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는 즉위하자마자 새로운 법령이 계속 쌓이고 그것들이 전후 모순되거나 미비해 결함이 발견될 때마다 속전을 간행하는 고식적 법전 편찬 방법을 지양하였다. 이에 따라 당시까지의 모든 법을 전체적으로 조화시켜 만세성법(萬世成法)을 이룩하기 위해 육전상정소(六典詳定所)를 설치, 통일 법전 편찬에 착수하였다.
1460년(세조 6) 7월에 먼저 재정·경제의 기본이 되는 「호전 戶典」과 「호전등록(戶典謄錄)」을 완성, 이를 「경국대전 호전」이라고 이름지었다. 이듬해 7월에는 「형전(刑典)」을 완성해 공포, 시행했으며, 1466년에는 나머지 「이전(吏典)」·「예전(禮典)」·「병전(兵典)」·「공전(工典)」도 완성하였다. 또 「호전」·「형전」도 함께 다시 전면적으로 검토해 1468년 1월 1일부터 시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세조는 신중을 기해 반행(頒行)을 보류하고 있었다. 그 뒤, 예종도 육전상정소를 설치해 원년 9월에 매듭지어 2년 1월 1일부터 반포하기로 결정했으나, 예종이 갑자기 죽어 시행하지 못하고 말았다.
성종이 즉위하자, 곧 『경국대전』을 다시 수정해 드디어 1471년 1월 1일부터 시행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신묘대전(辛卯大典)』이다.
그런데 누락된 조문이 있어 다시 개수해 1474년 2월 1일부터 시행했는데, 이것이 『갑오대전(甲午大典)』이다. 그 때 대전에 수록되지 않은 법령으로 시행할 필요가 있는 72개 조문은 따로 속록(續錄)을 만들어 함께 시행하였다.
1481년 9월에 다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논의가 있어, 감교청(勘校廳)을 설치하고 대전과 속록을 적지 않게 개수해 1485년 1월 1일부터 시행하였다. 이것이 『을사대전(乙巳大典)』인데, 이것을 시행할 때에 앞으로 다시는 개수하지 않고 최종적으로 확정된 것으로 규정지었다.
그리하여 영세 불변의 조종성헌(祖宗成憲)으로서, 통치의 기본 법전으로서 그 시대를 규율하게 되었다. 오늘날 온전히 전해오는 『경국대전』은 『을사대전』이며, 그 전의 것은 하나도 전해지지 않는다. 따라서, 이 『을사대전』은 우리 나라에 전해오는 법전 중 가장 오래된 유일한 것이다.
『경제육전』과 같이 6분 방식에 따라 「이전」·「호전」·「예전」·「병전」·「형전」·「공전」의 순서로 되어 있다. 또 각 전마다 필요한 항목으로 분류해 규정하고, 조문도 『경제육전』과는 달리 추상화, 일반화되어 있어, 건국 후 90여 년에 걸친 연마의 결정답게 명실상부한 훌륭한 법전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전」에는 통치의 기본이 되는 중앙과 지방의 관제, 관리의 종별, 관리의 임면·사령(辭令) 등에 관한 사항이 규정되어 있다. 「호전」에는 재정 경제와 그에 관련되는 사항으로서 호적제도·조세제도·녹봉·통화·부채·상업과 잡업·창고와 환곡(還穀)·조운(漕運)·어장(漁場)·염장(鹽場)에 관한 규정을 비롯, 토지·가옥·노비·우마의 매매와 오늘날의 등기제도에 해당하는 입안(立案)에 관한 것, 그리고 채무의 변제와 이자율에 관한 규정이 수록되어 있다.
「예전」에는 문과·무과·잡과 등의 과거와 관리의 의장(儀章) 및 외교·제례·상장(喪葬)·묘지·관인(官印), 그리고 여러 가지 공문서의 서식에 관한 규정을 비롯, 상복 제도·봉사(奉祀)·입후(立後)·혼인 등 친족법 규범이 수록되어 있다.
「병전」에는 군제와 군사에 관한 규정이, 「형전」에는 형벌·재판·공노비·사노비에 관한 규정과 재산 상속법에 관한 규정이, 「공전」에는 도로·교량·도량형·식산(殖産)에 관한 규정이 수록되어 있다.
당시의 법사상인 양법미의(良法美意)에 대한 자신감과 실천 의지가 표명되어 있으며, 정치의 요체는 법치(法治)에 있다고 서약, 선언한 창업주인 태조의 강력한 법치 의지가 계승, 발전된 조종성헌으로서, 법제사상 최대의 업적이다.
이 대전의 편찬, 시행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전제정치의 필연적 요청으로서의 법치주의에 입각한 왕조 통치의 법적 기초라 할 수 있는 통치규범 체계가 확립되었다.
둘째, 여말선초의 살아 있는 현행 법령으로서 양법미의, 즉 타당성과 실효성있는 고유법(固有法)을 성문화하고 조종성헌화해 중국법의 급작스러운 무제한적 침투에 대해서 방파제가 되었다. 또 영구불변성이 부여되어 고유법의 유지, 계승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 전형적인 예가 「형전」 사천조(私賤條)에 규정된 자녀 균분 상속법(子女均分相續法), 「호전」 매매한조(買賣限條)에 규정된 토지·가옥·노비·우마의 매매에 관한 규정과 전택조(田宅條)에 규정된 토지·가옥 등에 대한 사유권의 절대적 보호에 관한 규정, 그리고 그들 사유권이 침해된 경우의 민사적 소송 절차에 관한 「형전」의 규정들이다. 이 규정들은 특히 중국법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고유법이었다.
셋째, 특히 「형전」의 규정은 형벌법의 일반법으로서 계수된 『대명률(大明律)』에 대한 특별형사법이었다. 「형전」의 규정에는 조선적 특수 형법사상이 담겨 있어 『대명률』보다 우선적으로 적용되었다.
이 대전이 시행된 뒤 『대전속록(大典續錄)』·『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수교집록(受敎輯錄)』 등과 같은 법령집과, 『속대전(續大典)』·『대전통편(大典通編)』·『대전회통(大典會通)』 등과 같은 법전이 편찬, 시행되어 이 조문이 실제로 개정되거나 폐지된 것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 기본이념은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으며, 이 대전의 조문은 나중의 법전에서 삭제되어서는 안 되는 신성성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제도사를 연구하는 데 기본 사료가 된다. 이 대전의 을사본은 편찬 당시 출판해 널리 반포했고, 그 뒤에도 여러 번 출판하였다.
이 밖에 1936년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판본을 고교(稿校)해 활자로 인쇄, 간행한 것이 널리 퍼져 있다. 이어 1962년에는 법제처에서 『경국대전』 역주본을 내었고, 1985년에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역주 경국대전』을 출간해 한글 번역본으로 독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