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 ()

경영자회의 / 강원일보
경영자회의 / 강원일보
경제
개념
일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인적 · 물적 자원을 결합한 조직의 관리와 운영을 가리키는 경영학용어.
정의
일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인적 · 물적 자원을 결합한 조직의 관리와 운영을 가리키는 경영학용어.
개설

경영이라는 낱말 자체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어서 사람에 따라 견해가 다양하다.

경영을 ‘상점이나 공장 · 농장과 가정을 경영한다.’와 같이, 어떤 일을 계획적 또는 체계적으로 운용, 관리한다는 뜻에서의 행동 내지 활동하다의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또는,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필요한 사람과 물자, 그리고 경비를 결합한 독립된 조직단위로 보는 생산조직체 · 서비스조직체 등을 뜻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을 넓은 뜻으로 경영이라고 한다.

그리고 경영과 흔히 혼동되는 말로는 기업이 있다. 이 기업 역시 국민경제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이자 영리목적을 추구하는 경제단위로서 자본주의경제 특유의 조직체이며, 좁은 뜻의 경영에 속한다고 하는 것이 통설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넓은 뜻으로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활동하는 일단의 조직체’로 정의하고, 자본주의 경영인 기업경영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하고자 한다.

경영의 전개과정

기업도 하나의 사회적 존재로서 역사적 산물이므로, 그의 과거 · 현재 · 미래를 내다볼 필요가 있다.

조선 말기의 기업경영(1876∼1909)

우리나라 기업을 역사적으로 고찰하려면 지도정신을 경제주의에 둔 고대경영에까지 소급하여야 할 것이나, 여기에서는 수익성과 영리성을 지도정신으로 삼아 본격적으로 봉건적 경영을 해체하고, 자본주의적 경영을 시작한 시기로, 우리나라 근대화과정의 출발점이 된 강화도조약(1876) 직전부터 파악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조선시대의 지배적 경영은 토지와 연결된 농업경영이었다. 조선왕조는 창립 후 구세력을 타도하기 위하여 그들의 물질적 기반인 농장(農莊)의 몰수와 토지분배를 목표로 하는 전제개혁을 단행하였다.

국가의 지도원리로 유교를 채용하고 사원의 사전노비(賜田奴婢)의 수를 대폭 감축함으로써 그때까지 전통적 권위를 가진 불교와 아울러 사원은 무력한 존재로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관료들의 노력에 의하여 관료체제가 정비되었다.

그리고 관인의 지방적 · 분산적 세력성장이 억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왕이나 왕조의 힘을 빌려 관인의 지주적인 성장이 이루어졌다. 권력자는 사전(賜田) 이외에 강점 · 매입 · 투탁(投託) · 개간 등 각종 방법으로 농장을 확대해 나갔다.

그러나 이들 전주(田主)는 그 물질적 기반인 농장확대에는 부심하면서도 노동은 즐기지 않았으며, 모든 경영관리를 노복에게 맡기고 자신은 농업에서 유리된 유교적 생활에 몰두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농업의 생산수준은 낮고 상품교환도 별로 진전되지 못하였다.

둘째, 상업경영으로는 왕실과 관아에서 필요한 물건의 조달을 담당하는 육의전을 중심으로 특권적 상업이 발달하였다. 이것은 관인이 권력으로 획득한 물자를 관아나 관인 내부에서 교환하였기 때문이며, 일반 서민 사이에서의 상업발달은 미약하였다고 할 수 있다.

민간에서는 보부상이라는 행상인이 여러 시장을 돌아다니는 여상형태(旅商形態)로 상업경영을 하였으며, 한 곳에 머물러 있는 좌상(坐商)은 빈약한 상태에 있었다. 이와 같이 상업경영이 발달하지 못한 것은 낮은 농업수준으로 농민의 생활수준이 빈한하였고, 수공업의 주요 부분이 국가에 귀속됨에 따라 민간의 수공업은 낮은 수준에 머물기 때문이다.

셋째, 수공업경영은 대부분 국가관아의 수요에 대응하는 국영수공업으로, 국가에 직속된 노비나 천민의 노동에 의하여 경영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여건하에서는 일반 서민층에서 분업이 나타날 수 있는 여지가 아주 적었다. 관인과 지주가 수탈할 뿐만 아니라, 다시 상인 · 관인 · 토호 등이 고리대금자로서 봄에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에 대단히 높은 이자를 붙여서 징수하는 경향까지 있었다.

생산성에 기반을 두지 않은 낮은 수준의 경영상태는 자체의 힘으로써 극복할 수 없었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 양반 · 평민의 평등화, 공 · 사 노비의 전적 폐기 등 일련의 혁신적 개혁을 추진한 갑오경장 등도 있기는 하였지만, 사회 내부에 혁신을 추진하는 세력을 육성, 집결시킬 수는 없었으므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조선 말기의 경영적 특질은 관인적 봉건성, 낮은 생산성의 농업경영, 사 · 농 · 공 · 상의 사회질서를 들 수 있다.

일제강점기의 기업경영(1910∼1945)

강화도조약에 의하여 조선은 일본을 대상으로 부산(1876) · 원산(1880) · 인천(1883)을 개항하였고, 이어 식민지화로 식민지경영체제하에 들어가게 된다.

이 기간의 우리 기업의 특질은 한마디로 식민지적 경영특질로 요약할 수 있다. 즉, 경영에 있어서 경영자층 · 자본 · 기술 등 필요한 여러 요인이 거의 백지상태에 놓여 있었던 우리나라에 일본의 경영자층 · 자본 · 기술 등이 강력한 무력과 정치적 특권 아래 육성됨으로써, 우리나라의 기업이나 경영자 · 자본 · 기술 등이 건전하게 발전할 수 있는 소지가 단절되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기업은 필연적으로 일본기업의 예속 아래 들어가고 극소수의 농업경영과 일본상품의 유통부문을 담당하는 상업경영, 그리고 광업경영이나 정미업을 중심으로 하는 식품공업, 또는 극소수의 경공업에만 국한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그 비중도 극히 적었다.

이때의 우리나라 기업은 봉건성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우리나라 기업은 산업자본화 또는 금융자본화하기보다는 봉건적 소작지대와 고리대이자가 자본축적의 근원이 되거나 상업교역에서 부를 축적하여 상업자본화하는 것에 불과하였다.

공업경영에 있어서도 대기업과 중화학 분야의 기업은 거의 일본이 운영하고 한국인은 정미업 등을 중심으로 하는 경공업에 국한되었다.

한편, 주요 광업경영으로 갑부가 된 예가 약간 있기도 하였으나, 그들이 채광 · 제련 · 제품가공에 이르기까지 계열산업화한 것이 아니라, 요행히 좋은 광맥을 잡아 그 채광권을 얻어 일본인에게 판매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원시적 형태로 채광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산업자본화하지 못하고 토지자본화하는 데 그쳐 근대화에 큰 소임을 담당하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상업경영 및 금융경영에 있어서도 일본인의 비중이 압도적이었다. 우리나라 기업의 일본의존성은 자본부족에 의거하는 것이지만 기술 부족, 경영능력 부족에도 의거한다.

그리고 원료수출적 · 제품수입적 · 수입초과적 특질이 있었다. 한편, 사회적으로는 일본인사회와 한국인사회가 공존하는 이중사회적 특질이 있었으며, 한일민족 사이에 두드러진 노동조건의 격차가 있었다.

광복 후의 국토분단적 · 미군정적 성격의 경영(1945∼1950)

광복으로 식민지적 경영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나, 경영면으로 볼 때 몇 개의 경영특질이 더 첨가되었다. 즉, 일제의 식민지적 경영특질에 새로이 국토분단적 · 미군정적 특질을 더하게 되었다.

즉, ① 국토분단으로 산업구조를 변경시켜 남한은 농업의존적 경영특질을 가지게 되었다. ② 미군정하에서 토지개혁설이 유포되었고, 그 뒤에 실제로 토지개혁이 단행됨으로써 농업경영에 있어서의 영세경영적 특질과 지주경영자의 몰락상을 보이게 되었다. 이때 유상으로 취득한 토지증권이 소비되어 산업자본화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③ 국토분단으로 북쪽의 중공업지대를 상실하여 경공업 의존적 특질을 가지게 되었다. ④ 일본인의 소유와 관리에서 벗어난 소위 적산귀속재산의 관리와 귀속 등을 에워싸고 여러 가지 문제점을 제기한 귀속재산관리적 특질을 들 수 있다.

한편, 민족항일기부터의 우리의 토착기업, 예를 든다면 경성방직(京城紡織) · 화신(和信) · 삼양사(三養社) · 박가분(朴家粉) 등과 같은 기업들이 아주 적은 숫자에 지나지 않지만, 광복과 더불어 혼란 속에서도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광복으로 일본인 소유의 기업이 물러감에 따라 기업경영에 공백기간이 생기게 되고, 이를 보충하기 위하여는 상당한 기간 동안 진통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뒤에 일본인 소유 기업은 적산으로 취급되어 농지 · 주택 · 상점 · 공장 등이 연고자 우선으로 임대차(賃貸借)되어 일정한 임대료를 납부하고 그를 활용, 운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일본인 소유 재산 중 규모가 아주 크거나 혹은 국민경제에 있어서 차지하는 비중이 아주 큰 것은 중앙정부의 직접관리하에 놓이게 되고, 이것이 뒤에 정부관리기업으로 되었다.

이 과정에서 큰 기업과 공익성이 강하였던 조선전업(朝鮮電業) · 경성전기(京城電氣) · 남선전기(南鮮電氣) 등과 같은 송전 및 배전회사와, 조선은행(朝鮮銀行) · 상업은행(商業銀行)과 같은 금융기관이 국영기업형태로 발달하게 되어, 이는 우리나라의 기업 중 공기업이 많게 된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 임대차와 불하과정을 통하여 오늘날의 대기업으로 등장한 경우도 없지 않으며, 이를 바탕으로 재벌로 성장한 경우도 적지 않다. 예를 들면, 신세계(三越 서울지점) · 대우중공업(朝鮮機械製作所) · 한국타이어(조선타이어) 등이 일본인기업의 불하기업 후신이라 할 수 있으며, 한화그룹도 그러한 예로 볼 수 있다.

어쨌든 일본인 재산이 여러 가지 배경, 즉 정치적 배경이라든지 과거의 연고적 배경, 경제적 배경 등을 이유로 하여 민간에 불하 내지 임대차됨으로써 새로운 귀속재산 경영자층이 형성되었다.

이 과정에 있어서 저렴한 불하가격, 장기간에 걸친 상환조건, 금융특혜, 독점허용, 원자재 우선배정 등 많은 특혜를 바탕으로, 극심한 물가상승에 편승하여 우리가 오늘날 볼 수 있는 지배적 경영층의 일부를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귀속재산 불하는 경우에 따라서는 부패를 조장하였고, 경영에 있어서의 정치 우위와 정경유착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치적 배경으로 경영권을 잡은 사람들 중에는 경영에 필요한 자본 · 기술 · 경영 · 관리 등의 결핍으로, 불하나 임대받은 기업체를 제대로 운용하지 못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6·25전쟁 후의 전재적 경영

우선 6 · 25전쟁으로 인적 · 물적 자원의 파괴가 심하였으며, 특히 대구 · 부산 이외의 지역에서의 공업부문 피해는 막대하였다. 이에 전쟁지원과 전쟁복구를 위하여 미국을 비롯한 국제연합의 경제적 지원, 즉 외국원조 의존적 특질을 띠게 되었다.

그 밖에 전쟁으로 인한 물자의 수요는 생산과 공급과정을 통하여 막대한 전시이득으로 나타나고, 이들을 중심으로 하여 대구 · 부산 지역에 많은 기업이 생기고, 기존기업은 급성장하였다.

근대사회에 있어서는 군수산업은 무기뿐만이 아니라 먹는 것, 입는 것, 신발에 이르기까지 방위산업으로 볼 수도 있어서 이를 계기로 소박한 군수기업도 나타났다.

우리나라의 산업경제의 지주를 형성하는 공업경영은 이때부터 싹트기 시작하였으며, 휴전 이후 어느 정도 기반을 이루고, 5 · 16군사정변 이후의 경제개발로 본격화하기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경향은 전시(戰時)인플레이션으로 더욱 촉성되었고, 이 시기에 원시축적을 한 기업도 있었다.

휴전 이후 5·16 군사정변 이전의 경영

휴전 이후 근대적 자본주의의 기틀이 마련되는 데 있어서 커다란 소임을 담당한 것은 외국의 경제원조, 특히 미국의 경제적 원조였다.

이로써 우리의 기업경영에 외국원조적 경영특질이 또한 첨가되었다. 즉, 막대한 액수의 외국원조는 기업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초기에 있어서는 소비재에 치중되었고, 뒤에 점차로 생산재 부문으로 옮겨갔다.

따라서, 기업경영의 측면으로 볼 때는 큰 비중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지만, 생산재로서 공장이나 기계 등 시설을 도입하여 공장을 운영하여 경영발전에 중추적 구실을 하였다.

그 예로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의 원조로 건립된 인천판초자(현재의 한국유리) · 충주비료(국영의 한국종합화학) 및 문경의 시멘트(대한양회: 현재의 쌍용양회)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양의 소비재공업은 ① 국민의 소비생활 수준을 높임과 동시에 이들 소비재를 중심으로 하는 외국원조 의존적 경영특질을 가져왔다. 그리고 이들 소비재 도입을 바탕으로 하여 자본축적으로 전개된 것이 사실이다.

② 수입의존적 기업특질을 가지게 되었다. 빈약한 생산시설하에서는 소비재를 해외에서 수입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따라 외채 의존적 기업체질을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기업의 업종별 특질을 보면 경공업, 특히 의류 및 식료품 등의 가공공업적인 경영특질을 볼 수 있으며, 중공업적 특질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이들 경공업 부문은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오늘날의 재벌의 기초가 마련되는 계기가 되었다. 자유당 말기에 이르러 이들 기업이 무역은 물론, 은행 · 보험 · 증권에까지 손을 뻗쳐 다각경영의 방향으로 나가게 되었다.

1961년 이후의 경영

1961년부터 1979년까지 약 20년 동안 우리나라의 경영은 그 양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많은 변화를 가져와 자본주의 경영의 체계와 많은 문제점을 내재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기간 동안 우선 부정축재 환수기업이 나타났고, 그 처리를 둘러싸고 적지 않은 진통이 있었다.

그러나 1962년부터 시작된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수행으로 우리의 기업경영은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한 느낌을 준다. 이 기간에 있어서의 기본철학과 그에 따른 개발전략의 전개에 따라 기업경영의 성장을 가져오기는 하였지만, 기업경영상에 많은 문제점을 내재하게 되었다.

이 기간의 기본철학은 경제제일주의라 할 수 있다. ‘우리도 남 못지않게 잘 살아보자.’는 철학에 입각하여 20년 가까이 노력을 기울인 결과 경제성장은 비약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에 상응하는 정치발전 · 사회발전 · 의식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아 많은 부작용을 낳기도 하였다. 경제제일주의에 입각하여 전개된 경제전략은 우선 ‘선성장 후분배’전략이었으며, 또 불균형성장전략이라 할 수 있다. 뒤에 이르러 중화학공업우선전략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기본전략에 따라 공업화가 추진되어 수입대체상품의 공업화도 어느 정도의 수준에 이르자 수출제일주의로 밀고 나갔다.

또, 1962년부터 시작된 경제개발로 우리는 선진국이 몇백 년에 걸쳐 이룩한 것을 단기간에 이룩하려 하다 보니 정부가 계획을 짜고, 그 계획을 집행하기 위하여 사업주를 찾고, 그들에게 금융특혜 · 조세특혜 등 많은 특혜를 주고 통제하는 등과 같은 정부주도형 경영이 지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제성장전략이 성공을 가져온 장점이 되기도 하였지만, 또한 많은 단점을 노출시켜 기업경영에도 여러 가지 문제점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대기업과 중소기업 · 영세기업 사이의 문제, 대기업 특히 재벌기업의 불공정 거래행위, 기업성과 배분을 둘러싸고서 일어나는 노사관리문제, 외수기업과 내수기업간의 갈등문제, 기업과 정치 · 행정과의 유착관계 등으로 나타난 부실기업 등등 여러 가지 문제가 제기되었다.

① 차관기업:1962년부터 수행된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계기로 지난 날 ‘부정축재기업가’로 낙인찍힌 기업가들로 하여금 경제개발계획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함으로써 경제개발의 일익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에 커다란 경제개발사업을 담당시키고 소요되는 막대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차관도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이들 계획사업을 중심으로 새로운 차관기업이 형성되었고, 주로 수입대체산업이 그 중심이 되었다. 예를 들면, 삼성그룹이 손을 댄 한국비료주식회사가 바로 그 대표적 사례이다.

② 합작기업:외국자본의 도입은 원리금 상환 없는 무상원조에서 시작하여, 원리금 상환이 의무화되는 차관, 그리고 경영성과 여하에 따라 배당이 문제가 되는 투자의 3개 형태가 있다.

우리의 경우에도 광복 후의 무상원조시대에서 1960년대의 차관, 이어 1960년대 하반기부터 외국자본의 투자형태로 국제경영이 이 땅에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현지투자도 전액을 외국자본에 의존하는 전액투자기업, 51% 이상의 과반수 이상 투자기업, 50%의 과반수 투자기업, 과반수 이하의 투자기업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차관에 이어 합작투자형태의 국제경영이 선진 각국의 다국적 기업과 제휴함으로써 우리 나라에도 외국기업경영이 도입되었다. 예를 들면, 미국의 다국적기업과 우리 정부와의 합작에 의한 대한석유공사 · 영남화학주식회사(3비) · 진해화학주식회사(4비) 등이 나타났고, 이후에 민간기업과 외국기업과의 합작기업, 그리고 외국기업의 100% 전액투자기업들도 나오게 되었다.

처음에는 미국기업과 서구기업, 그리고 뒤에는 일본기업과의 합작투자기업이 많이 늘어났다. 이러한 합작기업은 처음에는 우리가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시작하여 기업경영상 여러 가지 문제가 제기되었지만, 우리 경제가 좀더 고도화됨에 따라 자원확보 · 시장확보 · 무역마찰회피 등 여러 이유로 우리 나라 기업들도 해외에 전액투자 · 합작투자를 하여 해외에 진출하는 경우도 현저히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③ 수출기업:베트남 특수경기를 바탕으로 하여 국내에서 미군 관련 용역사업을 바탕으로 기업기반을 닦아온 기업들의 해외진출이 늘어났다. 예를 들면 한진 · 경남기업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공업화정책으로 어느 정도 기반을 다진 국내기업들은 그를 기반으로 하여 국가의 수출촉진정책의 붐을 타고 수출기업으로 크게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수출진흥과 곁들여 종합무역상사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 대표적 기업으로서는 대우실업주식회사를 들 수 있다.

④ 해외건설기업:1973년부터 시작된 제1차 석유파동을 계기로 우리는 높은 석유가격으로 국제수지면에서 많은 압력을 받게 되었다. 한편, 중동의 산유국은 석유가격의 앙등으로 국제수지상 많은 흑자가 생기고, 이를 자본으로 한 경제개발이 붐을 이루게 되었다.

이에 편승하여 우리의 건설기업들이 중동지역에 진출하기 시작하여 적지않은 성과를 거두어 기업성장과 국제수지 개선에 큰 기여를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개중에는 적지 않은 해외건설기업이 포말화(泡沫化)하여 부실기업 정리를 에워싸고 많은 문제점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⑤ 중화학기업:역사적으로 보아 지난 날 이 땅에서 경제를 주름잡던 경공업도 이제 점차로 그 비중이 낮아지고, 철강공업 · 화학공업 · 비철금속공업 · 기계공업 · 조선공업 · 전자공업 등이 육성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시책을 담당하기 위하여 적지 않은 중화학기업 또는 전자기업 · 기계기업 등이 많이 나타났고, 그 중에는 성공한 기업, 예를 들면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 · 현대자동차주식회사 등도 있기는 하지만, 부실화된 경우도 없지 않다.

1980년 이후의 경영

1980년 이후 우리의 기업경영도 이제는 양적 팽창에서 질적 향상이라는 커다란 과제를 안고 있다. 이에 서비스산업의 발전으로 금융기업 · 단자기업 · 증권기업 · 보험기업 · 관광기업들의 비약적인 발전을 보게 되었고, 고도의 정보사회를 지향하여 정보기업의 부각, 보험기업의 출현 등의 여러 변모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우리 기업은 국내외에 걸친 치열한 기업경쟁을 극복하기 위하여 경쟁력 배양에 여러 모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우리 속담에 아홉 고비가 있다고 한다. 이 아홉 고비의 진통은 우리의 경제와 기업경영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1950년대와 1990년대의 기업경영에도 적지 않은 진통을 안겨준 것으로 보여진다.

1979년의 서울의 봄을 계기로 우리 나라의 기업경영도 커다란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우선 이를 계기로 하여 불안한 정치정세 밑에 종전의 강력한 계획경제의 집행에 차질을 가져왔고, 특히 노사분규의 격화로 기업경영에 많은 마찰현상을 보여 기업체질이 취약한 기업은 부실화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서울의 봄이 일단 전두환(全斗煥) 정권으로 이어지면서 노사분규가 어느 정도 진정되고 칼(KAL)피격사건, 아웅산사건 등 국제위기를 극복하면서 기업경영도 경제성장, 물가안정, 국제수지균형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잡는 성과를 배경으로 더욱 더 양적 팽창과 중화학공업화, 서비스산업 확대, 대형화하는 경향을 보이면서 기업의 대형화로 재벌이 비대화하는 과정을 보이게 되었다. 이에 공정거래법이 시행되어 그의 부작용을 막으려 하였으나 큰 실효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어 노태우(盧泰遇) 정권으로 이어지며 1988년의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해서 1980년대의 고도성장을 구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1989년부터 시작된 제2의 서울의 봄은 기업경영에 적지 않은 마찰현상을 보였으며, 동구권의 붕괴, 소련의 해체, 중국과의 국교정상화를 계기로 한 우리 기업의 세계화 추세에 박차를 가하는 격동기의 어려움을 격게 되었다.

한편, 여러 파란 끝에 이어진 김영삼(金永三) 문민정부에 많은 기대를 걸고 기업경영의 비약적인 질적 향상을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다. 김영삼 정권은 기업경영의 국제화, 세계화, 고도화, 자유화로 질적 향상을 도모하였지만 기업경영의 구조개혁이 실패함에 따라 국제경쟁력이 상실되어 많은 기업의 부실화로 진통을 겪고 있다. 이의 정상화, 고도화는 현재 당면한 최대 과제가 아닌가 생각된다.

근대적 기업경영의 역사가 짧은 데다가 우리 기업경영만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특질, 예컨대 봉건적 · 식민적 · 국토분단적 · 전쟁적인 여러 특질들로 말미암아 우리 기업경영은 여러 면에서 특질을 가지게 되었다.

첫째, 대기업의 비중이 크다는 점이다. 이것은 우리 경제의 불균형성장전략에서 온 결과로서, 단기간에 성장을 추구하다 보니 정경유착이 이루어진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둘째, 경영관리가 아직도 과학적 · 합리적이라기보다는 비과학적 · 비합리적 요소가 완전히 불식되어 있지 않은 면이 많다는 것이다. 소유와 경영의 불분리, 혈연경영을 위한 각종 연고경영의 잔존, 가족주의적 노사관리, 타인자본 의존경영 등 경영면에서의 많은 전근대성을 내재하고 있다.

정치와 경영의 유착, 중앙집권적인 경영조직, 저임금을 포함한 나쁜 노동조건, 극렬한 노사대립, 기술의 취약성, 불공정거래행위 등 많은 문제점을 제기하는 경영관리상황에 아직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다.

셋째, 국제경영이 취약하다. 대부분의 기업경영이 국제지향적 기업경영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국제경영으로서의 자본 · 인력 · 기술 · 관리면에서의 국제적 수준에는 부족한 점이 많은 것으로 생각된다.

넷째, 우리 기업경영은 아직도 노동집약적 특질이 강하며 기술집약적 기업경영에는 취약하다는 특질을 가지고 있다. 이들 외에도 많은 한국적 경영특질을 생각할 수 있는데, 이것은 우리의 여러 경영배경과 짧은 경영 역사, 경영 문화 등에서 온 것으로 생각된다.

평가

짧은 기간 안에, 그것도 기구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기업경영을 이룩하다 보니 그 결과 외적으로는 기업경영의 모습을 갖추고, 경영실적을 올려 외적 성장과 양적 성장 모두 상당한 수준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기업경영의 각 분야를 엄밀하게 따져가면서 살펴보면, 아직도 보완, 개선되어야 할 부문이 너무도 많은 것이 현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외형적인 성장 못지않게 질적인 향상이 앞으로 더욱 더 이루어져서 국제적 수준으로까지 높여져야 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한국적 기업경영’이라는 특유한 면을 많이 발휘하여 세계의 여러 나라 기업경영에 지침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참고문헌

『경영사』(송기철, 박영사, 1984)
『신경영사』(김신웅, 유풍출판사, 1978)
『기업가사연구』(황명수, 단국대학교출판부, 1976)
『한국기업가사』(조기준, 박영사, 1973)
『한국개항기와 상업연구』(한우근, 일조각, 1970)
『한국농업사』(주봉규, 부민문화사,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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