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

광고물이 즐비한 대학가 / 대학축제
광고물이 즐비한 대학가 / 대학축제
언론·방송
개념
소비 대중을 대상으로 하여 상품의 판매나 서비스의 이용 또는 기업이나 단체의 이미지 증진 등을 궁극 목표로 이에 필요한 정보를 매체를 통하여 유료 또는 무료로 전달하는 모든 홍보행위. 광포.
정의
소비 대중을 대상으로 하여 상품의 판매나 서비스의 이용 또는 기업이나 단체의 이미지 증진 등을 궁극 목표로 이에 필요한 정보를 매체를 통하여 유료 또는 무료로 전달하는 모든 홍보행위. 광포.
개설

광고는 동시에 다수의 소비 대중에게 상품 또는 서비스 등의 존재를 알려 판매를 촉진하는 일종의 설득 커뮤니케이션 활동이다.

즉, 광고는 글, 그림, 사진, 도안, 영상, 소리 등의 표현 메시지를 신문, 잡지, 라디오, 텔레비전 등 대중매체 또는 우편, 포스터, 팜플렛, 옥외 광고, 극장, 인터넷 등 다양한 전달 매체에 게재 또는 방송한다.

이로써 예상 구매자에게 상품 및 서비스 등에 관한 정보 내용을 널리 전달, 설득하여 판매 등 소기의 목적 달성을 촉진하고자 하는 활동이다.

이러한 광고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소비자로 하여금 구매하도록 수요를 자극하거나 제품에 이미지를 부여하기 위해서 행해지며, 기업 이미지를 높이기 위하여 시도되기도 하며, 정치적 목적이나 공공 서비스를 위하여 행하여지기도 한다.

광고의 유형은 그 분류 기준에 따라 다양하게 나누어진다. 대표적인 것을 보면 영리성 여부에 따라 영리 광고와 비영리 광고로 분류된다.

영리 광고는 상품 등을 판매할 목적으로 하는 일반 상업적 광고를 가리키고, 비영리 광고는 적십자사 등의 공공단체나 공공 광고 기구에 의한 비상업적 광고이다. 일반적으로 공공 또는 공익 광고라고 일컬어진다.

또, 그 목적이나 기능에 따라 크게 제품 광고(또는 판매 광고)와 비제품 광고로 나눌 수 있다. 제품 광고는 기업이 생산하는 상품이나 서비스의 판매를 증진시키기 위해 행하는 광고이다.

반면 비제품 광고는 광고주의 사회적 공헌이나 기업 경영의 중요성을 일반 대중으로 하여금 인식하게 하여 그들의 호의나 신뢰를 획득하고자 시행하는 광고이다. 흔히 기업 광고 또는 이미지 광고라 부른다.

전달되는 지역의 범위에 따라 국제 광고, 전국 광고, 지역 광고, 지방 광고로 나누어진다. 그 밖에도 전달 매체에 따라 신문 광고, 잡지 광고, 라디오 광고, 텔레비전 광고, 교통 광고, 우송 광고, 옥외 광고, 전단 광고, 영화 광고 등으로 분류된다.

광고의 역사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광고의 역사는 짧아, 최초로는 인쇄술이 발명된 15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 광고를 풀이하면 그 역사는 기원전 수천 년까지 소급될 수 있다.

기원전 3천년 무렵 바빌로니아에서는 사원을 지을 때 사용한 벽돌에 사원의 이름, 사원을 지은 임금의 이름 따위를 새겼다.

기원전 136년에 세운 이집트의 로제타 돌은 톨레미왕(Ptolemy王)을 ‘태양의 아들’, ‘달의 아버지’, ‘인간 행복의 수호자’라고 칭송하는 내용을 적은 것인데, 이렇게 왕의 업적을 널리 알리는 돌을 방방곡곡에 세웠다. 이것은 비록 물건을 판 것은 아니나, 역시 하나의 광고로서 간주할 수 있다.

한편, 이탈리아 폼페이의 유적 가운데 벽에 글과 그림을 통해 빵 가게, 우유 가게, 여관을 표시한 벽 광고가 보인다. 1141년 프랑스의 베리라는 고을에는 루이 7세의 허가를 받고 12명이 회사를 만들어서 선전인 일을 했다.

이것은 거리를 다니며 큰 소리로 외치면서 가게 선전을 해주고 보수를 받는 구두광고(口頭廣告)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중국 북경역사박물관에는 북송(北宋)시대의 바늘광고가 실린 청동제 동판이 소장되어 있으며, 일본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인 1487년 민속화에는 붓을 파는 상점의 간판이 있는 장면이 나타나는 등 간판광고가 오래 전부터 성행하였음을 알려준다.

종이에 최초로 인쇄한 광고는 1480년경 영국 런던의 교회 입구에 붙인 전단광고인데, 그 내용은 책 광고로서 캑스턴(Caxton,W.)이 낸 광고였다. 널리 배포된 뉴스 팜플렛에 광고가 실린 효시로는 1525년경 독일에서 인쇄된 것이 있다.

광고라는 뜻의 영어 단어인 ‘애드버타이즈먼트(advertisement)’가 처음 사용된 것은 1655년 영국에서 발행된 간행물에 나타났는데, 그 뒤 곧 널리 쓰이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누구든지’라는 뜻의 이탈리아 말인 ‘시퀴스(siquis)’가 오늘날의 광고였다. 그 이유는 ‘누구든지 어떠어떠한 물건을 보시면……’ 또는 ‘아니면……’ 따위의 말로 시작되는 것이 광고의 첫머리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근대적인 광고의 역사는 인쇄술 발명 이후에 비롯된다고 하겠다.

신문, 잡지의 발달과 산업혁명에 따른 대량 생산, 판매를 위해 영국에서 발전된 광고는 그 뒤 오히려 미국에서 발달하게 되는데, 그 원인 중의 하나는 1712년∼1853년 사이에 영국에서 신문구독료와 광고에 부과된 세금인 인지세(印紙稅, Stamp Act) 때문이었다.

그 뒤 1920년대에는 라디오의 등장으로 광고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고, 1940년대 말 텔레비전이 도입되면서 그 발전은 더욱 가속화되어 지금은 현대사회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자리잡게 되었다.

우리 나라의 경우, 광고는 미국, 일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 이유는 우리의 근대 광고가 1876년 개항 이후 이 두 나라의 영향 아래 성장해 왔다는 역사적 사실에 기인한다.

정치, 경제, 사회, 특히 언론 매체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우리 나라의 광고의 역사는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한말(1886~1910)의 광고

이 시기는 우리 나라의 근대 광고가 생성, 정착한 때이다. 1886년 2월 22일자 ≪한성주보 漢城周報≫ 제4호 15면과 16면에 독일의 무역상인 세창양행(世昌洋行, Edward Meyer & Co.)이 ‘덕상세창양행고백(德商世昌洋行告白)’으로 시작되는 순한문 광고를 실었는데, 이것이 근대 광고의 효시였다. 이는 독일의 상사가 조선에 개업을 하여 사고 팔 물건을 공시하는 광고였다.

그 뒤 1896년 4월 7일 창간된 ≪독립신문≫은 첫 호부터 광고를 게재했다. 특히, 창간 이듬해부터 영문판 ≪인디펜던트 THE INDEPENDENT≫를 분리한 뒤 2면과 4면에 모두 광고를 실었고, 1면에도 역시 광고를 게재했다.

≪독립신문≫은 우리 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이었을 뿐 아니라 광고에 있어서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즉, 광고가 무엇인가에 관한 계몽구실도 하였고, 또 한말의 모든 신문이 채택한 광고 요금 제도를 도입했다.

1896년 10월 3일자에 영문으로 발표한 광고 요금을 보면 다음과 같다. 1개월-1인치당 $1.20, 3개월-1인치당 월 $1.15, 6개월-1인치당 월 $1.10, 1년-1인치당 월 $1.00, 1면 게재시는 10% 추가, 광고를 많이 자주 할수록 단가를 싸게 했으며 면지정료제도를 만들었다.

1899년 6월 1일자 국문판 ≪독립신문≫에는 광고료를 [표 1]과 같이 발표하였다.

[표 1] 독립신문광고료 (1899.6.1)

기 간\지면량 28행
(1단)
14행
(½단)
7행
(¼단)
1년 광고료 40원 20원 16원
6개월광고료 24원 12원 10원
1개월광고료 5원 3원 2원
1주(6일)광고료 1원50전 1원 75전
1회광고료 50전 30전 20전

1896년에서 1910년에 이르는 기간에 신문 전체 지면에 대한 광고면 비율은 10%에서 50%를 넘을 만큼 급격한 성장을 나타냈는데, 한말 세 신문의 경우를 보면 [표 2]와 같다.

[표 2] 한말 중요신문의 광고비

연 도\신문명 독립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1896 10%
1897 14%
1898 13% 20%
1899 14% 26%
1900 47%
1901 52%
1902 50%
1903 41%
1904 37%
1905 45% 30%
1906 32% 40%
1907 47% 42%
1908 50% 49%
1909 45% 53%
1910 44% 54%
자료 : 한국 개화기 신문의 광고(오인환, 서울대학교대학원 사회학과석사논문, 1968).

광고량의 현저한 증가는 20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나타났다. 업종별로는 책과 약 광고가 많았다. 광고 표현과 방법도 눈부신 발전을 보였는데, 남녀의 삽화, 상표, 상품명, 고유의 글자체, 여러 가지 테두리, 지면 조정, 광고 카피의 전문화 등이 광고면에 나타났다.

또한, 우편에 의한 판매, 경품 광고 등의 방법도 이용되었고, 광고 간판 제작회사가 생겼으며, 1910년에 이르러서는 한성광고사(漢城廣告舍)라는 광고대행사도 나타났는데, 이 회사는 신문, 잡지 광고를 취급한다는 광고를 냈다.

광고가 늘어나자 광고에 대한 계몽 및 비판기사도 생겨났다. 1899년∼1904년에 ≪황성신문 皇城新聞≫에만도 7회에 걸쳐 계몽 또는 비판 기사가 실렸다. 또한,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 통감부는 <신문, 잡지 취체에 관한 건>에서 광고무단게재를 규제하는 공문을 내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1910~1945)의 광고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의 무단정치가 시작되면서 ≪대한매일신보≫는 ‘대한’이 빠진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바뀌었고, 그 밖의 국문 민간 신문은 폐간 또는 사라졌다.

1913년의 조선총독부 통계에 따르면, 29개의 정기간행물 중 국문으로 된 것은 넷뿐이며, 일본어와 국문으로 된 신문이 둘이고, 나머지는 모두 일본어 간행물이다. 네 개의 국문 간행물 중 일간신문은 ≪매일신보≫와 지방 신문인 ≪경남일보 慶南日報≫뿐이었다.

따라서, 경술국치 전에는 그렇게 많던 광고가 그 전달 매체를 상실하여 겨우 총독부 국문 기관지만을 통해 명맥을 유지했다.

반면, 이 무렵의 주요 일본어 신문인 ≪경성일보 京城日報≫, ≪조선신문≫, ≪부산일보 釜山日報≫ 등의 광고량은 상당했다.

≪경성일보≫의 경우 1913∼1918년 기간의 연간 평균이 100만 행(行)이었으며, 1918년에 이르러서는 조간, 석간이 각각 4면 발행되었기 때문에 전 지면의 약 30%에 가까운 광고가 게재되었다.

또한, ≪경성일보≫의 경우 이 6년 동안의 전체 광고 중 일본에서 들어온 광고 물량이 54%로서 국내 신문의 지면에 일본 광고가 판을 치는 현상이 나타났다.

3·1운동 이후 일본의 식민정책이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전환되면서 국문 일간지인 ≪조선일보 朝鮮日報≫와 ≪동아일보 東亞日報≫가 1920년에 창간되었다.

이러한 민간 신문이 발간되면서 주요 국문 광고의 매체가 생기기는 했으나, 광고 관례는 왼전히 일본식으로 바뀌었다. 광고량과 광고 게재 기간에 따르는 할인제도는 없어졌고, 회사별 비밀단가제가 생겼다.

일본 제품의 소비시장으로 전락해 버린 한국의 경제 상황은 바로 신문 광고에서도 나타나, ≪동아일보≫의 경우 1921년에 전체 광고면의 약 64%를 차지하던 국내 광고의 비율이 1925년에는 40%, 1934년에는 33%로 줄어들고 일본 광고는 계속 증가했다.

1935년에는 ≪경성일보≫, ≪조선신문≫의 두 일본어 신문과 ≪동아일보≫, ≪조선일보≫ 및 ≪매일신보≫의 3개 국문지 총 광고량 중 일본에서 들어온 광고의 비중이 65%를 넘게 되었다.

1926년에는 ≪동아일보≫가 ‘광고도안현상선발대회’를 주최했고, 1938년에는 상업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한 상업 미술 전람회를 개최하였다. 또한, ≪조선일보≫는 1937년에 광고 강좌를 주최하였다.

1920년에서 1940년에 이르는 동안에 광고 표현과 기법은 현저한 변화를 보였다. 광고에 대한 규제는 별로 없었으나, 그 내용이 한국의 독립과 관련된 경우에는 압수당하기도 하였다.

이 당시 광고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었으며, 산업의 발달도 미미한 일제의 식민지였던 때문에 국내의 광고 대행업은 본격화될 수 없었다.

다만, 1921년에 서울 종로 낙원동에 백영사(百榮社)라는 광고대행사가 설립되어 신문지상을 통해 광고 대리 영업을 하다가 1년도 못 되어 폐업되었고, 통신사를 겸하던 일본의 덴츠(電通)만이 지사를 두고 주로 통신 업무를 했을 뿐이었다.

광복 이후(1945년 이후)의 광고

광복 이후 시작된 현대 광고의 발달은 다시 다음의 네 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복구 및 4대 매체 시대(1945~1967)

8·15광복과 함께 많은 신문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났으나, 그것들은 대부분 정치 선전의 매체로 이용되었을 뿐 광고 전달의 기능은 적었다.

1945년에는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복간되었으나, 극심한 물자 부족으로 하루에 타블로이드 2면 발행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 신문들을 비롯한 몇몇 신문의 광고란을 통해 광고가 근근이 이어졌다.

광복에 뒤이은 국토 분단, 3년이 넘는 6·25전쟁 때문에 광고의 부진 현상은 계속되었고 실제로 광고가 새롭게 출발한 것은 주된 광고 매체인 신문이 하루 4면 발행을 시작한 1955년 이후부터였다.

1954년에 창간된 ≪한국일보≫는 우리 나라 초기 광고회사라고 할 수 있는 한국광고사를 전속 광고회사로 운영했으며, 1959년에는 ‘광고윤리요강 및 게재기준’을 제정했다.

이보다 2년 앞서 광고에 대한 독자의 감상, 비평을 모집했으며, 1959년에는 2백만환현상 ‘한국광고작품상’을 주최했다. 또한, 1960년에는 한국 최초의 광고전문지 ≪새광고≫를 만들었다. 이 잡지는 광복 후 처음으로 광고량 조사를 실시했다.

1950년대 후반기의 주요 광고 매체는 신문을 비롯한 잡지, 간판, 포스터, 영화 등이었다. 특히, 신문 광고는 가장 큰 광고 매체로서 1960년에는 그 광고 수입이 신문사 전체 수입의 30%에 이르렀다.

주로 게재되었던 광고는 약품과 서적 광고였으며, 극장의 영화 프로그램 광고도 많은 지면을 차지하였다. 이 무렵의 주요 광고주는 유한양행, 국도극장, 해태제과, ABC화장품, 샘표간장, 단성사 등이었다.

1961년 1월 당시 전국 14개 신문의 광고 수입은 3억 6,500만 환이었고, 업종별로는 영화가 약 30%, 의약품이 약 37%였다. 단가 기준은 여전히 행이었으며, 업종별 가격차등제가 있었다.

1956년 5월 12일 개국한 KORCAD, 호출부호 HLKZ-TV 방송에서는 우리 나라 최초의 방송 광고가 시도되었으나 여건상 그것은 극히 미약한 수준이었다.

도약기 및 광고대행사 시대(1968∼1980)

1960년대 말부터 광고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기업의 발전, 라디오, 텔레비전 방송 등 전파매체의 급성장, 코카콜라를 비롯한 외국 기업의 한국 진출, 그리고 광고 대행업의 대두 때문이었다.

1961년 12월 2일 서울에 문화방송국이 생기면서 본격적인 상업방송으로서 유료 광고를 실시하였다. 1961년 12월 31일 개국한 KBS-TV는 1963년 1월부터 광고 방송을 실시하였다. 그 뒤 1964년까지 라디오, 텔레비전의 상업 방송이 정착되었으며, 각종 방송 규정도 제정되었다.

1960년대 하반기는 라디오 방송 광고의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1970년대 초로 가면서 텔레비전 광고가 우위를 차지해 라디오, 신문, 잡지 광고는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경향을 보였다.

1960년대 말의 전파 매체 광고는 인쇄 매체에 대하여 6:4의 열세를 보였고, 텔레비전은 4대 매체 광고의 수입 구성비에서 겨우 14%를 차지하였다.

이 당시 전국지 8개, 주간지 6개, 월간지 6개, 라디오 3개, 텔레비전 2개를 대상으로 분석한 자료에 의하면 당시 최고의 광고주는 동아제약이었다.

그 뒤로 한일약품, 한독약품, 유한양행, 종근당, 영진약품, 일동제약, 한국화이자 등으로 의약품회사가 10개 기업 가운데 8개를 차지했으며, 그 밖에 해태제과와 럭키가 그 안에 포함되었다.

광고 대행업 회사로는 1967년에 합동통신사 광고기획실, 1969년의 만보사가 이 시기에 설립되었다. 합동 광고 기획실에서는 광고량 조사를 시작했고, 1969년에 전문지 ≪합동광고 合同廣告≫를 냈으나 1년을 넘기지 못했다.

1967년에는 신문·잡지발행부수공사국(ABC)이 연구회로 발족했으나, 공사제도 실시에는 실패하였다. 1968년에는 국제광고협회(IAA) 한국지부가 창설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한국 광고는 급격히 발전하여 그 규모나 체제에 있어서 매우 괄목할 만한 변화를 보였다. 광고대행사도 좀더 체계적이고 근대화되었다.

1973년에는 제일기획이, 1974년에는 연합광고가, 1979년에는 종전의 합동 광고와 만보사가 통합, 오리콤으로 바뀌면서 1970년대 광고업계는 3대 광고회사 시대를 이루게 되었다.

매체별로 보면 1970년대는 텔레비전 광고의 전성기를 이루었는데, 이것은 특히 텔레비전의 보급 현황이 급격히 신장(1973년에 100만대 상회)되었기 때문이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매체별 광고비 상황을 비교하면 [표 3]과 같다. 또한, 이 기간의 각 매체별 광고비의 상황은 [표 4]와 같다.

[표 3] 매체별 광고비 비교표 (단위 : 억원)

매체종류 1968년(%) 1974년(%) 대 비
신 문 41(45.0) 120(36.2) +203%
잡 지 5( 6.1) 18( 5.4) +237%
라 디 오 17(18.6) 64(19.4) +267%
텔레비젼 12(13.4) 97(29.2) +560%
기 타 16(16.9) 32( 9.8) +142%
합 계 92(100.0) 330(100.0) +253%
자료 : 한국광고사(신인섭, 나남출판, 1986).

[표 4] 매체별 광고비 (단위 : 원화-억원 미화-백만달러)

연도\종류 신 문 잡 지 라디오 텔 레비 젼 기 타 합 계
1968 41 5 17 12 16 92
달러 14.7 1.9 6.0 4.3 5.7 32.6
비율(%) 45.0 6.1 18.6 13.4 16.9 100
1970 60 8 26 18 15 127
달러 18.8 2.6 8.3 5.6 4.8 40.1
비율(%) 46.8 6.5 20.6 14.1 12.0 100
1972 68 15 30 47 31 190
달러 18.4 4.0 8.0 12.6 8.4 51.4
비율(%) 35.9 7.7 15.6 24.6 16.2 100
1974 120 18 64 97 32 330
달러 31.2 4.6 16.6 25.1 8.4 85.9
비율(%) 36.3 5.4 19.3 29.2 9.8 100
1976 315 35 148 304 133 935
달러 67.9 10.0 36.1 54.7 18.3 187.0
비율(%) 33.7 3.8 15.8 32.5 14.2 100
1978 574 57 213 545 310 1,699
달러 118.6 11.8 44.0 112.7 64.0 351.1
비율(%) 33.8 3.4 12.5 32.1 18.2 100
1980 989 108 344 820 491 2,752
달러 153.4 16.7 53.5 127.1 67.6 418.1
비율(%) 35.9 3.9 12.5 29.8 17.8 100
자료 : 광고연감(제일기획, 1997).

이 표에 나타난 대로 광고비 조사가 시작된 1968년 이후에 일어난 변화의 특징은 총 광고비 가운데 신문이 차지하는 비율은 줄어든 데 비해 텔레비전이 새로운 매체로서 급격한 성장을 보였다는 점이다.

1974년 업종별 집계에 따르면 해태제과가 가장 큰 광고주였으며, 태평양화학, 동아제약, 럭키, 유한양행, 종근당, 미원, 한독약품, 롯데제과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이는 1970년대에 들어와서 고도성장이 이루어지고 소비생활이 고급화됨에 따라 화장품, 식음료 소비가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79년에는 다시 변화가 생겨 가전업체가 1위와 2위를 차지하였고, 그 업종이 가전업체, 식음료, 화장품, 가정용품, 주류, 의약품 등 매우 다양해짐을 나타내었다.

특히, 전자업계의 광고비 지출 증가는 새로운 상품 업종으로서의 전자제품에 대한 소비자의 요구와 인기를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TV컬러화와 성숙기(1981∼1987)

1980년대를 맞이하면서 광고계는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즉, 1980년 11월 1일 이후 컬러 텔레비전 방송이 실시되면서 색채광고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또한, 언론 통폐합에 따라 방송의 공영화 및 방송광고의 공영화 조처가 이루어지면서 한국방송광고공사가 발족하게 되었다.

<언론기본법>이 제정되어 모든 정기간행물 발행은 심한 통제하에 놓이게 되었고, 급격한 컬러 텔레비전 대수 증가와 경제성장으로 텔레비전 광고시간이 몹시 부족하게 되었다.

한편, 하루 8면으로 묶여 있던 일간 신문은 1981년부터 12면 발행으로 증가했다. 외국 광고대행사와의 업무제휴가 늘고 이 시기 말에는 광고시장의 부분개방이 시작되었다.

1987년 노태우 대통령 후보의 이른바 6·29선언을 계기로 <언론기본법>은 폐기되고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한국의 언론과 광고계는 개방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개방시대(1988년 이후)

1987년 가을 말썽 많던 <언론기본법>의 폐기는 언론자유화의 물꼬를 텄다. 1987년 말에 30개이던 일간 신문의 수는 1988년 말까지 65개, 1990년에는 85개, 1992년에는 드디어 100개를 넘어 1995년 말에는 148개 지로 폭증했다.

전체 정기간행물의 수도 1987∼1995년 기간에 2,412개에서 9,720개로 4배 넘게 늘었다. 아울러 1일 12면 발행으로 묶여 있던 일간신문의 지면은 자유화되어 1988년 4월에는 16면, 1990년에는 24면, 1990년대 중반에는 40면을 넘게 늘어났다.

방송에도 변화가 일어나 1990년 4∼6월 사이에 서울에서 평화방송, 불교방송, 교통방송이 FM으로 방송을 시작했다. 1991년에는 3월에 SBS AM라디오, 12월에는 SBS TV방송이 시작됨으로써 1980년 말의 강제된 방송공영화는 다시 공·민영 이원제로 복귀했다.

1995년 봄에는 CATV방송이 시작되었고 아울러 지방 광역시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 민방 TV설립이 허가되었다. 이로써 우리 나라는 일시에 멀티 채널 시대로 돌입했다. 1991년에는 미디어 서비스 코리아(Media Services Korea., MSK)가 TV시청률 조사에 착수하였다.

한편 경제는 1987년 109.7조 원이던 GNP가 1996년에는 386.6조 원으로 성장했고 개인당 GNP는 1988년에 약 4,300달러에서 1995년에는 1만 달러를 넘어섰다. 광고비의 성장도 두드러졌다.

1987년에 9,724억 원으로 GNP의 1%를 넘어선 광고비는 1988년에 1조 2,800억 원, GNP의 1.1%가 되었으며, 1996년에는 5조 원을 넘어 GNP대비 1.4%선에 도달했다. 그리고 1990년대 중반에는 세계 10대광고비 보유국에 들어서게 되었다.

1989년에 들어선 뒤 방송 매체 광고 대행 기준의 완화로 10여개 사이던 광고대행사가 1990년 말에는 64개 사, 1996년 말에 180개 사로 늘어났다. 아울러 방송매체 대행사 수수료도 상향 조정되고, 또 광고주 계열 및 비계열의 차등도 없어졌다.

1988년에는 코래드와 금강기획이 미국 광고회사인 오길비&매더 및 베이츠와 각각 합작했고, 뒤이어 DYR, 보젤, J. 월터, 톰슨, 매캔에릭슨 등 모두 12개의 주요 외국 대행사가 한국에 진출했다.

10대 광고주에도 변동이 있어 1987년만 해도 10위권 밖에 있던 자동차 3사가 모두 10대 광고주로 부상했다. 최대 광고주로 부상한 삼성전자는 1995년에 1,000억 원을 넘는 광고비를 4대 매체에 투자한 것으로 나타났다.

1987년과 1992년의 두 차례에 걸친 대통령 선거전에서는 광고대행사의 활약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1992년 12월 선거에서는 민자당, 민주당, 국민당의 주요 3당이 치열한 선거광고전을 벌였다.

그 해 6∼12월 사이에 이 3당이 신문 광고에 쓴 비용은 약 190억 원에 이른 것으로 한국 광고데이터 자료에 나타났다. 이는 1992년 신문광고비 1조 1,410억 원의 17%에 이르는 돈이었다. 1992년에는 비록 정당마다 5회라는 제한은 있었으나 TV광고가 선거에 이용된 첫 사례를 남겼다[표 5].

[표 5] 연도별 GNP 대비 광고비

연 도\광고비 총광고비 전년대비 GNP대비점유비 GDP대비점유비 90년대비
(백만 원) (%) GNP(억 원) 점유비(%) GDP(억 원) 점유비(%) (%)
1981 318,359 115.7 457,029 0.70 476,567 0.67 15.92
1982 432,621 135.9 524,605 0.82 547,210 0.79 21.63
1983 565,314 130.7 620,860 0.91 641,965 0.88 28.26
1984 683,354 120.9 710,446 0.96 736,051 0.93 34.17
1985 739,312 108.2 793,011 0.93 820,621 0.90 36.96
1986 818,539 110.7 929,093 0.88 957,364 0.85 40.92
1987 972,352 118.8 1,097,265 0.89 1,121,303 0.87 48.61
1988 1,278,523 131.5 1,313,713 0.97 1,331,342 0.96 63.92
1989 1,564,635 122.4 1,479,416 1.06 1,491,647 1.05 78.23
1990 2,000,133 127.8 1,782,621 1.12 1,795,390 1.11 100.00
1991 2,395,461 119.8 2,142,399 1.12 2,157,344 1.11 119.77
1992 2.815,857 117.5 2,387,046 1.18 2,403,922 1.17 140.78
1993 3,228,713 114.7 2,655,179 1.22 2,671,460 1.21 161.42
1994 4,028,426 124.8 3,037,726 1.33 3,059,702 1.32 201.41
1995 4,951,257 122.9 3,482,843 1.42 3,512,948 1.41 247.55
1996 5,615,559 113.4 3,866,000 1.45 3,899,792 1.44 280.76
자료 : 광고연감(제일기획, 1997).

1988년 이후 10년 사이에 일어난 광고 관련 주요 사건을 살펴보면 개방 시대의 변화가 여실히 드러난다. 1988년에는 드디어 외제 담배 시장이 개방되었다.

광고주협회가 창립되었고, 중앙대학교 광고홍보학과가 복과되었다. 한양대학교, 서울예술전문대학에는 광고전공학과가 신설되었다. 1989년에는 한국ABC협회가 창립되었다.

10월에는 광고학회가 창립되었고, 방송광고 심의권은 한국방송광고공사에서 방송위원회로 이관되었다. 방송광고공사는 국제광고협회(IAA)가 인정하는 IAA국제광고인 교육과정을 설립하였다.

1990년에는 단체 성격의 변화에 따라 한국광고협의회가 한국광고단체연합회로 호칭을 바꾸었다. 공보처 광고담당과는 광고진흥국으로 승격되었다. 1962년에 제정되었던 옥외광고물 등 관리법이 크게 수정, 보완되어 1991년에 공포되었다.

1991년에는 광고시장이 완전자유화되었고, 두산전자의 페놀 유출 사건은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광고에 대한 관심은 국내에서 수여된 박사학위논문의 수에서도 드러난다. 즉, 1945년에서 1986년까지 3편에 불과하던 논문 수가 1987∼1991년 사이에는 13편으로 늘어난 것이다.

광고대행사 인정기준의 완화는 이미 1989년에 시작되었는데 그 뒤 2년 동안의 기간에 방송 광고대행사는 95개, 신문 광고대행사는 45개 사로 늘었다.

신문 카르텔의 붕괴와 신문 수의 폭증은 극심한 판매 경쟁을 불러일으켰다. ≪한겨레신문≫은 1992년 4월 22일자에 2면에 걸쳐 이 문제를 보도했으며, TV도 이 문제를 다루어 신문 판매 경쟁은 사회문제가 되었다.

1992년에는 유공 광고인에 대한 포장이 처음 실시되었다. 그리고 시장조사협회가 발족되었다. 1994년은 맥주광고 전성시대였다. 한 신문에 1억 원을 들여 2면에 전면 컬러 광고를 내기도 했다.

1976년 프로그램 시간의 100분의 8로 줄었던 광고 방송 시간이 1994년 18년 만에 100분의 10으로 복귀했고 KBS 1TV는 광고를 다시 중단했다. 1994년 광고 표현의 개방 바람은 X-세대, missy 풍조와 함께 나체 뒷모습 광고가 일간신문에 등장하게 하였다.

1995년 1월 1일 유력 전국 종합지는 80면이 넘는 신년 특집을 발행했다. 3월에는 케이블 TV방송이 시작되고 4대 광역시에 지역민방 TV가 허가되었다.

공보처는 ABC협회를 위해 50억 원의 기금을 지원했다. MBC방송은 정부기관인 방송광고공사가 가지고 있는 영업권 반환을 요구했다. 7월 1일에는 무궁화호 위성이 발사되었다.

1996년은 IAA세계광고대회 서울개최의 해였다. 6월 KOEX에서 있은 서울 IAA세계대회에는 역대 어느 대회보다 많은 대표가 참가했다. 그리고 대회는 성공적이었으며 또한 가장 완벽한 기록을 남겼다. 지방도시 민영 TV방송국 설립은 계속되었고 7월에는 KBS의 위성방송이 시작되었다.

광고주협회가 전국 1만여 표본을 대상으로 실시한 매체접촉조사 결과를 일부 언론이 무단 보도함으로써 말썽이 일어났으며, 6월에는 수는 적으나 ABC부수공사보고가 발표되었다.

신문판매 경쟁으로 7월에 중앙일보 고양지국 사원이 조선일보 사원을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을 계기로 공정거래 위원회는 신문 판매에 대해 공정거래법을 적용하는 규정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1996년 하반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불황의 징조는 10월 이후 TV광고 방송 시간이 20%나 미판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것은 1981년 TV컬러화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1996년은 한국이 29번째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이 되었고, 2002년 월드컵 한일양국 공동주최가 결정된 해였다.

1997년에 더욱 심화된 경제 불황은 드디어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조를 받는 상황에 이르렀고, 대기업들의 잇따른 부도사태로 광고산업도 지난 30년 기간에 처음으로 전년 대비 감소현상이 나타났다. 1988년 이후 10년간은 한국광고산업이 국제화 및 개방시대로 접어든 시기였다.

이제 남은 문제는 광고 산업의 세 다리, 즉 광고주, 광고대행사, 매체 가운데서 특히 인쇄 매체의 광고지면 판매와 관련된 관습의 국제화이다. 또한, 이미 도래한 멀티미디어 시대에 정부기관이 거의 모든 방송 광고를 독점 판매하는 제도의 폐기 또는 개선이 필요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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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동광고』 Ⅰ∼Ⅸ(합동광고, 1969∼1970)
『PR작전』 1∼5(김용중, 한국능율협회, 1966∼1973)
『신광고론』(유붕노, 일조각, 1975)
『광고학개론』(김원수, 경문사, 1981)
『한국광고사』(신인섭, 나남출판, 1986)
『광고연감』(제일기획, 1980∼1997)
『광고정보』(한국방송광고공사, 1981∼1997)
The History and Development of Advertising(Frank Presbrey, New York:Doubleday, Doran & Co., Inc.,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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