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석기념물 ()

김제 월촌 입석 정면
김제 월촌 입석 정면
선사문화
개념
석기시대 인류가 큰 돌을 이용하여 만든 축조물.
정의
석기시대 인류가 큰 돌을 이용하여 만든 축조물.
개설

일반적으로 선돌〔立石, Menhir〕·석렬(石列, Stone Alignments)·고인돌〔支石墓, Dolmen〕·환상석렬(環狀石列, Stone Circle) 등이 있다. 서양에서는 돌방〔石室〕형태를 갖추고 있는 무덤도 거석문화에 포함시키고 있으며, 동양에서는 여기에 돌널무덤〔石棺墓, Stone Cist〕·돌무지무덤〔積石墓, Cairn〕·석상(石像, Stone Statue) 등을 더 포함시키고 있다. 더욱 넓게는 이집트나 중남미의 피라밋과 같은 대형석조기념물도 포함된다. 이처럼 거석기념물은 지역·연대·형태에 차이가 있다.

연원

선돌은 자연석이나 약간의 손질을 가한 돌을 하나 세워놓은 것으로 선사시대부터 만들어졌다. 오래된 것일수록 자연석에 가깝고 후대로 내려갈수록 사람모양의 조각을 한 석상이 많다. 즉, 선돌은 사람을 상징했던 것으로 그 중 남자 성기를 닮은 형태는 출산을 기원하는 성기숭배사상에 의한 것이다.

석렬은 선돌이 한 줄 또는 여러 줄로 서있는 것으로, 프랑스 카르낙지방의 것이 대표적이다. 환상석렬은 선돌들의 배열이 원형을 이룬 것으로, 하나의 원을 구성한 것과 여러 겹으로 동심원을 이룬 것이 있다. 그 중 선돌과 선돌 위에 돌을 올려 연결시켜 놓은 것을 스톤헨지(Stone Henge)라 하는데, 영국 뉴밸리지방의 것이 대표적 유적이다.

고인돌은 하나의 뚜껑돌〔蓋石〕을 2개 또는 여러 개의 받침돌〔支石〕로 괴어놓은 것이 기본형식이다. 신석기시대 말부터 초기철기시대까지 범세계적으로 유행하던 기념물로서, 묘소와 제단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내용 및 현황

우리나라의 거석기념물로는 선돌·고인돌·돌널무덤·돌무지무덤·환상석렬 등이 있다. 선돌은 선사시대부터 역사시대까지 오랜 기간동안 만들어졌다. 또한 선돌은 새끼줄을 치고 볏짚으로 덮어서 신례(神禮)로서 기원하는 신앙의 대상물이며, 출산과 나쁜 것을 물리치는 존재로서 남성성기숭배와 관련된 수호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일부지방에서는 ‘할머니돌’ 또는 ‘할아버지돌’이라 하여 민속유물로서의 의미도 가지고 있다. 또한 선돌은 사람과 관련있는 것으로, 한 가족이나 씨족의 인물을 상징하기도 했다.

그리고 선돌의 재료가 점차 목재(木材)로 바뀌어 장승이 되면서 ‘천하대장군’·‘지하여장군’이라고 하였다. 제주도 특유의 기념물인 ‘돌하루방’도 같은 의미의 기념물로서 신격화된 인물의 표현이다. 그들의 원초적 기능은 땅(토지·재산·생산)·주민을 지켜주는 데에 있다.

고인돌은 함경북도를 제외한 한반도의 도서지방까지 고루 분포되어 있다. 북쪽은 만주의 요령성(遼寧省)과 길림(吉林)을 경계로 하여 남쪽은 제주도까지 분포되어 있다. 그 가운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강화도와 고창 지석묘군은 가장 대표적인 유적이다. 형식은 크게 탁자식(卓子式: 北方式)과 기반식(碁盤式: 南方式·塊石式)으로 구분된다. 특히, 제주도에는 뚜껑돌 밑에 돌을 세워 바닥이 원형인 널방을 만든 고인돌이 여러 개 있는데, 동남아시아·인도 등지의 고인돌과 비슷하다. 고인돌의 분포는 농경사회의 난생설화의 분포지와 같다.

우리나라에서 고인돌이 나타난 시점에 대해서는 신석기시대 축조설과 청동기시대설이 있으며 적어도 서기전 12∼11세기 무렵에는 등장한 것으로 본다. 고인돌의 하한연대로는 세형동검문화와 덧띠토기와 관련하여 서기전 3∼2세기설이 유력하다.

환상석렬은 최근 부여에서 발견되었다. 자바·수마트라에서도 비슷한 유적이 보인다.

돌널무덤은 판석을 조립하여 널을 만든 것이다. 바닥이 직사각형인 것도 있고 어깨부분이 넓고 발부분이 좁은 이른바 두관족협식(頭寬足狹式)도 있다. 돌널무덤은 주로 청동유물이 출토되고 있어 북방계 청동문화에서 전파된 기념물로 추정된다. 그러나 최근에 대만·인도네시아에서도 돌널무덤이 발견되고 있다. 한반도에서는 남부지방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가장 밀집되어 발견된 지역은 금강 중·하류이며 송국리유적이 대표적이다. 이밖에 돌널무덤 주위에 도랑시설을 갖춘 형태도 발견되는데 춘천 천전리, 천안 운전리, 보령 관창리, 사천 이금동유적 등이 있다.

돌무지무덤은 시체를 눕히고 그 위를 자연석으로 덮은 것으로, 공동묘와 개인묘가 있다. 공동묘는 강상(岡上)·누상(樓上)지방의 경우 10여 명 이상이 한 곳에 묻혀 있는데, 화장한 것이 특징이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시도, 제원군 양평리, 춘성군 천전리 등지이다. 특히, 천전리의 경우 중심부에 2∼3개의 돌덧널이나 돌널을 두고 커다란 석괴를 덮은 것으로 청동기시대에서 초기철기시대에 걸쳐 나타난다.

의의와 평가

거석기념물 가운데 고인돌은 전 세계적으로 볼 때 만주와 한반도에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다. 한편 돌널무덤은 중국의 중원지방에서는 별로 발견되지 않는 우리나라 거석문화의 원류를 밝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돌널무덤·고인돌·돌무지무덤은 출토유물로 미뤄볼 때 청동기시대에 가장 많이 만들어진 무덤양식이지만, 그 하한선은 초기철기시대까지 내려온다.

참고문헌

『한국지석묘연구』(김재원·윤무병, 국립박물관, 1967)
「조선의 거석문화연구」(한흥수, 『진단학보』 3, 1935)
「忠南의 입석수례」(이은창, 『미술자료』 3, 1961)
「한국석관묘의 연구」(이종선, 『한국고고학보』 1, 1976)
「한국거석문화원류에 관한 연구」(김병모, 『한국고고학보』 10·11합집, 1981)
「묘제 Ⅰ-지석묘-」(심봉근, 『한국사론』 13, 국사편찬위원회, 1983)
「묘제 Ⅱ-석관묘-」(지건길, 『한국사론』 13, 국사편찬위원회, 1983)
「묘제 Ⅲ-적석총-」(임세권, 『한국사론』 13, 국사편찬위원회,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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