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예 ()

평양 석암리 금제 띠고리
평양 석암리 금제 띠고리
공예
개념
실용적 가치와 미술적 가치를 가진 공작에 관한 기법 또는 조형예술.
정의
실용적 가치와 미술적 가치를 가진 공작에 관한 기법 또는 조형예술.
개설

일반적으로 공작으로 만들어진 물건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따라서, 그 물건을 만드는 과정도 문제가 되지만, 물건 자체의 양식이나 양식의 변천에 관하여 더욱 관심을 보이게 된다.

공예품은 인간이 생활을 영위하는 동안 필요에 따라 제작되는 만큼 여러 가지 재료가 사용되며, 사용하는 계층에 따라 품격의 차이가 생기고 사용 목적에 따라 형태를 달리한다. 또한, 시대 또는 지역에 따라 표현양식이나 제작기법에 차이가 생기고, 대외적인 교섭에 따라 외래양식의 수용·소화의 과정이 나타난다.

장시간에 걸쳐 이러한 여러 과정을 겪어오는 동안 무의식중에 한국적인 특질이 배양되어 타민족과 구별되는 성격을 가지게 된다. 이것은 공예품이 민중의 사고나 생활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면서 제작된 가장 민중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에 현존하는 공예작품은 고대 중국의 청동기와 같이 신에 대한 의기(儀器)가 아니고, 그 대부분이 생활과 직결된 것이었던 만큼 존대(尊大)하거나, 권위를 내세우거나 지나친 기교를 부리지 않은 것도 그 특색의 하나라고 하겠다.

공예작품의 종류

우리 나라에 현존하는 공예작품에 사용된 재료는 금속·목칠·도토(陶土)가 주류를 이룬다. 이 밖에 유리○가죽○종이○실 따위도 더러 있지만 수는 많지 않고, 유리를 빼고는 중요성도 크지 않다.

이러한 재료들은 그 자체의 내구성 여하가 현존하는 예의 수를 좌우하게 된다. 금속·도토·유리는 비교적 내구성이 강하므로 장기간 원형이 보존되지만, 목칠○가죽○종이○실 따위는 내구성이 매우 약하다.

또한, 금속·도토·유리 등은 외부에서의 충격이 없는 한 원형이 장기간 유지되므로 우리나라에서도 도토는 신석기시대, 금속은 청동기시대 이래의 작품들이 지하에서 발견되며, 삼국시대 고분에서는 유리제품도 출토된다. 이에 반하여, 목칠·가죽·종이○실 제품은 삼국시대 고분에 분명히 부장되었던 흔적이 있으나, 원형이 남아 있는 것이 매우 드물다.

금속공예

우리 나라에서 금속공예품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는 대체로 청동기시대, 즉 서기전 700년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보다 앞서 구리에 약 10%의 주석을 섞은 청동이 서기전 3700년경 이집트 피라미드에서 출토되었고, 동양에서는 서기전 2500년경의 인더스문화 등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청동기에 관한 지식이 차차 전파되어 북방경로를 거쳐 우리 나라에 전래되기는 서기전 1000년경으로 추정된다.

우리 나라에서 제작하여 사용한 시기는 이보다 약 300년 뒤로 추정되고, 이때 제작한 도구들은 의기·이기(利器)·거여구(車輿具) 등이었다.

의기로는 종교적인 행사에 사용하던 쌍두령(雙頭鈴)·팔두령(八頭鈴) 등 주로 소리를 내는 도구와 방패형 동기(銅器) 등을 들 수 있으며, 다뉴세문경(多鈕細文鏡)도 의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이들은 제작이 정교하여 같은 시기의 다른 지역이나 다른 민족의 작품과 비교하여 조금도 손색이 없다.

이기는 청동기시대 문화의 대표적 유물인 동검(銅劍)과 동모(銅鉾) 등이며, 중국과의 양식적 연관 내지는 우리 나라에서의 변천과정이 비교적 잘 파악된 작품이다. 출토된 예도 많고, 특히 거푸집의 발견은 주조(鑄造)의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거여구는 많지 않으나 이따금 발견되는 수가 있다.

청동기시대가 지나면 철기시대로 들어가게 되어 무구(武具)·농구 등이 제작된다. 분명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청동기와 전후하여 금이 등장하면서 서기전 16세기경에는 금제품이 출현하였고, 중국에서는 전국시대에 순금제품 또는 금상감(金象嵌)·금도금 등의 기법이 출현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도 4∼5세기경 이미 정교한 금제품을 제작하게 되어 그러한 유물들이 고분에서 많이 출토되었다. 이 시기를 고분문화시대라고 일컬으며, 금은 물론 은·구리·철 등 금속을 이용하여 여러 가지 물건을 제작하게 된다.

통일신라시대가 되면 고분출토는 거의 없고 절터 또는 석탑에서 발견되는 불교관계 유물이 많아진다. 고려시대가 되면 동경(銅鏡)·범종(梵鐘)·향완(香埦) 등에서 괄목할 만한 발전을 보이지만, 삼국시대에 성행하던 장신구를 비롯한 금속공예품들은 쇠퇴현상이 현저하게 나타난다.

재료도 구리에 약 30%의 아연을 섞은 놋쇠의 사용이 늘고, 조선시대는 놋쇠의 사용이 더욱 유행하여 거의 일색을 이룬다. 조선시대는 불교의 색채는 일소되고 유교적인 생활에 맞는 용품이 제작되며, 금속공예보다는 도자기와 목공품이 양산된다.

청동기문화의 전래로 인하여 선사시대에 이미 청동을 사용하여 도구를 제작하였지만, 여러 가지 금속을 구사하면서 다양하게 제작하던 절정기는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까지이고, 고려시대는 아직도 그 여맥이 이어지다가 조선시대는 급속하게 쇠퇴한다.

이 흐름을 염두에 두면서 삼국시대 이래의 우리 나라 금속공예품을 분류하면, 장신구·불구(佛具)·사리구(舍利具)·일상용구로 구분할 수 있다. 장신구는 삼국시대는 주로 고분에서 착장(着裝)된 상태로 발견되어 가장 화려하고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

머리에는 금제 또는 금동제의 관모를 쓰고 목걸이·귀고리·팔찌·과대(銙帶)·요패(腰佩)·신 등 실로 찬란하게 몸을 치장하였는데, 이 시대에 쓰이던 장신구 재료는 금○은 등 귀금속이다.

삼국시대가 지나도 장신구는 계속 제작되나 금·은 같은 귀금속을 삼국시대와 같이 흔하게 쓰지는 않는다. 삼국시대 장신구는 형태나 기법에 있어서도 놀라운 진보를 보이며, 특히 원시신앙의 일단을 보여 주는 작품이 있어 주목된다.

불구는 불교행사 또는 사찰에서 승려들이 사용하던 도구들이다. 그 가운데 동종(銅鐘)·향로·금고(金鼓:북모양으로 만든 종)·정병(淨甁) 등이 두드러진 유물들이다. 동종은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계속 제작되어 현존하는 예도 300여 구(口)에 달하여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성덕대왕신종은 높이 3.6m의 거작이고, 고려시대까지 독특한 동종 양식을 보여 주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향로는 8세기경의 작품으로 보이는 긴 손잡이가 달린 형식이 제작되다가, 고려시대가 되면 밑에 나팔형 받침과 위에 바리모양의 노신(爐身)이 붙는 형태로 바뀐다.

표면에는 은입사(銀入絲) 기법으로 문양이 장식되고, 때로는 그러한 기본형의 변화형 또는 뚜껑 위에 동물이 앉아 있는 모양의 향로들이 제작된다. 금고는 한 쪽이 막히고 한 쪽이 터져서 막힌 쪽을 쳐서 소리를 내며, 문양은 주로 막힌 쪽 표면에 있다. 통일신라시대 작품이 1점 전할 뿐, 대부분 고려시대 작품이나, 형식은 동일하다.

사리구는 탑 안에 봉안하는 사리를 수호, 장엄하기 위한 기구들로서 금·은·금동 등 각종 재료를 사용하여 제작한다. 형태는 일정하지 않으나 사리를 외호(外護)하는 기구는 함모양으로 만든다. 장엄구는 신심과 재력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

그 중에서도 익산 왕궁리오층석탑에서 발견된 ≪금강경≫ 금판과 그것을 넣었던 함들은 가장 호화스러운 장엄구이다. 일상용구는 일상생활에서 소용되는 도구인 만큼 큰 항아리에서부터 수저에 이르기까지 종류가 실로 잡다하다. 고분이나 석탑에서 발견되는 것 중에는 금 혹은 은으로 만든 것도 있으나 대개는 청동제이다.

그중에서 동경은 수가 월등히 많으나 대부분 고려시대의 것이며, 형태나 문양의 다양함은 다른 어느 시대 작품도 이에 미치지 못한다. 삼국시대 고분에서 출토되는 부장품의 형태나 문양, 또는 고려시대 금속제품에 시공된 섬세한 입사문양은 기술의 뛰어남을 과시하고 있다.

목칠공예

나무는 재료의 취약성 때문에 현존 유물은 거의 근세에 제작된 것들이다. 삼국시대 고분에서 이따금 목제품이 발견되지만, 원형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부식되어 형태가 완전한 것은 극히 드물다. 대개의 경우 칠(漆)을 하는 수가 많아서 때로는 칠만 남기도 하며, 때로는 칠로 인해서 형태가 보존되는 수도 있다.

경주 호우총(壺杅塚) 출토 방상시칠면(方相氏漆面), 황남대총(皇南大塚) 출토 칠기, 공주무령왕릉(武寧王陵) 출토 족좌(足座)·두침(頭枕)·봉황두(鳳凰頭) 등은 매우 희귀한 예에 속한다.

목공품에는 칠 외에 나전기법(螺鈿技法)을 아울러 쓰는데, 고려시대는 이 기법이 매우 발달하여 국내외에 그 명성이 높아 송(宋)나라의 서긍(徐兢)은 ≪고려도경≫에서 나전세공의 우수함을 찬양하였고, 원(元)나라의 왕후가 고려에 나전경함(螺鈿經函)을 주문할 정도였다.

고려시대의 현존 작품은 그다지 많지 않으나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장품을 비롯하여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동양미술관의 경상(經箱), 일본 도쿠가와미술관(德川美術館)의 경상, 일본 다이마사(當麻寺)의 염주거(念珠筥) 등은 특히 뛰어난 작품들이다.

이 염주거는 나전과 귀갑전(龜甲鈿)을 겸한 걸작으로, 이러한 수법이 조선시대는 화각(華角)으로 발전하였다. 고려시대에 사용한 귀갑은 흑색 또는 황색의 대모(玳瑁:바다거북의 등껍데기)였고, 또 은·황동·주석 등으로 계선(界線)을 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시대는 나전뿐이다.

한편, 조선시대의 목공품에는 나전 외에도 순수한 목공예의 전래품이 적지 않다. 조선시대의 목공가구들은 우리의 주(住)생활에 맞도록 합리적으로 설계된 형태에 따라 제작되었고, 나무의 종류 또는 나무의 결이나 무늬를 살려서 자연을 물건 속에 끌어들이는 수법을 써서, 우리 나라의 미술을 자연주의적이라고 평하는 데 가장 알맞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가구에 사용된 나무는 은행나무·호도나무·피나무·소나무·오동나무·느티나무·먹감나무·대나무 등이고, 화류·휘가사 같은 희귀재료도 사용되었다. 가구의 종류는 옷장·궤·탁자·문갑·연상·농·함·경대·소반·찬장 등 실로 다양하다.

가구들 가운데서 사랑방가구는 청렴·질박한 분위기가 나도록 재료나 장식을 쓴 반면, 안방가구는 나전·화각 등으로 화려한 분위기를 살렸고, 주방가구는 실용적으로 튼튼하게 만들었다.

목공가구 표면에는 생칠·주칠·흑칠 등 칠을 하는데, 신라시대는 칠전(漆典)이라는 관청까지 두어 양질의 생칠을 사용하였으며 조선시대까지 계속 사용하였다. 표면에는 철·주석·백동 등으로 만든 자물쇠·경첩·들쇠 등 기능적인 장식과 감잡이·귀장식·세발장식 등 구조적인 장식이 붙는다.

나전칠기와 함께 조선시대 목공예품에서 주목되는 것은 화각제품이다. 어린 소의 뿔을 따뜻한 물에 불려 편 뒤 얇게 켜서 투명하게 만든 다음, 백·청·홍·녹·황·흑 등의 색으로 민화풍의 그림을 그려서 나무에 붙인 작품이다.

주로 여성용품에 이용되며 큰 것은 삼층장에서부터 작은 것은 실패·참빗 같은 것까지 있다. 그밖에 죽제품도 많이 제작되는데, 인두로 지져서 무늬를 내는 낙죽(烙竹)은 독특한 운치를 나타낸다.

토도공예

인류가 필요한 용기를 만들 때 가장 먼저 사용한 재료가 흙이다. 고대사회에서 흙으로 만든 그릇들을 우리는 토기라는 총괄적인 명칭으로 부르고 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제작기술이 발달하여 재료의 선택, 기형(器形)의 변화, 표면장식의 다양화 등의 현상이 나타난다.

민무늬토기·빗살무늬토기·가지무늬토기·홍도(紅陶)·흑도(黑陶)·김해식 토기 등은 그러한 과정을 보여 주는 중요한 예들이다. 이 시기가 지나면 김해식 토기의 수법을 계승한 삼국시대 토기로 연결된다.

삼국시대 토기는 각국의 특색이 뚜렷이 나타나서 그들 자체의 문화적 성격 또는 그 배경을 보여 주고 있다. 예컨대, 고구려의 짧은 세 발이 달린 원통형 토기, 회색에 가까운 백제 항아리, 고신라의 고배(高杯)·장경호(長頸壺)·감(坩) 등은 각국의 특색이 가장 잘 나타난 토기들이며, 이러한 토기들은 당시의 고분에서 많을 때는 수백 개씩 출토된다.

그 밖에도 고신라 또는 가야시대의 고분에서는 각종의 상형토기(象形土器)들이 출토된다. 경주금령총(金鈴塚)의 기마인물형토기·주형토기(舟形土器), 경주 계림로(鷄林路)고분 출토의 신구형토기(神龜形土器)와 수레모양 또는 오리○말○집모양 등의 토기는 그중에서도 뛰어난 작품들이다.

이들 토기 표면에는 문양이 장식되었는데, 백제의 거치문(鋸齒文)·승석문(繩蓆文), 신라의 평행파상문(平行波狀文)·원권점문(圓圈點文) 등이 대표적인 무늬이고 담록색의 유약(釉藥)을 쓴 것도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토기는 출토된 예가 삼국시대만큼 많지 않으나, 삼국시대 토기에 비하면 기형과 표면처리에서 변화가 나타나 장경호·상형토기 등이 자취를 감추고, 장경병·무개고배(無蓋高杯)·유개합 등이 등장한다.

또 표면에는 꽃무늬·기하(幾何)무늬가 인화수법(印花手法)으로 거의 전면에 찍히고, 유약이 많이 사용된다. 토기는 고려시대 초기까지도 계속 제작, 사용되며 회흑색의 색조는 신라토기를 계승하고 있으나, 매병(梅甁)·과형병(瓜形甁)·표형병(瓢形甁) 등 신라시대에는 없었던 새로운 기형이 나타난다.

이 시기가 지나면 10세기경부터는 그릇은 토기에서 자기로 바뀌어 태토(胎土)·번조법(燔造法)·기형·문양·시문(施文)방법·유약 등에 큰 변화가 일어나 청자시대를 맞이한다.

청자는 고려시대 자기를 대표할 만하여 대명사처럼 사용되고 있으나, 고려시대는 청자 이외의 자기도 많이 제작되었다. 청자는 유약이 비취색으로 발색하는 데서 붙은 이름이다.

이 청자 계통에는 중국 북방계 청자기술이 황해의 중부 연안지대에 이식된 인천 경서동, 충청남도 보령·서산 지방의 산화염(酸化焰) 또는 중성염(中性焰) 번조의 암록유계의 것과, 중국 남부 월주요계(越州窯系)의 환원염(還元焰) 기술이 전라남도 강진과 전라북도 부안에 상륙, 정착한 남방계 청자기술의 두 가지가 있는데, 고려청자라 하면 이 남방계의 청자가 주류를 이룬다.

그러나 순화4년명호(淳化四年銘壺)와 개성 만월대(滿月臺), 또는 경기도 용인에서 발견된 백자질(白磁質) 대접의 파편 등으로 보아 남방계 청자기술과 함께 백자기법이 전래되었다고 생각되고 있다.

고려시대 도자기는 10세기 말에 이르는 동안 연마를 거쳐 11세기경 이미 상당히 우수한 자기가 생산되었고, 1123년 고려에 왔던 송나라 서긍(徐兢)의 저술인 ≪고려도경≫의 기사로 볼 때 12세기 초에 절정기에 달하였던 듯하다.

고려시대의 자기들은 고대의 의기적인 성격에서 탈피하여 용도에 따라 기능을 살린 실용적인 그릇으로 변한 점이 주목되며, 따라서 그릇 종류나 표면장식의 문양 또는 그 표현수법도 다양해진다.

청자는 푸른색 이외의 다른 색조가 가미되지 않은 순청자(純靑磁 : 시문 방법에 따라 무문·오목새김·돋을새김으로 구분된다.)와 상감(象嵌)·진사(辰砂)·퇴화(堆花)·화금(畫金)·화(畫)·연리문(練理文) 등의 청자로 분류되며, 이러한 분류는 백자에도 대체로 적용된다.

이 가운데 상감기법은 목칠공예의 나전기법, 금속공예의 입사수법과 일관된 기법으로 고려 도공들의 창작이며, 세계도자사에서도 독보적인 존재였다. 화금청자는 문양의 획선에 금박을 칠하는 기법으로 고려에서 원나라 왕실에 선물로 보낼 정도의 호화품이었다.

청자의 문양은 국화·운학(雲鶴)·유로수금(柳蘆水禽) 등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고, 그밖에 연꽃·모란꽃·여의두(如意頭)·송죽·당초(唐草)·포도·앵무 등이 있다. 또 동물 또는 식물의 형태를 모방한 상형청자도 다수 제작되었지만, 그중에서도 우수한 작품은 순청자에 많다.

고려 말기에 가까워지면서 원나라의 산화염 번조법이 들어와 유조(釉調)에 변화가 생기고, 문양은 틀로 찍는 인화수법이 나타나서 조선시대의 분청사기(粉靑砂器)로 계승된다. 조선시대가 되면 자기의 기형·유색·문양·시문법 등이 일변한다.

물론, 초기에는 인화 또는 상감 수법의 문양과 청자유약이 남기는 하지만 그것이 주류는 아니었다. 고려시대의 대표적 기형인 매병은 자취를 감추고 목이 긴 병과 후기에는 문방구가 대량으로 생산된다. 유색은 백색으로 변하고 문양은 유교적이 되며, 상감시문법은 분청사기에서 볼 수 있을 뿐 백자에서는 거의 자취를 감춘다.

이러한 변화의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하여는 아직 만족한 해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조선시대 자기는 분청사기와 백자가 주류를 이룬다. 분청사기는 다시 인화·상감·박지(剝地)·조화(彫花)·백토(白土)·철화(鐵畫) 등으로 구분되고, 백자는 순백자와 상감·청화(靑華)·진사·철화 등으로 구분된다.

분청사기에는 고려시대의 수법을 계승한 상감과 인화의 수법이 병행되다가 차차 상감수법이 사라지고, 인화도 하나하나의 무늬가 작아지면서 그릇 표면의 전체에 찍힌다. 또, 인화분청에는 장흥고(長興庫)·내섬시(內贍寺) 등의 관청명이 찍히거나 연대가 찍힌 묘지(墓誌)가 있어 제작 연대를 밝히는 데 도움을 준다.

분청사기의 형태는 한층 서민적이어서 개방적이고 순박해지는데, 이러한 느낌은 유색과 무늬에서도 크게 영향을 받아 인화문을 제외한 다른 분청사기의 무늬는 규칙적이고 대칭적이 아닌 자유로운 필치로 그려져 있다. 분청사기의 기법은 한때 크게 유행하다가 차차 쇠퇴하여 임진왜란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받아 드디어 소멸되고 만다.

백자는 조선시대 초기부터 굽기 시작하여 말기까지 이어온 조선시대 자기의 대표이고, 그 중에서도 청화백자가 크게 유행하였다. 청화는 원래 회청(回靑) 또는 회회청(回回靑)이라고 하여 중국에서도 페르시아일대에서 아라비아 상인을 통하여 수입하던 물감인데, 우리 나라에서는 중국에서 다시 수입하였으므로 사용에는 많은 제한을 받다가, 토청(土靑)을 개발한 뒤부터는 비교적 자유롭게 사용하였다.

백자에 베풀어지는 문양은 유교적인 성격이 짙어 현세에서의 부귀 또는 문학적인 시취(詩趣)를 나타내는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표현 방법도 일부에서 상감이나 오목새김 또는 돋을새김 같은 전대의 수법이 남기는 하지만, 청화백자나 철화백자에서는 붓으로 그리는 방법이 채택되어 도안적인 표현에서 회화적인 표현으로 바뀐다.

도토공예에서 또 하나 중요한 분야가 기와[瓦]와 전(塼)이다. 기와는 흙을 이겨서 틀에서 떼어내어 구운 것으로 지붕을 이는 데 사용되는데, 처마 끝에 붙는 기와는 마구리를 막고 그 면에 문양을 조각하여 이것을 와당(瓦當)이라고 부른다.

우리 나라에서는 삼국시대 이래 조선시대까지 제작, 사용되었는데 형태나 문양은 시대에 따라 변화가 있다. 와당에는 원형의 수막새[圓瓦當]와 4분원형의 암막새[平瓦當]가 있는데, 고구려시대는 반와당(半瓦當)도 사용하였다. 문양은 연화문이 큰 줄거리를 이루고, 식물·동물 또는 벽사(辟邪)의 의미를 가진 귀문(鬼文) 혹은 불교적인 문양이 장식되고, 그 밖의 기와 종류로 귀면와(鬼面瓦)·서까래기와·치미(鴟尾) 등이 사용된다.

전은 바닥에 깔거나 벽을 장식하기 위한 것이고, 사용되는 장소에 따라 형태의 크고작음, 문양의 차이 등이 생긴다. 형태는 방형·장방형·마름모형이 있으며, 문양은 주로 연화와 보상화(寶相華)가 장식된다. 와전에는 가끔 유약을 사용하기도 하며, 전으로 분묘의 현실(玄室)을 축조하기도 한다. 또, 고려시대는 청자기와와 전을 사용한 일이 있어 매우 주목된다.

우리 나라의 유리공예는 주로 삼국시대의 찬란한 유리문화가 중심이 된다. 이러한 고대 유리제품은 특히 그 구성 성분이나 조형에서 서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유리의 동점(東漸) 경로는 매우 복잡한 것으로 이러한 배경 속에서 삼국시대의 유리는 지배계층의 총아가 되었다.

이것들은 5, 6세기경의 고분출토품으로서 대개 유리의 성분이 소다유리 계통의 로만 글라스에 속하는 것이어서, 서방으로부터의 수입품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게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릇의 형태에 있어서도, 가령 이란에서 유행하였던 봉수형병(鳳首形甁)과 유사한 유물이 출토된다는 사실은 그러한 추측을 더욱 강하게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국시대의 유리에 나타나는 몇 가지 특징은 그것들이 한반도에서 생산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하여 주고 있다.

예를 들면, 마구(馬具)장식인 행엽(杏葉)에 얇은 판유리가 내장되었다든지, 한국을 비롯한 동북아시아 일원에서만 발굴되는 곡옥(曲玉)과 같은 장식물에 유리제품이 섞여 있다는 사실, 또한 유리에 비교적 기포가 많고 성형이 매끄럽지 못한 점 등은 그 유리들이 우리 자신의 생산품임을 암시하는 자료라고 생각된다.

고대한국의 유리생산 여부에 대하여서는 속단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나, 유리의 원료나 기형의 특징을 원생산지의 것과 비교하여 고려할 때, 그 가능성이 전적으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경주 황남대총(98호분) 출토품 중에 보이는 일련의 유리제품은 다양한 곡옥·칠보 기술 등의 예로 보아 신라에서 생산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더욱이 이 고분의 북분(北墳)에서 수습된 2점의 남색 유리완(琉璃碗)은 다른 유리그릇과 연관성이 별로 없다는 견지에서 신라제품일 수도 있는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대체로 신라 고분시대의 유리가 후기 로만 글라스에 속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불교를 받아들인 이후의 것은 대부분 동양계 연유리인 것으로 판명되고 있다. 이는 중국 불교의 영향으로 유리로 만든 사리기를 봉안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통일신라기의 유리제품은 비서방계 유리로서, 중국에서 수입되었거나 또는 한국에서 만든 것으로 볼 수 있다. 경상북도 칠곡송림사전탑(松林寺塼塔)과 전라북도 익산왕궁리석탑(王宮里石塔)에서 각각 발견된 사리병은 그 좋은 예이다.

이와 같은 경로를 거쳐 유리는 불교문화의 성쇠에 따라 대체로 고려시대까지 생산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접어들면 이미 사리용기가 청자로 대체되고 있음을 보게 되며, 더욱이 귀중공예품으로서의 가치도 반감된다. 가령, 14세기 초의 <수월관음도 水月觀音圖>와 같은 고려불화에 나타난 유리그릇은 청자정병(靑磁淨甁)을 담는 보조용기로 쓰이고 있다. 이렇게 전통적인 유리공예는 고려 이후로는 맥을 잇지 못한다. 이러한 전통의 단절은 대량생산의 근대적 유리공업으로 이어질 때까지 계속된다.

삼국시대 이래 한반도에서 이용된 유리공예품은 금령총을 비롯하여 금관총·서봉총·황남대총·천마총 등 금제보관(金製寶冠)이 출토된 삼국시대 주요 고분에서 발굴된 유리배(琉璃杯)와 유리고배(琉璃高杯), 기타 봉수형병과 유리구슬이 있다.

또 백제 무령왕릉에서는 많은 유리구슬이 발굴되어 주목을 끌었는데, 그 중 특히 작은 동자상(2.5㎝)은 유리조각품으로서 매우 희귀한 자료가 된다.

이 밖에 신라고분에서 출토된 행엽에 부착된 유리판장식(琉璃板裝飾)은 삼국시대에 유리를 직접 생산하였다는 뚜렷한 증거가 되는 자료이다. 또 유리로 만든 제품 중에 주목되는 것이 사리병(舍利甁)이다.

이와 같은 대표적인 유형 외에도 전형적인 로만 글라스 특유의 남청색 대접과 같은 의식기와 팔찌·목걸이·곡옥 따위의 장신구 등이 유리로 만들어져 찬란한 유리공예의 전통을 수립하였다.

공예의 기법

공예의 기법은 재료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 먼저 금공에서는 서기전 수십 세기부터 주조(鑄造)와 단조(鍛造)의 기법으로 공예품이 제작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청동기시대부터 이러한 기법으로 제작된 유물이 발견되고 있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동·철은 주로 주조, 금·은은 주로 단조에 의하여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동·철 제품의 성분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특히 선사시대 금속제품 연구에 지장을 주고 있으며, 선사시대 유적에서 야철지(冶鐵址)가 발견되지만 이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편, 고분시대 분묘에서 출토되는 귀금속제 장신구류는 오목새김·돋을새김 등의 기법을 겸하면서 세공이 가해져서 제작기술의 발달상을 보여 주고 있으며, 귀금속을 사용한 도금술도 상당한 진전을 보이고 있다.

목공품에는 나전·화각 등의 기법이 가미되는 수가 있지만, 가장 주목되는 기법은 칠공예의 기법이다. 목심(木心)에 칠을 하는 기법이 가장 흔하지만, 그밖에도 협저(夾紵)·남태칠기(籃胎漆器)·와태칠기(瓦胎漆器) 등이 중국에서 생산되었다.

낙랑군의 한묘(漢墓)에서는 이배(耳杯)·반(盤) 등의 칠기가 다수 발견되었는데, 그 중에서 채협총(彩篋塚) 출토의 채협은 가장 유명하다. 우리 나라에서도 신라 때 칠전(漆典)이 있었고 경덕왕 때는 식기방(飾器房)으로 개칭한 사실을 보면, 기명을 장식하기 위하여 칠을 사용하였음이 분명하다.

백제에서는 금칠(金漆)이라는 것이 있어서 이것이 곧 ≪당서 唐書≫ 동이전 백제조에 보이는 황칠(黃漆)이라고 하나 지금 그 실태를 파악할 수는 없고, 고대 유적, 예컨대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 남성리의 청동기시대 유적 또는 경주 금관총, 공주 무령왕릉 등에서 칠기들이 발견되어 그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

고려시대 나전칠기가 특히 발달하였음은 ≪고려도경≫이나 현존 유물을 통하여 짐작되며, 조선시대를 거쳐 지금까지도 나전칠기의 기법이 계승되고 있다. 도토공예에서는 선사시대 토기의 제작기법과 토제품 표면에 칠하는 유약의 사용이 주목된다.

선사시대 토기의 성형 방법을 발달순서대로 예를 들면, 첫 단계는 점토를 손으로 빚어서 만들었고, 다음 단계는 다른 기물에 점토를 발라 말린 다음 그 기물을 떼어 내거나 그대로 붙여 구워 사용하는 방법, 또는 점토를 고리모양으로 만들어 쌓아올리는 방법(ring building method)과 점토를 국수발모양으로 만들어 나선형으로 말아 올리는 방법(coiling method)을 사용하였으며, 마지막 단계는 물레라는 도구를 사용하였다.

토기에 나타나는 문양은 기벽(器壁)을 굳히기 위하여 외부에서 두드릴 때 그 공구의 무늬가 찍히는 경우와 의식적으로 장식 문양을 시공하는 경우가 있다. 승석문은 전자의 예이고, 후자에는 표면에 점토를 붙이는 융기문(隆起文)과 오목새김하거나 틀로 찍는 침문(沈文)의 구별이 있다.

유약은 우리 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토기 혹은 와전에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연유계(鉛釉系)의 녹유(綠釉)이며, 중국 당대(唐代)에 유행한 연유계의 삼채(三彩)의 영향을 받아 매우 드물지만 통일신라시대에 삼채 그릇이 제작되었다.

그리고 회유계(灰釉系)의 투명한 청자유약은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사용되었다. 유리제품으로는 장신구 또는 용기가 삼국시대 고분에서 출토되며,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시대에 걸쳐서는 유리제의 사리병이 탑 속에서 발견된다.

그 가운데 경주 황남대총 남분에서 발견된 유리병은 그 형태로 보아 서방적 요소가 강하여, 신라에서 제작한 것이라기보다는 페르시아 지방에서 전래된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고분에서 출토되는 이른바 청옥(靑玉)은 우리 나라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 밖의 유리제품이 자국산인지 외래품인지를 가려내기는 매우 힘들다.

우리 나라 공예에서 주목되는 기법의 하나로 상감기법이 있다. 금속공예에서는 입사(入絲)라 하고 목칠공예에서는 나전이라 하며, 도자공예에서는 상감이라 하여, 본바탕에 문양을 판 다음 그곳을 다른 물질로 메워서 장식효과를 내는 수법이다.

금속공예에서는 은으로 메우고 목칠공예에서는 조개로 메우며 도자공예에서는 백토 또는 흑토로 메운다. 중국에서는 전국시대부터 청동기에 금상감의 기법이 발달하였고 당대(唐代)에는 나전기법이 유행하였으나, 도자기 표면에 흑토 또는 백토로 상감하여 문양을 표현하는 기법은 없었다. 삼국시대 고분에서는 금제 장신구에 구슬로 감장(嵌裝)한 작품이 발견되고, 그 여운은 조선시대 장신구에까지 이어지고 있으나 작례가 많지는 않다.

공예품의 문양

공예작품에는 표면을 문양으로 장식하는 수가 많다. 상감기법도 결국은 문양의 표현기법이다. 문양의 내용은 작품 자체의 크기나 용도에 따라 다양하지만, 시대에 따라서도 많은 변화가 있다.

몇 가지 종류로 대별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원시문양은 선사시대 토기 또는 청동기에 나타나는 문양으로서 토기의 승석문·어골문(魚骨文)·밀집파문 또는 말·뱀·거북·물고기 같은 동물문이 있으며, 다뉴세문경의 기하문, 방패형 청동기 또는 각종 무구(巫具)에 있는 점문이나 선문은 매우 정교하다.

공예는 아니지만 울주 반구대(盤龜臺), 고령 양전리 등의 암각화(巖刻畫)에 새겨진 동심원문이나 동심능문(同心菱文) 등도 일종의 원시문양이며, 삼국시대 토기에 시문된 직선 또는 곡선의 각종 문양에는 아직도 원시적인 색채가 남아 있다.

둘째, 종교적 문양에는 불교의 색채가 짙으나 삼국시대 토기에 나타나는 말·거북·뱀 등의 선각문양에는 원시신앙적인 색채가 있다. 불교 전래 이후 각종 공예품에 불교적 문양이 채택되었고, 그 여운은 불교를 배척하던 조선시대까지 남는다.

예컨대, 연화문은 비단 불교공예품뿐 아니라 조선시대까지 각종 공예품에 장식 문양으로 남는다. 연화 외에 보상화문(寶相華文)도 자주 쓰이며, 특수한 예로 불상·탑·불각(佛閣) 등을 조각한 전으로 탑을 축조한 경우도 있다.

고려청자에 많이 쓰이던 운학문도 푸른 바탕에 학과 구름이 날고 있는 형상이 속세를 떠난 불교적인 광경이라고 해석되기도 한다. 불교 이외의 문양으로는 신선·봉황 등이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에 걸쳐 유행하는데, 이러한 것들이 반드시 종교적이 아닐지 모르나 인간의 염원이 담겨 있어 이 범주에 드는 문양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길상문양(吉祥文樣)은 조선시대 공예품에 자주 사용되던 문양으로서 유교적인 성격과 현세구복적인 염원이 담겨 있다. 그 중 칠보문과 같이 그 어원이 불교에 있는 것도 있으나 조선시대는 길상적인 뜻으로 변하고 있다.

도안화된 박쥐가 여러 가지 형태로 쓰이는데, ‘박쥐복(蝠)’자가 ‘복복(福)’자와 음이 같으므로 복을 바라는 의미에서 자주 사용되며, 같은 뜻에서 모란무늬도 자주 이용된다.

십장생은 열 가지 장수하는 물상을 문양으로 채택하며, 포도·석류 등에는 다산의 뜻이 담겨 있다. 물고기도 다산(多産)의 뜻으로 고대부터 즐겨 쓰던 문양이고, 용·호랑이·학·거북·해태 등도 특별한 서기(瑞氣)를 가진 동물로서 각종 공예품에 쓰인다.

조선시대에는 ‘수(壽)’자나 ‘복(福)’자를 도안화하여 문양으로 빈번히 사용하였고, 강(康)·녕(寧)·부귀다남(富貴多男)·자손창성(子孫昌盛) 등의 문자를 쓰기도 하였다.

넷째, 회화적인 문양으로는 산수풍경·사군자 등을 그려서 문양으로 삼는 예가 있다. 고려시대는 유로수금문(柳蘆水禽文)이라는 전원풍경을 그린 문양이 매우 유행하여 이 시대의 특징을 이루었고, 그 밖에도 연지(蓮池)에서 동자가 노는 풍경, 건물과 수목과 인물이 있는 풍경도 있다.

조선시대가 되면 각도를 달리하면서 각종의 회화적 문양이 등장하여 산수·화조·송하인물(松下人物)·매죽·송죽·포도 등이 등장한다. 이와 같은 그림은 도자기에 많은데, 중앙의 도화서(圖畫署) 화원이 그리는 수도 있으나 도공이 그리는 경우도 있어 민화풍이 많아진다.

다섯째, 조선시대 목공가구에는 나무의 결을 살려서 문양으로 이용하는 수가 많다. 먹감나무·괴목 등은 나뭇결을 살리기에 가장 적당하고, 소나무·은행나무·오동나무 등은 고운 나뭇결을 살려서 적당한 자리에 쓰며, 불에 그을린 다음 수세미로 문질러서 나뭇결을 더욱 뚜렷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목공가구에 사용하는 나무가 가지는 색에도 신경을 써서 하나의 작품에도 색을 가려서 여러 가지 나무를 알맞은 자리에 사용하여 전체적인 색의 조화를 고려하였다.

목공가구에서 또 한 가지 주목되는 점은 장식이다. 아무리 나뭇결과 색감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단조로운 표면에 장식과 기능의 두 가지를 고려하면서 금속장식을 붙였다. 장식의 재료로는 백동·놋쇠·무쇠 등이 쓰이며, 금속의 색조도 고려되어 들기름 그을음으로 처리된 검은색이 나는 시우쇠는 조선시대 가구장식의 하나의 특색이다.

한국 공예에 미친 외래문화의 영향

우리 나라에서 출토되는 고대 공예품 중에는 수입품이라고 생각되는 것도 있지만, 우리 나라에서 제작된 것일지라도 형태나 문양에서 외국문화의 영향이 분명히 엿보이는 것들이 있다.

우리 나라 공예품에서 외국문화의 요소를 가려내는 작업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중요한 일이며, 당시의 문화상을 파악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몇 가지 구체적인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경주 황룡사탑지 출토 은제화수대금문원판(銀製花樹對禽文圓板)은 지름 2.5㎝인데 중앙에 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위에는 잎과 꽃이 좌우 대칭으로 표현되었으며, 밑에는 나무줄기를 중심으로 좌우에 새를 대칭으로 배치하였다.

이 은판은 유리된 상태로 발견되어 용도는 알 수 없으나 문양은 다분히 이란 계통이다. 이와 비슷한 문양이 조각된 석조물이 경주에서 발견되었는데, 서역에서 발견되어 일본으로 간 사천왕사렵문금(四天王獅獵文錦)·화수대록문금(花樹對鹿文錦)·천마문금(天馬文錦)·사렵문금 등의 직물 문양과 매우 비슷하다.

이러한 문양이 언제 채택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문양은 이 은판과 석조물 외에는 나타나지 않음을 보아 그다지 유행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제작연대는 고신라 말기로 추정되는데, 앞에서 든 직물들이 서방의 주문을 받아 수(隋)나라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점에서, 서역과 왕래가 잦던 삼국시대 말기에 이러한 문양이 전래되어 이 이색적인 문양을 이용한 공예작품이 몇몇 제작되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둘째, 경주 계림로 제14호고분에서 출토된 감옥금장단검(嵌玉金裝短劍)을 들 수 있다. 전장 36㎝로 철제 검신(劍身)은 부식되어 없어지고 표면을 쌌던 금판과 금판에 박았던 옥만 남아 있다.

형태는 반원형 손잡이 옆에 D자형으로 된 반원형 돌기가 붙어 있고, 긴 칼집에도 반원형 돌기가 있어 P자형이 되며, 표면에는 세공이 가해지고 여러 가지 색깔의 크고 작은 옥이 박혀 있다.

이른바 다채장식양식(多彩裝飾樣式, polychrome style)에 속하는데, 이와 비슷한 검이 소련 카자흐공화국의 보로우오예(Borovoje), 이란, 이탈리아카스텔 트로지노(Castel Trosino)의 랑고바르드(Langobard)에서 발견되며, 파키스탄의 키질(Kizil) 69동 벽화에도 이와 비슷한 단검을 차고 있는 인물화가 있다.

이러한 단검은 중국이나 우리 나라 또는 일본 등지에서 발견된 일이 없어 이 단검이 수입품인지 신라에서 제작한 것인지는 간단히 판별하기 어려우나, 다른 실례가 없는 점으로 보아 전래품일 가능성이 많다.

다만, 감옥수법만은 삼국시대 고분에서 출토되는 금제 귀고리나 팔찌에서 많이 볼 수 있으나, 이 단검의 수법과 연관은 밝히기 어렵다.

셋째, 반와당에 관해서이다. 우리 나라에서 와당은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어왔으나 유독 고구려에서만은 반와당을 사용하였다. 반와당은 수막새기와, 즉 원와당을 가로로 반으로 잘라 윗부분의 반원만을 남겨서 반원와당이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용어이다.

중국에서는 연(燕)의 샤두유적(下都遺蹟), 제(齊)의 린쯔현(臨淄縣)도성지(都城址), 노(魯)의 취푸현(曲阜縣) 도성지 등 전국시대 유적지에서 발견되며, 고구려의 유적지로는 평양 부근에서만 발견된다.

고구려가 지리적인 인근성으로 해서 일찍부터 대륙문화를 받아들여 백제나 신라에서 볼 수 없는 이색적인 형태의 와당을 제작, 사용한 것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반와당이 중국에서 한대(漢代)까지 사용되다가 그 뒤 소멸되었고, 우리 나라에서도 고구려시대 이후 소멸되었다는 점은 피차의 문화적인 교류 시기로 보아 당연한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넷째, 경주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유리제 제병(提甁)이 주목된다. 높이 25㎝로 전체가 연한 녹색을 띠고 있으며, 받침은 포도주잔의 받침을 축소한 형태이고, 몸체는 밑에서 차차 불러지다가 어깨 부근에서는 차차 좁아지면서 목을 형성하였다.

목에는 푸른 유리로 가는 띠를 여러 줄 돌리고, 입술에는 약간 굵은 푸른색 띠를 돌렸다. 손잡이는 굵게 ㄱ자형으로 역시 푸른 유리로 만들어 붙였는데, 여기에 금실이 감겨 있는 것은 손상된 것을 고정시키기 위한 장치로 보인다.

이 병과 함께 유리잔이 발견되었는데, 형태는 위가 넓고 밑이 좁으며, 전체의 색은 역시 연한 녹색이고 입술에 푸른색 유리띠를 돌렸다. 유리병의 형태는 중국에서 호병(胡甁)이라고 부르는 형태로서 일견하여 서역계임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는 이러한 형태의 자기병도 제작되고 있으나, 삼국시대 유물로는 유일하여 이것 또한 서역에서의 수입품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밖에도 형태·문양·수법 등에서 외래양식을 찾자면 상당히 많다.

예컨대, 고구려 고분벽화에 자주 등장하고 평안남도 중화군 진파리 제1호분에서 출토된 투각 관모형(冠帽形) 금구(金具)에 있는 일상(日象)인 삼족오(三足烏), 경주식리총(飾履塚) 출토 식리와 황남대총 북분 출토 은잔에 있는 귀갑문 안의 괴수문양(怪獸文樣), 통일신라시대 와당에 자주 조각되는 날개 달린 사자와 날개 달린 기린, 삼국시대 고분에서 출토되는 각종 장신구에 나타나는 금립세공(金粒細工, filigree)수법 등 실로 다양하다.

결국, 외래문화와의 접촉 내지는 그 수용이 빈번하였다는 표시이며, 이러한 작용을 통하여 참신한 창조적 방향으로 발전하여 왔다.

한국공예의 성격

우리 나라 공예품의 제작 목적은 대체로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종교적 행사에 사용하기 위한 것과 일상생활 용구로 제작되는 것이다. 종교적 행사라 함은 고대사회의 원시종교의식에 사용하던 각종 의기들을 비롯하여, 삼국시대 이후 불교행사에 사용하던 각종 도구들이 이에 포함된다.

이러한 도구들은 모두 금속제품들이고 전체 공예작품에 비하면 많은 수가 아니다. 여기에 비하면 일상생활에 사용되던 용구들은 문화의 발달 정도나 시대적 성격에 따라 각종 재료를 사용하여 막대한 양이 제작되었고, 그들 하나하나에는 사용하던 사람들의 기호 또는 시대적인 풍속과 습관의 영향이 짙게 반영되어 있다.

그것은 곧 공예작품에 나타나는 시대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이 종합되면 민족적인 특질로서 나타나게 된다. 우리 나라 공예품의 대부분이 이와 같이 민중적인 것이기 때문에 서민층의 감각이 가장 솔직하게 표출되게 마련이다.

이러한 특질이 회화나 조각 또는 권위를 상징하는 작품에서보다 일상생활에 제공되었던 공예품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예컨대, 삼국시대의 장신구, 통일신라시대의 불구, 고려시대의 청자와 나전칠기, 조선시대의 백자와 목공품 등은 대표적인 예들이다.

이와 같이 각 시대별 대표작이 있음에도 현존하는 예는 근대로 내려올수록 많아져서 그 성격이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삼국시대 고분에서 다수 출토되는 금제 장신구들은 한 사람의 부장품치고는 놀랍게 많은 양일 뿐 아니라 그 제작의 정교함은 타국의 이른바 황금문화와 비길 만하다.

같은 재료로 만든 같은 종류의 장신구라 할지라도, 신라의 것이 잘 정돈된 섬세함이 있는가 하면, 백제의 것은 부드럽고 세련된 멋을 풍기고 있다.

이 시기의 장신구에서 보이는 형태는 이 시기가 지나면 나타나지 않아 자연 당시 생활과 사고의 일면을 짐작할 수 있고, 기법이나 양식 또한 이 시기에 한해서 나타나는 것이 있다. 예컨대, 고신라의 관모와 백제의 관모가 전혀 형태를 달리할 뿐 아니라, 후대의 관모에는 그러한 형식이 나타나지 않으며, 금립세공 수법이나 삼족오 같은 양식도 삼국시대에 한해서 나타나는 형식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공예기술이 더욱 발전하였을 것은 당연하므로, 현존하는 얼마 되지 않는 불구들의 예를 통하여서도 격조 높은 발전상을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범종과 사리구는 그 중에서도 주목되는 작품이다.

그때는 온 국민이 불교를 신봉하였고 또 그 자체가 불교적인 용품이기는 하지만, 문화전반의 수준 향상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상원사동종과 성덕대왕신종 등에 나타나는 한국종이라는 독특한 양식의 정립과 금속주조기술의 발달상은 우리 나라 전시기를 통하여도 하나의 대표가 될 만하다.

또 감은사(感恩寺)·불국사·송림사(松林寺) 등 사원의 탑파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들은 세공기술의 발달과 아울러, 외래문화의 수용과 소화라는 힘든 과정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또 그것을 자기 문화에 어떻게 적응시키고 있는지도 잘 보여주고 있다.

불구, 즉 통일신라시대의 불교공예품에는 그 밖에도 향로·금고 등이 있으나, 어느 것이나 모두 잘 정리된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다. 고려시대가 되면 같은 불교국가이면서도 불교공예품에서보다도 다른 분야에서 전대에 없었던 특색을 발휘하였으니, 청자와 나전칠기의 발달에서 그 일면을 볼 수 있다.

청자기법이 중국에서 전래되었음은 통설이지만, 중국의 청자와 비교하여 색조·기형·문양 등이 전혀 다른 것은 피차의 문화배경이나 국민감정 또는 생활양식의 차이에 기인한 결과이다.

색조에 있어 고려청자가 한층 맑고 명랑해졌고, 기형은 고려사람들의 생활양식에 알맞게 고안되었으며, 운학문 또는 유로수금문 같은 독특한 문양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한편, 나전공예는 현존 예가 극히 드물기 때문에 이에 대한 평가가 소홀하기 쉬우나, 당시의 발달상은 놀라운 바 있어 중국에서 높이 인정하여 고려에 제작을 주문할 정도였다. 현존 예로 보더라도 문양 도안의 세련됨이나 자개의 색조를 선택하여 적당한 위치에 배열하는 안목 등은 조선시대의 나전공예품에 비할 바가 아니다.

나전수법의 이러한 발달은 드디어 도자기에 상감수법으로 옮겨져 우리 나라 도자사상에 하나의 특색을 이루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공예품에는 불교적인 색채가 일소되었으니 당시 사회환경으로는 당연한 결과이고, 그 대신 백자와 목공가구에서 특색을 발휘하였다.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로 왕조가 바뀌면서 자기의 색은 청색에서 백색으로, 기형은 귀족적인 것에서 서민적인 것으로, 문양은 탈세간적(脫世間的)인 것에서 현세적인 것으로 변한다.

이러한 변화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의 정치이념으로 불교가 아닌 유교를 채택한 데도 한 원인이 있을 것이다.

한편, 목공가구들은 우리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공예품이며, 큰 것은 물론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민족의 생활과 감정이 가장 강하게 노출된 작품이다. 따라서 한국미술의 특색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분야가 조선시대의 목공품이다.

여러 사람이 지적하였듯이 우리 나라 공예품은 중국 공예품에서 느끼는 권위적이고 존대(尊大)한 점이나, 또는 일본 공예품에서 느끼는 가식적이고 기교적인 점이 없어 솔직하고 순박하며 순정적이라고 한다. 따라서 ‘무기교(無技巧)의 기교’니 ‘무계획의 계획’이니 하는 표현도 나오게 된다.

전통공예의 전승

우리 나라에서 생산되어 장기간에 걸쳐 우리 민족이 사용하여오던 공예작품 중에는 이미 사라져 없어진 것도 있으나, 반면 지금까지 그 전통이 계승되어 오거나 단절되었던 기법을 재현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분야도 있다.

지금까지 전통이 계승됨은 그 공예작품에 공감을 느껴 왔기 때문일 것이고 단절현상은 그 반대일 것이나, 지금에 와서 다시 재현을 시도함은 전통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잠재된 공감의식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나전칠기 또는 화각은 그 전통을 이어받아 지금도 생산되고 있으며, 일반가정에서도 계속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생산조건 또는 생활양식이나 문화인식의 차이, 즉 필요한 재료를 과거와 같이 쉽게 구할 수 없다는 점, 가옥구조의 변화에 따른 가구의 용도나 형태의 불가피한 변화, 통신·교통의 발달로 외국문물에 접할 기회가 많아서 생기는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의 변화 등으로 과거의 양식이 필연적으로 변형되겠지만, 기본적인 수법에 대한 공감은 지속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청자, 조선시대의 백자는 한때 그 기법이 단절되기도 하였지만, 특히 청자의 유색은 특별한 정취를 느끼게 하여 다시금 이에 대한 관심이 쏠려서 그 재현에 노력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백자도 그 풍습은 일부 계승되고 있으며, 생활양식의 급격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색조나 기형에서 새로운 인식과 함께 공감이 형성되고 있다.

정책면에서도 전통공예기법의 보존과 전승을 위하여 <문화재보호법>에서는 이들을 무형문화재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지정 대상은 나전장(螺鈿匠)을 비롯하여 낙죽장(烙竹匠)·조각장(彫刻匠)·화장(靴匠)·악기장·궁시장(弓矢匠)·채상장(彩箱匠)·소목장(小木匠)·장도장(粧刀匠)·두석장(豆錫匠)·백동연죽장(白銅煙竹匠) 등과 자수장(刺繡匠)·망건장·탕건장·한산모시짜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부문에 걸쳐 있다.

공예제품은 생활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어서 과거에는 생활의 필수품으로서 제작되었으나,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근대사회에서 어느 정도 또는 어떠한 형태로 그때그때의 생활에 적응할지는 미지수이다. 그러나 민족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곧 전통이며, 공예에도 그러한 요소가 계승되고 있음이 사실이다.

참고문헌

『한국의 목가구』(박영규, 삼성출판사, 1982)
『한국도자사』(강경숙, 일지사, 1989)
『중앙아시아 미술』(권영필, 국립중앙박물관, 1986)
『한국의 금속공예』(이호관, 문예출판사, 1997)
집필자
진홍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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