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효공과 정경부인 영정은 전북특별자치도 무주 백산서원 사당에 봉안된 조선 전기의 문신 문효공 하연과 정경부인 성주이씨의 초상화이다. 시호가 ‘문효’인 하연과 그의 부인 초상화로 19세기 이모본이다. 문효공 사후 1467년에 그의 아들 하우명이 양친의 영정을 직접 그렸다. 이후 이모본들은 하우명이 그린 초상을 근거로 제작되었다. 그림 속 문효공은 청단령의 시복차림에 각대를 두르고 오사모를 쓰고 있다. 정경부인은 조바위 형태의 관모를 쓰고 비단 무늬의 저고리와 치마를 입었다. 이 영정은 조선 전기에 유행한 부부 초상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1977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현,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비단 바탕에 채색. 각 세로 138㎝, 가로 87㎝. 하연(河演)은 조선 초기 문신으로 본관은 진주이며, 자는 연량(淵亮), 호는 경재(敬齋),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부인 성주이씨(1390~1465)는 개성부윤 이존성(李存成)의 딸이다. 고려 말 정몽주의 문인으로, 1396년(태조 5) 문과에 급제한 후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1449년(세종 31)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1454년에 문종의 묘정에 배향되고, 숙종 때 진주의 종천서원(宗川書院)과 합천의 신천서원(新川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문효공의 사후 1467년 소래산(蘇萊山, 현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 옆에 영당을 지었고 그의 아들 하우명(河友明)이 양친의 영정을 직접 그려 봉안하였다. 따라서 이후 다른 영당에 봉안된 이모본들은 하우명의 필로 그린 문효공 부부의 초상을 근거로 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소래산 초상은 왜구에 의해 절도되었으나 무거워서 옮기지 못하고 소래산 암석 사이에 숨겨둔 것을 후에 후손의 꿈에 문효공이 나타나 그 위치를 알려주어 비로소 되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1608년(선조 41) 소래산 영당을 합천으로 이건하여 진상을 옮겨 봉안하였다. 1615년(광해군 7) 광해군이 영당 이름을 ‘타진(妥眞)’이라 사액하였다. 이때 타진은 진영을 편안히 봉안한다는 의미이다. 1624년(인조 2) 합천의 신천서원이 완성되어 문효공 부부를 배향하였고, 1640년에는 김류(金瑬)의 상소로 임금이 관리를 파견하여 사제(賜祭)하였다. 이후 1690년 외손인 영남관찰사 구봉서(具鳳瑞)가 타진당 진영을 개모(改模)하였다. 다시 1821년 타진당 봉안 진상(眞像)을 개모하여 오늘에 전하고 있다.
1708년(숙종 34) 문의에 우록(友鹿) 영당이 완성되어 진영을 봉안하였고, 1825년 우록영당 진상을 개모하였다. 우록영당은 1842년(헌종 8)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1718년 진주 종천서원에 제향(躋享)하였고, 1726년(영조 2) 안악에 숙청당(肅淸堂)이 완성되어 진영을 봉안하였다. 1786년(정조 10) 장연(長淵)에 반곡서원(盤谷書院)이 완성되어 안악의 숙청당의 진영을 반곡서원으로 이봉하였다. 1819년(순조 19) 타진당을 영천서원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건하여 영정을 봉안하였다.
따라서 문효공 부부 초상은 하우명이 그린 원본을 소장한 합천의 신천서원을 비롯하여, 문의 우록서원, 진주 종천서원, 장연 반곡서원 등에서 그 이모본을 봉안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무주 백산서원의 타진사는 1821년(순조 21) 창건하여 순조가 타진사 액호를 하사하여 문효공과 정경부인 성주이씨의 영정 및 위패를 봉안하였다. 그러나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으며, 이후 1905년 유림들에 의해 다시 복원되었다. 따라서 현재 백산서원에 소장된 문효공 부부의 초상도 1821년 초상을 봉안할 무렵 그려진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일본의 덴리대학[天理大學]에 소장된 『조선명현초상화첩(朝鮮名賢肖象畵帖)』 총 4권 중 제1권에는 조선시대 명현들의 초상화 290여 점과 문효공 부부 초상이 반신상으로 함께 실려 있다. 이 초상은 무주 백산서원 초상의 복식과 인물 묘사가 매우 유사하다. 따라서 백산서원 초상의 모본(模本)은 바로 『조선명현초상화첩』에 근거할 개연성이 높다.
그림 속 문효공은 흉배가 없는 청단령의 시복차림에 각대를 두르고 오사모를 쓰고 목화를 신었다. 조선시대 70세 이상의 연로한 대신들에게 하사한 의자에 앉아 양손을 소매에 넣은 공수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 옆에 새머리가 조각된 조두장(鳥頭杖)을 세우고 있다. 따라서 70세 이후 말년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정경부인 성주이씨는 문효공의 나이를 고려할 때 50대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정경부인은 위가 뚫린 조바위 형태의 관모를 쓰고 입잠을 세워 꽂았으며, 비단 무늬가 있는 저고리와 치마를 입었다. 가슴에는 붉은색 대를 둘러 두 줄로 길게 늘어뜨렸다. 겉옷은 치마 아래까지 늘어진 포를 입고 목에서 소매까지 걸치는 숄(shawl) 형태의 영건을 둘렀다. 부부 초상 배경에 안상을 배치하고 그 위로 향로, 화분 등을 배치한 것은 조선 전기 초상화의 특징이다.
조선 전기에는 부부를 함께 그려 영당에 봉안하는 것이 유행하였다. 하연 부부상 외에도 박연 부부상, 조반 부부상 등이 여러 폭 전해온다.
비록 19세기 모사본이지만, 조선 전기에 유행한 부부 초상화의 전형을 보여주며, 문효공 하연과 정경부인 성주이씨의 초상은 조선 전기 복식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