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인식 ()

회화
인물
「작품」, 「천(성)」, 「무제」 등의 작품을 그린 화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19년 1월 15일
사망 연도
1988년 3월 3일
본관
현풍(玄風)
출생지
대구
정의
「작품」, 「천(성)」, 「무제」 등의 작품을 그린 화가.
개설

대구 출신. 일본 도쿄[東京]의 니혼미술학교[日本美術學校]에서 수학하였고 일본에 정착한 재일 한국인 화가이다. 전통적인 양화(洋畵)를 주류로 하는 일본 미술의 흐름에서 벗어나 입체, 오브제 등 공간 전체에 걸린 다양한 실험을 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일본 도쿄[東京]에서 수학(修學)하고. 1937년 일본의 독립미술협회전, 1949년 이과회전에 현대적 표현주의 작품을 출품하여 주목을 받았다. 1950년대에는 주1주2 미학의 영향을 받은 조형 작업을 지향하면서 1954년 요미우리[讀賣] 앙데팡당전 출품, 1957년 ‘신 에콜드 도쿄’ 창립 회원, 1965년 일본국제미술전(도쿄비엔날레)에 초대 출품 등의 활약을 보였다. 그리고 개인전도 다수 가짐으로써 일본 현대 미술의 움직임 속에서 부각되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는 특히 평면적인 회화 작업에서 떠나 유리 조각, 돌, 나무, 철판, 점토 등의 물질을 화면에 부착하여, 그 자체의 특이한 조형적 구성으로 형상적 발언을 하는 작품을 추구하였다. 당시 일본의 이른바 ‘모노파(物派)’, 곧 ‘물상파(物象派)’로 말할 수 있는 물질적 형상 추구파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70년대 중반 이후에는 전통적인 일본 종이 화지(和紙)에, 작은 타원형으로 단순화시킨 일정 형태의 맑고 투명한 색상 이미지를, 유동적이고 복합적인 구성으로 전개시키는, 동양적 신비감의 평면 회화를 창출해 보였다. 한편, 자연스러운 돌에 조형적인 표정을 조성하는 변용 작업과 도자기용 점토를 자유로운 형상 구현에 이용한 작품 행위도 계속하였다.

곽인식은 일본에서의 활약이 두드러진 가운데 한국의 미술계와의 교류도 활발하였다. 1968년 동경 국립근대미술관에서 열린 ‘한국현대회화전’에 출품하였고, 1969년 상파울로 비엔날레에는 한국인 화가로 참가하였다. 1970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한국 현대작가전’과 1971년 파리에서 열린 ‘한국 현대회화전’, 그리고 1977년 동경 센트럴미술관에서 열린 ‘한국 현대미술의 단면전’에 참가하였다. 1985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고, 2019년에도 탄생100주년 기념전이 열렸다.

상훈과 추모

1954년 일본 요미우리신문 앙데팡당전 최우수상, 1956년 일본 아사히신문 주최 신인선발전 신인상 등을 수상하였다. 1989년 일본 도쿄의 갤러리 Q에서 추도전이 열렸다.

참고문헌

『곽인식』(국립현대미술관, 1985)
국립현대미술관(www.moca.go.kr)
주석
주1

제일 차 세계 대전 뒤에, 다다이즘의 격렬한 파괴 운동을 수정하여 발전시킨 예술 운동. 인간을 이성의 굴레에서 해방하고, 파괴와 창조가 함께 존재할 수 있는 ‘최고점’을 얻으려고 하였다. 문학의 경우에 이성의 속박에서 벗어나 비합리적인 것이나 의식 속에 숨어 있는 비현실의 세계를 자동기술법과 같은 수법으로 표현하였다. 우리말샘

주2

제이 차 세계 대전 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서정적 추상 회화의 한 경향. 정형화하고 아카데미즘화한 기하학적 추상에 대한 반동으로 생겨난 것으로, 격정적이며 주관적인 것이 특징이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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