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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복산(郭福山)

언론·방송인물

 해방 이후 한국신문학회 초대회장, 한국신문연구소 이사 등을 역임한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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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복산
이칭
우당(牛堂)
분야
언론·방송
유형
인물
성격
언론인
성별
출생일
1911년
사망일
1971년
시대
근대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해방 이후 한국신문학회 초대회장, 한국신문연구소 이사 등을 역임한 언론인.
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아버지 수천(洙千)과 어머니 김수경(金洙卿)의 장남이다. 유년시절에 기독교계 사립 영신학교(永信學校)와 소성의숙(小星義塾)에서 보통학교 교육을 받았다.
영역닫기영역열기생애 및 활동사항
중학교 과정은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통신강의록으로 독학했다. 20세에 일본으로 가서 동경물리학교(東京物理學校) 예과를 마치고 와세다대학 정경과 2년을 수료한 뒤, 조치대학(上智大學) 신문학과를 졸업했다.
일본유학을 가기 전인 1927년에 어린 나이로 『동아일보』 지방기자가 된 것을 인연으로, 1935년 4월 동아일보사에 들어가 사회부기자로 일했다. 1941년 8월『동아일보』 폐간 뒤 일본인이 경영하는 『매일신보 每日新報』의 기자로 일했다. 광복과 함께 『동아일보』 복간준비위원이 되고, 1945년 12월 복간되자 재입사하여 사회부장이 되었다.
재직 중이던 1946년 12월백낙준(白樂濬)·홍종인(洪鍾仁)·설의식(薛義植) 등과 대학원 수준의 신문학원 설립을 위한 창립총회를 가졌다. 1947년 4월 조선신문학원이 설립되자 초대 원장이 되었다.
6·25전쟁때에는 『제주신문』의 주필이 되었으나, 부정폭로사건으로 1개월간 구속되었다. 1952년 3월 동아일보사에 세번째 입사, 그 해 4월까지 1개월간 편집국장 겸 논설위원을 지냈다.
1953년 서울수복과 함께 신문학원에 신문보도과 외에 신문영어과·신문사진과를 신설하는 한편, 기성기자 재교육을 위한 신문기자 아카데미 강좌, 전국지방기자 강좌, 방송연구 강좌 등을 실시, 한국 언론계의 개척자로 활약하였으며, 한때 세계통신 고문, 『중앙일보』 주간(취체역), 합동통신사 이사를 역임했다.
1955년 홍익대학 신문학과 교수를 거쳐, 1957년 11월 문교부로부터 우리 나라 최초로 신문학 교수자격을 승인받았으며, 1958년 중앙대학 신문방송학과 교수가 되었다.
1959년 한국신문학회 창립을 주도, 초대 회장이 되었으며, 1966년 한국신문연구소 이사와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심사위원 등을 지냈다. 1961년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수상하였으며, 저서에 『신문학개론 新聞學槪論』이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한국언론인물지』(한국신문연구소,1981)

  • 『백과요람』(동화통신사,1972)

  • 『인물한국언론사』(정진석,나남출판,1995)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권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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