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학생운동 ()

광주학생운동 / 이광춘, 박기옥
광주학생운동 / 이광춘, 박기옥
근대사
사건
1929년 광주 지역의 학생이 주도하여 일으킨 항일독립만세운동.
정의
1929년 광주 지역의 학생이 주도하여 일으킨 항일독립만세운동.
개설

광주에서 폭발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민족 차별 교육에서 발단하여 민족 독립 만세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광주학생운동의 역사적 배경

국내외 정세

1919년 3·1운동과 1926년의 6·10만세운동 뒤 일제는 반일적 사상 운동과 사회 운동, 그리고 학생운동 등 한국 민족의 대대적인 반격과 도전에 직면하고 있었다.

한편,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전쟁 경기로 비교적 호황을 보이던 일본 경제계에 공황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일본 경제의 파국적 위기와 천황제 정치체제를 위협하는 좌파 세력의 진출은 일본 정계에 커다란 위협이 되고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일본은 1927년 5월 제1차 산둥출병(第一次山東出兵)을 단행하여 중국 국민혁명군의 북상을 저지하면서 대륙 침략 정책을 여실히 드러냈다. 1928년 4월 일본 국내의 반대 여론을 무시하고 제2차 산둥출병을 강행하여 영국·미국과 대립하며 중국 침략에 앞장섰다.

또한, 6월에는 만주에서 특무공작을 전개하여 장쭤린(張作霖)을 폭살하였고, 7월에는 특별고등경찰(特別高等警察)을 전국에 배치하여 치안 체제를 강화하였다.

당시 우리 나라는 6·10만세 운동을 전후하여 한때 국내 사회 운동과 사상 운동 선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좌파에 대한 탄압이 확대됨으로써, 일제에 대한 민족 저항 세력은 새로운 방향에서 재편성의 기운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특히, 1925년 5월 치안유지법이 국내에도 적용, 실시되면서 사유재산 제도를 부인하려는 국내의 좌파 세력이 탄압을 받게 되자, 민족주의 진영은 새로운 방향에서 반일 민족운동을 전개할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1926년 7월 15일 한국 민족의 단일 전선 기관을 표방하고 실업·종교·청년·형평·학생·사상의 각 계통을 망라하여, 대동단결에 의한 민족적 통합 세력을 구축할 것을 목적으로 명제세(明濟世) 등의 이름으로 조선민흥회준비위원회(朝鮮民興會準備委員會)가 결성되었다.

한편, 도쿄에 있던 한국인의 좌파 단체 북성회(北星會)는 1925년 1월 일월회(一月會)로 개칭하였다. 그후 안광천(安光泉)·하필원(河弼源)·김삼봉(金三奉) 등의 회원들도 귀국하여, 1926년 4월 14일 북풍회(北風會)·조선노동당·무산자동맹·화요회(火曜會) 등 4개 단체를 통합하여 정우회(正友會)를 창립하였다.

그러나 제2차 공산당사건으로 다시 많은 간부를 잃게 되고, 또 일본에 있어서의 무산정파들의 동향도 고려하여 그들 좌파와 민족주의가 상호제휴함으로써 전 민족의 역량을 집중하여 경제적 투쟁에서 정치적 투쟁으로 방향을 전환, 민족단일전선 결성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정우회는 1926년 11월 15일 해체 선언을 하였다. 그리고 조선민흥회·전진회 등도 해체된 후, 거기에 소속된 회원들은 신간회의 기치 아래 수용되었다. 신간회는 1927년 2월 15일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 회관에서 발기되어 회장에 이상재(李商在), 부회장에 홍명희(洪命熹)가 피선되었다.

같은 해 5월 16일 이에 승복하지 않은 좌파들은 속칭 874개 단체 대표들을 모아 조선 사회단체 중앙협의회 창립 대회를 열었고, 5월 27일에는 신간회의 자매 단체인 근우회(槿友會)가 창립되었다.

그런데 1920년대 항일 운동의 전개는 학생들의 동맹휴학과 같이 일제의 식민지 교육 체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일제는 일제 통치 기구에 협조할 수 있는 최소한도의 친일적 한국인을 위한 제한된 실무 교육인 간이 교육(簡易敎育)을 실시하였다.

또한, 한국인의 지적 수준이 높아지면 일본 제국의 도덕적 기초가 무너지고 일본인 통치자를 무시하게 된다는 우려 속에서 식민지주의적 교육정책으로 일관하였다.

특히, 일제 당국은 3·1운동의 민심 수습책의 하나로 1면 1교계획(보통학교)을 4년내 달성할 것을 공포했으나, 10년 뒤인 1928년 현재 전국 2,400여 면에 공립·사립 보통학교가 도합 1,544개가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차별적이고 제한적인 식민지 교육 상황에서 한국인 학생들은 항일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1928년 83건의 항일 학생운동이 전개된 사실은 한국 학생들이 식민지 교육 체제 및 일제의 한국 강점에 대한 민족적 저항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3·1운동의 좌절 뒤에 등장하는 민족 실력 양성 운동은 반일제, 독립의 길을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방향에서 설정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교육열과 신지식열을 봉쇄하거나 해치는 교육정책은 한국 학생의 저항을 필수적으로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광주 지방의 제정세

1928년 4월경 광주와 송정리 등에서 항일 격문을 뿌린 사건에 연루된 이경채(李景采) 등 8명이 공판에 회부되었다. 특히, 당시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이었던, 이경채가 『조선독립선언문』의 작성과 살포에 가담하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1928년 6월 동맹휴교운동에 들어갔다.

또, 1928년 4월 28일에는 임실청년회관에서 제4회 전라북도 기자 정기 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이때 일제는 전라북도 기자 대회의 토의 사항과 강령이 불온하다 하여 기자 대표 6명을 경찰의 취조 뒤 송국(送局)하였다. 전라북도기자대회사건으로 말미암아 국내 언론계뿐 아니라 호남 지방의 항일적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이때 평안북도 의주 출신인 조인현(趙仁賢)이 3년 동안 이리·김제 등지에서 공작을 전개하며, 일제의 한국인에 대한 착취 기관인 동양척식회사 지점을 비롯한 관공서를 습격할 목적으로 폭탄을 제조하고 총기를 밀수입하는 등 구체적으로 준비를 진행시키던 중 발각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러한 사건은 국내에서 조직 공작을 통해 무력 투쟁을 전개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전라남북도 지방에 걸쳐 큰 자극을 주었다.

한편, 1928년 8월 5일 전라남도소년연맹 창립총회가 경찰에 의하여 금지되자, 전라남도 각 지방의 소년운동대표자들은 무등산 증심사(證心寺)에서 간담회를 열었다. 그런데 일본 경찰은 이들 대표자들을 강제 연행하였다.

그 뒤 가혹한 취조 끝에 정홍교(丁洪敎)·고장환(高長煥)·유혁(柳赫) 등 8명이 중앙에서 파견된 사실을 알아내고 이들을 광주지법 검사국으로 송국시키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928년대 전라남북도에서 일어난 이상의 민족적 결사 운동과 항쟁, 그리고 일제의 탄압은 광주학생계에 고무적인 충격과 용기를 심어 줬을 것이다.

광주학생의 맹휴운동

광주 학생운동의 지도적 역할을 담당한 학생 결사 성진회(醒進會)는 항일·반식민지·민족독립이라는 한민족 공통의 대국적 상황을 학생의 처지에서 집약한, 그리고 광주학생계의 현실에서 조직된 결사체로 1926년 11월 조직되었다.

다음해에 독서회로 확대, 개편되면서 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농업학교·광주사범학교·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목포상업학교 등에 하부 조직을 두고, 김기권(金基權)과 장재성(張載性)은 학생소비조합을 만들어 자금 조달에 노력하였다.

1928년 11월 초 광주학생계의 이와 같은 항일적 분위기에 맞추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장매성(張梅性).박옥련(朴玉蓮).박계남(朴繼男) 등 11명이 주도하여, 민족의 독립과 자유의 쟁취, 그리고 여성의 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인 소녀회를 조직하였다. 소녀회는 동지를 포섭하여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을 때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한편, 광주고등보통학교를 비롯한 광주학생계에서 일어난 항일 의식은 동맹휴교와 항일 운동이 고조되어 간 1927년과 1928년에 더욱 성숙해 갔다. 1927년 2월 5일 밤 소등 후에 도서실에서 공부하던 광주사범학교 학생 윤형남(尹亨南)을 일본인 체육 교사가 지나치게 모욕적인 언사로 단속을 가하였다. 여기에 반발한 광주사범학교 기숙사생 150명이 "조선인 본위의 교육을 실시하라!", "노예 교육을 철폐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하였다.

같은 해 5월 하순에는 광주고등보통학교 2·3학년생들이 '한·일학생교육제도와 시설의 차이'를 지적하며 동맹휴교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그런데 광주고등보통학교의 본격적인 항일동맹휴교운동은 1928년 6월의 이경채사건에서 비롯되었다.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이었던 이경채는 광주와 송정리 등에서 발생한 불온문서사건에 관련되어 구속되고, 학교 당국으로부터 퇴학당하였다. 이에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이경채 권고 퇴학의 이유를 밝히라며 전교생이 동맹휴교에 돌입하였다. 이어 광주농업학교에서도 비슷한 요구 조건으로 동맹 휴교에 돌입하였다.

이렇듯 광주 학생들의 동맹휴교가 확대되자, 학부형·동창회 및 재동경 광주고등보통학교의 졸업생까지 개입된 동맹휴교중앙본부가 발족되었다. 동맹휴교중앙본부가 설치되자 동맹휴교는 학교 내부 및 광주 지방의 차별 교육 문제에서 탈피하여 식민지 교육 체제와 통치 기구에 대한 항쟁으로 성격이 변화, 발전하였다.

학생 동맹 휴교는 매우 조직적이며, 지속적인 태세를 갖추게 되었고, 동맹휴교 정신도 명백해져 식민지 노예 교육을 거부하고 피압박 민족의 해방을 요구하였다.

1927년과 1928년 사이에 국내 항일 민족운동의 고조된 분위기와 맹렬한 호남의 항일 풍조 토대 위에 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농업학교가 주축이 되어, 4개월간 전개된 동맹 휴교 투쟁은 학생계의 항일 의식을 명백하게 부각시켰으나 일제 당국의 폭압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광주학생운동의 경과

광주학생운동의 발단

1929년에 들어서도 광주고등보통학교를 비롯한 광주 학생들의 항일 기운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그러던 1929년 3월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 김몽길(金夢吉)·여도현(呂道鉉) 등이 교규문란의 이유로 퇴학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교내는 험악한 분위기가 감돌며 긴장이 계속되다가 광주학생동맹휴교 1주년이 되는 6월 26일 5학년을 비롯하여 2·3학년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하학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또, 이날 통학열차가 운암역을 통과할 때 일본인 중학생 하나가 "한국인은 야만스럽다"라는 말이 문제가 되어 일본인 중학생과 광주고등보통학교학생들의 충돌 사건이 일어났다.

이러한 사건 등으로 인해 광주지방의 한·일학생간의 감정은 더욱 악화되고 있었으며, 특히 광주주변에서 기차로 통학하는 우리나라 학생과 일본인 학생들의 관계는 긴박한 긴장감마저 돌게 되었다.

이러한 한·일학생간의 대립은 1929년 10월 30일 오후 5시반경 광주발 통학열차가 나주에 도착하였을 때 폭발하였다. 이날 나주역에서 통학생들이 집찰구로 걸어나올 때 일본인 학생 몇 명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3학년 학생 박기옥(朴己玉).이금자(李錦子).이광춘(李光春) 등의 댕기 머리를 잡아당기면서 모욕적인 발언과 조롱을 하였다.

그때 역에서 같이 걸어나오고 있던 박기옥의 4촌 남동생이며 광주고등보통학교 2학년생인 박준채(朴準埰) 등이 격분하여 이들과 충돌하였다. 그때 출동한 역전 파출소 경찰은 일방적으로 일본인 학생을 편들며 박준채를 구타하였다.

이에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인 최희선(崔熙善).김보섭(金普燮) 등 10여 명이 박준채와 합세하여 한·일학생간의 대결이 계속되었으나 더이상의 큰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11월 1일의 광주역사건으로 사태는 급전되었다. 당일 통학생도 아닌 일본인 중학 5학년 학생 4, 5명이 광주고등보통학교의 정세면(鄭世勉)에게 도전해 옴으로써 한·일학생간의 충돌 사건이 다시 일어났다.

양교의 교사들이 충돌 사건을 수습하기 위하여 현장에 왔으나 일본인 중학교 교사들은 중학생들을 오히려 선동하였으며, 교사끼리의 교섭도 일본인 중학교 교사들의 교만한 방언으로 옥신각신하다가 간신히 동시 퇴각을 결정하였다.

그 뒤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이러한 사태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 위해 학교로 돌아가 5학년 학생 노병주(盧秉柱)와 통학생 단장 채규호(蔡奎鎬) 등이 사실을 보고하고, 의견을 교환하였으나 묘안 없이 귀가하였다.

11월 2일 하학 열차에는 양교 교사와 경찰이 동행하였으며, 아침에는 전라남도 지사가 양교 교장에게 통학생들에 대한 엄중한 감독을 지시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제의 형식적이며 관료적 차원에서의 수습책이 광주 학생들의 굳은 민족 의식에 기조를 둔 대일항쟁정신을 퇴화시키거나 변질시킬 수는 없었다.

광주학생의 제1차 가두 투쟁

1929년 10월 30일 이후 고조되어 가던 광주고등보통학교를 비롯한 광주 학생들의 대일항쟁심은 '독서회중앙본부'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하나로 뭉쳐져 1929년 11월 3일 대항일 학생운동으로 전개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날은 몇 가지를 함께 의미하는 날이기도 하였다. 일본으로서는 일왕 메이지의 생일인 메이지절[明治節]이었고, 우리 민족으로서는 마침 음력 10월 3일로 개천절이었으며, 광주 학생들의 독서회원들에게는 전신인 성진회 창립 3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날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메이지절 기념식 후에 있을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지금까지의 산발적이고 소극적인 투쟁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실력행사에 들어가기로 작정하였다.

그런데 이날 오전 11시경 우편국 앞에서 신사 참배를 하고 돌아오던 16명의 일본인 중학생들과 광주고등보통학교의 최쌍현(崔雙鉉) 등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최쌍현이 광주중학교 학생의 단도에 찔려 코와 안면에 부상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소식을 전해들은 주변의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도주하는 일본인 학생들을 쫓아가 구타하자 일본인 중학생들은 광주역쪽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그들을 추격하여 계속 구타를 가했다. 그때 시찰 중인 광주경찰서원과 교사들이 제지를 하였지만, 이를 뿌리치고 역 구내로 도망친 광주중학 학생들을 개찰구를 뛰어넘어 닥치는 대로 때려 눕혔다.

급보를 전해들은 광주중학 기숙사생 백수십명은 목도(木刀)와 단도 등을 들고 유도교사를 선두로 '고보생타도'를 외치면서 충돌 현장으로 달려왔다. 또한, 광주고등보통학교 기숙사생들과 시내의 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농업학교 학생들도 이 소식을 듣고 역 앞으로 몰려왔다.

이들 양교 학생들은 중학교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성저리 십자로 부근의 작은 흙다리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였다. 그러나 학생 외의 당사자들의 교섭으로 동시 퇴각이 결정되었다. 그런데 이날 한·일학생 가두 투쟁으로 발생한 부상자는 광주중학교측은 16명, 광주고등보통학교측은 10명이었다.

학교로 돌아온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노병주의 사회로 집회를 열어 가두시위 투쟁을 결행하기로 하고 김병기(金炳基)·강윤석(康潤錫)·김용대(金容大)·김상환(金相奐) 등의 지휘로 목봉과 검도 도구 등으로 무장, 시가전을 각오하고 오후 1시 대오를 정비하여 300여명의 학생들이 교문을 박차고 나섰다.

추진력이 강한 김향남·김보섭·김상섭(金相燮)·강윤석·김무삼(金戊三) 등이 선두에 서고,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과 광주농업학교 학생 일부가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운동가를 고창하며 행진해 나갔다.

원래 광주 학생들의 가두 행동대는 충장로를 거쳐 광주역을 돌아 광주중학교를 습격할 계획이었으나, 경찰이 소방대·재향군인까지 동원하여 필사적으로 방어를 하였다. 때문에 진로를 바꾸어 일본인 소학교(지금의 중앙초등학교)를 돌아 광주중학교로 다시 진공해 들어가려고 했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그런데 가두 행동대가 충장로와 우체국을 거쳐 도청 옆의 상품진열관부근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 있던 광주사범학교 학생 100여 명의 호응을 받았다. 또, 메이지절 기념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 일부가 행동대에 가담하였다.

광주 학생들의 호응 속에 숫자가 불어난 가두 행동대는 도립병원 앞으로 나와 다시 광주중학교 습격을 시도했으나 경찰·소방대 등의 완강한 방어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러나 행동대는 계속 함성을 지르고 일전불사의 기세로 시위를 했으며, 연도의 군중은 이들의 결연한 항쟁을 지지, 성원하였고, 일본인 상인들은 폐점 상태에 들어갔다. 행동대는 가두에서 강력한 제지와 해산명령 등을 아랑곳하지 않고 금동을 지나 광주고등보통학교로 돌아왔다.

그런데 광주농업학교·광주사범학교 학생들은 교문에서 해산하고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강당에 집결하여 김향남·오쾌일(吳快一)·정명섭(丁明燮) 등이 차례로 등단하여 '부상자 문제'와 '금후의 연락 방법' 등을 결의하고 대오를 지어 귀가하였다.

그리고 이날 박상기(朴相琦)와 최상을(崔相乙) 등 30여명은 광주역에서 일본인 순사와 역원을 구타하였고, 일본인 중학생 12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1929년 11월 3일 전개된 광주 학생의 제1차 가두 투쟁은, 오전의 투쟁이 부분적 투쟁이라면 오후의 투쟁은 전체적인 투쟁이라 할 수 있다.

11월 3일 오후의 투쟁은 동맹 휴교 투쟁에서 실력 투쟁을 거쳐 집단적 가두 투쟁의 단계로 발전시킨 광주 학생들의 새로운 대일 항쟁의 장이 벌어진 것이다. 이를 기점으로 항일 학생운동은 중대 국면에 접어들었다.

광주학생의 제2차 가두 투쟁

11월 3일 밤 도당국은 광주중학교와 광주고등보통학교 양교에 대해 3일간 임시 휴업을 지시하고 학부형과 학생들에게 다각적인 선무책을 강구하도록 했으나 실효가 없었다. 이에 다시 3일간의 휴업을 더 연기하여 11월 11일부터 수업을 재개하기로 하고 일면탄압·일면선무의 양면책을 썼다.

한편, 11월 3일 가두 투쟁에서 39명의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과 1명의 광주농업학교 학생이 구속되었다. 일제 측의 이러한 탄압은 항일 학생들의 항쟁 심을 꺾기보다는 오히려 학생들이 보다 발전된 차원에서 대일 항쟁을 전개할 수 있도록 하였다.

즉, 광주의 학생 가두 투쟁을 민족 독립운동의 차원으로 확대하기 위하여 신간회지부·청년단체·사회단체가 혼연일체가 되어 광주 투쟁의 전국화에 힘썼고, 따라서 학생들이 이러한 민족적 요청을 전위적으로 제고시켜 나가는 행동력을 담당하기로 한 것이다.

11월 3일 사태 이후 광주 청년계에 영향력을 가졌던 장석천(張錫天)·장재성·강석원(姜錫元) 등은 시내 금동에 '학생투쟁지도본부'를 설치하고 광주 학생 투쟁을 항일 민족운동의 전국화라는 방향으로 확대, 발전시키기 위하여 각기 지도 업무를 분담하였다.

장석천은 광주 및 전국 학생의 행동 지도, 장재성은 광주 학생 행동지도, 국채진(鞠埰鎭)은 전라남도 내 지방 학생의 지도, 박오봉(朴五鳳)은 직공 및 노동 단체의 지도, 임종근(林鍾根)은 전라남도 내 공립보통학교 교사와의 연락, 강석원은 외래 동지와의 연락, 나승규(羅承奎)는 운동자금 조달을 각각 담당하였다.

이때부터 광주 학생운동은 학생이 항일 선도 세력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해 나가고, 민족 각 계층에서도 광범위한 참여가 있어 공동 투쟁의 단계에 돌입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계획으로 11월 12일 오전 10시를 기하여 제2차 시위는 조직적으로 과감히 전개되었다.

치밀한 준비 작업 끝에 격렬한 항일 격문이 요소 요소에 뿌려졌으며,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우체국에서 대인동으로 진출하여 함성을 지르며 여자고등보통학교의 참여를 촉구했다. 그러나 이미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교실 내 감금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참가하지 못하였다.

광주고등보통학교의 가두 행동대는 맹렬한 시위로 진격하여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형무소 앞에서 함성을 지르고 시위를 하였으며, 광주사범학교 앞에서는 사범학교 학생들의 참여를 촉구하였으나, 이들도 학교 당국에 의해 감금 상태에 있었다. 그때 광주농업학교 학생들이 달려와 가세함으로써 시위 항쟁은 최고조에 달하였다.

이때부터 경찰의 대대적인 탄압이 가해져 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농업학교의 가두 행동대 주류는 일제히 구속되어 도청 앞에 있는 무덕전(武德殿)에 수감되었다.

한편, 광주농업학교는 격문을 담당한 조길룡(曺吉龍)이 12일 아침에 등교하여 격문을 뿌리자 3학년의 김남철(金南哲)·김현수(金玄洙) 등의 주창으로 가두시위에 들어갔다.

학교장의 저지로 실패한 5학년을 제외한 전학년의 한국인 학생 140여명이 궐기하여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고 격문을 뿌리면서 광주사범학교로 밀려가 광주고등보통학교와 합류하였다.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도 12일 첫 시간 수업이 끝날 무렵 교문 밖에서 격문을 뿌리며 공동 투쟁을 촉구하는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에게 호응하여 일제히 교문을 뛰쳐나가려 했으나 경찰과 교직원의 적극적인 저지로 교정에서만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행동 저지를 돌파하지 못하자 다음날부터 동맹 휴교 상태에 들어갔고, 광주사범학교측은 교사들의 극력 제지로 시위 운동이 좌절되었다.

일제의 광주학생 탄압

이와 같은 광주 학생 대일 항쟁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제2차 투쟁 때부터 열기를 더해 갔다. 12일 당일 광주사범학교 앞에서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 190여명과 광주농업학교 학생 60여명이 검속되었다.

이날 검속된 학생과 11월 3일 직후 검속된 학생들은 성진회·독서회 그리고 광주학생관계 등으로 분류되어 공판에 회부되었다.

12일 항쟁 이후의 탄압 상을 보면 광주고등보통학교는 300여명을 무기정학 처분하고 임시 휴업에 들어갔으며, 광주농업학교에서도 항쟁에 참가한 학생 전원을 무기정학 처분하고 임시 휴학의 조처를 취하였다

그리고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도 장경례(張慶禮)·박봉순(朴奉旬) 등 17명을 취조 후 무기정학에 처했다. 이에 학생들이 동맹 휴교로 탄압에 항거하니 학교 당국에서는 임시 휴교를 선언하고 주모 여학생 64명을 무기 정학시켰다.

광주사범학교에서도 항일 학생으로 주목받은 37명을 일시 귀향시켰다가 1930년 3월 19일자로 1명을 추가한 38명을 이른바 항일 풍조의 예방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퇴학시키고 말았다.

1,000여 명이 되는 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농업학교·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광주사범학교 등 광주 시내 중학교 학생 대부분이 항쟁에 참여하였는데, 일제는 이 가운데 170여 명을 광주형무소에 투옥시켜 공판에 회부하였다. 광주고등보통학교의 검속 학생 총수는 12월 17일까지 247명이며, 그 중 55명은 구속, 192명은 석방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학부형들이 당국과 협의, '학생의 면학과 학부형의 보호 감독 철저' 등을 요지로 하는 굴욕적인 서약서를 제출한 뒤에 겨우 12월 10일 개교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학생들의 저항은 다른 형태로 나타났다.

1930년 1월 9일 2학기의 시험이 시작되자 4학년 이하 학생들 모두가 백지 동맹으로 항거하자 학교측은 이에 맞서 선동자로 지목된 17명을 또 퇴학 처분하였다. 14일에 일어 난 백지동맹에 가담한 244명의 학생을 3일간 자택에서 근신하도록 하고, 15일에는 10일의 백지동맹 주동자 48명을 퇴학 처분하였다.

이처럼 탄압과 저항이 교차되고 있는 가운데, 19일에는 2학년 학생 중 퇴학·정학자들이 주동이 되어 2학년생 전체의 자퇴 운동을 전개하려다 학교 당국에 포착되어 4명이 또 퇴학 처분되었다.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도 1930년 1월 10·11일 양일간 실시된 시험에서 백지 동맹이 기도되었는데, 15일에 백지 답안 제출자 37명에게 3일간 근신 명령을 내렸으며 주모자 2명은 퇴학 처분을 당하였다.

광주농업학교에서는 12월 17일까지 검거된 학생 80명을 석방했다가 다시 2명을 검속, 1월 19일에는 독서회와 관련되어 있다라는 명목으로 다시 16명을 검거하였다. 광주사범학교는 이미 38명이 퇴학 처분되고 24명이 검찰에 넘겨졌다.

광주학생운동의 전국적 확대

광주 학생의 항일 운동은 3·1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 항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광주 학생들의 대일민족항쟁은 어떤 특정 지역 학생이나 주민의 문제가 아니라 전국 학생과 전 민족의 당면 과제였다. 따라서, 학생이 항쟁 주체였으나 민족 각 계층의 성원과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광주 학생의 항일 의지는 목포·나주·함평 등으로 번졌고 드디어 서울 학생의 궐기를 촉구하였다. 뿐만 아니라, 전국으로 확대되어 전국의 학생은 최악의 조건들을 뚫고 지성의 결의와 행동력을 발휘함으로써 항일 학생운동 사상 불멸의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먼저 목포상업학교에서는 11월 3일 광주 학생 항쟁의 소식을 전해들은 최창호(崔昌鎬)·강영수(姜榮秀) 등 몇 사람이 주동이 되어 광주 학생과 연락 끝에 11월 19일 '피감금학생즉시탈환', '총독폭압정치 절대반대' 라는 기치 아래 시위를 전개하다 36명이 검속되었고 72명이 무기정학과 근신 등의 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27일에는 나주농업보습학교와 나주보통학교에서도 독자적으로 항일 시위가 있었다.

이와 같이 광주 학생의 항일 운동은 목포·나주를 비롯하여 곧 서울로 점화되었으며, 이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이에는 신간회(新幹會)의 영향이 컸는데, 중앙 본부의 간부이며 변호사인 김병로(金炳魯)와 허헌(許憲), 서기장 황상규(黃尙奎) 등이 광주학생항쟁운동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하여 광주에 다녀와서 진상을 보고하자, 한용운(韓龍雲)·조병옥(趙炳玉) 등이 중심이 되어 민중운동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12월 9일 서울 학생들의 궐기로 12월 13일 예정했던 신간회의 민중운동은 경찰의 탄압으로 실패하였다. 이때 조병옥·권동진(權東鎭)·한용운 등 신간회 회원 44명과 근우(槿友)·청총(靑總)·노총(勞總) 등의 관계자 47명이 검거되었다. 또한, 중앙청년동맹·조선학생과학연구회 등에서도 광주의 진상 조사를 하였다.

이와 같이 신간회와 청년단체·학생단체에서 광주 사태에 대하여 '진상 조사'라는 명목으로 적극적인 개입과 지원 운동을 전개하였다는 사실은 학생들의 대일 항쟁의 분위기가 성숙되어 가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드디어, 1929년 12월 2일 밤과 3일 새벽 사이에 경성제국대학을 비롯한 주요 공립·사립학교와 시내 요소에 광주 학생운동의 전국화를 위해 학생과 민중의 총궐기를 촉구하는 격렬한 격문이 살포되었다.

경찰은 종로경찰서에 수사 총본부를 설치하고 4일 정오까지 각 사상단체·청년단체·근우회의 간부와 학생 등 127명을 검거하고 조사에 나섰다. 5일 아침에도 40여명을 더 검거하였다.

그리고 12월 5일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에서는 '학우회의 자치', '조선 역사의 교수', '광주 학생에 대한 응원', '식민지 교육 반대' 등을 내용으로 하는 진정서를 제출하고 교내 시위에 들어갔으며, 7일에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가 교내 시위를 했다.

그 뒤 같은 취지로 경신·중동·보성·중앙·휘문·협성실업·숙명·근화·배재학교 등이, 11일에는 이화·여자상업·동덕·실천여학교(實踐女學校)·경성농업학교·법정학교·고등예비학교·전기학교·선린상업학교 한국인 학생 등이 광주 학생 지원을 위해 분기하자, 배화·진명·중앙보육·정신·간이상공 등의 각 학교는 휴학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1930년 1월 개학하자 항일 운동은 다시 시동되었다. 1월 15일 보성전문학교를 비롯한 고등보통학교·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등 서울 학생들은 광주학생 지원과 일제의 살인 정책을 규탄하고 성토·시위·동맹휴교 등을 단행하였다.

서울 학생의 항일 운동은 곧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참가한 학교 194개, 학생 수 5만 4,000여 명이었으며, 퇴학 처분자 582명, 무기정학 2,330명, 피검자 1,642명으로 이 운동은 3·1운동 이후 최대의 대일민족항쟁이었다.

의의와 평가

1928년 6월부터 동맹 휴교 형태로 가열된 광주 학생의 대일 항쟁은 날이 갈수록 단계적인 심화와 발전을 거듭하였다. 1928년대의 광주고등보통학교를 비롯한 동맹 휴교가 다음해의 민족 독립 항쟁의 길로 연결되지 않았더라면 1929년에서 1930년대의 전국적인 항일 학생 민족운동은 양상과 시기를 달리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광주의 항일 학생운동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역사적 의의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첫째, 광주 학생들은 당시 사회운동·청년운동을 포함한 민족 독립운동에 대해서 민감한 수용력을 보여주었고 그것을 체득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우리 민족사가 일제의 강점으로 식민지화되어 있을 때 민족 독립을 위한 역사적 과제를 모색하는 생동력 있는 지성을 추구해 나갔다.

둘째, 광주 지역에는 이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성진회가 창립되어 민족 독립의 성취를 위한 이론을 다양하게 연구하여 대일항쟁요원을 육성, 조직한 점이다. 셋째, 일제 강점 하의 한국 사회에서 누구든지 민족적 방향, 그리고 인간적 차원에 선 대일 감정이 있었다. 아무리 소박한 측면에서라도 일제는 침탈자요 수탈자이며, 폭력을 동원하는 압박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반일선상의 상식을 조직성과 집단력이 강한 학생층이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구체적으로 비판하고자 하였는데, 민족 차별과 식민지 교육 체제, 여기에 대한 '민족 독립의 필요성'은 부각되는 것이다.

광주 학생이 위와 같이 부각된 문제점들을 집약하여 가장 어렵고 불리한 상황 속에서 궐기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이상과 같이 민족의 저변에 깔린 당위를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광주 학생의 항쟁은 일본 제국주의의 타도를 통한 민족의 독립과 이 길을 위해 식민지 교육 체제를 반대하고, 민족 교육을 주창하며 궐기한 민족 독립 항쟁인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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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생민족운동사」(김대상·정세현, 『사상계』16-5∼12,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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