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당 ()

고대사
제도
삼국시대 고구려의 미성년 학교.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경당은 삼국시대 고구려의 미성년 학교이다. 유교경전을 읽고 활쏘기를 연습하였다고 한다. 신라의 화랑도와 같이 청소년 연령집단에서 기원하였다. 고구려의 경당에 대해서는 『구당서』와 『신당서』에 기록되어 있다. 지방의 평민을 위한 교육기관이었다.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에 지방의 평민까지 군사로 동원하기 위해 건립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지방의 평민까지 군사로 동원하는 체계가 정비되었다는 것을 반영한다.

정의
삼국시대 고구려의 미성년 학교.
개설

고구려의 미성년 학교이다. 경전(經典)을 독서하고 활쏘기를 연습하였다고 한다. 신라의 화랑도와 같이 청소년 연령집단에서 기원하였다고 이해된다.

내용

고구려 경당에 관한 기록은 『구당서』와 『신당서』에 보인다.

“습속은 서적을 아낀다. 형문(衡門) · 시양(廝養)의 집안에 이르기까지 큰길[街衢]에 각기 커다란 집[大屋]을 짓고 이를 경당이라고 하였다. 혼인하기 전의 자제(子弟)는 이곳에서 밤낮으로 책을 읽고 활쏘기를 익혔다.”(『구당서』 고려)

“고구려인은 학문을 좋아하였다. 궁리(窮里)의 시가(厮家)에 이르기까지 또한 서로 학문을 힘써 권하며 큰길가(衢側)에 모두 장엄한 집[嚴屋]을 짓고 경당이라고 이름하였다. 미혼의 자제가 무리지어 거처하며 경전을 읽고 활쏘기를 익혔다.”(『신당서』 고려)

경당의 학생은 미혼이었다고 하였는데, 그 연령은 대체로 청소년이었다고 생각된다. 이 점에서 고구려의 경당은 신라의 화랑도와 마찬가지로 청소년 연령집단에서 기원하였다고 이해된다. 경당의 학생은 형문 · 시양과 같은 미천한 집안 출신을 포함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흔히 경당은 평민을 위한 교육기관이었다고 본다. 하지만 형문 · 시양과 같은 표현이 찬자의 과장이었다고 보고, 적어도 상층민 이상이 수학하였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경당의 학생 중에는 궁리 즉 구석진 마을 출신도 있었다고 하였다. 이를 중시하여 경당이 지방 촌락에 소재하였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었다. 그런데 경당은 큰길[衢]에 세워졌다고 하였다. 이를 주목하여 경당의 소재지가 일정 규모 이상의 도시였다고 보기도 한다. 왕도(王都)는 물론이고 대성급(大城級) 규모의 지방 주요 도시에도 소재하였다고 파악한 것이다.

경당에서는 책을 읽었다고 하였다. 책은 경전이라고도 하였는데, 이때 경전은 유교 경전을 가리킨다고 파악된다. 유교를 교육했던 것이다. 또한 활쏘기를 익혔다고 하였는데, 이는 군사훈련을 의미할 것이다. 따라서 경당에서는 유교 교육과 더불어 군사훈련이 실시되었다고 이해된다.

변천과 현황

경당이 언제부터 건립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유교를 교육했다는 점에서 태학이 설립된 372년(소수림왕 2) 이후부터 세워졌다고 보는 데 큰 이견은 없다. 대부분 427년 평양 천도 이후부터 건립되었다고 생각한다. 경당은 고구려의 멸망 이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통일신라와 발해의 지방 학교가 상정되는 만큼 이를 경당과 연관하여 생각하기도 한다.

의의와 평가

경당이 지방 촌락에 소재했고 평민을 위한 학교였다고 보는 견해에서는 경당의 건립이 전국적인 군사동원체계 즉 국민개병제의 정비를 반영한다고 해석한다. 지방 촌락의 평민까지 군사로 동원하기 위해 기존의 청소년 연령집단을 재편해 활쏘기와 같은 군사훈련을 실시했다고 본 것이다.

이와 달리 왕도와 지방의 주요 도시에 소재했고 상층민 이상을 위한 학교였다고 보는 견해에서는 지배층의 정치 · 사회적 역할이 분화한 결과를 반영한다고 해석한다. 이 견해에서는 경당의 학생이 하급의 실무관원 내지 무관으로 진출하였다고 보고, 지배층 내부에서 상층과 하층이 분화하면서 하층의 지배층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경당이 세워졌다고 이해한다.

참고문헌

「고구려 경당의 설립과 의의」 (이정빈, 『한국고대사연구』 67, 2012)
「고구려의 경당: 한국 고대국가에 있어서의 미성년집회의 일유제」 (이기백, 『역사학보』 35·36, 1967)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