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29년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거쳐 법문학부 문학과에서 조선어문학과를 전공하였다. 재학 중 일본인 교수 다카하시[高橋亨] 밑에서 김사엽(金思燁) 등과 함께 수학하였다. 광복 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로 있었으며 6·25 중에 납북되었으리라 추정된다. 우리어문학회의 회원이었다.
대학에서 주로 민요를 연구하여, 1941년 『춘추(春秋)』 4월 호에 고위민(高渭民)이라는 가명으로 「조선민요의 분류」라는 논문을 발표하였고, 1949년 『조선민요연구』를 발간하여 그 동안에 하였던 작업을 결산하였다. 같은 해 『청구영언』을 대본으로 하여 50편의 사설시조를 뽑아서 주해한 『고장시조선주(古長時調選註)』를 출판하였다.
그 밖에도 『국어국문학요강』·『국문학개론』 등의 개설서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집필하여 당시에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던 국문학 교재를 만드는 데 힘썼다. 대표적인 업적이라 할 수 있는 『조선민요연구』는 민요 연구가 실제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나온 개론서로서 의의를 가진다.
그의 민요에 관한 연구는 1920∼1930년대에 시인들이 민족적 특성을 지닌 시 창작의 원천으로서의 민요에 대하여 가졌던 관심과 민요를 통하여 조선인의 민족성이 좋지 않음을 입증하려는 일본인의 생각이라는 두 가지 흐름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치밀한 현지 조사가 부족하고, 이론적으로 명확한 방법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민요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제공하는 데 실패하였고, 민족문화에 대한 애착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교수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학문적 한계 때문에 민요의 실상을 왜곡하는 결론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과오에도 불구하고, 그의 연구는 민요 일반에 관한 체계적인 논술로서 최초의 것이라는 점과 이후의 연구에서도 이를 넘어서는 업적이 흔하지 않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의의를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