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황남리 고분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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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대릉원 일원 중 북쪽 하늘에서 바라본 황남리 고분군 전경
경주 대릉원 일원 중 북쪽 하늘에서 바라본 황남리 고분군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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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 · 구덩식돌덧널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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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 · 구덩식돌덧널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사적.
내용

경주분지 중심에 있는 대고분군 가운데 주고분군으로 노동동(路東洞) 고분군과 노서동(路西洞) 고분군에서 남동쪽인 월성(月城)으로 이어지는 선상에 분포하는 고분군이다. 고분군 일대 31,565평이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경주고분의 일련번호로는 90∼114호, 151∼155호 봉토분 30기가 이 고분군에 속하며, 고분군의 일부는 대릉원(大陵苑)으로 조성되어 보호되고 있다. 이 가운데 100·109호분이 일제강점기에, 151호분이 1965년에, 98(皇南大塚)·110·155(天馬塚)호분이 고분공원 조성 당시에 발굴 조사되었다. 그리고 대릉원의 담장을 축설하기 위해 그 부지들이 1973년에 발굴 조사되었다. 봉토가 남아 있는 고분들은 대개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추정되고 있고, 봉분의 형태는 대부분 단일원분(單一圓墳)이나 표형분(瓢形墳, 90·98·143호 등)도 있다. 고분들 가운데에 전 미추왕릉(傳 味鄒王陵)이 위치하고 있고 한국의 고분 가운데 가장 크다는 황남대총 등의 존재로 보아 신라 마립간기(麻立干期)의 왕과 왕족들의 무덤들로 추정된다. 이밖에도 대릉원의 동편에는 일제강점기에는 43기의 봉토분(59∼89호, 115∼117호)이 남아 있었으나 모두 없어지고 지금은 가옥이 들어서 있다. 그리고 이것들 가운데 82호분과 83호분이 일제강점기에 발굴 조사되었다.

1973년부터 1975년에 걸쳐 발굴조사된 황남대총은 남∼북 길이 120m, 동∼서 직경 80m, 높이 23m의 거대한 돌무지덧널무덤으로 남분(南墳)에 북분(北墳)을 덧붙여 만든 표형분이다. 남분은 으뜸덧널(主槨)과 딸린덧널(副槨)을 동서에 ‘昌’자형으로 배치한 주부곽식이나, 북분은 외덧널식(單槨墳)이다. 남분 으뜸덧널의 내부 나무널(木棺)에서는 60세 전후의 남자 유골이 발견되었고, 나무널과 덧널 사이에서는 순장된 10대 여성의 유골 일부가 확인되었다. 그리고 북분에서는 ‘부인대(夫人帶)’라는 명문(銘文)이 있는 은제허리띠가 발견되었다. 따라서 남분은 남성의 무덤, 북분은 여성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남분에서는 금동관(金銅冠)·금제관드리개(金製冠垂下飾) 등의 장신구류와 금은장의 세고리자루큰칼(三累環頭大刀)·은제팔뚝가리개(銀製脛甲) 등의 무기류, 옥잠(玉蠶)을 장식한 금동제의 마구류, 유리용기, 각종 토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북분에서는 금관·금제허리띠(金製과帶) 등의 장신구류, 타출문은잔(打出文銀杯)·유리잔·흑갈유병(黑褐油甁) 등의 용기류가 출토되었다. 출토유물로 보아 5세기대 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추정되며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과 그 비 또는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과 그 비의 능으로 비정되고 있다.

1973년에 조사된 천마총은 직경 47m, 높이 12.7m의 원형 돌무지덧널무덤이다. 외덧널식인 내부에서는 금관·관장식·관모(冠帽) 등의 장신구류, 금동말안장과 백화수피제천마도장니(白樺樹被製天馬圖帳尼) 등 각종의 마구류, 금동·은·청동제의 용기류, 유리용기, 각종 철기와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백화수피제장니에 그려진 천마도(天馬圖)가 출토되어 천마총이라 명명되었고, 이 고분을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의 무덤으로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이 고분은 복원되어 내부시설이 공개되고 있다.

이 두 고분 이외에 발굴조사된 109호분과 110호분 역시 돌무지덧널무덤이었다. 110호분은 으뜸덧널과 딸린덧널을 가진 한사람무덤(單葬墳)이었으나, 109호분은 하나의 봉토 안에 시차를 두고 축조된 여러 개의 무덤으로 구성된 여러사람무덤(多葬墳)이었다. 109호의 무덤 가운데 가장 일찍 축조된 제3·4곽(으뜸덧널과 딸린덧널)은 현재까지 알려진 돌무지덧널무덤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151호분은 하나의 봉토 안에 남∼북 방향의 돌무지덧널무덤과 동∼서 방향의 장방형돌방(長方形石室)이 함께 들어 있는 무덤이었다. 이 무덤은 보문리부부총(普門里夫婦塚)과 함께 신라묘제의 변천과정을 잘 알려주는 것이다. 또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83호분은 외덧널식의 돌무지덧널무덤이었으며, 82호분은 동총(東塚)과 서총(西塚)으로 구성된 고분인데 모두 주부곽식의 돌무지덧널무덤이었다.

그밖에도 1973년 고분공원 조성 당시 담장부지의 발굴에서는 지상에는 흔적이 없었던 고분들이 지하에서 수백 기가 조사되었다. 이것은 여기에 분포하는 대형분들 사이사이 또는 주변에 원래 봉분이 없거나 너무 작아 멸실된 소형분들이 수도 없이 분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조사된 소형의 고분들은 대부분 돌무지덧널무덤이었으나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와 독널무덤(甕棺墓)도 혼재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경주황남리고분군은 본래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나 2011년 7월 28일에 경주노동리고분군, 경주노서리고분군, 경주황오리고분군, 경주인왕리고분군과 더불어 사적 경주 대릉원 일원으로 재지정되었다.

참고문헌

『황남대총 남분』(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1994)
『황남대총 북분』(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1985)
『경주지구고적발굴조사보고서』2(문화재관리국 경주사적관리사무소, 1980)
『경주지구고분발굴조사보고서』1(문화재관리국 경주사적관리사무소, 1975)
『황남동고분발굴조사개보』(김택규·이은창, 영남대학교 박물관, 1975)
『천마총』(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74)
「황남리 제151호분」(박일훈,『경주황오리 제1·33호, 황남리 제151호 고분발굴조사보고』, 1969)
『皇南里第百九號墳皇吾里第十四號墳調査報告-昭和十一年度古蹟調査報告』(齊藤忠, 朝鮮總督府, 1937)
『慶州皇南里第82號墳第83號墳調査報告-昭和六年度古蹟調査報告』(有光敎一, 朝鮮總督府,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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