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주산(主山)의 남쪽 기슭에 있다. 1906년 일본인 세키노(關野貞)가 첫 발굴 조사한 이래 1915년 구로이타(黑板勝美), 1917년 이마니시(今西龍), 1918년 하마다(濱田耕作), 1939년 아리미쓰(有光敎一)·사이토(齋藤忠) 등이 다수의 고분을 조사하였다. 1976년 사적정화사업 때 외형이 확실하고 비교적 큰 고분에 한해 일련번호를 매겨 현재 제72호분까지 정해져 있다.
1977년경북대학교와 계명대학교가 합동으로 대형분 2기(제44·45호분)를, 1978년계명대학교가 중형분 4기(제32∼35호분)를 발굴 조사하였다.
고분은 외형상으로는 모두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이며, 봉토의 규모에 따라 대형분(지름 20m 이상)·중형분(지름 10m 내외)·소형분(봉토의 유무를 확인할 수 없는 것)의 구별이 가능하다.
대형분은 주로 능선 상부에, 중형분은 능선 중간 이하에 군집하고 있고, 소형분은 능선 아래 위 구분없이 대형분과 중형분 주위에서 혹은 그 밑에서 발견되고 있다. 고분군은 내부구조에 의해 돌널무덤〔石箱墓〕·돌덧널무덤〔石槨墓〕·돌방무덤〔石室墓〕으로 크게 분류된다.
돌널무덤은 매장부의 네 벽과 바닥 및 뚜껑을 각 1매 혹은 몇 매의 얇은 판석으로 짜맞춘 상자형의 무덤이다. 머리맡 쪽이 넓고 발치 쪽이 좁은 두광족협(頭廣足狹)의 형태를 보이고 있는 점이나, 매장부의 한 쪽에 칸막이 벽을 세워 껴묻거리칸〔副葬間〕을 만들고 있는 점 등에서 청동기시대의 돌널무덤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대체로 어린이용 혹은 성인용의 단독무덤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대형분 속의 덧널로 존재하는 것도 적지 않다. 대개 길이 2m 내외, 너비와 깊이 0.5m 내외의 크기이다. 돌덧널무덤은 매장부의 네 벽을 할석(割石)으로 쌓은 것이 기본형이며, 할석에 판석을 잇대어 만든 것도 적지 않다.
지산리의 돌덧널무덤은 구조상 시신을 위로부터 내려서 안치하고 뚜껑을 덮어 매장을 끝내는 구덩식〔竪穴式〕뿐이며, 내부에 돌널 혹은 나무널을 안치한 것과, 널 없이 시신만을 매장한 두 형식이 있다. 돌널을 안치한 돌덧널무덤은 돌널의 형태가 돌널무덤의 그것과 동일하여 두 형식의 복합형이라 할 수 있다.
이들 돌덧널무덤은 돌널무덤과 마찬가지로 단독무덤 또는 대형분의 덧널로 존재한다. 단독무덤으로 발견되는 돌덧널무덤은 따로 널이 있건 없건 모두 자체의 둘레돌〔護石〕을 갖추고 있다. 지산리에서는 둘레돌을 갖춘 널이 없는 돌덧널무덤이 수적으로 가장 많은 일반형이라 할 수 있다. 대개 길이 2, 3m, 너비와 깊이 0.5m 내외의 크기이다.
돌방무덤은 일반적으로 매장통로인 널길〔羨道〕과 널문〔羨門〕이 달린 굴실〔橫穴式〕을 가리키는 말이나, 구덩식 중에서도 내부공간이 넓어서 사람이 서서 다닐 수 있을 정도로 큰 것은 돌방무덤이라고 부른다. 지산리의 돌방무덤은 구덩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굴실은 지금까지 1기밖에 보고되어 있지 않아 이곳에서는 예외적인 존재로 보인다. 구덩식 돌방무덤은 돌방 외에 한 봉토 안에 돌널이나 돌덧널이 함께 들어 있는 다장묘(多葬墓)가 상당수 있는데, 이것은 가족묘가 아닌 순장묘(殉葬墓)로 이해되고 있다. 돌방의 크기는 대개 길이 5∼10m, 너비 2m, 깊이 2m 내외이다.
이들 지산동고분군에서는 대량의 토기와 함께 금동관, 갑옷 및 투구, 긴칼 및 꾸미개류가 출토되고 있어, 4∼6세기경에 축조된 대가야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가야국(大伽耶國)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고령(高靈)지역에 대형봉토분이 밀집 조영된 최고지배자집단(最高支配者集團)의 고분군이다. 대가야읍의 서편에 위치한 주산(主山)의 봉우리에는 대가야의 산성인 주산성(主山城)이 있고 이로부터 남쪽으로 뻗어내린 주능선과 그 동남쪽 사면에 대규모로 고분군이 분포하는데 이것이 지산동 고분군이다. 주능선과 지맥의 정상부를 따라서는 봉분 직경이 20m가 넘는 대형분과 10∼15m 가량 되는 중형분이 줄지어 분포하고 경사면에는 그보다 작은 중소형 봉토분들이 밀집 분포한다. 이러한 고분 입지방식은 가야제국(伽耶諸國) 중심고분군의 일반적 입지유형이라 할 수 있다.
지산동 고분군은 구(舊)1∼3호분과 39호분, 甲호분, 乙호분, 절천정총(折天井塚) 등 7기가 조사되었다. 1976년에는 봉분이 뚜렷한 대형 혹은 중형분 72기에 일련번호를 붙이고, 1977년 파손상태가 심한 44호분과 45호분 등 대형분 2기를 조사하였다. 도굴로 유물이 상당량 반출되기는 했지만 덧널의 규모나 배치상(配置狀), 잔존유물의 양상 등으로 미루어 대가야의 최고지배자급의 고분임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1978년에는 중형분에 속하는 32∼35호분을 차례로 발굴하여 다량의 유물을 수습하였다. 대체로 고령지역의 고분들이 그러하듯이 지산동 고분군의 내부구조는 절천정총(折天井塚)을 제외하고는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독립된 소형의 외덧널(單獨槨)도 있지만 중형분의 경우 2개의 돌덧널이 병렬 배치되거나 최고위(最高位) 대형분의 경우는 많으면 으뜸덧널(主石槨)을 중심으로 30여 개의 소형 돌덧널이 배치되는 여러덧널식(多槨式)이 보통이며, 이렇게 많은 돌덧널이 한 봉분 안에 배치되는 것은 순장(殉葬)으로 인한 것이라 추측되고 있다.
현재까지 발굴조사 자료만으로 볼 때 지산동 고분군 내 최대형, 최고위계(最高位階)의 고분은 44호분과 45호분이다. 지산동고분군 주능선의 가장 현저한 지형에 입지하고 있는 최대형분은 봉분 직경이 30m에 가까운 5기로 헤아려진다. 44·45호분은 이들 최대형분 아래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보다는 약간 작은 편이다. 44호분은 장축이 27m, 단축이 25m 되는 타원형 봉분이고 높이는 3.6m 가량 된다. 길이 9.4m, 너비 1.75m되는 세장(細長)한 형태의 중심돌덧널을 봉분 중앙에 배치하고, 이보다는 약간 작은 딸린돌덧널(副葬石槨)을 으뜸덧널의 서편에 ‘T’자형으로 배치하고 또 하나의 딸린돌덧널은 으뜸덧널에 나란히 병렬 배치하였다. 그리고 그 둘레에 순장자용으로 추측되는 소형의 돌덧널들이 32기나 배치되어 있다. 중심돌덧널과 딸린덧널은 모두 깬돌(割石)로 촘촘히 쌓아 올렸지만 순장덧널은 판석(板石)을 세워 쌓은 돌널형(石棺形)도 있고 깬돌과 판석을 혼용한 것도 있다. 부장유물은 대부분 도굴되었지만 많은 양의 토기류와 함께 금제귀고리(金製耳飾), 영부검신형말띠드리개(鈴附劍身形杏葉)와 투구를 비롯한 무기류도 출토되었다.
45호분도 약간 작은 규모이지만 기본적인 구조는 44호분과 유사하다. 병렬 배치된 으뜸덧널과 딸린덧널을 중심으로 11기의 순장자용 소형 돌덧널을 둘레에 배치하고 직경 23m의 둘레돌(護石)을 원형으로 돌려놓았다. 역시 도굴이 심한 고분이었지만 초화형금동관식(草花形金銅冠飾)을 비롯하여 금제귀고리 등의 장신구류, 각종 마구류, 은장식고리자루큰칼(銀裝環頭大刀) 등이 출토되었다.
1978년에 발굴조사된 32∼35호분은 대형분이 분포하는 주능선에서 급경사로 내려와 약간 평평해지는 구릉부에 소재한 봉분 직경 10∼15m 안팎의 중형분으로 대형봉토분과는 고분의 구조나 출토유물상으로 일정한 격차가 있다. 32호분의 봉분 규모는 13.1×12.6m 가량 되고 5.6×0.86m 크기의 세장(細長)한 으뜸덧널에 소형의 순장 돌덧널을 배치하고 둘레돌을 돌려놓은 구조를 하고 있다. 이 고분에서는 중요한 부장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는데 다양한 토기류와 함께 광배형금동관(光背形金銅冠), 횡장판판갑옷(橫長板短甲), 충각부투구(衝角附胄) 등이 발견되었다. 1978년 조사시에는 소형 단독 돌덧널들도 여러 기 발굴 조사되었는데, 32호분 동북편에 있던 소형 봉토분인 32NE-1호분의 경우 길이 3.3m, 너비 0.7m 가량의 소형 돌덧널에 간단한 둘레돌을 돌린 것이다. 이 고분에서는 소형분인데도 불구하고 은상감당초문고리자루큰칼(銀象嵌唐草文環頭大刀)과 금제귀고리(金製耳飾)가 출토되었다.
고령지역에는 대체로 면 단위마다 봉토분이 밀집한 고분군이 산재해 있는데 그 중에도 지산동 고분군이 중심고분군에 상당한다. 가야의 중심고분군들은 보통 평야지대를 향하여 뻗어내려 가는 주능선의 정상부를 따라 형성되는데 지산동 고분군 역시 그러한 입지를 취하고 있고 최대형분이 모여 있는 고분군이다. 발굴조사자료를 통하여 추정한 지산동 고분군의 연대는 35·32NE-1호분 등을 가장 이른 시기로 그리고 44·45호분을 가장 늦은 시기로 편년하는 것이 학계의 공통된 견해로, 5세기 전반에서 6세기 전반대에 걸치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특히 44·45호분 단계에 들어서면 고령의 대가야식 묘제와 토기양식이 낙동강 서안 일대에 광범위하게 확산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를 두고 대가야에 주축이 된 가야연맹의 결성 혹은 대가야 세력의 확산이라고 하는 견해가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지산동 고분군에 대한 발굴조사자료는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