 경제적 파국은 면하게 되었다.
일제의 한국인에 대한 동화정책의 결과로 한국의 고유문화가 크게 왜곡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문화의 와해정책에도 불구하고 한국문화의 흐름은 비록 사회생활과 정치생활의 영역에서 억제되었다고는 하나 가족생활의 영역에서는 끝까지 유지되어 광복 후 새로운 문화발전의 원천이 되었다.
다만 하나의 약점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총독부의 오랜 동화정책 때문에 한국인 자체의 문화지도세력이 형성되지 못한 채 광복을 맞이하였다는 사실이다.
미군정이 시작되자 미군정이 제시하는 각종 교육·문화정책이 그대로 서구문화의 이식(移植)이라는 형태로 작용하였다. 다시 말해서 한국의 고유문화와 서구제도의 이식·모방 사이에 어떤 상호관계가 성립되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서구제도가 기성문화 위에 새로운 층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더욱이 미군정청의 문화·교육정책이 조령모개식(朝令暮改式)으로 시행착오를 거듭함으로써 사실상 문화혼란만을 조성하는 결과가 되었다.
그 이유는 대체로 미군정을 보좌했던 한국인들 자신이 오래전부터 한국의 고유문화로부터 일탈하여 서구화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문화·교육정책 수립과 그 시행과정에서 한국화할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이 결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미군정의 능력의 한계성이었다. 그래서 광복 직후의 38선 이남의 사회·문화활동은 교육정책을 제외하고는 한국인들의 자발적인 활동으로 전개되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사회·문화 지도층의 형성이 미흡한 채 광복을 맞이하였기 때문에 광복 직후 사회·문화활동이 자발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할지라도 그것 또한 정치적 혼란을 반영하여 시행착오와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상태였다.
여기서는 미군정청의 교육정책과 문화일반-언론·문학·출판·연극·미술·음악·방송·영화-을 일별하는 것으로 한다.
미군정청의 교육정책의 원칙은 민주주의 교육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제시된 원칙에 불과하였으며 실질적으로 일제강점기의 교육제도와 기능이 1946년 6월까지 지속되었다.
7월에 들어가서 미군정은 새로운 교육개혁안으로서 이른바 국립서울대학안을 발표하였다. 그 당시 좌익세력이 팽배해 있던 여건하에서 이 안은 완강한 반대에 직면하게 되었다.
국립서울대대학안에 대한 반대운동은 그 뒤 만 1년간 계속되다가 이른바 법령 제102호의 수정과 민간이사, 한국인총장의 문제를 신임이사진에 일임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광복 전에 대학이라곤 경성제국대학 하나밖에 없었고, 나머지는 전문학교였지만 국립서울대학안이 정착됨으로써 광복 직후 갑자기 늘어난 대학과 합해서 24개로 늘었다.
이에 따라 대학생수도 1만3483명으로 늘었다. 초등교육에서도 완만한 증가현상이 보였다. 1945년 12월 현재 학생수가 163만7723명이던 것이 1947년 5월 말에는 218만3449명이 되었다. 중등교육도 같은 기간 동안 7만1701명에서 15만9950명으로 2배 이상 늘었다. 말하자면 광복 후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은 교육의 팽창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문화계는 거의 혼란에 가까운 양상을 나타냈다. 우선 언론계를 말하자면, 미군정청의 당초의 자유언론정책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혼란과 특히 공산당의 파괴활동으로 군정청으로서는 언론통제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우익신문에서부터 공산당기관지에 이르기까지 광복 후 우후죽순처럼 나타난 신문만 해도 1947년 9월 말 현재 일간지 69개를 비롯해서 전체 131개나 되었기 때문에 정간·소환·구금·테러·파괴·폭행 등 갖가지 일들이 신문을 둘러싸고 발생하였다.
광복 후의 언론계의 혼란상의 한 단면은 다음과 같은 사실만으로도 잘 이해될 수 있다. 1946년 9월부터 만 1년 사이에 테러단에게 습격, 파괴당한 언론기관만도 11개 소, 피습언론인 55명, 피검언론인 105명이었던 것이다.
광복 직후의 언론계의 혼란상은 바로 정치적 혼란의 반영이었으며 정치세계의 안정만이 언론제도화의 전제조건이 되어 있었다. 광복 후의 문학 또한 당시의 혼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가장 두드러지게 정치성을 나타내면서 등장한 것은 문학가동맹(文學家同盟)이다. 그들은 주로 계급투쟁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문학활동을 하였다기보다는 정치활동을 하였다. 문필가협회(文筆家協會)라는 것도 대동소이하였다.
예컨대, 문학가동맹의 두드러진 업적이라 할 수 있는 기관지 ≪문학≫이 1946년 10월의 임시 증간호의 특집에서 인민항쟁을 자료로 삼았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이에 반해서 문필가협회는 공산당 운동에 대해서 비판적·중립적이었다는 의미에서 정치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학활동을 주도한 세력들은 1930년 이후 문필활동을 해오던 사람들이었다.
이러던 중 문필가협회를 대표하는 김동리(金東里)와 문학가동맹을 대표하는 김동석(金東錫) 사이의 문학관논쟁은 광복 후 처음 보는 문학논쟁으로서 전개되기도 했다.
광복과 더불어 소설 분야에서 많은 작품들이 쏟아져나왔고, 희곡과 시 부문에서도 양보다 질을 지향하는 작품들이 나왔다. 출판은 광복 직후의 용지난(用紙難)으로 큰 곤경에 빠졌다.
그 당시 일반적으로 월 10만 연(連) 가량의 용지가 필요하였는데 남한 소재 17개 제지공장의 월간 생산량은 불과 5천 연밖에 되지 않아서 수입용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게 되면 가격의 앙등이 불가피하였다.
1947년 8월 말 현재 남한에는 519개 소의 출판사와 278개 소의 인쇄소가 있었다. 이들에 의해 통신·신문·잡지 등 334종이 출판되고 있었다. 이 출판물들은 1947년 9월 19일 입법의원을 통과한 <정기간행물법>으로 통제되기 시작하였고 이에 대한 반발도 강하였다.
그러나 광복 후 가장 활기를 띤 분야는 연극계라고 할 수 있다. ‘민족예술의 재건’이라는 구호 밑에서 제각기의 장르에 따라서 연극활동을 시작하였으나, 크게 보면 좌경 연극활동이 조직적으로 전개된 시기이다.
동시에 상업연극도 많이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1947년 1월 8일부터 19일까지 계속된 문화단체연맹 주최 제1회 종합예술제가 일단 광복 후 연극활동의 종합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화단체연맹의 활동방향이 인민예술이라는 명분 밑에서 전국적 규모의 공연활동으로 번져가자 우익진영과 군정당국이 충돌하는 사태가 빈발하였다. 미술에서도 조선미술가동맹과 조선조형예술동맹이 생겼으나 1946년 11월에 조선미술동맹으로 통합되어 민선(民線) 산하에서 활동하게 되어 좌익운동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반면 좌경운동에 대립하는 조선미술가협회·조선미술문화협회 등은 민선 산하의 예술활동에 대항해서 출현한 미술가단체이다. 즉, 미술계에서도 정치적 좌우대립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음악세계에서도 좌우의 대립이 심각하였다. 광복 직후 조선음악가협회와 음악동맹이 생겼으나 1947년 1월 10일에 음악단체협의회로 통합되었다가 또다시 좌우로 분열되었다.
그 뒤의 사정은 한마디로 난맥상을 드러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러한 중에서도 고려교향악단이 생겨 1948년까지 16회의 정기공연을 했다는 사실은 특기할만하다.
광복 이후의 전반적 혼란 속에서도 한국사회에 대해서 가장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방송일 것이다. 1927년 이후 줄곧 일제의 선전도구로 이용당해온 방송은 광복 후 한국인들에 의해서 헌신적으로 재건되었다.
미군진주와 더불어 방송은 곧 미군정청이 장악하였고 1946년 4월부터는 중앙국(中央局)의 방송관계 업무 일체가 공보부로 편입되었고 기술관계 업무는 체신부 관할하의 방송협회에서 맡게 되었다.
1946년 10월 18일부터 정규 1시간반 방송이 시작되었다. 1947년 8월 말 현재 전국의 방송청취자는 약 18만5700명으로 추산되고 있었고,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에 11개 방송국이 있었다.
끝으로, 영화계의 실태를 본다면 미군정기의 영화제작은 처음부터 검열제하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던 중 1946년 10월 8일 영화허가에 관한 법령이 공포되면서 좌익계로부터 반발을 사기도 하였다. 그러나 광복 후 30여 개소의 잡다한 영화사가 생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불가피한 조처였다.
영화의 종류로는 뉴스영화·기록영화, 그리고 극영화로 분류할 수 있으나 이 중에서 기록영화와 극영화의 중요 내용을 보면, 기록영화에서는 <레이테만(灣)의 복수전>·<전쟁은 무엇을 가져왔나?>·<제2차세계대전 유황도(硫黃島)결전>·<오키나와(沖繩)소탕전> 등 주로 미국측에서 제공된 것이고, 극영화에서는 <자유만세>·<똘똘이의 모험>·<민족의 새벽>·<새로운 맹세> 등 국산영화도 있었지만 대종을 이룬 것은 외화였다.
이 사실은 외국문화에 직접 접하지 못했던 절대 다수의 한국인들이 외화를 통해서 외국을 알게 되고 외래문화를 받아들이려는 경향이 많았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광복 직후 소련의 후원과 인민위원회조직이 확대되는 것과 보조를 맞추어서 ‘공산주의 사상강화’라는 일반독제 밑에 북한의 교육은 시작되었다.
우선 1945년 11월에 5도행정위원회에서 학교교육 임시요강이 결정되어 한글보급과 유물사관적 역사교육의 의무화를 추진하게 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교육개혁은 1946년 3월 5일 인민교육제도를 확장할 것을 결정하고 소련교육제도를 도입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서 인민학교 5년, 초급중학교 3년, 고급중학교 3년, 기술전문학교 3년, 대학 4년의 학제로 결정되었다.
이러한 교육제도는 6·25전쟁 후까지 계속되었다. 교육개혁은 ‘민주개혁’과 더불어 북한사회의 사회관계를 바꾸어놓는 중추적 구실을 하였다.
이에 따라서 언론·출판·보도의 목표와 구조와 기능도 달라졌다. 우선 언론을 보면 언론은 가장 중요한 ‘계급투쟁의 무기’이기 때문에 당연히 당이 독점하여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언론은 가장 중요한 지배수단이라고 보기 때문에, 첫째, 공산당노선 이외에는 일체 허용되지 않으며, 둘째, 언론은 대중지배를 위한 선전·선동의 수단이며, 셋째, 정보원을 독점함으로써 정보의 비교 가능성을 차단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특징을 사실적으로 나타낸 것으로서 1945년 11월 1일부로 ≪정로 正路≫라는 신문이 나오고, 이것이 1946년 8월 30일에 현재의 ≪노동신문≫으로 개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나, 이 신문이 북한에서는 독점적인 정보원이 되어왔다.
초기의 언론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선전, 건설교육, 반미·반남한·반일 선전선동,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중점이 주어지고 있었다.
6·25전쟁 후로는 명실공히 조선노동당 기관지가 되었다. 당이 독점하여 언론 특히 신문은 당의 지배력의 확립과 더불어 증가되었다. 신문이 1946년 전국에 23종 7142만6522부가 발행되고 있었으나, 1949년에는 31종 2억641만6235부(약 7배)로 급증하였다.
방송도 당의 독점하에 있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광복 전 북한지역에는 5개 소의 방송국이 있었으나, 1945년 10월 14일 김일성귀국환영 평양시군중대회를 중계한 것을 계기로 해서 10월 14일을 ‘방송절’로 정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방송이 김일성 개인지배의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6·25전쟁 당시까지 방송은 별다른 발전을 보이지 못하였다. 출판에서는 1948년 정권수립 때까지 주로 공산주의선전용의 출판물만을 내놓았는데, 그 수는 190여만 부라고만 알려져 있다.
그 중 ≪소련공산당 약사≫·≪레닌선집≫·≪스탈린약전≫·≪수개국 공산당 대표자들의 보도회의 문헌집≫ 등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잡지는 1946년에 29종 44만3800부, 1947년에 22종 131만3500부, 1949년에 39종 316만9611부가 발행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출판물은 예외없이 당의 엄격한 검열을 거쳐야 하였다.
일본제국주의 지배 35년간의 광복운동이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전으로 ‘8·15광복’이라는 표현을 쓰게 해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연합국의 승리에 의해서 주어진 광복 또는 해방이었기 때문에 8·15광복은 한국민족에게는 주어진 광복, 또는 단순히 얻은 해방이라는 실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미군정이 한국민족이 오랫동안 ‘정부’로 인식하고 있었던 상해임시정부 요인의 환국까지도 ‘개인자격으로서’만 인정했을 때 한국민족은 광복에서 주인이 아님을 느끼게 되었다.
38선 획정이 일시적인 것이라는 일반적 기대가 아직 살아 있었던 광복 직후의 상황에서는 국토분단이 어떤 비극을 야기할 것인지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38선 이남에 진주한 미군정청은 미국의 민주주의를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길이라고 가르치고 있었고, 그 이북에서는 처음부터 소비에트화가 진행되었다. 그것은 선택 이전에 그냥 강요된 것이다.
미·소 대립이라는 세계 2분화 구조가 굳어감에 따라서 38선 남과 북은 우선 정치제도에서 서로 방향을 달리하여 움직이기 시작하였고, 여기에 따라 경제·교육·문화 정책도 서로 방향을 달리하여 움직이게 되었다.
단순한 국토분단이라는 지리적 개념은 이와 같이 해서 점점 이데올로기적 구분과 대립의 선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하나의 민족이 광복된 대신 두 조각 났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것이 인자(因子)가 되어 6·25전쟁이라는 민족분열을 일으키게 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8·15광복은 처음부터 민족적 모순, 즉 국토분단이라는 새로운 민족분열의 씨를 배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8·15광복은 이러한 민족적 모순을 새로운 민족적 과제로 한국민족에게 던져주었다.
그러나 6·25전쟁은 이러한 과제를 푸는 데는 가장 졸렬한 방법이었다. 그것은 분단된 민족이 이 전쟁으로 인해 분열된 민족으로 발전하였다는 데에서 그러하다.
한반도의 분단문제에 있어서 분명한 것은 폭력이나 무력으로는 완전한 해방, 즉 민족통일을 이룩할 수 없다는 것이다. 평화적으로 민족이 통일되는 방법을 발전시키는 것만이 우리의 의무이다.
8·15광복은 어떤 의미에서건 외세의 지배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였지만 분단되어 있는 상황 속에서의 광복은 민족통일을 의미할진대, 그것은 본질적으로 우리 스스로의 해방을 통해서만, 다시 말해서 우리 스스로의 발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객관적인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