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흥군 ()

대동여지도 중 함경북도 경흥 부분
대동여지도 중 함경북도 경흥 부분
인문지리
지명
함경북도 북동부의 두만강 하구에 있는 군.
정의
함경북도 북동부의 두만강 하구에 있는 군.
개관

동쪽은 두만강을 경계로 하여 중국 동북 지방(東北地方)의 송강성(松江省 : 현재의 吉林省) 및 소련의 연해주(沿海州), 서쪽은 종성군, 북쪽은 경원군, 남쪽은 동해에 면하고 있다.

군 중심부는 동경 130°24′, 북위 42°19′에 위치하며, 면적 1,001.48㎢, 인구 9만 7957명(1943년 현재)이다. 2개 읍 3개 면 49개 동으로 되어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웅기읍 웅기동이다.

자연환경

내륙 지방은 산악 지대이나 두만강변과 해안 지대는 비교적 평탄하다. 함경산맥의 여맥이 경흥면 서쪽까지 뻗어, 송진산(松眞山, 1,146m)·보로지봉(保老地峰, 819m)·광대덕(廣臺德, 638m) 등의 산지가 중첩되어 있다.

하천으로는 동쪽에 있는 두만강 외에 웅기령에서 발원하여 경흥면 중앙으로 흘러 들어가는 포항천, 아오지읍 중앙으로 흘러 들어가는 아오지천(阿吾地川) 등이 있다.

경흥면의 함림산 부근에는 둘레 5㎞ 정도의 호수 적지(赤池)가 있다. 두만강 하구의 토리동 부근의 녹둔도 일대는 삼각주가 잘 발달되어 있고, 만포(晩浦)·서번포(西藩浦)·동번포(東藩浦) 등의 석호(潟湖)와 명사평(明砂坪) 일대의 하안 사구대(河岸砂丘帶)는 우리 나라에서 규모가 가장 큰 사구이다.

해안선은 비교적 굴곡이 심하여 웅기만(雄基灣)·대진만(大津灣)·창진만(倉津灣) 등이 있으며, 만 안에는 적도(赤島)·난도(卵島)·비파도(琵琶島) 등의 섬들이 있다.

토양은 두만강 상류에서 운반된 퇴적물로 덮여 있는 하류 일대의 평지가 비옥한 식양토이고, 산록 완사면과 구릉 지대는 식양토이다. 지질은 중생대 말기의 평안계(平安系)이며, 보을천(甫乙川) 중류와 아오지천 일대에 다소 함탄육성층(含炭陸成層)이 발달되어 있고, 그 밖의 지역은 화강암이 분포되어 있다.

기후는 대륙성 기후로 한서의 차가 현저하나, 해안 지방은 다소 바다의 영향을 받아 같은 위도 상에 있는 서해보다 높다. 연평균 기온 6.3℃, 1월 평균 기온 ·9.3℃, 8월 평균 기온 21.1℃, 연 강수량은 767.8㎜이다. 대개 첫서리는 10월 중순경에, 마지막 서리는 4월 하순경까지 온다.

역사

[고 대]

군내 노서면 서초항의 반포호반에서 굴포문화(屈浦文化)라고 불리는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의 복합층 패총이 발견되어 각종 골각기와 석기류가 출토되었고, 웅기읍 송평동과 용수동에서는 신석기 시대의 주거지·화로지·분묘지와 타제 석촉 및 채문토기(彩文土器) 등 많은 유적과 유물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이곳은 이미 선사 시대에 사람이 살았던 것이 분명하다.

『사기 史記』에 의하면, 옛날 이 지방에는 숙신(肅愼)·읍루(挹婁)·예맥(濊貊)·말갈(靺鞨)·부여(夫餘) 등 여러 부족 국가가 흥망하였고, 삼국 시대에는 고구려의 영역이었다.

668년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이 땅은 당(唐)나라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699년 고구려 유민들이 발해를 세웠을 무렵에는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에 속하게 되었다.

[고 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건국 초기의 영역은 이곳에 미치지 못하였으며, 926년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뒤에는 그 지배하에 있었다.

그리고 발해 멸망 당시 이에서 벗어난 일부 말갈족의 집단은 이를 여진이라 불렀으며, 1115년(예종 10) 금(金)나라를 세워 거란을 멸망시켰고, 금나라는 1234년(고종 21) 원(元)나라에 의하여 무너지고, 1368년(공민왕 17) 원나라는 명(明)나라에 의하여 멸망되었으니, 이 지방은 몇 세기에 걸쳐 이들 여러 나라의 판도로 변천을 거듭하였다.

한편, 금나라가 멸망한 뒤 여진족은 백두산 후면에서 차차 남하하여 함경도 지방을 무대로 고려와 자주 충돌하였다. 그리고 고려가 아직 원나라의 지배하에 있을 때 이성계(李成桂)의 고조부 안사(安社)는 두만강 하구의 알동(斡東) 다루가치(達魯花赤)로서 여진을 다스렸고, 그 아들 행리(行里) 또한 천호(千戶)를 물려받았으며, 목조와 그 비의 능인 덕릉(德陵)과 안릉(安陵)은 지금의 경흥면 솔봉[松峯]기슭에 있었다.

원나라가 무너지고 명나라가 일어서자 고려는 두만강 하구 지방까지 그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이곳은 동북면(東北面 : 朔方道) 공주(孔州 : 匡州·楸城)가 되었다.

[조 선]

1398년(태조 7)동북면 도선무순찰사 정도전(鄭道傳)이 북방의 주·군·현을 분정할 때, 공주를 덕릉과 안릉이 있는 조기(肇基)의 땅이라 하여 이름을 경원이라 고치고 부(府)를 두었다.

그런데 1409년(태종 9) 읍치(邑治)를 고성에서 지금의 경원 용당 근처의 소다로(蘇多老) 책성으로 옮겼다. 이듬해 대안의 여진이 쳐들어왔기 때문에 부득이 민호를 경성으로 이동시켜 부를 이에 병치하는 동시에 덕릉과 안릉도 함경남도 신흥군으로 이장하였다.

그 뒤 1417년(태종 17)경원부를 지금의 부령군 부거(富居)로 복귀하여 도호부로 승격시켰다가, 육진 개척으로 1434년(세종 16) 경원읍치를 회질가(會叱家 : 지금의 경원읍)로 옮긴 이듬해에 공성현(孔城縣)을 분리, 1437년경흥군으로 이름을 짓고, 1443년 성을 넓혀 도호부로 승격시켰다가 1459년(세조 5) 읍치를 무안보로 이전하였다. 1586년(선조 19) 이순신(李舜臣)이 조산보만호 겸 녹둔도둔전관으로 부임, 여진 토벌에 큰 전공을 세웠다.

[근 대]

1921년 웅기가 개항되고, 다시 1931년 읍으로 승격함과 동시에 군청을 이곳으로 옮겼으며, 1934년에는 지난날의 신안면을 나진읍으로 하였다가 나진항이 대륙의 종단항으로 지정됨에 따라 이듬해 시로 승격하여 분리되었고, 1940년에는 탄광 개발 및 인조 석유 공장의 건설과 더불어 상하면이 아오지읍으로 승격하였다. 1945년 당시의 관내 읍면 수는 2개 읍 3개 면이며, 호수는 2만 763호, 인구 9만 7957명에 이르렀다.

근대 인물로는 구한말 개화기에 법부협판을 지낸 김학우(金鶴羽), 학부협판이었던 김홍륙(金鴻陸), 서북학회(西北學會)의 지도자로 민족 문화의 창달과 애국 정신의 고취를 위하여 헌신한 김주병(金柱炳), 그리고 간도 대한성리회(大韓聖理會) 목사이며 신민회(新民會) 대표로 있다가 상해 임시 정부의 교통총장을 역임한 김규면(金圭冕) 등 많은 독립 운동가가 있다.

유물·유적

선사 시대 유적으로는 노서면 서수라동의 조개더미를 비롯하여 웅기읍 송평동조개더미·용수동조개더미, 노서면 굴포동조개더미가 있으며, 웅기읍 웅상동, 노서면 적도 등지에서는 수혈 주거지가 발견되었다.

특히, 굴포리 서포항 유적은 구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에 걸친 유적으로 유명하다. 고분으로는 아오지읍 용연동의 고장봉(高壯峰) 동록에 200여 기의 돌널무덤이 분포한다.

조선 시대 유적으로는 노서면 조산동에 이순신장군승전대비가 있는데, 이 비는 1586년 이순신이 조산만호로 부임한 뒤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이 밖에 한국·중국·소련의 세 나라를 바라볼 수 있는 청허정(淸虛亭), 여진족이 남긴 여진고비(女眞古碑) 등의 유적이 있으며, 천연기념물로는 웅기읍 알섬 바닷새보호구와 서수라동 산벚나무가 있다.

교육·문화

옛 교육 기관으로는 조선 초기에 창건된 경흥향교가 중심이 되어 많은 유생을 교육시켰고, 또 지방 여러 곳에는 서당이 설치되어 한문을 전수하였다.

근대적 교육 기관으로는 1911년 경흥공립보통학교가 처음 개교되었으며, 1913년 노서면 서면공립보통학교, 1919년 웅기공립보통학교의 개교를 계기로 일찍이 1면 1교의 교육 체제를 갖추었다.

교육열이 높아서 1945년 현재 군내 교육 기관으로는 유치원 3개소, 초등학교 13개교에 이르렀다. 종교 상황은 1945년 현재 불교 사찰 3개, 천주교 성당 1개이며, 개신교 교회는 경흥교회를 비롯하여 캐나다 계통의 장로교 교회 등 4개가 있다.

전래되는 민속놀이는 청년층의 횃불놀이·석전놀이 등이 있었고, 정월에는 윷놀이가 성한데 추위 때문에 실내에서 놀며, 강낭콩에 금을 그어 만든 윷을 사용하는 것이 다른 지방과 다르다.

정월 보름날 밤에는 윷점으로 그해 운수를 보는데, 먼저 달님에게 절을 하고 세 번 윷을 던져 나온 숫자를 풀어 당년 수를 점서에 따라 점을 친다. 동제로는 산간 지방은 3월 초순 길일에 산천제를 지내며, 산짐승의 피해나 나쁜 병을 물리치려 하고, 어촌에서는 풍어를 비는 용신제를 지낸다.

이 고장은 오랫동안 여진족이 살았고 근세에 이르러 개척된 땅이므로 발달된 민요는 없고, 근대요로서 〈애원성 哀願聲〉이 전하는데, 가사나 곡조가 애상적이며 특별한 악기를 타는 것이 아니라, 바가지나 양푼을 두드리며 부르는 것이 특징이다. 이 밖에 시집살이노래가 있다.

설화로는 〈적도설화〉와 〈적지전설〉이 있다. 〈적도설화〉는 목조의 뒤를 이은 익조에 얽힌 이야기로, 익조가 천호로 있으면서 그 위덕이 날로 높아 가므로 인근의 천호들이 시기하여 계교를 써서 죽이려 하였다.

그러한 음모를 모르는 익조가 초청을 받아 그들의 관성으로 가는 도중에 물 긷는 한 노파를 만났다. 익조가 물 한 그릇을 청하여 마시고 떠나려 하자, 노파가 이곳 사람들이 당신을 해치려 하니 속히 몸을 피하라 하였다.

익조가 황급히 언덕에 올라 보니 과연 기병 수백 인이 몰려오고 있었으므로, 말을 달려 해안으로 가서 적도로 건너가고자 하였으나 물이 깊고 배도 없어 진퇴유곡에 빠졌다. 이 때 갑자기 물이 줄어 적도로 건너가자 곧 물이 다시 불어 추적하던 적병을 차단하였으므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지금 이 섬에는 ‘어제기적비’가 서 있다.

또, 이 고을에는 백룡과 흑룡이 싸웠다는 〈적지전설〉이 있다. 이성계가 왕이 되기 이전에 가끔 이 호숫가에서 낚시를 즐겼는데, 어느 날 밤 꿈에 백룡이 나타나서 내가 흑룡과 싸운 지 오래인데 내일은 승부를 결단하고자 하니 귀공이 도와준다면 후일 반드시 보은하리라고 말하면서, 내일 싸움에서 내가 흑룡을 물 위로 떠올렸을 때 활로 쏘아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튿날 이성계가 못가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과연 흑룡이 물 위에 떠올랐으므로 활을 쏘아 맞히니, 흑룡이 붉은 피를 흘리며 크게 꿈틀거리다가 죽었다. 이로부터 이성계는 명궁으로 이름이 높아 세인의 추앙을 받았고, 뒷날 백룡의 도움이 있어서 조선조를 세워 태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산업·교통

두만강과 포항천·아오지천 등의 하천 유역에 형성된 곡저평야가 농경지로 이용된다. 총농경지는 212.23㎢로, 이 가운데 논이 15.73%인 33.39㎢에 불과하므로 밭농사가 성하고, 주요 농산물은 조·피·옥수수·보리·감자 등이다. 두만강 유역과 해안 부근의 초지는 목야지로 이용되는데, 농가부업으로 면양·소·돼지 등이 사육된다.

근해에서는 한·난해류가 교차하여 세계적인 어장을 이루고 있다. 주로 대구·청어·연어·명태·게 등의 어획이 많으며, 특히 서수라항(西水羅港)은 미역과 다시마의 명산지이다.

태양천(太陽川) 유역에 있는 아오지에서는 갈탄이 채굴되며, 매장량은 1억5000만 톤이다. 1936년 이후부터 수소 첨가에 의한 갈탄 액화 방법을 도입하여 인조 석유·윤활유 등을 생산한다.

두만강 하구에 있는 경흥·고성·용현·토리 등은 중국 혼춘 지방 및 소련 연해주의 연추 지방(煙秋地方)과의 국제 교역소로서 시장 기능이 활발하였으나, 20세기 초부터 국경이 경색된 뒤로는 그 기능이 쇠퇴되었다.

반면에 웅기만에 있는 웅기항이 발전하여 근대적 시장이 형성되었다. 웅기는 우리 나라 북쪽 끝에 있는 양항으로서, 두만강 하류 지방의 각 군과 그 대안인 혼춘 지방의 곡창 지대를 배후에 끼고 있어서 소와 콩을 비롯한 농산물이 집산되고, 서수라를 비롯한 여러 어장에서 잡힌 각종 수산물이 집하되므로, 웅기시장은 시설 규모나 거래액이 매우 크다.

이 시장은 상설 시장으로서 우시장·곡물 시장·생선 시장·건어물 시장·일반 잡화 시장 등으로 구분되며, 철도·자동차·선박 등 육해 교통이 편리하여 번영 일로에 있다. 아오지가 광공업 도시로 발전함에 따라 이곳에도 일용 잡화·채소류·해산물 등의 시장이 급격히 번영하고 있다.

교통은 웅기를 기점으로 북한동부선이 나진을 거쳐 청진에 이르며, 북쪽으로는 온성군 훈융(訓戎)을 거쳐 중국의 혼춘과 연결되고, 아오지와 오봉(梧鳳)을 잇고 있다. 국도는 비교적 잘 발달되어서 웅기에서 나진을 비롯하여 인접 군과의 물자 수송이 용이하다.

읍·면

[웅기읍 雄基邑]

군의 남부 해변에 있는 읍. 면적 270.18㎢, 인구 2만 5047명(1943년 현재). 읍 소재지는 웅기동이다. 두만강 하구로부터 약 36㎞ 떨어진 한촌이었으나, 1921년 6월 교역장으로 웅기항이 개항되면서 발전되기 시작하였다. 1931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1940년 인접지인 나진이 대륙의 종단항이 된 뒤로는 물자 교역 기능이 정체되고 어업 활동이 성하다.

3면이 구릉으로 둘러싸이고 만구가 동남으로 열린 데다가 서남 앞바다에 비파도가 가로놓여 있어 북쪽의 거센 바람을 잘 막으며, 수심이 깊어 대형 선박의 출입이 용이하다. 그리고 웅기만과 대진만 앞바다에는 좋은 어장이 형성되어 각종 어류가 어획된다.

내륙의 구릉 지대에서는 잡곡 생산이 많고, 서남쪽의 관곡동에는 군마보충부(軍馬補充部)와 도립종마소가 있어서 말과 면양이 많이 사육된다.

유적으로는 송평동의 신석기 시대 주거지에 온돌 구조 터가 있으며, 이곳 패총에서 출토된 도단채문토기(塗丹彩文土器)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또, 서쪽의 용수호반(龍水湖畔)에는 신석기 시대의 분묘지가 있어 고고학계의 관심을 모은다. 교육 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개교가 있다.

웅기(雄基)·웅상(雄尙)·백학(白鶴)·송평(松坪)·관곡(寬谷)·용수(龍水)·비파(琵琶)·철주(鐵柱) 등 8개 동이 있다.

[아오지읍 阿吾地邑]

군의 북단에 있는 읍. 면적 205.46㎢, 인구 4만 9105명(1943년 현재). 읍 소재지는 농경동이다. 본래 상하면(上下面)이었으나 탄광 개발과 더불어 1936년 석탄 액화 공장이 건설됨에 따라 읍으로 승격되는 동시에 아오지로 개칭되었다.

서남단에는 송진산이 솟아 있고, 북부와 남부 지방은 낮은 구릉 지대가 있어 중앙부는 분지를 이룬다. 분지를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태양천 유역에는 평야가 형성되었다.

이곳은 원래 농가가 산재한 작은 벽촌이었으나, 1930년대부터 탄광이 개발되기 시작하여 크게 성장하였다. 부존량이 1억5000만 톤으로 추산되는 큰 갈탄광상이며, 탄질이 우수하여 인조 석유 원료로 적합하므로 액화 공장이 건설되었다.

회암(灰巖)·귀락(貴洛)·오봉(梧鳳)·태양(太陽)·노두(露頭) 등 5개 갱구에서 채탄되며, 이를 원료로 하여 아오지인조석유공장에서는 수소 첨가식 직접 액화법으로 휘발유·석유·경유·중유·메틸알코올·윤활유 등이 생산된다.

1938년북선선(北鮮線)과 연결되는 아오지∼회암 간의 산업철도가 개통되어 두만강변 최대의 광공업도시로 발전하였다. 유적으로는 용연동에 2백여 기의 돌널무덤이 있다. 교육 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개교가 있다.

농경(農耕)·귀락(貴洛)·명룡(明龍)·송상(松上)·회암(灰巖)·오봉(梧鳳)·송학(松鶴)·삼봉(三峰)·아오지(阿吾地)·용연(龍淵)·태양(太陽)·용성(龍城) 등 12개 동이 있다.

[경흥면 慶興面]

군의 동북부에 있는 면. 면적 178.57㎢, 인구 8,097명(1943년 현재). 면 소재지는 경흥동이다. 본래 군청소재지이었으므로 경흥면이라 하였고, 군청이 웅기로 이전된 뒤로는 발전이 다소 정체되었다.

서부는 낮은 구릉 지대이나 동부는 두만강·포항천·태양천이 흐르고 있다. 두만강은 경원군 부근부터 곡류하여 남으로 흐르고, 포항천은 서남부의 웅기령(雄基嶺) 기슭에서 발원하여 면의 중앙을 지나서 동류한다. 북쪽에서는 아오지에서 흘러온 태양천 하류가 두만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두만강 유역은 충적평야를 이루어 쌀 생산이 많고, 그 밖의 지역에서는 조·피·보리·수수·기장·옥수수·콩·팥·원두·강낭콩 등 각종 잡곡이 많이 나며, 유축 농업이 발달하여 소·말·면양 등의 사육률이 높다.

북선선이 서북에서 동남 방향으로 부설되었고, 도로가 강변을 따라 발달되었다. 조선태조의 조상 조기(肇基)의 땅으로서 많은 고적과 전설이 있다.

경흥 남쪽 4㎞ 지점인 양원봉(兩園峰, 또는 松峰) 기슭에는 태조이성계의 고조부인 안사(뒤에 穆祖로 追尊)와 그 비(妃)의 덕릉 및 안릉이 있었으나, 1410년(태종 10) 여진의 침입이 잦아 능들을 함경남도 신흥군으로 이장하고 그 자리에 유적비만 남아 있다.

사회(四會) 부근에는 적지와 적지고성이 있고, 북쪽에는 무이보(撫夷堡)도 있어 옛날부터 국방 및 교통의 요지였다. 교육 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가 있다.

경흥(慶興)·원정(元汀)·은계(隱溪)·하여평(下汝坪)·오봉(五峰)·장로(長路)·신창(新倉)·고성(古城)·적지(赤池)·청학(靑鶴)·하송(下松) 등 11개 동이 있다.

[노서면 蘆西面]

군의 동남단에 있는 면. 면적 170.15㎢, 인구 9,510명(1943년 현재). 면 소재지는 서수라동이다. 두만강 하구에 있으며, 강구로부터 약 28㎞ 지점까지는 러시아와 접하고 그 이북은 중국과 접한 3국 국경 지대이다.

대부분 지반이 낮은 충적평야로서 호소가 많다. 몽리면적 1,177ha에 달하는 요산수리조합(樂山水利組合)이 설립되어 쌀 생산이 많고, 그 밖에 조·피·수수·옥수수·콩·강낭콩 등도 많이 생산되며, 소·말·면양의 사육도 성하다.

두만강 하구의 조산만 연안에서는 어로 활동이 활발하며, 주요 수산 기지는 서수라이다. 두만강 하구 서남단에 있는 서수라항은 높이 20m 내외의 앵산(櫻山)이 남쪽으로 돌출하여 남동풍을 동반한 파도를 막는 제방의 구실을 하고, 배후에는 우암령(牛巖嶺, 281m)이 있어 북서풍을 막아준다.

또, 수심은 15∼20m이고, 조석 간만의 차가 작아 큰 선박이 정박할 수 있으며, 러시아와 인접하므로 국토 방위에서도 중요한 곳이다. 연근해에서는 미역·다시마·명태·고등어·임연수·갈치·문어·게 등이 잡히며, 특히 미역과 다시마의 명산지이고, 게 통조림 공장이 있다.

북선산벚꽃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주위의 저습지에는 현담(玄潭, 일명 黑池)·만포·서번포·동번포 등의 큰 호수들이 분포하고 있으며 이들 호수에는 굴·조개·붕어 등이 서식한다.

앞바다에는 적도·난도·비파도 등의 여러 섬이 있다. 유적으로는 서수라동 굴포리에 조개더미, 적도에 수혈 주거지가 있으며, 조산리에 이순신장군승전대비가 있다. 교육 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개교가 있다.

서수라(西水羅)·증산(甑山)·용현(龍峴)·조산(造山)·토리(土里)·서포항(西浦項)·굴포(屈浦)·부포(鮒浦)·대암(臺巖) 등 9개 동이 있다.

[풍해면 豊海面]

군의 최남단에 있는 면. 면적 177.57㎢,인구 6,198명(1943년 현재). 면 소재지는 대유동이다. 북쪽에는 송진산 여맥인 보로지봉이 가로놓였고, 서남쪽에는 천안산(天安山)이 솟아 면내 대부분이 구릉성 산지이며, 남쪽 해안에만 약간의 평야가 있다.

소청천(素淸川)이 북쪽에서부터 서부 지역으로 흘러 들어가 천안산 북쪽을 지나 부령군 내로 흐르고, 중앙부에서 발원한 작은 내는 신동 부근을 지나 바다로 흘러 들어가며, 해안선을 따라 국도가 지나간다.

하천 연안의 저지대는 농경지로 이용되며, 농산물로는 약간의 쌀·조·피·보리·수수·기장·옥수수·콩·녹두·강낭콩 등 잡곡이 생산되는데, 특히 콩은 우량종으로서 수출되고 있다.

초지가 넓고 농후 사료원(濃厚飼料源)이 풍부하여 소·말·면양·돼지·닭 등 각종 가축이 많이 사육된다. 인접지인 웅기읍 관곡동에 군마보충부와 도립종마장이 있어 그 영향을 받아 말 산지로 유명하다.

나진시에 연접한 동쪽 지역에서는 배추·무·양배추·당근·우엉·가지·오이 등 각종 원예 작물이 재배된다. 남쪽 해안은 나진만의 서쪽 입구로서 굴곡이 심하며, 앞바다의 동쪽에는 대초도(大草島)가 마주 보이고, 만의 입구에는 피도(避島)가 있다.

나진만에 있는 유진(楡津)은 연안 어업의 기지로서 고래·대구·고등어·청어·게·문어·낙지·조개·해삼·미역·다시마 등 각종 어패류가 많이 나며, 경유 공장(鯨油工場)이 있다. 교육 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가 있다.

대유(大楡)·후창(厚昌)·추(楸)·송림(松林)·무창(武昌)·일류(日柳)·월산(月山)·신(新)·상진(上津) 등 9개 동이 있다.

광복 후 변천

1952년 12월 일부 지역을 분리하여 웅기군(뒤에 선봉군으로 개칭됨.)에 편입하였고, 1961년아오지리 일부를 분리, 용연노동자구라 하였으며, 백동리는 장평리에 통합하였다. 1965년 1월오봉리를 오봉노동자구라 개칭하였다. 1977년 9월 행정 구역 개편 때 군 명칭을 은덕군(恩德郡)으로 개칭하였다.→은덕군

참고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1967)
『함북요람』(함경북도지편찬위원회, 1967)
『함북대관』(김성덕, 정문사, 1967)
『함경북도지』(함경북도지편찬위원회, 1929)
『인물의 고향』-북한편-(중앙일보사, 1929)
『북한지지요람』(통일원, 1929)
집필자
조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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