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용(金思容)은 1893년 10월 7일 경상북도 상주에서 출생하여 1941년 9월 22일 사망하였다.
경상북도 상주 출신인 김사용은 1910년 4월 휘문의숙(徽文義塾)을 제1회로 졸업하고, 5월 경상남도 동래의 구성학교(龜明學校) 교사로 부임하였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909년 10월 결성된 비밀결사인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에도 가입하였다고 한다.
1919년 서울에서 3 · 1운동에 참여하여 독립선언서를 제작, 배포하고 불온한 연설을 하였다고 하여, 출판법과 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8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증거불충분으로 면소 처분을 받았다. 1920년 2월 대구에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출신인 문상직 및 서영균 · 송정득 등과 함께 '폭탄밀조사건(爆彈密造事件)'에 연루되어 검속되었으며, 4월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 창립에도 관여하였다. 같은 해 6월 창립된 조선교육회(朝鮮敎育會) 평의원을 맡았으며, 진주에서 고등보통학교 설립 활동을 벌이는 한편, 노동공제회 진주지회 조직을 주도하였다.
1923년 3월 무장투쟁 단체인 의열단(義烈團)의 김시현 · 김지섭 · 유석현 · 황옥(黃鈺) 등이 중국에서 다량의 권총과 폭탄 등 무기를 몰래 들여와 일제의 관공서를 폭파하고 요인을 암살하려 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이때 김사용도 서울에서 황옥에게서 소형 폭탄 5개를 받아 보관하는 등 협조하였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4월에 석방되었다.
1923년 5월에는 경상도 출신 서울 유학생들로 조직된 교남학우회(嶠南學友會) 회관건축기성회의 상무위원을 맡아 경비 조달을 위하여 경상북도 일대를 순회하는 한편, 일신고등보통학교 설립후원회 실행위원도 맡는 등 교육운동에 노력하였다.
1963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