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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집 문전을 찾아가거나 길에서 만나는 사람으로부터 금품이나 음식 등을 빌어서 얻어먹고 사는 사람을 가리키는 일반용어. 비렁뱅이 · 걸인 · 동냥치 · 걸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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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남의 집 문전을 찾아가거나 길에서 만나는 사람으로부터 금품이나 음식 등을 빌어서 얻어먹고 사는 사람을 가리키는 일반용어. 비렁뱅이 · 걸인 · 동냥치 · 걸뱅이.
내용

농경에 의한 정주사회(定住社會)가 형성된 이래, 유랑생활을 하는 거지는 사회적인 낙오자의 생활수단 내지는 부득이한 사정에 의하여 택해진 천대받는 직업의 일종이 되어왔다.

구걸하는 행위가 종교적인 수행방법의 일종일 때도 있었다. 불교의 탁발승(托鉢僧)은 극도로 남루한 차림새에서, 혹은 탁발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인해서 일반인에게 거지의 구걸과 비슷한 행위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거지에 대한 오래된 기록은 ≪삼국사기≫에 전한다. 백제 개루왕 때 도미(都彌)부부가 왕의 학대를 피해서 고구려로 도망가 살 때 “고구려 사람들이 이를 불쌍히 여겨 옷과 밥을 주었으니, 드디어 떠돌이 생활을 마치고 거기서 살게 되었다.”고 했다.

도미부부는 학정(虐政:국민을 괴롭히는 정치)에 쫓기며 신체적 불구와 가난으로 유랑생활을 하였다. 한편, ≪삼국유사≫에는 조신(調信)의 꿈을 통해서 당시의 거지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조신은 집안이 가난하여 가족을 이끌고 다니면서 걸식을 하였다. 10년을 이렇게 초야를 두루 유랑하니 옷이 해어져 몸을 다 가리지 못하였다.

마침내 명주(溟州 : 지금의 강원도 강릉)를 지날 때 15살 된 큰 아이가 홀연 굶어 죽었다. 10살 되는 딸아이도 구걸을 다녔는데, 어느날 마을 개에게 물려 아픔을 참지 못하고 울부짖었다. 그 부인은 “이집저집 걸식하는 부끄러움은 산더미를 진 것보다 무겁습니다.”라며 한탄하였다고 한다.

여기에서 당시 거지생활의 단면을 알 수 있는데, 이 설화는 이광수(李光洙)의 소설 <꿈>으로 소설화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어려움은 이후의 거지생활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고려 성종 때 유학자 최승로(崔承老)는 상소문에 떠돌이 거지가 절을 찾아가 중이 되려 함은 이롭지 못한 일이라 하였다.

또, 고려 중엽 이후 거지 가운데는 구걸의 대가로 음악을 연주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양성지(梁誠之)의 ≪눌재집 訥齋集≫에는 백정(白丁)의 문제에 관하여 상소하는 글 가운데 ‘음악을 연주하면서 떠돌며 구걸하는 자’에 대한 단속을 펼 것을 말하였는데, 이를 통해 당시 풍각쟁이나 각설이의 형태를 추측하게 한다.

이들이 어떤 음악을 연주하며 어떤 내용의 노래를 불렀는지는 알 수 없으나, 현악기를 다루며 노래를 불렀다고 하니 뒤에 보이는 광대(廣大)의 근원과도 통하고 있다. 또한, 백정 중에 재인(才人)들은 떠돌며 노래부르며 악기를 다룬다고 하였으니, 이들에게 옷이나 음식을 베푸는 측에서는 이들도 거지의 한 부류라고 인식하였으리라 본다.

조선시대의 거지도 단순히 구걸만으로 유랑하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구걸의 대가로 각종 재주를 보여줌으로써 보다 원만한 거지생활을 해 나가는 부류도 있었다. 조선 중기 이후의 문헌에 나타나는 각설이패나 풍각쟁이 등은 노래나 악기연주 혹은 촌극 등의 구경거리를 가지고 각 집의 문전이나 장터에서 구걸을 하였다.

각설이패는 주로 <장타령>이라고도 하는 <각설이타령>을 부르면서 흉내내기나 익살스런 말로 상대방을 즐겁게 해주며 돈이나 음식 등을 얻었다. 풍각쟁이는 혼자서 돌아다니기도 하지만 5, 6명이 패를 지어 다니기도 하였다.

신재효(申在孝)의 <변강쇠가>에 묘사된 풍각쟁이패의 구성은 노래꾼, 퉁소쟁이 소경, 북쟁이, 가야금 타는 늙은이, 검무(劍舞)쟁이 겸 퉁소쟁이, 소경의 길잡이 소년 등으로 되어 있다. 이들이 보여주는 구경거리의 내용은 <초한가>·<짝타령>·<봉장취>·<여민락>, 토속민요, 시나위가락 등을 연주하거나 판소리나 검무도 하였다.

이와 유사한 부류에 초란이가 있는데, 이들은 노래·악기연주·탈춤·재주넘기 등을 보여주며 구걸을 하였다. 초란이는 귀신을 쫓아내는 궁중의식인 나례(儺禮)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이 의식이 끝나면 동원되었던 자들이 해산되는데, 그 중의 일부는 민간에 떠돌이생활을 하면서 궁중 의식을 흉내내며 구걸을 하였다.

그리고 거지가 되는 자의 특색 중 하나는 신체적인 결함을 지닌 자가 많았다는 점이다. 불구자이기 때문에 보통사람과 같은 노동력을 지니지 못했고, 사회적으로는 낙오자가 되어 또한 떠돌이생활을 하게 된다. 이런 점은 조선 중기에 정착된 소설 <심청전>의 결말 부분에 묘사되어 있다.

심청이 걸인 잔치를 벌여 아버지를 만나고자 하는 대목에 풍각쟁이 봉사, 걸식으로 사는 봉사 등이 열거되어 있다. 거지가 구걸행위를 할 때, 신체적인 결함이 때로는 유리한 결과를 가져다주기도 한다. 불구인 거지들은 그들이 불구라는 점을 강조해 보임으로써 상대방의 동정심을 강하게 유발시켜 보다 큰 것을 얻어내기도 한다.

각설이패들의 경우, 일부러 특별한 병을 지닌 사람의 흉내를 내거나, 다리를 절뚝거리거나 눈을 찡그리기도 하였다. 근대에 들어서도 거지들은 집집 문전이나 거리에서 구걸을 계속하였는데, 특히 나병환자가 구걸하는 일이 많았다.

이들은 신체적인 결함을 그대로 밖으로 드러나 보이게 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동정심 내지는 혐오감을 갖게 하여 구걸의 효과를 높이기도 하였다. 이들을 ‘문둥이각설이’라고도 하였는데, 어린이들을 데려다가 약으로 쓴다고 하는 말까지 퍼져 있어서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는 거지들 사이에 어느 정도 조직이 형성되어 있었다. 각 조직은 서로간에 활동범위를 설정하여 상대방의 구역에 들어갈 수 없도록 하여, 각자의 이권을 확립하려 하였다.

또한, 조직은 내부적으로 상하 내지는 주종관계가 형성되어 있어서, 조직원의 신변보호라는 왕초의 임무와 왕초에 대한 상납이라는 똘마니의 임무 등이 분리되어 있었다. 오늘날에는 이전시대와 같은 형태의 문전걸식을 하는 거지는 찾아보기 어려우나 거지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사회적 여건이 변화함에 따라 구걸하는 방식이 바뀌었을 뿐, 다른 방식으로 거지는 존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버스나 전차 안에서 자신의 형편을 하소연하고 돈을 얻거나 물건을 파는 이, 지하도 입구나 길거리에 앉아서 행인들의 동정을 바라는 이 등은 이 시대의 거지의 모습이다.

구걸하는 형태에 근거를 두고 거지를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단순히 일방적으로 돈이나 물건을 받는 경우, 무언가 구경거리를 보이며 대가로 받는 경우, 물건을 팔면서 동정심을 돈으로 환산한 몫을 물건값에 덧붙여 받는 경우, 종교적인 적선의식(積善意識)을 표방하는 경우, 이상의 것이 복합된 경우 등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신재효판소리사설집』(신재효·강한영, 민중서관, 1971)
「각설이타령연구」(박전렬, 중앙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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