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시 ()

강릉부지도
강릉부지도
인문지리
지명/행정지명ˑ마을
백두대간의 동쪽 영동지역 중앙에 위치한 강원특별자치도의 시.
이칭
이칭
동명
정의
백두대간의 동쪽 영동지역 중앙에 위치한 강원특별자치도의 시.
개관

동쪽으로는 동해가 있고 서쪽에는 평창군 · 홍천군, 남쪽으로는 동해시 · 정선군, 북쪽에는 양양군이 인접해 있다. 동경 129°04'∼128°35', 북위 37°27'∼37°54'에 위치한다. 면적은 1,040.38㎢이고, 인구는 21만 4560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개 읍, 7개 면, 13개 행정동(39개 법정동), 146개 행정리(65개 법정리)가 있다. 시청은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홍제동에 있다.

자연환경

남북으로 달리는 태백산맥의 동쪽에 지맥이 급한 경사를 이루면서, 동해로 흐르는 남대천 남북에 분지형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고, 구정면 어단리로부터 시가지 남단부인 담산동 쪽으로 산록완사면 지형이 넓게 형성되어 있으며, 신리천, 연곡천, 사천천, 남대천, 섬석천, 군선강, 주수천 등 하천 주변에 좁은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신리천 · 연곡천 · 사천천 · 경포천 · 군선강 · 정동천 · 낙풍천과 주수천인 합류한 천 등 동해로 흘러드는 하구 부근의 평야 말단부에는 파랑의 영향이 직접 미치는 사빈과 해안사구가 발달해 있다. 특히 경포호(鏡浦湖)는 사구가 후빙기(後氷期)의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이루어진 만입(灣入)의 입구가 막혀 형성된 석호(潟湖)이다.

또 강동면의 정동진과 옥계면의 금진리 사이에는 남한에서 가장 전형적인 해안단구(海岸段丘) 지형이 형성되어 있다. 지질은 화강암 · 사암 및 셰일을 비롯하여 규암 · 슬레이트 · 결정편암 등의 암석이 분포되어 있다. 구릉지대는 풍화에 약한 화강암이 기반을 이루고 있는 반면, 배후산지는 풍화에 강한 사암(沙岩) · 이판암(泥板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북쪽에 철갑령(鐵甲嶺, 1,014m) · 두로봉(頭老峰, 1,422m) · 노인봉(老人峰, 1,338m) 등이 있고, 서남쪽 시의 경계를 따라서 제왕산(帝王山, 841m) · 능경봉(1,123m) · 고루포기산(1,238m) · 옥녀봉(玉女峰, 1,146m) · 노인봉(老人峰, 1,057m) · 노추산(魯鄒山, 1,322m) · 덕우산(德牛山, 1,009m) 등이 있다. 남쪽에 대화실산(大花實山, 1,010m) · 석병산(石屛山, 1,055m) · 자병산(873m) · 매봉산(607m) · 만덕봉(1,035m) · 칠성대(七星臺, 954m) 등이 있다.

동대산에서 발원한 연곡천(連谷川), 철갑령 부근에서 발원하는 신리천(新里川), 사천면 사기막리의 무릉담(武陵潭)과 그 북서쪽에서 발원한 사천천(沙川川), 대관령과 삽당령(揷唐嶺, 670m) 쪽에서 발원한 남대천(南大川), 강동면 어단리 완사면의 배후산지에서 발원하여 남대천과 합류하는 섬석천(蟾石川)은 동해 바다로 흘러간다. 왕산면 서쪽 남한강 지류인 송천(松川)이 남류하고, 만덕봉 부근에서 발원한 낙풍천(樂豊川)과 석병산 부근에서 발원한 주수천(珠樹川)이 하구 부근에서 합류하여 동해로 흘러든다.

기후 특징은 산맥의 급경사면이 바다와 접해 있으며, 해안선을 따라 좁고 길게 형성되어 있는 지형적 여건에 따라 위도에 비하여 겨울철은 온난하고 여름철은 비교적 시원한 편이어서 연기온의 격차가 적은 편에 속한다. 간혹 북동기류의 장시간 유입시 겨울철은 대설, 여름철은 지속적인 강우와 저온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1월 평균기온 -4.0℃, 8월 평균기온 24.6℃, 연평균기온 13.4℃이고, 연평균 강수량은 영동북부지방이 1,400㎜로 많은 편에 속하며, 영동남부지방은 1,200㎜ 정도의 분포를 보이고 있다. 비슷한 위도상의 서해안의 다른 지역과 비교하면 연평균기온이 일반적으로 높으며, 연강수량도 많은 편이다.

이 지방은 해풍의 영향을 일부 받기도 하지만, 태백산맥을 넘어 불어오는 하강풍(下降風)인 서풍계 바람의 영향을 주로 받고 있는데, 특히 겨울과 봄에 부는 서풍계의 강풍(强風, 이른바 襄 · 江之風)은 교통뿐만 아니라 대형산불 발생으로 주민생활에 큰 불편을 주고 있다.

역사

강릉토성지에서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 조각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이 시기부터 사람이 주거했던 것으로 보인다. 포남동 주거지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 시는 예로부터 예족이 살던 곳으로 서기전 129년에 위만조선에 영속되어 있었으며, 서기전 128년에 예맥의 군장인 남려가 위만조선의 우거왕을 배반하고 한나라에 귀속됨으로써 한나라 창해군의 일부가 되었다.

그 뒤 창해군은 다시 한사군의 설치로 임둔군(서기전 108)으로 되었으며 서기전 75년 낙랑동부도위가 되었다. 서기 30년에 한나라의 예속으로부터 해방되어 동예라는 새로운 자치국이 되었다. 하슬라를 두고 예(濊)의 고국(古國)이니, 철국(鐵國)⋅예국(蘂國)⋅예국(濊國)⋅하슬라국(河瑟羅國) 등의 명칭이 상용되었던 것으로 보아 하슬라는 하나의 성읍국가(城邑國家) 또는 읍락국가(邑落國家)였음을 알게 한다.

고구려와 신라의 입장에서 하슬라 지역은 동해안 지역의 전략적 요충지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397년 내물마립간 42년 7월조에 ‘분벽(北邊)의 하슬라에 한재(旱災)가 있어서 흉년이 들고 백성이 기근이 심하므로 왕은 죄수들을 놓아주고 1년 동안의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는 기사가 있다. 그 후 450년(눌지왕 34년)에는 실직지원(悉直之原)에서 군사훈련을 하고 있던 고구려의 변장(邊將)을 하슬라성주(何瑟羅城主) 삼직(三直)이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신라의 서변(西邊)을 공격하므로 왕은 말을 낮추어 그 잘못을 사과하였다. 이와 같이 하슬라는 고구려의 남하를 위한 전략요충지로서 신라는 북방진출을 위한 전초기지로서 중요성을 띠고 있어서 빈번한 충돌을 일으키고 있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강릉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명주는 본시 고구려의 하서랑(河西良) 또는 하슬라(何瑟羅)였는데 후에 신라에 속하였다. 가탐(賈耽)의 『고금군군지(古今郡國志)』에는 ‘지금 신라 북계인 명주는 대개 예의 고국’이라고 되어 있다. 『삼국사기』 지증왕 13년조에 ‘이찬 이사부를 하슬라주 군주로 삼았다’ 고 한 점으로 보아 이때부터 신라의 군사적 영역 안에 포함되었으며, 그 뒤 신라 진흥왕 때 신라의 영역으로 완전히 편입되었다. 639년(성덕여왕 6)에 하소서경으로 되어 사신이 두어졌으며, 661년(문무왕 원년) 소경이 철폐되었고 하서주로 되었다가 757년(경덕왕 16)에 명주라 명명되었다.

명주는 진성여왕대의 농민봉기를 거치면서 궁예의 세력권 안에 들어가 강릉지역 지배세력은 궁예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는데 지지기반이 되었다. 그 뒤 국가를 세우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 후 궁예가 축출되고 왕건이 왕위에 오르자 강릉세력은 왕건에게 불복하였으나 왕건은 순식(順式)을 포섭하기 위해 시랑(侍郞) 권열(權說)의 건의에 따라 당시 내원(內院)의 승려로 있던 순식(順式)의 아버지 허월(許越)을 강릉에 파견하였다. 922년(태조 5) 순식은 수원(守元)을 통해 귀부 의사를 밝혔다.

명주는 936년(태조 19) 동원경(東原京)이 되었다가, 통일을 완수한 940년(태조 23)에는 다시 명주로 환원되었다. 이후 성종대에 와서는 명주는 네 번에 걸친 빈번한 개명을 거듭하였다. 성종 2년에 하서부(河西府)라 했다가 5년에는 명주도독부(溟州都督府)로, 11년에는 다시 명주목(溟州牧)이 되었다. 또 동왕 14년에는 다시 주(州)가 되어 단련사(團鍊使)가 설치되었다. 단련사가 임명된 곳은 삭방도(朔方道)와 관내도(關內道)였는데, 이들 지역은 대체로 동계(東界)로 편입되는 곳이므로 거의 방어사(防禦使)에 준하는 군사적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1178년(명종 8)삭방도를 연해명주도(沿海溟州道)로 개칭하였고 춘주(春州)는 분리하여 춘주도(春州道)라 하였다. 그 후 1261년(원종 원년)에는 몽고의 침입 시에 국왕을 보필한 공신(功臣) 김홍취(金洪就)의 고향이라 하여 명주를 경흥도호부(慶興都護府)로 승격시켰다. 1263년(동왕 4년)에는 경흥도호부를 강릉도로 개칭하였다. 1308년(충렬왕 34)에 강릉부(江陵府)로 되었다가, 공민왕이 즉위하면서 왜적의 침입이 빈번해지자 김유(金庾)를 강릉도병마사(江陵道兵馬使)에 임명하였다. 1364년(공민왕 13)에는 제도(諸道)의 자제를 뽑아 8위(衛)에 보충시켜 상번(上番)케 하였으나 강릉도의 자제만이 그 도에 주둔케 하여 동북면(東北面)을 방위토록 하였다. 1389년(공양왕 원년)에는 강릉부를 강릉대도호부(江陵大都護府)로 승격하고 별호(別號)를 임영(臨瀛)이라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강릉대도호부가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1413년(태종 13)에 전국이 8개의 도로 나뉘면서 강원도란 명칭에 소속되었다. 1666년(현종 7)에 박옥지(朴玉只)가 자기 부친을 생매장한 데 따른 벌로써 강릉이 현으로 강등되고 도명도 원양도로 바뀌었다.

1675년(숙종 원년) 다시 강릉대도호부로 승격되었으나 1782년(정조 6) 대역부도의 역명사건 가담자인 이택징(李澤徵)의 고향이 강릉이라는 이유로 다시 현으로 강등되었고 도명도 원춘도로 바뀌게 되었으며, 7년 후인 1789년에 다시 강릉대호부로 복원되었다.

1895년(고종 32) 관제개혁으로 관찰부가 설치되었다. 1년 후인 1896년에 전국의 23개 부가 13개 도로 개정되었다. 이 때 강릉은 군으로 바뀌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북일면 · 북이면 · 남일면이 통합되어 군내면이 설치되었으며, 1916년에 군내면이 강릉면으로 개칭되었다. 1920년 11월 1일성남면 · 덕방면 · 자가곡면 일부가 병합되어 성덕면으로 개편되었고 하남면의 일부가 정동면에 편입되었다.

1931년 강릉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38년 9월 1일정동면이 경포면으로 개칭되었다. 1940년 11월 1일신리면이 주문진읍으로, 1942년 10월 1일망상면이 묵호읍으로 승격되었다.

1955년 9월 1일 강릉읍과 경포면, 성덕면이 병합되어 강릉시로 승격하였다. 당시의 강릉시 행정구역은 38개 동 489개 반이었다. 이와 동시에 강릉군이 명주군으로 개칭 · 분리되었고, 1980년 4월묵호읍이 동해시에 편입되었다. 1983년 2월 15일구정면 언별리가 강동면으로, 구정면 산북리가 성산면으로, 연곡면 방내리 일부가 주문진읍으로 각각 편입되었다. 1989년 1월 1일명주군 강동면 운산리가 강릉시 운산동으로 개칭되었으며, 1995년 1월 1일 도농통합에 의하여 강릉시와 명주군이 통합되어 강릉시가 되었다. 1998년 소규모 동의 통폐합과 행정조직의 구조조정 차원에서 10월 1일중앙동과 임당동을 중앙동으로, 장현 · 노암 · 월호평동을 강남동으로, 입암동과 두산동을 성덕동으로, 유천 · 죽헌 · 운정 · 저동을 통합하여 경포동이라 하였다. 2001년 12월 17일에는 강릉시 홍제동로 청사를 신축 이전하였다.

유물 · 유적

1998년 조사된 강릉시 시대별 문화재 현황은 다음과 같다. 강릉시 강동면 심곡리에서 조사된 구석기유적 1개소가 있으며, 이후에는 조사 보고된 지역으로는 남대천 북쪽 구릉지대인 홍제동에서도 몸돌이 발견된 바 있고 그 뒤 1999년∼2000년 조사에서 옥계면 현내리 · 주수리, 내곡동 등에서도 많은 구석기시대석기가 발견되었다.

신석기유적으로는 주문진 장덕리, 연곡면 송림리, 동덕리, 영진리, 사천면 판교리, 가둔지, 안현동, 유천동, 지변동, 홍제동, 강동면 하시동리, 옥계면 금진리 등 19개 지역에 분포해 있다.

청동기 유적으로는 주문진읍 향호리, 장덕리, 교항리, 연곡면 송림리, 방내리, 동덕리, 사천면 석교리, 판교리, 미노리, 덕실리, 방동리, 방동상리, 가둔지, 산대월리, 안현동, 저동, 난곡동, 유천동, 교동, 홍제동, 내곡동, 장현동, 입암동, 강동면 하시동리, 모전리, 옥계면 현내리, 천남리 등 87개 소에 분포해 있으며 주로 유적과 고인돌이 산재해 있다.

유적지로는 주문진읍 교항리, 주문리, 연곡면 동덕리, 방내리, 영진리 저동, 죽헌동, 성산면 보광리, 교2동, 송정동, 구정면 학산리, 어단리, 초당동, 강문동, 두산동, 병산동, 운산동, 강동면 안인리, 정동진리, 옥계면 금진리, 주수리 등 39개 지역으로 유물산포지, 고분, 탑, 석조물, 사찰 등이 분포해 있다.

이중 방내리 삼층석탑(강원도 유형문화재, 1971년 지정), 영진리 고분군(강원도 기념물, 1981년 지정), 죽헌동 강릉오죽헌시립박물관 내에 보관되어 있는 강릉 석불입상(강원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과 옥천동 석탑재(강원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성산면 보광리 명주군왕릉(강원도 기념물, 1971년 지정), 화부산사(강원도 유형문화재, 1977년 지정), 대창리 당간지주(보물, 1963년 지정)와 수문리 당간지주(보물, 1963년 지정), 보광리 석조여래좌상(강원도 유형문화재, 1992년 지정), 하시동 고분군(강원도 기념물, 1973년 지정), 굴산사지(사적, 1963년 지정), 굴산사지 당간지주(보물, 1963년 지정)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시대 유적으로는 강릉시 저동에 있는 경포대(보물, 2019년 지정), 강릉오죽헌시립박물관 소장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보물, 2017년 지정), 강릉향교(강원도 유형문화재, 1963년 지정), 강릉대도호부 관아(사적 1994년 지정), 임영관 삼문(국보, 1962년 지정), 옥천동 은행나무(강원도 기념물, 1993년 지정), 대공산성(강원도 기념물, 1979년 지정), 보현사 낭원대사탑(보물, 1963년 지정), 낭원대사탑비(보물, 1963년 지정), 관음리 오층석탑(강원도 유형문화재, 1992년 지정), 신복사지 석조보살좌상(보물, 1963년 지정), 신복사지 삼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굴산사지승탑(보물, 1963년 지정), 등명사지 오층석탑(강원도 유형문화재, 1971년 지정), 산계리 석탑(문화재 자료, 1984년 지정) 등이 있다. 이중 1993년 강원도 기념물로 지정된 옥천동 은행나무는 조선 초기에 식수된 것으로 전해진다. 따라서 고려조 유적은 24건이다.

조선시대 유적으로는 115건이 있는데, 고목, 충효비, 정각, 사찰, 요지, 사묘, 고가, 전적류, 무형문화재, 관아건물 등 다양한 유형들이 분포해 있다. 강릉 장덕리 은행나무(천연기념물, 1964년 지정), 박치규 가옥(강원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 조옥현 가옥(강원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 선교장(중요민속문화재, 1967년 지정), 강릉 수리골 고택(강원도 유형문화재, 1985년 지정), 해운정(보물, 1963년 지정), 오죽헌(보물, 1963년 지정), 이이 수고본 격몽요결(보물, 1976년 지정), 이씨분재기(강원도 유형문화재, 1971년 지정), 벼루와 토지양여서로 구성된 율곡유품(강원도 유형문화재, 1971년 지정), 옥산서병(강원도 유형문화재, 1971년 지정), 신사임당 초서병풍(강원도 유형문화재, 1973년 지정), 강릉 비석군(강원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명안공주 관련유물(보물, 1995년 지정), 귀부(강원도 문화재자료, 1963년 지정), 신사임당 초충도병(강원도 유형문화재, 1971년 지정), 매창 매화도 및 옥산 국화도첩(강원도 유형문화재, 1971년 지정), 금란정(강원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호해정(강원도 유형문화재, 1979년 지정), 방해정(강원도 유형문화재, 1976년 지정), 강릉 초당동 고택(강원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 보광리 분청자요지(강원도 기념물, 1994년 지정), 함대식 가옥(강원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 회암영당 주희영정(강원도 유형문화재, 1986년 지정), 난설헌시집 목판초간본(강원도 유형문화재, 1998년 지정), 강릉향교 대성전(보물, 1963년 지정), 향현사(강원도 유형문화재, 1971년 지정), 계련당(강원도 유형문화재, 1973년 지정), 강릉 오금집(강원도 유형문화재, 1985년 지정), 강릉농악(국가무형문화재, 1985년 지정), 문무잡과방목(보물, 1976년 지정), 강릉 효자리비(강원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용지(강원도 기념물, 1971년 지정), 보진당(강원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보현사 대웅전(강원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상임경당(강원도 유형문화재, 1976년 지정), 임경당(강원도 유형문화재, 1974년 지정), 칠사당(강원도 유형문화재, 2021년 지정), 김윤기 가옥(강원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 조수환 가옥(강원도 유형문화재, 1985년 지정), 강릉 추산 고택(강원도 유형문화재, 1985년 지정), 운산리 은행나무(강원도 기념물, 1979년 지정), 강릉 시호 고택(강원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 오봉서원(강원도 유형문화재, 1973년 지정), 강릉 만성 고택(강원도 유형문화재, 1985년 지정), 강릉 조철현 가옥(강원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 남진용 강릉 모학당 고택(강원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 대관령 성황사 및 산신각(강원도 기념물, 1984년 지정), 송담서원(강원도 유형문화재, 1973년 지정)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관리 보존되고 있다.

근대유적으로는 고가, 사찰, 사묘, 충효비, 기념비 등이 있다. 최선평 가옥(강원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 강릉 운파 고택(강원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 김윤기 가옥(강원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 경양사(강원도 유형문화재, 1977년 지정), 황산사(강원도 유형문화재, 1977년 지정), 강릉 반송댁(강원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 오성정(강원도 유형문화재, 1974년 지정), 강릉 동은 고택(강원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이밖에도 봉수, 사찰, 성지 등 연대미상의 유적들이 다수 있다. 청학동 소금강(명승, 1970년 지정), 금강산성(강원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강릉 경포대와 경포호(명승, 2013년 지정), 강릉단오제(국가무형문화재, 1967년 지정), 강릉 산계리 석탑(강원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학산오독떼기(강원도 무형문화재, 1988년 지정), 옥계굴(강원도 기념물, 1980년 지정), 강릉 서대굴(강원도 기념물, 1980년 지정), 강릉 동대굴(강원도 기념물, 1980년 지정), 강릉 비선굴(강원도 기념물, 1980년 지정), 강릉최씨 동원군 종택(강원도 문화재자료, 2005년 지정), 산계리 금옥계 방역사적비 및 종선비(강원도 문화재자료, 2000년 지정), 용연사 석탑(강원도 문화재자료, 2006년 지정), 강릉 사천 하평 답교놀이(강원도 무형문화재, 2003년 지정), 방짜수저장(강원도 무형문화재, 2003년 지정) 등이 지정되어 있다. 2000년대 초반 강릉전통문화도시 조성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던 옛 관아지 복원 사업으로 2006년 10월 2일 1차로 임영관지 복원사업이 완료되었으며, 2012년 2차 복원사업이 완료되어 사적공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교육 · 문화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으로는 1313년(충선왕 5)에 창건된 강릉향교가 있다. 이 향교는 당시 강릉도 존무사인 김승인(金承印)이 화부산 아래에 설립한 것으로서, 조선시대에 여러 차례 중건되고 확장되어, 지금까지도 잘 보전되고 있다.

서원으로는 오봉서원(五峰書院)과 송담서원(松潭書院)이 있다. 오봉서원은 1562년(명종 16)에 전 부사 함헌(咸軒)과 도경(蹈景) 최운우(崔雲愚)를 비롯한 향원(鄕員)의 향론과 강릉부사 홍춘년(洪春年)과 도백(道伯) 윤인서(尹仁恕) 등의 협조를 얻어 건립되었다. 오봉서원은 공자의 진영을 봉안하고 있으며, 공자의 진영은 1556년(명종 11) 칠봉 함헌이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을 때, 오도자(吳道子)의 수화(手畵)인 공자진영을 가지고 와서 이곳에 봉안하였다. 오봉서원은 사액서원(賜額書院)은 아니었지만, 공자의 진영을 봉안한 강원지방의 유일한 서원이었으므로 1681년(숙종 7)에 위전(位田) 3결과 모속인(募屬人) 20명을 하사받았다. 1782년(정조 6) 주자의 영정을 봉안하였고 1831년(순조 32)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1882년(고종 19) 칠봉 함헌의 공을 추모하여 별원(別院)인 칠봉사(七峯祠)를 짓고 봉사하였다. 1868년(고종 5) 전국의 사액서원을 제외한 서원철폐령으로 오봉서원도 철폐되었으며, 서원 철폐령으로 공자의 영정은 강릉향교에 옮기고 주자의 영정은 경기도 연천의 임장서원(臨漳書院)에 돌려보냈다. 그리고 송우암의 영정은 청주의 후손에게 보냈다. 아울러 오봉서원의 서책, 전지, 노비 등 재산은 강릉향교에 이속되었다.

1902년 사림들에 의해 오봉서원의 옛터에 단을 설치하고 다례를 봉행하였고, 1914년에 집성사(集聖祠)를 중건했으며, 1916년에는 석단과 담장을 쌓고 묘정비(廟庭碑)를 중건하였다. 1928년에는 집성사 우측에 칠봉사를 중건하고 우측 담장 밖에 강당도 건립하였다.

송담서원(松潭書院)은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배향하는 서원으로 석천묘(石川廟)에서 시작되었다. 석천묘는 1592년(선조 24) 사인(士人) 김경시(金景時) 등의 발의로 서원 건립을 위한 공론이 모아졌으나 임진왜란으로 성사되지 못하였으며, 1617년(광해군 9) 다시 논의되었으나 난정(亂政)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석천묘의 건립은 처음으로 발의된 지 20여년이 지난 1624년(인조 2) 전 공조참의 김몽호(金夢虎)와 이상필(李尙馝) 등 30여명의 향론이 다시 모아짐으로서 추진되었으며, 강원감사 윤안성(尹安性)과 강릉부사 강주(姜紬)의 협조를 얻어 6년간의 공정으로 1630년에 완공되었다. 석천묘 건립 당시의 위치는 구정면 학산리 왕현(王峴)이었다. 1652년(효종 3) 강원감사 김익희(金益熙)와 강릉부사 이만영(李晩榮)의 협조를 얻어 현재의 위치인 구정면 언별리로 이건되면서 그 명칭이 ‘송담서원’으로 개칭되었다. 1659년(효종 10) 12월에 사액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고, 다음 해인 1660년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었고, 서원이 소유하고 있던 재산은 강릉향교로 이관되었다. 이후 도사(都事) 권학수(權學洙)가 신의계(臣義契)를 조직하여 다례를 지내다가 1905년 옛터에 묘우 1칸을 세우고 송담재(松潭齋)라 하였다. 현재의 서원은 1971년에 건립된 묘우 6칸, 1976년에 건립된 동재 6간, 1978년에 건립된 서재 6칸으로 그 규모를 갖추고 있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1908년에 선교장 구내에 설립된 동진학교, 초당동에 설립된 영어학교(일명 초당학교)가 있다. 강릉향교에서는 1909년(순종 3)에 화산학교(1911년 폐교), 1911년에 잠업전습소가 설립되었다. 이 밖에도 1928년에 강릉공립농업학교가, 1938년에 강릉공립상업학교가, 1940년에 강릉공립여자학교가 설립되었다가, 현재의 위치로 이설되었다.

1949년에는 향교 구내에 강릉명륜중학교가 설립되어, 현재의 강릉명륜고등학교로 발전되었다.

2015년 현재 강릉시 관내 초등학교는 37개 교, 중학교는 강릉중학교를 비롯한 12개 교, 고등학교는 강릉고등학교를 비롯한 11개 교, 특수학교1개 교가 있다. 기타 강릉교육청 산하 교육기관으로는 주문진읍 교항 1리에 위치한 명주도서관, 폐교시설을 활용한 성산초등학교 보광분교의 보광체험학습장이 있다. 강원도 산하기관으로 강원예술고등학교가 강릉시 구정면 제비리에 자리잡고 있다. 대학으로는 전문대학인 사립 강릉영동대학, 도립 강원도립대학이 있고, 4년제 대학으로는 국립인 강릉대학교와 사립인 관동대학교가 있다.

1965년 설립된 강릉문화원은 강릉지방 유무형 전통문화를 체계적으로 조사 · 발굴하여 보존계승하는 전통문화단체이다. 특히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강릉단오제를 주관하면서 2005년 유네스코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시켰다. 또 전통문화강좌인 임영향토문화학교, 청소년문화체험, 외국인주부문화체험, 전통문화유산의 문화콘텐츠화 등에 주력하고 있다. 1963년 설립된 사단법인 한국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 강릉지부는 대현이율곡선생제전 백일장, 사생대회,서예휘호대회 등을 주관하고 있으며, 1971년 부터 영동종합예술제를 매년 개최하고 있다. 1991년부터는 애향심포지엄을 개최하고 있으며, 1993년부터는 예술문화학교를 개설 운영하고 있다. 2001년 강릉예총 청소년 예술단을 창단하였고, 2002년 동아시아 청소년 예술출전을 개최하고 있다. 강릉문화예술진흥재단은 문화예술 진흥을 통한 자치단체의 경쟁력 제고를 위해 전국 기초자치단체 가운데 최초로 설립됐다. 재단 설립은 재일교포 故 박준용이 "강릉과 평창 일대의 땅을 강릉지역 문화발전을 위해 쓰여지기 바란다"는 유언을 남겼고 1996년 부인 김순자와 아들 박평조 등 유족들은 고인의 유지를 이어달라며 강릉시에 상속 재산인 토지를 기탁했다. 강릉시는 토지를 매각, 현금 10억원을 마련, 재단 설립을 서두르던 중 대원그룹 박도문회장(제1대 이사장)이 자산평가 10억원 상당의 규사광 광업권을 기탁, 총 20억원 자산규모로 1998년 11월 3일 재단 설립 등기를 모두 마쳤다. 재단 사무국은 1999년 8월 설치됐고 2000년 7월강릉시부터 강릉문화의 집을 위탁받아 운영하기 시작했다. 강릉문화예술진흥재단은 전통문화예술의 전승과 현대문화예술의 창작보급과 지원, 향토사의 조사, 연구와 사료의 수집보존과 지원, 지역문화예술에 관한 자료수집, 국내외 교류와 지원, 지역문화행사의 개발 · 개최 및 지원, 지역문화에 관한 사회교육활동과 지원, 문화예술인의 후생복지증진을 위한 사업과 지원, 지역 문화예술의 육성발전을 위한 시설의 건립 · 보수 · 지원 등의 업무를 추진하고 있다.

1977년에 설립된 사임당교육원에서는 전국의 여성들에게 사임당의 얼과 덕성을 현대적으로 발전시켜 전수하고 있다.

박물관으로는 강릉오죽헌시립박물관, 대관령박물관, 관동대학교 박물관, 강릉대학교 박물관, 하슬라아트월드. 소리박물관, 시계박물관, 산불방지홍보관, 강릉시청 홍보전시관, 강릉시청 행정역사관 등이 있으며, 전시관으로는 강를문화예술관, 강릉시립미술관 등이 있다.

기타 교육 및 문화시설로는 도서관으로 강릉시립중앙도서관, 평생교육정보관, 명주도서관, 종합공연장, 일반공연장, 소공연장, 영화관, 미술관, 화랑, 복지회관, 강릉관노관극, 강릉학산오독떼기, 강릉 하평답교놀이 전수회관 등이 있다.

체육시설로는 종합운동장, 빙상장, 승마장, 실내체육관 등이 있다. 청소년수련시설로는 수련장과 야영장이 있다.

민속

이 지방의 특이한 민속놀이로는 구정면 학산리의 짱치기놀이 · 고비고사리꺾기 등이 있다. 짱치기놀이는 여러 사람이 편을 갈라서 각기 1∼1.5m 가량의 나무막대기를 가지고 나무공을 쳐서 상대방 문방(門房)으로 넣는 놀이다. 이 놀이는 산에 갔던 나무꾼들이 두 패로 편을 나누어, 쉬는 틈을 이용하여 지게 또는 나뭇짐을 문방으로 만들어놓고 하던 놀이다.

고비고사리꺾기놀이는 초동(樵童)들이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쉬는 틈이나 나무를 해가지고 마을로 돌아오는 도중에 묘를 중심으로 손을 마주잡고 원을 그리면서 노래를 부르고 노는 놀이로서 다른 지방의「강강술래」와 비슷하다. 노랫말은 “신령산 신령산 고비고사리 꺾으러 가세/이 고사리 꺾어서 무엇을 하나/이 고사리 꺾어서 우리 부모님 봉양하지.”인데, 여기에서는 효를 장려하는 뜻이 담겨져 있다.

현재 전승되는 대표적인 민속놀이는 강릉단오제의 서낭제 탈놀이의 하나인 관노탈놀이와 강릉농악의 홍제동 농악놀이가 있다. 이 둘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2003년 강원도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강릉사천하평답교놀이는 마을에 일년 내내 우환이 생기지 않고 풍년들기를 기원하는 뜻으로 음역 2월 초엿새 좀상날이 되면 다리밝기와 횃불놀이를 즐겼다, 저녁이 되면 마을 사람들이 다리에 횃불을 들고 모여 그 해 농사가 잘되기를 빌고 마을의 안녕을 비는 다리밟기 농악이 함께 전승되고 있다. 사천 하평에서 행하는 다리밟기 · 횃불놀이 등이 하평교 위에서 펼쳐진다. 강릉에서는 좀상날 여러 자연부락 단위의 마을에서 다리굿, 다리밟기(답교), 쇠절금, 돌싸움(석전), 횃불싸움 등의 놀이가 행하여 졌다. 특히 송정마을과 초당마을, 사천 하평마을과 진리의 좀상날 답교놀이는 유명하다. 좀생이날 저녁에 사천천을 중심으로 진리와 하평을 사이에 두고 형성된 두 마을은 사천천에서 좀생이날 풍년기원의식 놀이인 다리굿, 다리밝기, 돌싸움, 횃불싸움 등의 여러 놀이를 통하여 승부를 갈라 한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민속놀이를 해온 것에서 유래한다.

이 고장의 대표적인 동제로는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강릉 단오제가 있다. 대관령국사서낭당을 주신으로 모시는 이 단오제는 풍농과 풍어, 행로안전 및 태평을 기원하는 동제이다. 우암진(牛巖津)의 별신굿 · 안인진의 해랑제(海娘祭), 주문진의 성황제(城隍祭)가 있다.

우암진의 별신굿은 풍어와 안전조업을 기원하는 굿으로, 도무당이 주가 되어 마을에 굿당을 설치하고 서낭신에게 제사지낸다. 먼저 봉화대에서 성황당에 신대를 잡혀 청신한다. 성황당은 돌담으로 쌓아놓았으며 뚜렷한 신명이나 위패는 존재하지 않는다. 신간을 들고 굿당에 내려와 모셔놓고 사흘간에 걸쳐 19거리의 굿을 한다.

19거리는 부정굿 · 청좌굿 · 당맞이굿 · 화해굿 · 조상굿 · 세존굿 · 성주굿 · 군웅굿 · 천왕굿 · 삼신굿 · 심청굿 · 거진굿 · 손님굿 · 제면굿 · 용왕굿 · 꽃놀이굿 · 뱃놀이굿 · 등놀이굿 · 거리굿의 순서로 진행된다. 이 가운데 심청굿이 가장 활발하고 성대하다.

안인진의 해랑제는 바닷가에 있는 봉황산 중턱의 골매기서낭당과 정상의 해랑당에서 지낸다. 골매기서낭당이라 불리는 할아버지 서낭당에는 세 개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데, 가운데는 성황지신위(城隍之神位), 양쪽 옆에는 토지지신위(土地之神位), 여역지신위(癘疫之神位)가 있다.

해랑당에는 오른쪽에 김대부지신위(金大夫之神位), 왼쪽에 해랑지신위(海娘之神位)가 나란히 모셔져 있다. 제사는 일년에 두 번 지내는데, 음력 정월보름과 9월 9일로 정해져 있다. 지금은 간소하게 지내며, 골매기서낭에게 먼저 지내고 난 다음에 해랑신에게 지낸다.

주문진성황제는 일년에 두 번 음력 3월 10일과 9월이나 10월에 굿을 했는데, 지금은 삼년에 한 번 하고 대신 일년에 두 번 제사를 지낸다.

서낭당에는 바다를 향한 언덕 정상에 큰 서낭당(할아버지 서낭당)이 있고, 조금 아래쪽에 작은 서낭당이 있다. 큰 서낭당에는 위패가 없고 의자에 갓을 쓴 성황이 동자와 시녀 둘을 거느리고 앉아 있는 화상이 있다. 작은 서낭당에는 비석이 서 있으며, 성황지신위(城隍之神位)라고 쓰여 있다. 굿은 외부에서 무당을 초치해서, 큰 서낭에서 먼저 지내고 작은 서낭으로 옮겨서 지낸다. 축을 한 굿 끝머리에 가서 고기를 많이 잡게 해달라고 축수한다. 제사를 지낼 때도 같은 순서로 진행한다.

이 밖에도 강릉 단오제와 진또배기놀이를 하는데 진또배기는 장대 위에 세 마리의 오리를 올려놓고 매년 세 차례의 제를 지내는 데서 유래되었다.

설화 · 민요

이 지방에는 범일국사(梵日國師)와 학(鶴)바위전설, 해령사전설(海靈祠傳說), 양명(揚名)을 할 수 있는 묘터전설, 진이성황당전설, 범에 얽힌 이야기 등의 인물전설, 지명연기전설, 당제유래담 등이 전해온다.

범일국사와 학바위전설은 다음과 같다. 옛날 학산(鶴山)마을의 한 처녀가 아침에 굴산사(屈山寺)에 있는 석천(石泉)에 가서 바가지로 물을 뜨니, 물속에 해가 떠 있었다. 처녀가 그 물을 마신 뒤 태기가 있어서 옥동자를 분만하였다.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낳은 것을 망발이라 여겨, 아이를 강보에 싸서 뒷산에 버렸는데 뜻밖에도 학들이 아이에게 조그맣고 새빨간 구슬을 입에 넣어 먹여주고 품고 있었다.

이로 인해 마을사람들은 그 아이가 하늘이 점지하신 아이라고 믿어 키우니, 뒤에 자라서 경주에 가서 불경을 공부하여 범일국사가 되었다. 그 이름이 중국에까지 알려졌고, 학들이 아이를 보호해준 곳의 바위는 학바위로 불리게 되었다 한다. 지금도 석천과 학바위가 남아 있다.

해령사전설은 400여 년 전 이모(李某)라는 강릉부사가 관기들을 거느리고 유람 겸 소풍을 해령산으로 나왔다가 그네를 매달아놓고 관기들에게 그네뛰기를 하도록 했는데, 그네줄이 끊어지면서 관기 하나가 바다 속으로 떨어져 시체마저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부사가 마을 사람들에게 그 기생의 넋을 달래기 위한 춘추제(春秋祭)를 지내주도록 하였다.

그런데 그 뒤로 해마다 흉어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동네 사람들은 아무리 귀신이라도 짝이 있어야 된다고 하여 나무로 남근(男根)을 깎아 매달아놓고 제를 지냈다. 그랬더니 그 때부터 고기가 잘 잡혔다고 전한다.

1930년경 강동면 안인진 구장 김천오(金千五)의 부인 장씨가 정신이상이 생겨 자정만 되면 해령산(海靈山)으로 오르내리면서 김씨를 배우자로 얻었다고 하여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달라고 하였다. 그 말을 좇아 김대부지신(金大夫之神)이라고 쓴 위패를 모시고 의식을 행하니 과연 구장부인은 제 정신이 돌아왔다.

이와 같이 신들이 부부지간이 된 뒤로는 남근을 달고 제를 지내지 않게 되었다. 이 때의 김대부지신은 이 곳 바다에서 익사한 강릉김씨 판결사 만호공이 신격화된 것으로 본다. 안인진에는 그의 이름을 딴 자락바위가 있어 전설을 구상화시키고 있다.

양명할 수 있는 묘터전설은 다음과 같다. 옛날 조형익(趙亨翼)이라는 사람이 양명할 수 있는 명당자리인 묘지를 구하려고 택지사를 데리고 한 곳에 이르렀는데, 택지사가 이곳은 명당 터이기는 하지만 세 명의 자손이 호랑이에게 물려간 뒤에 과거에 급제할 자손이 나오겠다고 하였다. 조형익은 자손에게 호환이 오는 것이 두려워 묘를 못 썼는데, 강릉의 김씨 성을 가진 어떤 사람이 이 소문을 듣고 자기 아버지를 모시니 과연 세 사람이 호환을 당한 뒤 급제자가 나왔다.

진이성황당전설은 미색을 좋아하는 연곡현감이 주문진을 순시하던 중 해초를 따던 진이라는 처녀의 미모에 혹하여 수청들기를 요구하자 진이는 아이를 낳고 자살하였다. 그런 일이 있던 다음해부터 배가 바다에 나가면 풍파를 만나 피해를 입었다. 얼마 뒤 정우복이라는 현감이 부임하여 진이의 혼을 달래는 제를 지내고 위패를 모시니, 다시 배가 안전하게 다닐 수 있게 되고 고기잡이도 풍어를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경포호전설은 과거 경포호수는 호수가 아니고 그 자리에 큰 부자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하루는 그 부잣집에 중이 와서 동냥을 청하자 주인이 외양간을 치우다가 중에게 거름을 한 삽 퍼서 던져 버렸다고 한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그 집 며느리가 중을 따라 와서 시아버지의 무례함을 빌며 용서를 청하며 중을 따라갔다. 이때 중이 “잠시 뒤면 집이 물에 잠길테니깐 돌아보지 말고 나를 따라 나가라” 하고서는 사라졌다. 이 말은 들은 며느리가 겁이 나 집에 두고 온 딸과 가족들을 걱정하던 참에 “꽝”하는 소리에 집이 물에 잠겼고 이내 호수가 되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강감찬(姜邯贊)장군과 호랑이의 내기바둑이야기, 권성두(權星斗)장군의 호랑이 잡은 이야기, 용금정(湧金井)전설, 할미바위전설 서출지전설 등이 전한다.

이 고장에 전하는 대표적인 민요로는 농가인「오독떼기」가 있다. 이것은 불교적 정서가 담긴 음곡(音曲)으로 명주 · 강릉을 비롯하여 여러 곳으로 전파된 전통적인 향요이다. 이 노래에 대한 내력은 신라의 화랑도들이 부르던 노래가 곡조만 살아서 내려왔다는 설과 다섯 번을 꺾어서 부르기 때문에 오독떼기라고 하였다는 설, 동서남북 중앙의 오독(五瀆)을 떼기[開拓]한다는 뜻에서 생겼다는 설 등이 있다. 이 노래는 『삼국사기』 「악지(樂志)」에 나오는 하서군락(河西郡樂)인 덕사내(德思內)가 아닌가 한다.

이 민요는 명주지방 일대와 강릉지방에서 지역적으로 냇골오독떼기 · 수남오독떼기 · 하평오독떼기 등 셋으로 나뉘는데, 이곳의 오독떼기는 냇골오독떼기에 속하며 자진가락으로 되어 있다. 부르는 방식은 한 사람이 메기면 다른 사람이 얹는 식으로 2부 합창 형식으로 행하는데, “남문을 열고 파래를 치니/계명산천 밝아오네/강릉이라 남대천물에/빨래망치 둥실떴네/매어주게 매어주게/욱신욱신 매어주게/지어가네 지어가네/점심참이 지어가네/요질을 매고 저질을 매고/님의 손길 매어주게/오늘해도 건주를 갔네/골골마다 정자졌네.”의 가사로 되어 있다.

또 다른 민요조로는 「영산홍」이 있다. 이것은 대관령국사성황(大關嶺國師城隍)을 모시고 내려오면서 즐겁게 해주기 위해 부른 민요창 비슷한 신가(神歌)로써, 민요조로 유입 · 융화하여 영산홍이라 불렸다. 이것은 “꽃밭일레 꽃밭일레/사월 보름날 꽃밭일레/기화자자 영산홍/이히야아 헤∼/에헤야 어헤야얼사 기화자자 영산홍”의 가사로 되어 있다.

이 밖에 「오독떼기」와 함께 부르거나, 논에서 김매기가 끝날 무렵 둥글게 모여들며 쌈을 싸듯이 마지막을 장식하는 싸대, 「오독떼기」 · 잡가 등과 함께 부르는 「사리랑」, 벼를 벨 때 부르는 벼베기 흥조[불림], 「타작노래」, 「놀량사거리」 등이 있는데, 이 고장 특색은 대체로 노동적 · 집단적 특색이 농후한 민요가 많다.

산업 · 교통

영동지방의 정치 · 경제 · 문화 · 교육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천혜의 자연조건과 수많은 유무형의 문화유산을 간직한 전국적인 관광지이므로 3차 산업이 활발하다. 즉, 산업별 구조를 보면 3차 산업, 1차 산업, 2차 산업 순이다. 즉 지역 경제구조가 제조업보다는 관광산업 위주의 서비스업에 치중해 있음을 말한다. 남대천을 비롯하여 연곡천 · 주수천 · 사천천 등과 그 지류들에 의해 이루어진 기름진 평야지대가 비교적 넓게 분포하고 기온이 온난하며 강수량이 많아 농업이 활발하다.

경지면적이 논 51.82㎢, 밭 51.98㎢로 총 103.8㎢이며, 농업인 인구는 1만 7416명으로 시 전체 인구의 약 10%를 점유하고 있다. 그러나 가구당 경지면적은 0.1㎢를 약간 상회하는 수준으로 왕산 등 일부고랭지 지역을 제외하면 0.3㎢ 이상 소유농가의 비중이 극히 낮은 실정으로 영세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 · 옥수수 · 메밀 · 수수 · 콩 · 팥 및 감자 등이다. 해발 700m 이상의 산간지역에서는 채소, 감자 등 가격변동이 심한 작목을 주로 재배하고 있다.

한우는 409농가에서 8,169두를 사육하고 있으며, 젖소는 13농가에서 864두를 사육, 돼지는 27농가로 72,102두를, 닭은 764농가 20만 8787수이며, 사육농가수는 감소추세를 보이고 있다.

임야면적은 837.75㎢로 시 면적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주요 임산물은 밤 · 대추 · 버섯 · 산나물 등이다.

강릉시는 해안선 길이가 48.3km로 근해에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여 어족이 풍부하였으나 어족자원의 고갈과 기후 변화로 어획량은 매우 부진한 상태이다. 따라서 어업인구도 계속 감소 추세에 있다. 항포구는 11개항으로 국가어항 3개, 지방어항 2개, 어촌정주어항 3개, 소규모 어항 3개가 있다.

강동 · 왕산 · 옥계면 등지에서 무연탄이 생산되었으나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에 의하여 쇠퇴되었다. 석회석이 옥계면, 규사가 주문진읍에서 생산된다. 공업은 선박수리 · 제빙 · 제사 · 수산가공업 등이 있다. 공업단지로는 목재 및 나무제품, 비금속 및 금속광물제품, 자동차 정비 등을 주로 담당하고 있는 입암동에 강릉공업단지가 1983년부터 가동되고 있으며, 주문진읍 교항리에 주문진 농공단지가 1989년에 준공되어 가동되고 있다. 2008년강릉시 대전동과 사천면 일대에 50만평 규모의 강릉과학산업단지가 조성되었다.

상업활동은 예로부터 이루어져 1770년대 시내에는 강릉부내장이 2 · 7일에, 연곡장이 3 · 8일에, 우계장이 4 · 9일에 개설되어 거래가 이루어졌고, 이는 1830년대까지 이어졌다. 1912년에는 3개 시장이 증가하여 강릉 읍내장이 2 · 7일에, 옥계면의 옥계장이 4 · 9일에, 연곡장이 3 · 8일에, 묵호읍의 묵호장이 5 · 10일에, 주문진읍의 주문진리장과 성산면의 구산장(邱山場)이 1 · 6일에 개설되었고, 1923년에는 앞의 묵호장과 구산장이 폐쇄되어 4개로 감소되었다.

1926년에는 앞의 4개 장 외에 묵호장이 부활되어 4 · 9일에 개설되어 5개로 되었고, 1938년에는 묵호장 대신 강동장(안인리)이 5 · 10일에, 옥계장이 1 · 6일로 개설되었다. 1963년에는 3개로 감소되어 읍내 · 옥계 · 묵호장(상설)만이 남았다가 1976년에는 읍내장 · 옥계장 4 · 9일, 묵호장 외에 주문진장이 1 · 6일로 부활되어 4개로 증가했으나 1994년에는 읍내장과 주문진장이 상설로 2개만 남게 되었다. 일반시장으로는 시내에 중앙 · 동부 · 서부시장과 주문진읍에 주문진시장 등 5개가 있다. 최근에는 이마트, 농협하나로마트, 원마트 등 대형 마트가 개설되면서 재래시장의 상권은 위축되고 있다.

교통은 수도권 · 영서지방과는 영동고속국도와, 강릉시 이남과 이북인 주문진 지역은 동해고속국도와 연결되어 편리하다. 동해북부권은 7번 국도로 연결되고, 주문진∼영동고속국도와는 6번국도로 연결되며, 지방도는 없다. 그러나 시 · 군도가 11개 노선이 있어 각 면 지역과의 교통이 이루어지는데, 이들 노선을 보면, 1번 주문∼삼교, 2번 사기막∼사천진, 3번 상시동∼내곡, 4번 금광∼학산, 5번 정동진∼안인, 6번 목계∼모전, 7번 임계∼현내, 8번 대기∼송현, 9번 대기∼삼산, 10번 고단∼대기, 11번 신대원∼주문 등이다.

철도 교통은 영동선 철도가 경포대역까지 이어져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이용되었으나, 1980년에는 도시계획에 의하여 강릉∼경포대역 사이의 철로가 철거되었다. 시내에는 강릉 · 안인 · 정동진 · 옥계역 등이 있다. 서원주역에서 강릉역을 잇는 경강선이 있으며 KTX가 운행중이다. 한편, 강릉∼서울, 강릉∼부산 간의 항공 교통은 양양국제공항이 가동되면서 폐쇄되었다.

관광

산지와 호수 · 바다를 배경으로 하는 명승지가 산재해 있고, 역사적으로는 영동(嶺東)의 행정 · 문화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신사임당 · 이율곡 등의 인물을 배출한 곳이기 때문에 도내 어느 지방보다 문화재가 많다.

지정관광지로는 소금강국립공원과 경포도립공원이 있다. 소금강의 지명은 청학동이지만 산수의 경치가 금강산을 축소한 듯하다고 소금강이라 불렸다. 소금강은 무릉계곡에서부터 상류로 40여 리에 걸쳐 구비마다 절경을 이뤄 금강산에 들어간 느낌을 준다.

주요 관광자원은 무릉계 · 십자소 · 식당암 · 청심대 · 구룡폭과 군자폭 · 만물상 · 망군대 · 보현사 등이다. 관광객은 여름철 중에도 8월에 가장 많다. 경포도립공원에는 경포호 중심의 경포팔경 · 경포대 · 경포해수욕장이 있고, 이들 부근에는 민속자료로 지정된 선교장(船橋莊)과 보물로 지정된 오죽헌(烏竹軒) · 해운정(海雲亭) 등이 있다.

경포호와 경포해수욕장 앞 바다의 5리, 10리 바위, 해송(海松) 등을 배경으로 한 해돋이와 달맞이의 장엄한 광경을 볼 수 있다. 경포해수욕장에서 주문진 방향으로는 사천해수욕장 · 연곡해수욕장 · 주문진해수욕장 등이 있고, 옥계 방향으로는 정동진해수욕장 · 옥계해수욕장 등이 있다. 이들 중 경포해수욕장 · 옥계해수욕장은 타지방의 피서객들이 많다.

강릉시 중앙에 있는 문화재로는 칠사당(七事堂), 객사문(客舍門), 신복사지삼층석탑, 향교, 대창리 · 수문리의 당간지주 등과 중요무형문화재인 강릉 단오제, 강원도 기념물인 용지가 있다. 구정면에는 굴산사지와 송담서원, 성산면에는 오봉서원 · 명주군왕릉(溟州郡王陵)이 있고, 성산면 · 연곡면 · 옥계면 · 강동면 · 왕산면의 산지나 구릉지에는 산성 또는 성지가 있고, 특히 옥계면에는 석회암 동굴이 많다.

유명한 경포팔경(鏡浦八景)으로는 ① 녹두일출(綠荳日出: 경포 동남쪽 해안에 있는 녹두정(綠荳亭)에서 바라보는 바다와 호수 위로 퍼지는 찬란한 해돋이 광경) ② 죽도명월(竹島明月: 경포 동쪽 해안강문 마을에 있는 언덕인 죽도에서 달맞이를 하는 광경) ③ 강문어화(江門漁火: 강문 마을에서 바라보는 밤의 고기잡이 광경) ④ 초당취연(草堂炊煙: 해가 질 무렵에 경포의 동남쪽에 위치한 초당마을에서 저녁 짓는 연기가 우거진 송림 사이로 평화롭게 번져오르는 광경) ⑤ 홍장야우(紅粧夜雨: 호수의 동북안에 있는 홍장암(紅粧巖)에 내리는 밤비를 바라보며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살았던 관기인 홍장의 고사를 생각하는 것) ⑥ 증봉낙조(甑峰落照: 경포대에서 바라보는 시루봉의 저녁노을) ⑦ 환선취적(喚仙吹笛: 달 밝고 고요한 밤에 호수 부근의 경치 좋은 곳에서 신선들이 부는 퉁소 소리가 들리는 듯한 느낌) ⑧ 한송모종(寒松暮鐘: 경포호 남쪽 2㎞쯤 떨어진 바닷가에 있던, 신라 때 사찰인 한송사의 저녁 종소리가 호수 주변에 은은히 울려 퍼짐)을 말한다.

읍 · 면
  1. 주문진읍(住文津邑)

시의 북부 동해안에 위치한 읍. 면적 60.56㎢로 농경지 9.50㎢, 임야 43.58㎢, 대지 1.67㎢, 기타 5.8㎢이다. 인구는 총 1만 8030명(2015년 현재)이다. 읍 소재지는 주문리이다.

주문리는 원래 강릉군 신리면 지역으로 주문을이라 하다가, 이곳에 나루터가 있으므로 주문진이라 하였는데 1916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거물이, 방꼴, 봉꾸미, 오릿나루, 약물골, 용소동, 소돌을 합하여 주문리라 하였다. 그 후 항구가 생김에 따라 1937년신리면이 주문진면이 되고 1940년 11월 1일에 주문진읍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른다. 주문리는 주문진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마을로 상권이 형성되어 인구가 가장 많이 밀집되어 있는 지역이다. 주문진읍은 5개의 법정리와 31개의 행정리로 구성되어 있다.

본래 강릉군 연곡면의 소속이었는데, 신리(新里)의 이름을 따서 신리면이라 하여 사기(沙器) · 교항(橋項) · 주문진 · 향호(香湖) 등 4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장덕리를 새로 두어 5개 리를 관할하였고, 1927년주문진면으로 개칭되었다가 1940년주문진읍으로 승격되었다. 1983년 행정구역 재조정 때에 연곡면 방내리 일부가 편입되었다.

북부에 삼형제봉(三兄弟峰, 618m)이 있고, 대부분의 지역이 산악지대이다. 철갑령 부근에서 발원하는 신리천이 남부지방을 동류하여 동해로 흘러드는데, 하천의 하류와 해안지방에는 약간의 평야가 있다. 북부 해안에는 석호인 향호(香湖)가 있고, 사빈 해안은 해수욕장으로 개발되어 있다.

태백산맥이 겨울철의 찬 북서 계절풍을 막아주고, 동해에 면하고 있는 관계로 같은 위도의 다른 지역보다 한서의 차가 적고 겨울철에도 비교적 기온이 온난하다. 관내의 식생은 침엽수가 가장 많으며, 혼효림 · 활엽수림의 순이다.

주요 산업은 어업을 비롯해 농업 · 상업 · 서비스업 등이 발달되어 있으나, 특히 주문리를 중심한 어업이 중심산업이며, 어획물은 오징어 · 복어 · 도루묵 등이다. 2015년 현재 어업 인구는 1,235명이고 어선은 279척이며, 위판량은 8,416톤으로 액수로는 275억 7,451만원이다. 논이 밭보다 많으며, 주요 농산물은 쌀 · 보리 외에 사과 · 배 · 복숭아 · 감 등과 채소류가 생산된다. 광물로는 향호 근처에서 규사가 채취되고, 교문리에는 1989년에 주문진농공단지가 준공되어 수산물 가공업을 비롯한 공업의 발달이 기대된다. 인구의 90% 이상이 주문진 항을 중심으로 하는 주문리와 교항리에 거주하고 있으며, 내륙 산간지대에는 인구가 적다.

7번 국도가 동해안을 따라 남쪽으로는 강릉시내, 북쪽으로는 속초와 연결되어 있고, 영동고속도로와 연결된 동해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또 관광도로인 해안도로가 개설되어 있어 남북을 연결하는 도로망이 매우 발달되어 있다. 최근 동해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주문진항은 어업항이면서 관광항으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문화유적은 장덕리에 은행나무, 최선평가옥과 교항리에 고분, 도광현가옥 등이 있다. 이밖에 향호리의 성터와 봉화대 등이 있다.

관광지로는 석호인 향호, 소돌해수욕장, 주문진항, 주문진해수욕장, 청소년들이 바다체험을 즐길 수 있는 청소년해양수련원, 소돌 바위 등이 있다. 소돌바위는 일억 오천 만 년 전 쥬라기 시대에 바닷속에 있다가 지각변동으로 인하여 지상에 솟은 바위이다. 죽도의 큰 바위 밑에서 소원을 한 가지씩 말하면 모든 소원이 바라는 대로 이루어졌다는 전설이 있는데 특히 자식을 원하는 사람이 자식을 낳을 수 있기를 소원하면 자식을 낳는다고 하여 ‘소원바위’, 아들 낳기를 기도하여 아들을 낳았다고 하여 ‘아들바위’라 부른다. 지역축제로는 해돋이축제, 달맞이축제, 복사꽃축제, 허수아비축제, 오징어축제, 해변축제 등이 있다.

  1. 강동면(江東面)

시의 중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112.20㎢, 5,034명이 거주하고 있다(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상시동리이다.

본래 강릉군 지역으로 자가곡면(資可谷面)이라 하여 신석 · 시동 · 모전 · 안인진 등 11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7년 군선강(郡仙江)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강동면으로 개칭되었다. 1983년구정면 언별리가 본 면으로 편입되었고, 1989년운산리가 월호평동으로 이관되었다. 1998년 도로 확충에 따른 교통 편리와 구조조정의 차원에서 정동출장소를 폐지하였다.

면의 서쪽과 남쪽 경계에 망덕봉 · 피래산 · 기마봉 등이 있어 험준한 산악을 이루며, 시동천과 군선강이 흐르는 북부에 약간의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해안선은 단조롭고 정동진에서 심곡리 사이에는 전형적인 해식애와 해안단구 지형이 발달해 있어 지형학의 좋은 교육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주민의 약 30%가 농업에 종사하고, 농경지는 논이 많으며, 주요 농산물은 쌀 · 고구마와 채소 · 과일 등이 생산된다. 해안에서는 특산물로 돌김과 미역이 산출되는데, 특히 정동미역은 옛날에 궁중의 진상품으로 유명하였다. 변내의 무연탄광은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에 의하여 쇠퇴되었다.

교통은 동해고속국도와 7번 국도가 면을 남북으로 통과하고, 5번 · 6번 시 · 군도가 동∼서를 연결하여 종전보다 훨씬 편리해졌다. 한편, 영동선 철도가 남북으로 달리고 있고, 면내에는 안인 · 정동진역 등이 있다. 안인 · 등명 · 정동 등의 해수욕장이 개발되어 있으며, 명승지로는 허이대(許李臺) · 명선문(溟仙門) 등이 있어 관광지로 유명하다. 드라마 모래시계의 영향으로 정동진역과 정동해돋이공원 등이 널리 알려져 있고, 1996년 북한잠수함침투 지역에는 통일 안보체험을 할 수 있는 공원과 체험 공간 그리고 등산로도 개발되어 있다.

문화유적은 정동진리에 등명사지오층석탑, 언별리에 송담서원, 하시동리에 고분군과 박창규가옥 등이 있다.

행정구역은 21개 행정리, 10개 법정리에 92개 반 62개 자연촌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10개 법정리는 상시동, 하시동, 모전, 안인, 안인진, 임곡, 정동진, 산성우, 심곡리, 언별 등이다.

  1. 구정면(邱井面)

시의 중앙부에 위치한 면. 면적 42.75㎢, 인구는 3,968명(2015년 12월 현재). 면 소재지는 여찬리이다.

본래 강릉군 지역으로 구정리의 이름을 따서 구정면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상구정면과 하구정면의 2개 면으로 나뉘면서 하구정면이 되었다. 1917년에 상구정면이 왕산면으로 개칭되면서 다시 구정면으로 되었다. 1983년언별리가 강동면으로, 산북리가 성산면으로 이관되었고, 1989년구정리의 일부가 연찬리에 편입되었다. 1996년 1월 1일학산2리에서 3리로 분구되어 12개의 행정리, 7개 법정리가 있다.

면의 경계에는 칠성산과 망덕봉이 있고, 어단리 · 금광리 일대는 100m 미만의 완만한 침식구릉지와 금광평이라 일컫는 산록완사면이 강릉시가지 쪽으로 전개되면서 평야지대를 형성한다. 섬석천이 본 면을 지나 동해로 흘러든다. 금광평을 중심으로 벼농사가 행해지는데, 주요 농산물은 쌀 · 보리 외에 감 · 사과 · 배 · 복숭아 · 자두 등의 과일이 생산되며, 특히 감이 유명하다.

면내에는 시 · 군도 3 · 4번이 강릉 시내와 다른 지역과 연결되어 비교적 편리한 편이다. 문화유적은 학산리에 굴산사지부도 · 굴산사지당간지주 · 정의총가옥 · 정의윤가옥 · 굴산사지 · 굴산사지석불좌상 · 조철현가옥, 강릉학산오독떼기 전수회관 등이 있다.

여찬리, 학산, 금광, 어단, 덕현리, 구정리, 제비 등 7개 법정리이고 총 59개반으로 편제되어 있다.

  1. 사천면(沙川面)

시의 중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70.84㎢, 인구 4,501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미로리이다.

본래 강릉군 지역으로 사화산(沙火山)의 이름을 따서 사화산면이라 하다가 사화면이 되었다. 1895년(고종 32)사천면으로 개칭되었고, 그 뒤 사월면(沙越面)이라 하다가 사천면으로 개칭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하남면의 방동 · 산대월리가 편입되었다. 면의 서쪽에 태백산맥이 있어 1,000m 이상의 산지가 있고, 그 산지에서 발원한 사천천이 면의 중앙을 따라 동해로 흘러들면서 주변에 비옥한 충적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논농사가 발달된 지역이다. 농어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전체의 64%를 차지하는 산업구조를 형성하고 있으며 해양성 기후로 해풍피해가 빈발하고 저수지와 사천천이 있어 농업용수 확보가 용이하다. 사천항은 1종어항으로서 방파제 492m, 방사제 65m, 물량장 624㎡규모로서 항구를 중심으로 73가구가 36척의 어선을 가지고 어업에 종사하고 있다. 1984년도에 완공된 사기막 저수지는 구면적 18ha, 담수량 2,230천톤, 제방높이 165m, 관개면적 380ha의 농업용수를 확보하고 있어 전천후 농업에 크게 기여하고 있으며 강릉 농지개량 조합에서 관리하고 있다. 해수욕장으로는 방동하리에 위치한 사천해수욕장 산대월에 위치한 순포해수욕장 사천진리에 위치한 뒷불해수욕장이 있어 많은 피서객들이 찾고 있다. 논의 면적이 시내에서 가장 넓어 벼농사가 중심이다. 특산물로는 사기막리를 중심으로 감과 송이버섯이 생산되고, 수산물로는 사천진리에서 성계 · 전복 · 해삼 등이 많이 잡힌다.

면내에는 7번 국도가 남북으로 달리고, 시 · 군도 2 · 9 · 11번이 해안과 내륙을 연결하여 종전보다 교통이 편리해졌다. 문화유적은 미로리에 박치규가옥과 석교리의 성지, 방동리의 선사유적지, 용연사 삼층석탑, 사기막리의 용연사, 판교리의 애일당 · 쌍안정, 김동명시비, 허균시비, 6.25포병전적비 등이 있다. 또 2003년 강원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강릉 사천 하평 답교놀이도 전승되고 있다. 마을 주변으로 백두대간의 준령이 병풍처럼 둘러친 형상의 해살이 마을은 200년 전 막사발 사기그릇을 만들던 움막이 많아 "사그막" 또는 "사기막"이라고 불렀던 곳으로 지금도 가마터와 사기그릇 잔혼을 쉽게 찾을 수 있다. 해살이 마을은 음력 5월 5일 단오가 되면 창포물에 감아 매끄러운 머리에 액운을 물리친다는 창포뿌리비녀를 꽂아보고 수리취를 넣은 수레바퀴 모양 같은 수리취떡을 만들어 먹으며 무더운 여름을 준비하는 옛 전통을 체험해 볼 수 있으며, 참드릅보다도 진한 쌉쌀한 맛이 일품인 개드릅으로 만든 다양한 요리와 막걸리로 발효해서 독특한 향기와 구수한 맛을 자랑하는 기정떡 등 독특한 맛이 일품이기도 하다. 봄이면 개드릅축제, 농사체험, 창포심기, 산나물채취, 여름이면 단오체험, 수리취떡 만들기, 용연동계곡 산천렵, 가을이면 곶감만들기, 농사체험, 용연계곡 단풍트래킹, 겨울이면 일출체험 및 새해소망빌기, 한과만들기, 연날리기, 양미리 · 도루묵 · 오징어 음식체험 등 체험 프로그램이 있으며 단오음식, 송이버섯, 친환경 농산물, 야생차 등 먹거리, 볼거리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전통테마마을이다

또 의료시설로 강릉아산병원이 있다. 기타 주요 기관으로는 강릉농업기술센터, 강릉운전면허시험장 등이 있다.

사천면은 9개 행정리, 15개 법정리, 83개 반, 47개 자연촌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행정리로는 미로(美老) · 사기막(沙器幕) · 노동(蘆洞) · 석교(石橋) · 판교(板橋) · 사천진(沙川津) · 덕실(德實) · 방동(芳洞) · 산대월(山帶月) 등이 있다.

  1. 성산면(城山面)

시의 중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80.23㎢, 인구 3,368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구산리이다. 본래 강릉군 지역으로 보현산성(普賢山城)이 있어 산성면이라 불리다가 성산면으로 개칭되었다. 1983년구정면 산북리가 편입되었다.

면의 서부는 해발고도 900∼1,000m의 산지로, 그 남쪽 안부에 대관령(大關嶺, 832m)이 있고, 동부는 300m 이하의 완사면이 넓게 펼쳐져 있다. 대관령에서 발원한 남대천이 면을 통과하면서 주변에 좁은 평야지대를 이루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 · 보리와 감이 많이 생산되는데, 감은 농가의 소득원으로 중요한 몫을 한다. 구산리에서는 소규모로 멧돼지 · 흑염소사육과 송어양식업이 행해지고 있다. 교통은 영동고속국도가 면을 동서로 통과하고, 35번 국도가 남쪽의 왕산면을 통해 태백시까지 이어지며, 9번 시 · 군도가 사천면으로 연결되어 편리한 편이다.

금산리는 1970년부터 새마을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마을환경개선, 공동이용물의 시설, 농기구의 공동구입, 각종 문화시설 확충, 농지구획정리사업 및 주택개량사업 등에 힘써서 농경지는 반듯한 바둑판 모양이 되었고, 주택은 모두 기와집으로 변모했으며, 소득도 많이 증대되어서 잘 사는 농촌이 되었다. 1978년 정부에서는 이 마을을 전국우수새마을로 선정하였고, 강원도에서는 외국인 홍보마을로 지정하였다. 영동고속도로 확장 · 개통에 따른 여건변화로 대관령 정상에 고원 자연탐방형 전망지구, 도로, 숲, 계곡 등엔 역사문화 · 위락형 체험단지, 마을단위 취락지역에는 주말휴양형 여가지역 등으로 조성되고 있다.

문화유적은 보광리에 보현사낭원대사오진탑 · 석조여래좌상 · 명주군왕릉 · 대공산성 · 분청자요지 · 보현사대웅전, 오봉리에 오봉서원, 금산리에 임경당 · 상임경당 · 김덕기가옥, 관음리에 고분군과 오층석탑, 위촌리에 이진기가옥 · 함대식가옥 등이 있다. 대관령에는 범일국사 서낭당이 있다. 대관령 옛 영동고속도로 끝자락에 대관령박물관이 있으며, 성산면 어흘리에는 산림청에서 운영하고 있는 자연휴양림과 숲체험 단지가 있다.

14개 행정리는 구산리, 관음1리, 관음2리, 금산1리, 금산2리, 위촌1리, 위촌2리, 송암리, 보광1리, 보광2리, 어흘리, 오봉리, 산북1리, 산북2리 등이 있다.

  1. 연곡면(連谷面)

시의 북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202.38㎢, 전체면적 중 91%인 183.77㎢가 임야에 해당된다. 인구 6,945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방내리이다.

본래 연곡현(連谷縣)이었으나 조선시대에 현이 면으로 개칭되면서 연곡면이 되었고, 영 · 진 · 역 · 현내 · 마곡 등을 관할지로 하였다. 1983년방내리 일부가 주문진읍으로 이관되었다.

면의 서쪽으로는 태백산맥을 따라 철갑령 · 복룡산 · 두로봉 · 동대산 · 노인봉 등이 있고, 동대산과 두로봉에서 발원하는 연곡천이 면의 중앙을 흘러 동해로 들어가면서 주변에 기름진 충적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즉, 유등평(柳等平) · 동덕평(冬德平) · 강해평(江海平) 등의 3개 평야를 중심으로 주로 벼농사가 행해지고 있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 · 보리이고, 채소와 잎담배의 생산도 많으며, 특산물로는 송이버섯 · 표고버섯 · 느타리버섯과 토종꿀이 생산된다. 청학동 소금강(靑鶴洞小金剛)은 산악미와 계곡미가 어울린 경승지로, 그 주변은 오대산국립공원의 일부에 속하며, 동덕리에는 깨끗한 모래사장과 울창한 해송림으로 유명한 연곡해수욕장이 있다.

교통은 6번 국도가 연곡천 계곡을 따라 진고개를 넘어 평창지역으로 연결되고, 7번 국도가 동쪽에서 남북으로 달리고 있으며 9 · 11번 시 · 군도가 해안과 내륙으로 연결되어 편리한 편이다. 문화유적은 삼산리에 소나무 · 청학동소금강 · 금강산성, 방내리에 삼층석탑 · 연곡고분, 영진리에 고분군 등이 있다. 국립공원 오대산 소금강에서는 매년 등산객의 안전과 주민들의 평안을 위해 소금강 청학제를 개최하고 있으며, 장천마을관리휴앙지, 부연동마을관리휴양지, 신왕리 마암터마을관리휴양지 등 농촌과 산촌문화를 체험하고 즐길 수 있는 휴양 체험시설들도 산간계곡 주변에 자리잡고 있다.

이 밖에 소금강의 금강산성지, 유등리백운사지, 사지석조, 청소사 대웅전, 연화대석, 방현사지(坊縣寺址), 청학사 부도군 등이 있다.

9개의 법정리, 21개의 행정리에 100개반과 83개의 자연촌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법정리로는 방내(坊內) · 영진(領津) · 동덕(冬德) · 송림(松林) · 행정(杏亭) · 신왕(新旺) · 유등(柳等) · 삼산(三山) · 퇴곡(退谷) 등이 있다.

  1. 옥계면(玉溪面)

시의 남단에 위치한 면. 면적 148.83㎢, 인구 4,094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현내리이다.

본래 고구려 때 우곡현(羽谷縣)이었고, 신라 때 우계현(羽溪縣)으로 개칭되면서 삼척군에 속했으며, 고려 때는 명주에 속해 있었다. 그 뒤 현이 폐지하면서 우계면이 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옥천우계(玉泉羽溪)의 의미로서 옥계면으로 개칭되었다.

태백산맥의 지맥이 동쪽으로 급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면계를 따라 석병산 · 음봉산 등이 있어 지세가 험준한 편이어서 면의 대부분이 산지로 되어 있다. 석병산에서 발원한 주수천 유역에는 몇 단의 하안단구 지형이 형성되어 생활무대로 이용되고, 주수천과 낙풍천이 동해로 흐르면서 토사를 운반하여 그 하류에 가평들이라는 충적평야를 이루고 있다. 해안은 사빈과 해식애가 발달하여 경치가 아름답다. 수심이 얕고 깨끗한 모래와 해송림이 어우러져 옥계해수욕장이 개발되었다.

주요 농산물은 채소 · 과일 · 마늘 등이다. 금진리를 중심으로 어업이 행해지나 영세한 편이고, 석회석 광산이 있다. 한라라파즈시멘트 공장이 있고, 시멘트와 유류 수송을 위해 옥계항이 개발되었다.

교통은 동해고속국도와 7번 국도가 남북으로 연결되고, 5 · 7번 시 · 군도가 개설되어 종전보다 편리해졌다. 영동선 철도가 해안을 끼고 남북으로 이어지고, 면내에는 옥계역이 있다.

문화유적은 산계리에 동대굴 · 서대굴 · 옥계굴 · 비선굴 · 삼층석탑 등이 있다. 이 밖에 우계산성지 · 산계리사지 · 신영사지 · 낙풍리봉화대, 금옥계 방역사적비 및 종선각비 등이 있다.

옥계면은 20개의 행정리, 10개의 법정리, 92개반, 66개 자연촌락으로 편제되어 있다. 법정리는 현내리, 천남리, 주수리, 남양리, 산계리, 북동리, 낙풍리, 금진리, 도직리, 조산리 등이다.

  1. 왕산면(王山面)

시의 서남단에 위치한 면. 면적 245.67㎢, 인구 1,726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도마리이다.

본래 강릉군 구정면에 속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상구정면과 하구정면으로 나뉠 때 상구정면이 되었고, 1917년 제왕산(帝王山)의 이름을 따서 왕산면으로 개칭되었다. 1955년 설치된 고단출상소는 1998년 폐쇄되었다.

면의 경계를 따라서 제왕산 · 칠성산 · 옥녀봉 · 노추산 · 덕우산 등이 있고, 면내에는 대화실산이 있어서 대부분이 험준한 산악지대이다. 동부는 동류하는 강릉 남대천의 상류로 급사면을 이루는데 반하여, 서부는 해발고도 700m 내외의 고위평탄면(高位平坦面)으로 그 위를 남한강의 상류인 송천(松川)이 대관령 일대에서 발원하여 이 곳을 심하게 휘감아 돌면서 감입곡류(嵌入曲流)를 하면서 남쪽으로 흘러 정선쪽으로 간다.

지형적인 원인 때문에 밭이 경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논은 일부에 불과하다. 고랭지 기후에 알맞는 고랭지 채소를 비롯하여 감자 · 옥수수와 약초의 재배가 활발하다. 특산물로는 송이버섯 · 토종꿀이 생산된다.

교통은 면의 동쪽에 35번 국도가 남북으로 달려 강릉시내와 태백시를 연결시키고, 8번 · 10번 군도가 35번 국도와 대기리 지역을 지나 평창군 대관령면 횡계리와 연결시키며, 9번 군도는 정선군 여량리와 이어지는 등 종전보다 많이 편리해 졌다.

문화유적은 도마리에 금선정(琴仙亭), 고단리에 칠련정(七聯亭)이 있으며, 노추산에는 이성대(二聖臺)가 있어서 봄 · 가을로 제를 올린다. 교통의 무사고와 풍년을 기원하는 삽당령성황제(揷堂嶺城隍祭)와 오마리의 배나무원풍제, 승성황제(憎城隍祭) 및 돌각탑을 대상으로 한 제가 매년 행해진다. 삽당령에는 임업시험장 동부육종장(東部育種場)이, 송현리에는 국립종자보급소 대관령지소가 있다.

체험시설로 푸른고원산촌체험장이 있다. 이 체험장은 대기리 중심에 있는 벌마을의 폐교된 대기초등학교를 마을주민들이 정성들여 정비하여 농업과 관광을 연계한 도시민의 체험장으로, 휴양시설로 운영하는 곳이다. 또한 지역 주민들의 공동체 문화 활동 공간으로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왕산면은 12개 행정리, 6개 법정리, 48개 반, 54개 자연촌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마(都麻) · 목계(木界) · 왕산(旺山) · 고단(高丹) · 대기(大基) · 송현(松峴) 등 6개의 법정리가 있다.

참고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택리지(擇里志)』
『강릉시통계연보』(강릉시, 2005년∼2008년)
『지방행정구역요람』(행정자치부, 2000)
『문화유적분포지도』(문화재관리국·강원도·강릉시·강릉대학교박물관, 1998)
『강릉시사』(강릉시사편찬위원회, 1996)
『한국지지』지방편Ⅱ(건설부국립지리원, 1984)
『신한국지리』(강석오, 대학교재출판사, 1984)
『한국지명요람』(건설부국립지리원, 1983)
『임영문화대관』(강릉문화원, 1982)
『한국구비문학대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
『향토의 전설』(강원도, 1979)
『한국시가의 민속학적연구』(김선풍, 형설출판사, 1977)
『임영(강릉·명주)지』(임영지증보발간위원회, 1975)
『강원총람』(강원도청, 1975)
『영동민속지』(최철, 통문관, 1972)
『중요무형문화재지정자료』 19 강릉단오제(임동권, 1966)
『임영지』(강릉고적보존회, 1933)
「강릉민속문학연구」(김선풍·홍문표, 『관동대학논문집』3, 1975)
강릉시(www.gangneung.go.kr)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