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의 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 창건되었다.
본래는 금계동 임실마을 서편에 있었으나, 1541년(중종 36) 주세붕(周世鵬)이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문묘에 참배한 뒤 그 위치가 읍에서 너무 멀고 식수(食水)가 불편하다 하여 이듬해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지었다.
1692년(숙종 18)에 군수 정증(鄭䎖)이 구지(舊址)로 옮겼다가, 1735년(영조 11) 군수 임집(任0x9C49)이 다시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었다. 1950년 6 · 25전쟁으로 양심루(養心樓)와 동재(東齋) · 서재(西齋)가 소실되었다.
1971년에 헌관실(獻官室)을 보수하고 1977년에 대성전을 중수하였으며, 1980년에 명륜당을 중건하였다. 1983년에 서무(西廡)를 보수하고 1985년에 동무(東廡)를 중수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5칸의 대성전, 7칸의 명륜당, 각 4칸의 동무와 서무, 4칸의 헌관실, 내삼문(內三門) · 관리사(管理舍)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6현(宋朝六賢), 우리 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 · 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 · 가을에 석전(釋奠:음력 2월과 8월에 문묘에서 공자에게 지내는 제사)을 봉행(奉行)하고 초하루 · 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대성전과 동무 · 서무는1985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으며, 소장전적 가운데 《풍기향교향안 豐基鄕校鄕案》 · 《향교액안 鄕校額案》 · 《교안 校案》 · 《강학소계안 講學所契案》 등은 이 지방의 향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현재 향교의 운영은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담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