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애사(愛史). 황해도 연백 출신. 편상훈(片相薰)의 셋째 아들이다.
이강년(李康秊)의 의병부대에 가담, 1907년 선봉장 겸 소모장이 되어 구국항일운동에 가담하였다.
1908년 서울 진공작전을 펴기 위해 휘하 의병부대를 인솔하고, 동해안을 돌아 강릉을 거쳐 경기도 양주에 당도했으나 일본의 대군을 만나 패하였다. 이 싸움에서 중상을 입고 태백산 본진으로 돌아가 재기의 날을 기다리던 중, 이듬해 봄 이 소식을 듣고 찾아온 큰형 편수열(片壽烈)의 권고로 귀가하였다.
1910년 평양 숭실학교를 다니면서 비밀지하운동을 전개하다, 이듬해 ‘105인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3년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영남 일대에서 동지를 모은 뒤 박상진(朴尙鎭) 등의 의병들이 조직한 광복단(光復團)에 가담, 활동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는 황해도 일대에서 맹활약하였고, 동생 편덕렬(片德烈)을 상해에 파견해 임시정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였다. 그러나 그 해 이른바 구월산주비단사건(九月山籌備團事件)에 관련되어 해주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상경하여 박영효(朴泳孝)·노심선(盧心仙)·김수장(金水長) 등과 국내 각지의 일제시설을 파괴할 것을 계획하고, 만주에 있는 각 단체와 연락을 취하기 위해 김경배(金庚培)·김태규(金泰奎)·조종호(趙鍾鎬) 등과 만주로 건너갔다.
1923년 회덕현(懷德縣) 오가자(五家子)에서 양기탁(梁起鐸)·남정(南正) 등과 의성단(義成團)을 조직, 단장으로 뽑혔다. 그 후 단원 5명과 함께 장춘(長春)에 있는 일본군을 습격하고, 봉천에서는 단원 7명과 함께 일본 헌병과 장시간 시가전을 벌여 수많은 일본군을 사살하였다.
또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통의부(統議府)·구국단(救國團)·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 등 만주에 있는 각 독립운동 단체와 서로 연락하며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 안창호(安昌浩)·양기탁 등과 만주에 있는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할 목적으로 활동 중 하얼빈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국내로 압송되어 7년 징역형을 받고, 신의주형무소에서 옥고중 척추염이 발병해 안동적십자병원에서 사망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