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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일팔도끼만행사건(八一八─蠻行事件)

    국방사건

     1976년 8월 18일 오전 11시경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 사천교(돌아오지 않는 다리) 근방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하던 유엔사 경비병들을 북한군 수십 명이 도끼 및 흉기로 구타, 살해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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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칭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
    분야
    국방
    유형
    사건
    발생일
    1976년 8월 18일
    시대
    현대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1976년 8월 18일 오전 11시경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 사천교(돌아오지 않는 다리) 근방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하던 유엔사 경비병들을 북한군 수십 명이 도끼 및 흉기로 구타, 살해한 사건.
    키워드
    영역닫기영역열기역사적 배경
    북한이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을 일으킨 핵심적인 대외적 동기는 ‘주한미군 철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한 것이었다. 북한은 남북 간의 긴장상태를 ‘북침 위협’으로 역선전하여 한반도의 평화를 공고히 다지기 위해서는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미국과의 전쟁상태를 종식시키는 법적 효력을 지닌 대미 평화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유엔군사령부의 존재 명분을 제거하여 유엔군사령부의 해체를 실현하고 주한미군의 철수를 기대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북한의 대내적 동기는 긴장상태를 조성함으로써 경제난으로 인한 내부의 불만을 무마하고, 김정일 세습에 따른 내부 권력투쟁을 수습하려는 것이었다. 북한은 1970년대에 들어서서 무력증강과 이를 위한 중공업 우선정책 추진으로 경제난을 겪고 있었다. 즉 이와 같이 식량난과 생활고로 누적된 북한 주민들의 불만을 억압하기 위해서 임전태세가 필요했고, 또한 김일성 유일지배체제 유지를 위해서라도 전시에 준하는 비상태세가 요구되었던 것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은 유엔군과 북한군의 초소가 서로 중첩되어 설치되어 있었다. 특히 북한은 유엔군과 조율 없이 남쪽 지역에 5개의 초소를 만들어 놓고 있었다. 유엔군의 초소는 북한군의 초소에 둘러싸인 형국이었다. 특히 사건이 발생한 제3초소는 JSA남쪽 모퉁이에 자리 잡았고, 사천교(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넘어 오는 북한 측 출입 통로의 초입이기도 했다.
    1970년대 초 유엔 측은 3초소를 설치하고, 그 북쪽에 3초소를 조망할 수 있는 지점에 5초소를 추가로 설치하였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제3초소와 제5초소 사이에 미루나무 한 그루가 무성하게 자라나 양 초소의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1976년 8월 6일 한국인 노무단(KSC) 노무자 6명과 유엔사 경비병 4명이 나무를 베기 위하여 현장에 갔을 때, 북한 경비병이 그들의 목적을 물은 뒤에 나무를 그대로 두고 가라고 위협적으로 말했다. 이에 이들은 철수했다. 8월 18일 오전 10시 30분 경비병력 10명, 노무자 5명으로 구성된 유엔사 작업반이 나무 주변에 도착해서 가지치기 작업을 시작했다. 몇 분 후, 북한군 장교 2명과 병사 9명이 트럭을 타고 현장에 도착했다. 그 가운데 북한군 중위인 박철이 작업을 계속하면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위협하며 경고했다. 그러나 유엔사 작업반은 이 경고를 무시하고 작업을 계속하였다. 11시 경 10여 명의 북한군 경비대원들이 현장에 도착하였고, 북한군 병력은 3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때 박철은 작업을 중지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한국인 노무자들은 작업을 중지했지만, 미군 책임자 보니파스(Arthur G. Bonifas) 대위는 노무자들에게 작업을 계속하라고 명령했다.
    그 직후 박철은 “죽여”라고 소리치면서 보니파스 대위를 때리자, 북한군들이 달려들어 보니파스 대위를 쓰러뜨렸다. 그 중 몇 명이 주위에 있던 도끼로 보니파스의 머리를 가격했다. 또한 함께 있던 베렛(Mark T. Barrett) 중위도 공격받았다. 4분간의 난투극이 벌어지는 동안 우리 측 경비대는 현장에서 벗어나려고 하였다. 결국 미군 장교 2명은 모두 심각한 두부 손상을 입었다. 이후 이들은 후송 중에 사망했고, 한국군 장교 1명과 사병 4명, 미군 사병 4명 등 총 9명이 부상당했다.
    북한군의 공격으로 유엔사 제3초소가 완전히 부서졌고, 현장에 있던 유엔사 트럭 3대도 돌에 맞아 유리창이 모두 부서지는 등 손상을 입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결과
    사건 발생 직후 유엔군사령관인 스틸웰(Richard G. Stilwell) 대장은 대책회의를 주재하며 군사정전위원회에서 북한 측에 제시할 항의문 작성과 유엔군사령관이 김일성에게 보내는 서한, 그리고 미루나무를 제거하기 위한 준비를 지시하며, 상세한 내용을 미 백악관에 전달했다. 19일 미국은 북한군의 행위를 비난하며, 이 사건 이후 벌어지는 어떠한 사태에 대해서도 북한이 책임져야 할 것이라고 성명을 발표했다.
    한편 미국은 이에 따른 후속조치로 주한미군의 전투태세 강화, 오키나와의 미군 전투기를 한국으로 재배치, 미 본토의 전폭기 한국 이동 등 군사조치를 단행했다. 또한 방어준비태세 데프콘-3(DEFCON 3)을 발령했다.
    이에 대해 북한 역시 19일 17:00시를 기해 최고사령관 김일성의 명의로 전 군대와 로농적위대, 붉은청년근위대 등 북한의 모든 정규군과 예비군 병력에 대해 전투태세에 돌입하도록 명령을 하달하는 등 북한 전역을 비상체제로 돌입케 하고, 평양방송을 통해 미국을 비난하는 등 선전공세를 강화해나갔다.
    이러한 대결상태에서 유엔군 사령관 스틸웰 장군은 미루나무 절단 작전인 ‘폴 버년(Paul Bunyan)작전’을 8월 21일 실행하도록 명령하였다. 폴 버년작전은 미 2사단 병력과 한국군 제1공수특전단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시작되었다. 8월 21일 오전 6시 4분경 이들 특수임무부대가 트럭을 타고 공동경비구역으로 들어가면서 작전은 시작되었다. 7시 40분경 공병들에 의해 미루나무가 절단되었고, 8시 30분경 이 작전에 투입된 모든 병력이 철수함으로써 작전은 성공적으로 완수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평가
    팔일팔도끼만행사건은 공동경비구역[JSA]내에서 유엔군에 대해 북한군이 저지른 행위로서 1970년대 후반 북한의 대표적인 도발행위로 인식되고 있다 .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김양명
    개정 (2013년)
    이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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