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학(經學)의 ‘경(經)’은 유교의 경전을 말한다. 또한 경전은 경서(經書)라고도 일컫는다. 처음에는 ‘경’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논어』나 『맹자』에서도 보통명사를 그대로 고유명사화하여 『시(詩)』 또는 『서(書)』라고만 불렀으며, 여기에 ‘경’자를 붙여 『시경』이니 『서경』이니 하고 부르지 않았다.
하나 하나의 경서의 호칭은 시대에 따라 변화가 있었다. 『서경』의 경우만을 예로 들면 고대에는 『서』라고만 하다가, 한나라 때부터 『상서(尙書)』라 하였고, 명나라 이후로 『서경(書經)』이라는 칭호가 확정되었다. 하나 하나의 경서에 ‘경’자를 붙인 것은 아니라도 경서를 ‘경’으로 통칭한 것은 『장자(莊子)』의 천운(天運)편에서부터의 일이다.
유가 가운데서 ‘경’으로 부른 것은 역시 전국시대 말기에 나온 순자(荀子)가 처음으로 생각된다. 전국시대에도 도가, 법가, 묵가의 학문에 대립한 유(儒), 즉 유학만 있었지 경학이라는 명칭은 없었다.
‘경학’이라는 두 글자가 기록된 가장 오래된 문헌은 『한서(漢書)』 유림전(儒林傳)이다. 구양생(歐陽生)으로부터 『상서』, 즉 『서경』의 학(學)을 받고, 또 공안국(孔安國)에게 학문을 배우기도 한 예관(倪寬)이 “무제(武帝)를 처음 만났을 때 경학을 말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경학’이라는 명칭이 문헌에 정착한 것은 전한(前漢) 무제시대이다. 이는 경서의 개념 자체가 이 시대에 성립된 것과 관련된다.
진화(秦火)주 01)로 『악경(樂經)』이 망실되어 전한 초에 오경(五經)의 일컬음이 있다가 후한 이후로는 ‘경’의 영역이 점차 확대되어왔다. 흔히 진시황(秦始皇) 시대를 경학의 공백 시대로 보기 쉬우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진시황은 사상 최초의 군현제 통일국가의 효과적인 지배를 위하여 유능한 지식 관료의 필요성을 느끼고, ‘박사관(博士官)’이라고 일컫는 학술 교육 담당기관을 중앙에 설치하는 한편, 유학을 포함한 백가(百家)의 문헌을 적극적으로 수집하였다.
이렇게 확보한 막대한 장서가 뒤에 학술 상 대단히 유용하게 되었다. 비록 진나라 때에 학문은 지배층의 독점물이 되었지만, 학문 그 자체가 부정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전한 초에 금문상서(今文尙書) 29편을 전수한 복생(伏生)은 본래 진의 박사였다.
후한 반고(班固)의 『백호통 白虎通』에는 『역(易)』, 『서』, 『시』, 『예 禮』, 『악(樂)』을 오경이라 일컫고 있으나, 당(唐)의 서견(徐堅) 등이 찬한 『초학기 初學記』에 수록된 『악경』은 진화 뒤로 없어져 『시』, 『서』, 『역』, 『춘추 春秋』, 『예기 禮記』의 5종을 총칭하여 오경이라 하고 있다. 이것이 지금 오경이라 부르는 것과 일치한다.
이 가운데 『예』는 전한 무제 때에는 『의례(儀禮)』를 지칭했던 것이 후세에 와서는 『예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되었으며, 『춘추』는 『공양전(公羊傳)』을 말하는 것이었는데, 이것도 뒤에 『좌씨전(左氏傳)』으로 바뀌었다.
진의 행정 지배 기구는 전한에 와서도 발전적으로 계승되었다. 건국 후 70년, 충실한 국력을 토대로 등장한 무제는 춘추학자 동중서(董仲舒)의 건의로 유학중심의 사상통제와 그 추진기관으로서의 ‘오경박사(五經博士)’의 설치를 단행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유교의 국교화(國敎化)이다.
이 때의 오경은 『역』, 『서』, 『시』의 삼경에 『춘추』(공양전)와 『예』(의례)이다. 이 오경, 즉 5종의 경서를 유학 최고의 기본 문헌으로 인정하고, 그것에 ‘경’으로서의 권위를 부여하여 전문 학자를 박사로 임용하고 여기에 연구생을 배치하였다. 학문의 국가 관리 일환으로 경의 범위가 명확하게 규정됨에 따라 경학은 비로소 충분한 조건을 갖추어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전한 무제 이후 선제(宣帝) 때에는 학자들에게 명하여 오경의 이동(異同)을 석거각(石渠閣)에서 강론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도 당시 사람들 가운데 아직도 육경을 일컫는 경우가 있었는데, 후한의 반고가 『백호통』을 편술하고 나서 오경의 칭호가 보편화 되었다.
육경 또는 오경 이외에 삼경, 사경, 칠경, 구경, 십경, 십일경, 십이경, 십삼경, 십사경, 십칠경, 이십일경 등의 통칭이 있으나,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리는 것으로는 삼경(詩, 書, 易)과 구경과 십삼경이 있다.
구경은 몇 가지 이설이 있는데, 그 중 당나라 육덕명(陸德明)의 『경전석문서록 經典釋文序錄』에 따르면 『역』, 『서』, 『시』, 『주례(周禮)』, 『의례』, 『예기』, 『춘추』, 『효경 孝經』, 『논어』의 아홉 가지를 의미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역』, 『서』, 『시』에 삼례(三禮)주 02)와 춘추삼전(春秋三傳)주 03)을 합하여 구경이라 하는 것이 통설이다.
청나라의 피석서(皮錫瑞)는 『경학역사 經學歷史』에서 “당 때에 삼례와 삼전을 나누고 여기에 『역』, 『서』, 『시』를 합하여 구경으로 삼고, 송 때에 여기에 『논어』, 『효경』, 『맹자』, 『이아(爾雅)』를 보태어 십삼경을 삼았다.”고 하였거니와 십삼경은 이른바 경의 총칭으로 『역경 易經』, 『상서, 서경』, 『모시(毛詩), 시경』, 『춘추좌씨전』, 『춘추공양전』, 『춘추곡량전』, 『주례』, 『의례』, 『예기』, 『효경』, 『논어』, 『맹자』, 『이아』의 13종을 말한다.
지금 우리가 경서를 읽을 때에는 이 13경에 상세한 주석을 가한 『13경주소 十三經注疏』가 기본적인 참고서가 된다. 경에 대한 1차 주석으로서의 주(注)주 04)와 주석의 주석 혹은 2차 주석으로서의 소(疏)주 05)를 합한 것이 주소(注疏)인데, 한·진(晉) 때는 주가, 당·송 때는 소가 성행하였다.
전한 무제가 유교를 국교로 정하면서, 오경은 서양에 있어서의 성경과 같은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 경(經)이란 본래 직물(織物)의 ‘세로지른 실’이다. 뜻이 굴러 ‘사물의 줄거리’ 또는 ‘올바른 도리’를 의미한다.
오경은 곧 경으로 존숭되는 한 모든 진리의 원천이 된다. 우주론(易), 정치학(書, 禮, 詩), 윤리학(禮), 역사철학(春秋), 문학(詩) 등 천하 국가를 어떻게 다스리느냐,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의 문제에 대한 모든 해답은 오경 속에 완전히 구비되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오경의 무류성(無謬性)과 자기 완결성은 오경의 작자가 성인이라는 사실로서 보증되고 있다.
후한 정현(鄭玄)의 오경 전반에 걸친 방대한 주석 작업은 이 보증의 작업이며, 그의 주석학은 곧 그의 사상 체계이고 철학 체계라고도 할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한나라 초부터 청나라 말에 이르기까지 2,000년에 걸쳐 유교는 국교의 지위를 누렸다. 그러므로 오경의 한 글자 한 구절은 지식인의 상식이 되었고, 그들의 시문에서 모든 사람의 이해를 전제로 오경이 사용되어 왔다. 이런 이유로 중국학이나 한국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싫든 좋든 오경의 소양 없이는 원문 해독이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경학에는 숙명처럼 붙어 다니는 난제가 있다. 그것은 금문학(今文學)과 고문학(古文學)의 다툼이다. 행정 능률의 향상을 위해 진대에 만들어지고 한대에 개량된 간체문자(簡體文字), 즉 예서(隷書)를 금문이라 하고 그 이전의 구체문자(舊體文字)를 고문이라 한다.
경학 성립의 시기(전한 초기)에는 같은 경서에 금문(新體字)과 고문(舊體字)의 두 계통이 병존하고 있었다. 진대 박사관이나 한대 오경박사 계통의 관학이 주로 신체자 계통이고, 분서(焚書)를 면한 민간 계통이 주로 구체자의 계통이었다.
자체의 차이는 먼저 해석의 차이를 낳고 나아가 학파의 대립으로 번져서 결국에는 정치 세력까지 껴안은 항쟁으로 확대되어 경학은 내란 시대에 돌입하게까지 된다.
전한 무제가 인가한 오경박사는 물론 금문파이었는데, 그 뒤로부터 200년 가까이 걸친 고문파의 반격은 정치면에서 신(新)이라는 독자 정권의 수립을 가져올 정도로 금문파와 대등한 지위를 차지하기까지 이른다. 그리고 금문파와 고문파 사이의 화해 조건도 서서히 정비되어가고 있었다.
후한 정현의 오경 전반에 걸친 방대한 주석 작업은 확실히 오경의 무류성과 자기 완결성에 대한 보증 작업이었다. 이처럼 경학 사상 유례 없는 큰 업적을 남긴 정현은, 첫째로는 경은 말할 것도 없고 이 경에 대한 보완적 성격을 가지는 전(傳)까지를 포함한 경학의 모든 근본 문헌에 대하여 뛰어난 문자학에 근거한 종합적 해석을 확립하였다.
둘째로 그는 독특한 ‘예(禮)’의 관념을 축으로 하는 경학 전 영역의 체계화에 힘썼다. 경학이 곧 사상 체계이고 철학 체계이었듯이, 경학에 기대되는 국가에의 공헌도는 여기에서 비약적으로 상승되었다.
이것은 금문파와 고문파의 화해 조건이 서서히 성숙되어온 결과이기도 했지만, 이와 함께 정현의 학문적인 넓은 시야 속에서 금문학, 고문학의 후유증 없는 합작이 이루어진 결과이기도 하였다.
이후에 노장(老莊)과 불교 등의 유행으로 유교의 지위가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유교는 그때마다 시대의 호상(好尙)을 오경의 해석학 속에 도입하여 경서의 권위를 재무장함으로써 권위를 지켜 나갔다.
예를 들어 당초(唐初)의 공영달(孔穎達) 등이 지은 흠정(欽定)의 주석서 『오경정의 五經正義』에는 육조시대(六朝時代)의 노불(老佛) 유행기의 영향인 듯한 해석이 보이고 있다.
또한 주자(朱子)의 『사서집주(四書集注)』는 오경 중심으로부터 사서 중심으로의 획기적인 전환을 이룬 저술이기도 하지만, 그 속에는 노·불을 받아들여 지양한 새로운 철학이 담겨져 있다.
그러나 죽은 사자의 뱃속에 토끼가 여러 마리 들어있음이 해부 결과 드러났다고 해서 사자를 토끼라고 할 수 없듯이, 아무리 노·불의 영향이 크다 해도 이와 같은 새로운 해석으로 철학적인 재무장을 한 유교를 유교 아닌 다른 이름으로 바꾸어 부를 수는 없다.
요컨대, 경서 주석의 역사는 곧 중국 철학사의 중요한 일면임을 우리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신유학(新儒學)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정도로 철학적으로 면모를 일신한 송대 이후의 성리학 등을 거쳐 청대의 사상사학(思想史學)의 전반적 연구의 발전은 경학의 독자성의 확보라는 면에서는 여러 가지로 불리한 결과를 가져온 것만은 틀림없다.
오경은 흔히 『역』, 『서』, 『시』, 『예기』, 『춘추』 또는 『시』, 『서』, 『역』, 『예기』, 『춘추』의 순서로 일컫는 것이 상례이지만, 우리 나라 이이(李珥)의 『격몽요결(擊蒙要訣)』『독서장』의 순서는 『시경』, 『예기』, 『서경』, 『역경』, 『춘추』의 순으로 되어 있다. 중국에서의 경학의 흐름을 이상 개관하였거니와, 우리나라에서의 경학 연구의 흐름은 어떠하였는가를 살펴본다.
조선조 초기 권근(權近)의 학문 속에는 오경 중심의 경학과 사서 중심의 이학(理學)의 공존 현상을 볼 수 있다. 권근을 분수령으로 하여 그 이전의 경학은 오경 중심인 데 비해, 그 뒤의 경학은 사서 중심의 이학의 테두리 속에서 이루어졌다.
성리학 전성기의 경학의 주제는 주로 사서, 그 중에서도 특히 『대학』을 중심으로 한 것이 주종을 이루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내려와서는 이른바 실학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경학의 연구 범위는 다시 크게 확대되기에 이른다.
청대의 사상 사학과 고증학(考證學)이 실학자들의 경학연구에 크게 참고가 되었다. 우리 나라 경학사의 특기할 사항을 다음과 같이 간추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