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광주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1601년(선조 34) 호남 유생들이 광주 제봉산(霽峯山) 아래에 사당을 건립했고, 1603년(선조 36)에 박지효(朴之孝) 등 문인과 후손들이 사액을 청해 ‘포충(褒忠)’이란 액호를 받았다.
고경명을 주벽으로 제향하고 동배위에 고종후와 유팽로, 서배위에 고인후와 안영을 배향했다. 포충사는 사액 사당으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 때에도 장성의 필암서원과 함께 훼철되지 않았던 사우이다.
1623년, 1810년, 1879년, 1919년, 1927년, 1933년에 각각 중수했고, 1978∼1980년에 현재의 사우(신사우)를 정화하였다. 사당은 앞면 3칸으로, 1고주 5량가의 맞배집이고, 동재와 서재는 정면 3칸, 옆면 1칸 반의 맞배집이다. 내삼문과 외삼문은 앞면 3칸, 옆면 1칸의 맞배집이다.
제봉(霽峯)고경명(高敬命)은 1558년(명종 13)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호남 지방에서 최초로 의병 6,000명을 모집하여 금산전투에서 순절하였다.
고경명의 장남인 준봉(隼峯)고종후(高從厚)는 1577년(선조 10) 별시문과에 급제한 뒤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 참가했으나, 아버지와 아우를 잃은 뒤 진주성전투에서 김천일(金千鎰) · 최경회(崔慶會) 등과 함께 순절하였다.
고경명의 차남인 학봉(鶴峯)고인후(高因厚)는 1589년(선조 22) 증광문과에 급제한 뒤 임진왜란 때 부형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순절하였다. 월파(月坡)유팽로(柳彭老)는 1588년(선조 21)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서 고경명군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순절하였다. 안영(安瑛, ?∼1592)은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인물이다.
소장 자료로는 〈포충사우가 褒忠祠宇歌〉(1614) 등 현판문 3매, 복호입안문서(復戶立案文書, 1592)와 고경명의 문과급제교지(1558) 등 고문서 6매, 고경명친필 마상격문(馬上檄文), 《제봉집 霽峯集》(252매), 《정기록 精氣錄》(71매) 등의 목판 493매 등의 유물이 있다. 1974년 5월 22일에 광주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