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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국방을 책임질 국민의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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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대한민국의 국방을 책임질 국민의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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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군은 정부수립과 동시에 미군정하의 조선경비대와 조선해안경비대를 모체로 하여 창설되었으며, 국가와 민족사의 정통성을 수호하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을 사명으로 한다.

대내적으로 국군은 <국군조직법>과 <향토예비군법>에 의거하여 육 · 해 · 공군 및 향토예비군으로 구성되며, 각 군은 부여된 고유의 임무를 지속적이고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요원을 모집하여 교육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무기체계를 발전시키고 있다. 한편 대외적으로 국제화시대를 맞아 세계의 평화유지군(PKO)에도 기여하고 있다.

(1) 창군 전사

광복이 되자 많은 한국인 사이에는 과거의 쓰라린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국가방위를 위해 힘을 길러야 하겠다는 열망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광복군을 비롯하여 중국과 일본 등지에서 군사경험을 쌓은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조국을 수호하기 위한 국방력 강화를 역설하면서 사설 군사단체 및 유사 군사단체 조직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1945년 11월경에는 사설 군사단체 및 유사 단체가 무려 60여 개가 난립함으로써, 출발 동기가 애국적이었다 하더라도 오히려 무질서하고 혼란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리하여 1946년 1월 20일 미군정 당국은 사설 군사단체 해체령을 내려 군사단체들의 활동을 정지시켰다. 그리고 미군정 당국은 국내 치안유지책으로서 일본 경찰기구를 이용하려 하였으나, 당시의 경찰력으로는 혼란한 한국 내 치안을 유지하기는 불가능하였다.

이미 미군정 장관 아놀드는 1945년 11월 13일 군정법령 제28호를 공포, 군정청 내 국방사령부를 설치하고 초대 부장에 시크(Schik,L.E.)를 임명하였다. 경찰관계를 다루는 경무국과 육군부와 해군부로 구성된 군무국으로 편성된 국방사령부는 장차 창설될 한국군의 조직과 편성 등의 기본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이 군대 창설 계획은 동경의 맥아더 장군의 의견에 따라 경찰 창설 방안으로 바뀌게 되었고, 그 대신 1945년 12월 5일 미군정당국은 국방경비대 기간 요원만을 양성할 군사영어학교(軍事英語學校)를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냉천동에 설치하였다.

군사영어학교는 1946년 4월 30일 폐교될 때까지 4개월 동안 110명의 장교를 임관 배출하였다. 그리고 그 기능은 남조선 국방경비 사관학교로 계승되었다.

(2) 육군의 모체는 경기도 양주군 태릉(현재 서울특별시 도봉구)에서 창설된 남조선국방경비대(南朝鮮國防警備隊)이다. 국방경비대는 6백 명으로 제1연대 제1대대를 편성, 1946년 1월 15일 입대식을 거행하였다. 한편, 1946년 2월 7일 국방경비대사령부가 설치되었고, 1946년 4월까지 8개 연대를 창설하였다.

같은 해 3월 29일에는 군정법령 제63호로 국방사령부 산하의 경무국을 독립시키고, 이어 군정법령 제64호에 의거, 국방사령부를 국방부로, 남조선국방경비대는 조선경비대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어 그 해 5월 1일 태릉에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를 세워 장교양성의 바탕을 마련하였다.

한편, 국방부는 1946년 5월 서울에서 속개된 미 · 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측의 이름 시비로 국방의 개념을 ‘국내 치안’으로 한정시키고, 이름을 국내경비부로 바꾸었다.

국방경비대는 그 해 11월 16일부터 1948년 5월까지 8개 연대를 더 창설, 총 16개 연대로 늘어남에 따라 1947년 12월 12일 각각 3개 연대를 지휘할 여단(旅團)을 창설, 서울에 제1여단, 부산에 제2여단, 대전에 제3여단을 배치하고, 또다시 1948년 4월 충주에 제4여단, 광주에 제5여단, 서울에 제7여단을 창설하였다. 조선경비대는 정부 수립에 따라 1948년 9월 5일 대한민국 육군으로 개편되었다.

한편, 여단의 증설과정 속에서 미군정 당국은 지나치게 불편부당주의를 취하였기 때문에 군내에 공산주의 세력을 발붙이게 하는 빌미를 주어 1948년 4월 3일의 제주도 사건에 이어 1948년 10월 19일 여수 · 순천 사건이 발발하기에 이르렀으나, 국방경비대는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진압작전에 참가하는 한편, 공산주의자들을 군 내에서 쫓아냄으로써 민주 국군의 바탕을 다지게 되었다.

(3) 해 군

광복 직후 제독 손원일(孫元一)을 중심으로 조직된 해사대(1945.8.21.)가 1945년 11월 11일 해군의 모체인 해방병단으로 확대되면서 보유하고 있던 100톤급 2척과 40톤급 1척, 디젤선 · 증기선 등으로 소규모의 해안경비를 시작하였다.

1946년 1월 14일 미군정 법령 제42호로 1월 18일에 국방사령부로 편입되었다. 1946년 6월 15일 군정 법령 제86호에 의거 해방병단은 조선해안경비대로 개편됨과 동시에 전국 주요 항구에 기지를 신설하고 총사령부를 서울로 이전하였다.

그리하여 체제정비와 기지창설에 주력하면서 해양 지식을 익히는 한편, 항해와 기관 등의 기술 향상을 꾀하여 2월 7일에는 300톤급의 철선인 충무공정(忠武公艇, 최고 시속 13노트)을 자체 기술로 건조하였다.

같은 해 9월과 10월 상륙정 · 소해정을 처음으로 도입한 데 이어, 상륙정 · 소해정 · 유조정 등을 추가로 도입하고 해상전력을 강화하여 1947년 8월 미 제7함대로부터 38선 이남의 해안경비 임무를 인수하였다.

1948년 8월 정부 수립에 따라 조선해안경비대는 9월 1일 국군에 편입되어 9월 5일 대한민국 해군으로 정식 발족, 해안경비와 해상수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기지를 신설하는 등 해상 경비에 만전을 기하면서, 1949년 1월, 해사대학을 해군사관학교로 개칭, 운용하였다.

1949년 4월 15일 여수 · 순천 사건의 교훈과 삼면이 바다인 우리 나라의 입지적 여건을 참작하여 수 · 륙 양면작전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됨에 따라 초대 해병대사령관인 신현준(申鉉俊)을 주축으로 하여 해군에서 차출한 약 4백여 명의 병력과 장비로 경상남도 진해 덕산비행장에서 해병대가 창설되었다.

(4) 공 군

광복 전부터 외국의 항공계에서 종사하던 인사들이 귀국하여 1946년 8월 10일 민간단체인 한국항공건설협회를 조직하고 공군 창설을 목표로 노력한 결과, 1948년 5월 15일 육군항공부대의 창설을 보게 되었다.

육군항공부대는 1948년 9월 13일 L · 4 연습기 10대를 미군에서 인수하여 우리 나라 최초로 여의도기지에서 비행훈련을 시작하고, 9월 15일에는 한국인이 조종하는 역사적인 전시비행(展示飛行)을 서울 상공에서 실시하였다. 이어 10월 다시 미군에게서 L · 5 연습기 10대를 양도받아 공군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1949년 1월 14일 항공 장교 양성을 위한 육군항공사관학교가 김포에 창설되었다. 육군에 예속되어 1개의 항공군으로서 독립의 기반을 닦은 공군은 1949년 10월 1일 1,600명의 병력과 20대의 L형 항공기를 가지고 육군에서 분리, 독립된 1군으로서 육군 · 해군과 함께 3군으로 정립된 체제에서 조국의 영공을 방위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육군에서 독립한 공군은 육군항공사관학교를 공군사관학교로, 비행부대는 공군비행단으로, 항공기지부대는 항공사령부로, 여자항공교육대는 공군여자항공대로, 항공사령부 의무처는 공군병원으로 개편하여 기구를 정비하였다.

(1) 육 군

분단의 어려운 상황에서 창설된 육군은 북한 공산집단의 무력침략에 대응하여 작전 및 전투를 수행하면서 성장해 나갔다.

육군은 북한이 6 · 25전쟁 전까지 10여 차례에 걸쳐서 후방에 침투시킨 약 2, 400명의 무장공비를 소탕하는 한편, 제1 · 2차 개성전투, 배천전투 등 38선 전역에 걸쳐 도발하는 적을 격퇴했다.

그러나 북한공산군의 6 · 25전쟁 당시 국군의 군사력은 무기뿐 아니라 전투훈련 수준에서도 각개 전투훈련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보전포협동훈련까지 실시한 북한군의 전투력에 비하여 열세에 놓여 있었다.

6 · 25전쟁이 발발하자 산(汶山) 방면에서 방어에 임하고 있던 제1사단과 의정부 방면을 방어하고 있던 제7사단 장병들은 대인지뢰 · 수류탄 · 폭약 등을 안고 적 전차를 육탄공격으로 파괴하였으며, 소총 실탄마저 떨어진 상태에서 결사적으로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려 하였다.

춘천을 중심으로 중동부 산악지대를 방어하고 있던 제6사단 장병 역시 수류탄과 화염병을 가지고 적의 자주포를 공격, 파괴함으로써 북한군의 진격을 지연시켰다. 미약한 전투력에도 불구하고 일부 부대의 이 같은 용전은 북한군의 진격을 지연시킴으로써 개전 초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방어선 구축을 가능하게 하였다.

북한군 남침 이래 최초로 아군이 전선을 정리할 수 있었던 방어선은 금강선(1950년 7월 10일을 전후하여 형성된 단양 · 조치원 · 강경선)으로서, 이 선에서 사단급 부대의 전투지경선(戰鬪地境線)이 설치되었다.

유엔군이 전략적 방어를 위해 낙동강으로 철수할 때의 전선 엄호부대는 미 제1기갑사단과 미 제25보병사단이었다. 1950년 9월 낙동강 방어선에서 유엔군의 반격과 동시에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이루어졌다.

인천상륙작전은 유엔군이 낙동강 최후 교두보를 넘어 진격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 육군 2개 군단과 미 육군 2개 군단 등 4개 군단으로 구성된 제8군은 뒤쳐진 적을 소탕하면서 오산에서 미 제10군단과 연결작전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 진격하였다. 이 기간 중 무려 1만 2천 명 이상의 포로를 생포하였으며, 3만 명의 북한군은 풍비박산이 되었다.

(2) 해군 · 해병대

6 · 25전쟁 당시 해군은 구잠함 1척을 비롯하여 구식 소해정 29척, 상륙정 6척, 유조정 1척 등 도합 37척의 함정과 6천여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병력과 장비면에서 북한군의 해군력보다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해 나갔다.

1950년 6월 25일 소해정 가평호는 동해안 옥계지방에 상륙하는 적함과 교전하여 상륙정 1척을 격침시키고 기동선 1척을 나포하였으며, 이어 국민의 성금으로 구입한 구잠함 백두산호가 대마도(對馬島) 근해에서 중무장한 6백여 명의 상륙군과 탄약 · 식량 등을 가득 실은 1,000톤급의 적 수송선을 야간 추적 끝에 6월 26일 0시 대마도와 부산 중간 해상에서 격침시켰다.

서해상에서는 강화도 부근 일대의 해안을 엄중히 봉쇄하는 한편, 6월 26일 22시 30분 옹진과 부포에 고립된 육군 제17연대 병력 1,050명과 군수물자를 인천으로 철수시키고, 상륙하려고 강화도에 집결한 적을 함포사격으로 격퇴했다. 7월 3일 군수품을 수송중인 40톤급의 적선 2척을 격침시키는 등 개전 초기부터 북한군의 해군력을 제압하였다.

또한, 해군은 육상 근무 장병만으로 육전대를 편성하여 해상함정과 합동으로 후방 주요 보급로를 확보하고 각종 지상작전을 전개하는 한편, 전쟁 이후 후퇴를 거듭하던 국군이 처음으로 대승리를 거둔 포항탈환작전에 참전하여 활약하였다.

인천상륙작전 후 지상군이 북진함에 따라 원산과 진남포에 해군 전진기지를 설치하여 지상군에 대한 보급을 지원하고 동 · 서 해안을 엄중히 봉쇄하는 한편, 동해 영흥만 부근과 서해 연백 연안의 대 · 소 도서를 확보하여 적의 해안포대에 맹공을 가하고 기뢰를 부설하여 적의 해상활동을 분쇄하였다.

해병대는 1950년 8월 17일 우리 해군의 단독 지원 아래 통영 상륙작전을 기습적으로 감행하여 1천여 명의 병력으로 반격을 가해 오는 북한군을 궤멸시켜, ‘귀신 잡는 해병’의 신화를 창조하였다.

또한 1개 연대 규모의 적병력을 격멸시켜 부대 전 장병이 1계급 특진하는 영예를 누린 진동리전투와 인천상륙작전 · 수도서울 탈환작전 · 도솔산전투 및 함경북도 명천 앞바다에 있는 양도를 포함한 전략도서 확보작전, 김일성고지와 모택동고지 탈환작전, 수도 서울을 방어한 서부전선의 장단지구 전투 등에서 상승해병(常勝海兵)의 용맹을 과시하였다.

해병대는 6 · 25전쟁 중 적 사살 2만 2070명, 적 포로 1,739명, 야포 · 전차를 비롯한 대 · 소화기와 장비 5,055점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을 뿐만 아니라, 인천상륙작전에 이은 서울탈환작전에서 해병 소위인 박정모 등이 중앙청에 태극기를 제일 먼저 게양함으로써 무적 해병의 신화를 우리 전사에 길이 남겼다.

(3) 공 군

공군은 여수 · 순천 사건의 작전경험과 북한군의 공군력 증강에 따른 전폭기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정부 당국에 항공기의 필요성을 건의하였다. 이에 당국이 미국에 군사원조를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공군은 공군 전력의 강화를 전 국민에게 호소하고 항공기헌납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여, 국민들의 정성어린 헌금으로 1950년 3월, T · 6 고급 연습기 10대를 캐나다에서 구입하였으며, 그 해 5월 15일에는 여의도기지에서 국민의 애국심을 상징하는 T · 6 비행기를 ‘건국기’라고 이름짓는 명명식을 가졌다.

그러나 당시 공군이 보유한 비행기는 미군에서 인수한 무장 없는 경비행기 12대(L · 4 8대, L · 5 4대)와 국민의 정성으로 헌납된 건국기 10대 등 모두 22대뿐이었다. 이는 대전 · 대구 · 군산 · 제주도의 각 비행장에 기지부대를 주둔시켜 겨우 공비토벌작전에만 협력할 정도의 장비로 아직 전투기는 1대도 보유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6 · 25전쟁을 맞은 공군의 무장은 부평 육군병기창에서 시험제작한 15㎏ 폭탄 274개와 서울시경에서 인수한 수류탄 5백여 개뿐이었다.

그러나 비행부대는 T · 6 건국기에 폭탄과 수류탄을 싣고 출격, 관측사가 목측(目測:눈으로 측정함)하여 투하하는 등의 방법으로 적의 전차와 수송차량, 그리고 북한군의 지상군에 타격을 주면서 남침을 필사적으로 저지하였다.

그러나 3일 만에 폭탄이 모두 소모됨으로써 1950년 7월 2일 F­51 무스탕전폭기 10대를 미 공군에서 인수할 때까지 2개월 동안은 출격하지 못하였다.

당시 보유하고 있던 L­4 · L­5 · T­6로는 적 탱크 파괴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 미 공군에서 무스탕 10대를 인수받은 이근석(당시 대령) 외 9명의 조종사들은 단 하루 동안 훈련을 받고 곧바로 공군사상 최초로 4기편대가 출격하여 시흥 상공에서 적의 탱크와 수송차량 및 보급물자 등을 격파하는 한편, 남하하는 북한군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그 뒤 지리산공비토벌, 강릉지구 등 여러 전선에 본격적으로 근접 지원작전 및 적 후방 차단작전을 수행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이를 전사에 남게 하였다.

한편,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뒤 동해안에서는 도망하는 적을 추격하면서 파죽지세로 북진하는 가운데 1950년 10월 1일 이종찬(준장, 뒤에 중장 및 참모총장까지 승진함)이 지휘하는 육군 제3사단이 역사적으로 38선을 돌파함으로써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제정하게 되었다.

아군은 미 제1군단을 주공병력으로 하여 서부로, 한국 육군 제2군단을 중부로, 한국 육군 제1군단을 동해안으로 진격시키고, 미 제10군단을 원산에 상륙시켜 1950년 10월 10일 원산을 탈환하였고, 10월 19일에는 평양을 탈환하였으며, 10월 24일에는 청천강을 건너고, 10월 26일에는 초산에 도달하여, 10월 30일에는 혜산진을 점령, 11월 16일에는 장진호에 도달함으로써 북한군은 파멸을 맞게 될 처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국군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공군은 1950년 10월∼11월 사이에 9개 군단, 1951년 1월∼6월 사이에 10개 군단, 1952년∼1953년까지 7개 군단 등 세 차례에 걸쳐 투입되었다. 그들은 총 26개 군단 78개 사단으로 인해전술을 전개하여, 1951년 1월 오산∼삼척선까지 아군이 후퇴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재반격을 개시, 다시 38선을 돌파할 무렵 확대전을 두려워한 영국과 미국이 정전론(停戰論)을 제기하여 전쟁을 정치적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이러한 정세에서 1951년 말경부터 휴전 때까지 소강상태가 계속되었고, 휴전이 임박해서는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기 위한 전략적인 공격이 치열하게 전개되었지만 결국 1953년 7월 27일 유엔군사령관과 북한군 및 중공군 사령관 사이에 휴전협정이 체결됨으로써 동족상잔의 비극은 해결하지 못한 채 장기화되기에 이르렀다.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 1개월 동안이나 계속된 동족상잔의 비극을 일컬어 세계 여론은 제한전쟁이라고 평가할지라도 우리에게는 분명히 참담한 전면전쟁이었다. 아군의 인명 피해는 국군이 30만 1865명, 미군은 11만 4167명, 기타 유엔군이 9,800명으로 총 42만 5832명의 피해를 내었으며, 민간인은 106만 968명의 인명 피해와 피난민 277만 명, 전재민 330만 명을 내었다.

(4) 월남파병

국군은 성장과정에서 월남파병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월남파병은 국가정책면에서나 군사면에서 큰 의의를 갖고 있다.

국군이 월남전에 참전한 목적은, 첫째 아시아의 평화와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집단 안전보장의 도의적 책임을 다하고, 둘째 자유월남에 대한 공산침략은 곧 한국의 안전에도 중대한 위협이므로 우리가 월남을 지원하는 것은 곧 직접적인 국가방위가 되고, 셋째 6 · 25전쟁 때 16개 나라의 자유우방의 지원을 받아 공산군을 격퇴할 수 있었던 만큼 우리로서 우리의 한 우방이 침략군의 희생이 되는 것을 좌시해서는 안 된다는 정의감과 단호한 결의에 있었다.

파병은 육군 중령 이형수를 병원장으로 제1이동외과병원(130명) 및 태권도교관단(10명)이 1964년 9월 11일 부산항에서 출국, 9월 22일 월남 사이공에 도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뒤 이어 육군준장 조문환이 지휘하는 1개 공병대대, 1개 경비대대, 1개 수송중대 및 1개 해병 · 공병 중대로 구성된 비둘기부대가 1965년 3월 10일 인천항을 떠나 3월 16일 월남 사이공에 도착, 다얀으로 이동하여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정부는 1965년 6월 14일 월남공화국 수상에게서 한국군 1개 전투사단 지원요청서를 접수하고, 1965년 6월 23일 한국군 1개 전투사단 파월에 관한 대미 합의각서를 수교하였다.

국방부 일반명령(육) 제30호에 따라 1965년 8월 29일 맹호부대는 육군소장 채명신(蔡命新)을 지휘관으로 파월부대 편성에 착수, 4주 동안의 국내 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국방부 일반명령 제31호에 따라 1965년 9월 1일 맹호부대 예하에 육군준장 이범준을 지휘관으로 하여 군수지원사령부인 십자성부대가 창설되었다.

1965년 10월 12일 당시 여의도공항에서 대통령 박정희를 비롯한 3부 요인과 한 · 미 고위장성, 외교사절 및 20만 시민이 참석한 가운데 맹호부대 환송식을 가졌다. 또한, 주월 한국군사령부가 대통령령 제2226호에 따라 1965년 9월 25일 창설, 초대 사령관에는 당시 맹호부대장인 채명신이 겸임하게 되었다.

1965년 10월 16일 맹호부대 본대는 부산항에서 출국, 그 해 10월 22일 퀴논항에 도착한 다음, 11월 3일 미 제1공수사단으로부터 전술 책임지역을 인수했으며, 11월 6일 퀴논공설운동장에서 월남국민의 환영 국민대회가 거행되었다.

국방부 일반명령 제22호에 따라 1966년 6월 1일 월남증파 전투사단으로 백마부대를 결정, 육군소장 이소동을 지휘관으로 부대 증편 및 파월을 위한 4주간의 교육에 들어갔다.

백마부대 지휘부가 1966년 9월 22일 여의도공항에서 냐짱으로 공중 이동, 9월 23일 지휘소를 개소하고 작전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특히, 주월 한국군이 담당한 작전지역은 월남 중부 동해안지역으로서 정치 · 군사 · 경제면에서 볼 때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

이 지역은 해안선을 따라 폭 50㎞에 길이는 최남단 백마부대 담당지역부터 맹호부대 담당의 북단까지 총 372㎞에 달하는 드넓은 지역이었다. 이 넓은 지역에서 불과 4만 8천여 명의 병력으로 전선 없는 전장을 누비며 공산게릴라의 침투를 막는 대전과를 거두었다.

한편, 해군은 백구부대와 청룡부대를 파월하였으며, 개선하여 귀국할 때까지 백구부대는 월남의 1천여 마일에 달하는 해안선의 크고 작은 항구와 부산에서 월남까지 총 462회의 수송작전을 전개하여 56만 2천 톤의 군수물자를 수송하였다.

또한, 청룡부대는 여단급작전 55회, 대대급작전 106회, 소부대급작전 14만 4173회 등 수많은 작전을 통해 대전과를 올렸다. ‘짜빈동작전’과 ‘테로이매복작전’은 청룡부대의 유명한 작전 중의 하나였다.

주월 한국군은 1965년부터 1973년까지 8년 동안에 걸쳐 대대급 이상 작전 1천1백 회를 비롯하여 소부대작전 57만여 회 등을 통해 많은 전과를 올렸다. 또한, 대민지원사업도 활발히 전개하여 3천5백여 채의 건물과 1천7백㎞의 도로를 신설했으며, 6백만 주민과 친교를 맺었다.

1972년 1월 파리에서 휴전협정이 조인되기 직전, 한국과 월남 수뇌의 구두합의에 따라 1단계로 1971년 12월 4일부터 1972년 4월 1일까지 7개 대대를 철수했으며, 1973년 1월 28일 휴전협정이 발효되자 2월 3일부터 3월 23일까지 11개 대대 및 후발대로 나누어 개선, 귀국하였다. 월남 참전 8년간 총 31만 2853명의 병력이 파월되어 전투경험을 쌓았으며, 주월 한국군의 막강함을 세계만방에 과시하였다.

(1) 향토예비군의 창설

북한은 공산통일의 하나로 1964년부터 무장공비의 침투를 증가시켜 왔다. 1967년에는 4대 군사노선이 어느 정도 성취되자 본격적인 유격전을 시도하다가, 1968년 1월 21일에는 청와대를 향하여 무장공비를 남파시키는 등 그 해악이 극에 달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68년 2월 7일 경전선 개통식 인사말을 통하여 대통령 박정희는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건설하는’ 향토방위 태세의 정비를 위한 250만 재향군인의 무장을 천명하였다. 이에 따라 4월 1일 대전공설운동장에서 예비군이 창설되어, 육해공군과 아울러 범국민적 향토방위조직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향토예비군은 창설 이후 북한의 무장공비침투를 소탕하는 많은 전투에 참가, 큰 전과를 올려 왔다. 1968년 6월 강원도 고성에 침투한 무장공비 소탕작전에 참가한 이래, 11월에는 울진 · 삼척 지역에 침투한 공비소탕전에서 작전부대가 107명을 사살하고 7명을 생포하는 것을 측면 지원하였다.

그 뒤에도 1969년 3월 강원도 주문진지구작전, 12월 경상북도 영일군 모포리 무장공비 소탕작전, 1970년 6월 경기도 부천 영흥도 무장공비 소탕작전, 1973년 3월 제주도 및 전라남도 완도군 금당도전투 등 크고 작은 3백여 회의 전투에 참가하면서 내 고장을 지키려는 전투의지를 과시하였다.

(2) 현대화추진 휴전협정 이후

북한은 휴전협정을 위반하고 병력증강과 신무기 도입, 그리고 북한 각지에 비행장 건설을 추진하는 한편, 제반 군수공장을 확장하는 등 전력증강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한국 내의 미군 철수를 강력히 요구함으로써 재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

이와 같은 정세에서 국군은 전력을 강화하고, 전력을 유효 적절히 발휘하기 위해 종래의 기구 · 편제의 모순 및 비능률적인 제도를 과감히 시정하는 등 효율적인 지휘체계를 확립하였다. 아울러 날로 변모하는 현대전 양상에 대비하여 장비의 현대화를 추진하고 부대의 정비, 통폐합, 재배치 및 신무기 도입 등을 신중히 논의해 왔다.

더욱이 1972년 미국의 아시아지역에 대한 ‘닉슨독트린(Nixon Doctrine)’의 심화현상과 더불어 주한 미 지상군의 철수 대두 및 군사원조의 삭감 추세 등과 관련하여 자주국방태세의 확립문제가 지상과제로 부각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육군은 새로운 차원에서 본연의 사명감을 더욱 다지며, 첫째 현대전에 적합한 신예장비의 도입 및 방위산업 육성, 둘째 기술개발로 각종 장비의 개수 및 보강, 셋째 경제적인 군 운영을 위한 기구의 합리적인 조정 및 군수 동원체제의 확립, 넷째 실전 위주의 교육훈련을 통한 전술 · 전기의 연마로 북한군을 막아내겠다는 의지와 능력을 갖도록 하였다.

또한, 6 · 25전쟁의 교훈을 되살려 기갑전력의 강화와 더불어 백발백중의 명중률을 자랑하는 유도무기로 대전차방어력을 강화했으며, 적의 특수전에 대비한 특수전 전력도 강화했다.

특히, 전선에서 불과 25마일 거리에 있는 수도권을 사수하기 위해 각종 경보망과 물샐틈없는 방공망의 구축 등, 철저한 대비로 즉각 대응태세를 갖추어 놓고 있다.

해군은 1955년 3월 유엔군에게서 해상작전 지휘권을 인수해서 한국 전 해역을 독자적으로 경비하게 되면서 한편으론 최신 장비 도입, 한편으론 교육훈련 등으로 해상전력을 강화하고 있다. 1963년에는 오랜 숙원이던 구축함을 도입하여 현대 해군으로 첫발을 내디딤과 동시에 성장, 발전의 기틀을 갖추었다.

월남전에는 백구부대와 청룡부대를 파월, 수많은 작전의 전훈을 통하여 전술, 전기를 개발하였다. 또한, 해상 전력 증강을 꾸준히 추진해온 결과, 신예 전투구축함을 주축으로 국산 전투고속정을 위시하여 대잠초계 항공기와 함재 헬기, 그리고 현대전의 총아라고 불리는 각종 유도탄을 보유하는 등 최신 해상무기 체계를 갖추는 한편, 정예화된 상륙전부대를 보유하게 되었다.

1975년 8월 남해해상에서 두 차례에 걸쳐 실시한 ‘밀물 1호’ 및 ‘밀물 2호’작전에서 국민의 방위성금으로 만든 최신예 고속전투함으로 이루어진 함대함미사일 시험발사에 성공함으로써 미사일시대로 접어든 해군은, 1980년 4월 우리 나라 실정에 맞게 개발, 건조된 국산 구축함 ‘울산함’과 같은 해 5월 미국에서 도입한 최신예 구축함 ‘경기함’을 실전에 배치함으로써 완벽한 해상력을 갖추게 되었다.

1984년에는 그 동안 축적된 기술을 바탕으로 한국 해역의 특성에 맞는 개선형 초계전투함과 한국형 구축함 및 잠수함을 진수시키고, 대량생산 체제를 갖춤으로써 우리의 자주국방 의지와 능력을 국내외에 과시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대잠훈련 · 상륙전훈련 · 해상기동훈련 · 대함대공사격훈련 · 소해훈련 및 구조훈련 등을 비롯한 각종 해상훈련과 교육훈련을 연중무휴로 실시하고 있으며, 자유 우방 해군과의 각종 연합훈련을 수시로 실시하여 우방국과의 유대강화는 물론 멸공의 굳건한 결속을 다지고 있다.

특히, 1976년 이래 1994년까지 매년 실시되었던 팀스피리트(Team Spirit) 훈련을 통하여 미 해군과 긴밀한 협조체제를 강화하여 동북아시아의 평화유지는 물론 일단 유사시 북한공산군의 해상도발을 억제할 수 있는 완벽한 해상전력을 다져오고 있다.

공군은 휴전협정 이후 공군력을 증강한 북한의 공군에 대비하기 위하여 항공기의 제트화(turbo · jet化)를 비롯한 전술부대의 창설과 더불어 방공 · 통신 · 정비 · 보급 등의 각 분야를 강화하였다.

1955년 8월 27일 F­86F 14대와 T­33기 9대를 미 공군에서 인수하고, 1956년 68대의 F­86을 추가 인수함으로써 프로펠러시대에서 제트시대로 도약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 해 4월 29일에는 한미 군사회담에서의 합의에 따라 C­46 수송기를 도입하여, 1955년과 1956년 사이에 6 · 25전쟁의 쓰라림을 씻고 기종을 완전히 전환하는 한편, 미 공군과 합동작전훈련을 실시하여 전술 · 전기를 연마하는 데 박차를 가함으로써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965년 F­5전투기를 도입하게 되었으며 F­86 전투기를 점차적으로 F­5로 기종을 전환하여 비행훈련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조국 영공방위의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

1968년 1 · 21사태와 푸에블로호납북사건으로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되자 F­4기 도입문제가 제기되고, 그 해 8월에 드디어 인수함으로써 미국 · 영국 · 이란에 이어 세계에서 네번째의 팬텀기 보유국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로써 북한 공군의 어떠한 공중기습도 즉각 저지할 수 있는 공중 전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후 우리 손으로 생산한 국산전투기 F­5F ‘제공호’가 생산단계에 접어들어 독자적인 작전임무를 수행하는 데 충분한 전력을 확보하게 됨으로써 명실상부한 자주적 영공방위시대에 돌입하게 되었다.

또한, 최신예 고성능전투기 F­16 ‘필승보라매’를 도입 보유하면서 북한공산군의 MIG­23 · AN­2,500MD헬기 등에 대비한 충분한 전력을 보유하게 되었으며, 동 · 서해의 러시아함대 및 정찰기에 대한 우리 영공방위가 굳건해졌고, 북한군의 침략을 막을 수 있는 대비태세와 능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더불어 이러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세계평화를 위하여 기여하고자 하는 노력도 경주하고 있다.

우리 국군은 세계평화를 위해 1991년 걸프전과 1993년 소말리아, 이듬해 서부 사하라, 1995년에는 앙골라에 비전투군사력을 동원하여 그 의지를 실현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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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발전사』 제1집(해병대사령부,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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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사』 1∼3(국방부, 1984∼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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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표』(국방군사연구소, 1994)
『국방정책변천사1945∼1994』(국방군사연구소, 1995)
『월남파병과 국가발전』(국방군사연구소, 1996)
『한국군걸프전파병사』(합동참모본부, 1997)
『건군50년사』(국방군사연구소, 1998)
집필자
윤화헌|곽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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