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위 ()

근대사
인물
개항기 때, 『경위합벽』, 『손무자주』, 『동문자모분해』 등을 저술한 시인 · 개화사상가.
이칭
중무(仲武), 요장(堯章), 위옥(韋玉)
추금(秋琴), 자기(慈屺), 청추각(聽秋閣), 고환당(古懽堂)
이칭
강호(姜浩), 강성호(姜性澔)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20년(순조 20)
사망 연도
1884년(고종 21)
본관
진양(晉陽: 지금의 경상남도 진주시)
정의
개항기 때, 『경위합벽』, 『손무자주』, 『동문자모분해』 등을 저술한 시인 · 개화사상가.
개설

본관은 진양(晉陽). 이명은 강호(姜浩)·강성호(姜性澔), 자는 중무(仲武)·요장(堯章)·위옥(韋玉), 호는 추금(秋琴)·자기(慈屺)·청추각(聽秋閣)·고환당(古懽堂).

생애 및 활동사항

가계는 조선 중엽부터 문관직과는 거리가 멀어져서 강위의 대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무반신분으로 굳어져 있었다. 신분상의 제약으로 문신이 될 수 없음을 알자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과 문학에 전념하게 되었다.

과거에 뜻을 두고 공부할 때 첨정(僉正)을 지낸 정문용(鄭文容)의 집에 기숙하면서 그의 손자인 정건조(鄭健朝)와 함께 수학하였다. 이같은 인연으로 뒷날 이조판서를 역임한 정건조와는 일생의 지기로서 왕래하였다.

과거를 포기한 뒤 정건조의 극력 만류에도 불구하고 당시 이단으로 몰려 은거하던 민노행(閔魯行)의 문하에서 4년간 수학하였다. 민노행이 사망하자 그의 유촉(遺囑)에 따라 제주도에 귀양가 있던 김정희(金正喜)를 찾아가 5년 남짓 사사하였다.

그런데 민노행과 김정희는 다 같이 청대의 고증학을 받아들여 자신의 학문체계를 수립한 실학자들이어서 당대의 정주학(程朱學)과는 학문적 인식을 달리하였다. 따라서, 강위도 현실적으로 많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스승인 김정희가 북청 귀양에서 풀려난 뒤 김정희를 하직하고 방랑생활로 들어갔다. 이 때 강위의 방랑 생활을 밑받침해 준 것은 시인으로서의 명성이었다.

강위는 고심하며 시를 짓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시고를 다시 다듬고 고치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개성이 뚜렷하고 관습적 표현을 극력 배격한 참신한 시편들은 강위를 당대 제일의 시인으로 꼽는 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이 같은 방외인적(方外人的) 생활 태도를 버리고 현실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하기 시작한 것은 1862년 삼남지방을 시발로 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된 민란의 충격에서였다. 민란의 와중에서 난군들에게 감금당하여 격문을 기초할 것을 강요받았지만 탈출해 서울로 올라왔다.

이 때 친구인 정건조의 강권에 의해 지은 것이 3만 어에 달하는 시무책인 「의삼정구폐책 擬三政捄幣策」이다. 내용이 너무 혁신적이라 정건조가 조정에 제출하는 데 난색을 표하자 미련없이 불살라버리고 말았다.

실학자로부터 개화사상가로 전향하게 된 계기는 1873∼1874년에 걸친 두 번의 중국 여행을 통해서였다. 원래 역관들과 친숙해 해외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나, 이 두 차례의 여행을 통해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위기를 절감하게 되었다. 박규수(朴珪壽)와 함께 적극적인 개항론자가 되어 1876년 한일 간에 강화도조약이 체결될 때 전권대신 신헌(申櫶)을 막후에서 보좌하였다.

1880년 조정에서 김홍집(金弘集)을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할 때 김옥균(金玉均)의 추천으로 서기로 수행하였다. 이 여행에서는 일본과 중국의 개화파 인사들이 조직한 흥아회(興亞會)에 참석하여 교유를 맺었다.

특히 중국대사관의 참찬으로 파견되어 있던 황준헌(黃遵憲)으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아 귀국 후에 『조선책략(朝鮮策略)』으로 알려져 있는 황준헌의 연미거아책(聯美拒俄策)을 적극 옹호하였다.

2년 뒤인 1882년 김옥균·서광범(徐光範) 등 젊은 개화파 관료들이 일본에 파견될 때 제자인 변수(邊燧)와 함께 수행하였다. 이 때 이들은 유럽과 아메리카까지 돌아보고자 하였으나, 임오군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귀국하였다. 강위는 나가사키[長崎]에서 일행과 헤어져 단신으로 세 번째 중국 여행을 떠나 상해 일대의 개화파 인사들과 교유한 뒤 귀국하였다.

학문 및 저술활동

강위의 문집은 강위가 사망한 뒤 친구인 방치요(房致堯)가 평소 강위와 교유하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모은 시문을 편집, 간행한 것이다. 그런데 갑신정변 이후의 국내정세 때문에 강위와 김옥균·서광범 등 개화파 인사들 사이에서 오고간 시문은 모두 삭제되고 말았다.

고증학자로서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경위합벽(經緯合璧)』·『손무자주(孫武子註)』와 같은 저술은 세론이 두려워서 문집 간행 때 제외되었다가 산일되고 말았다. 강위의 문집과 해외여행 때의 일기, 「담초(談草)」·『동문자모분해(東文字母分解)』 등은 아세아문화사에서 『강위전집(姜瑋全集)』으로 영인·간행되었다.

참고문헌

『강위전집(姜瑋全集)』
「추금 강위의 사상과 문학관」(주승택,『한국학보』 43, 1986년 여름호)
「강위의 시문학론」(진영희,『동악한문학논집』 1, 1984)
「강위의 인물과 사상」(이광린,『동방학지』 17,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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