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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장(國立劇場)

연극단체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에 있는 국립(國立) 극장(劇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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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장
이칭
중앙국립극장, 국립중앙극장
분야
연극
유형
단체
성격
극장
설립시기
1950년 4월 29일
설립자
유치진
시대
현대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에 있는 국립(國立) 극장(劇場).
키워드
영역닫기영역열기설립목적
국립극장은 1950년에 민족예술의 발전을 위해 국가에서 설립한 극장으로 정식 명칭은 중앙국립극장(中央國立劇場)이다. 이 극장은 순수 무대예술만을 사업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자체 공연, 대관사업, 시상제도의 실시, 연극 연기자와 전통예술 계승자 양성, 무대예술에 관한 조사·연구, 무대예술의 보급 선전과 국제 문화 교류 사업 등을 주된 목표로 하고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연원 및 변천
1946년부터 국립극장의 설치 문제가 논의되었으나, 국립극장 설립운동이 활기를 띤 것은 1948년 정부수립 이후였다. 1949년 10월에 문교부에서 국립극장운영위원회를 조직하고 초대 국립극장장에 유치진(柳致眞)을 임명하였고, 같은 해 말에 1,997석의 구 부민관(府民館)주 01) 건물을 국립극장으로 확정하였다.
1950년 1월에는 전속극단으로 신극협의회(新劇協議會)를 창립하는 한편, 기성극단이었던 극협(劇協)을 끌어들여 두 개의 전속극단을 두었다. 같은 해 4월 29일에 개관식을 갖고, 개관공연으로 유치진 작·허석(許碩) 연출「원술랑」을 무대에 올렸다. 이어서 교향악단·무용단·오페라단·국극단까지 전속으로 두어 국립극장은 명실상부한 공연예술의 요람이 되었다. 그러나 제3회 공연 준비 중에 6·25전쟁이 발발하여 부산으로 피난하였다.
1953년 초에 서항석(徐恒錫)이 제2대 극장장으로 임명되면서 대구의 문화극장(文化劇場)이 국립극장으로 지정되었고, 2월 13일 윤백남(尹白南) 작·서항석 연출「야화(夜花)」로 재개관공연을 올렸다. 그러나 전속극단 신협이 국립극장과 무관하게 독자적 활동을 펼쳤기 때문에 기획공연은 부실할 수밖에 없었고, 재정도 부족해서 자체 공연도 갖지 못하고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정부의 적은 재정 지원을 공연 수익으로 메우기 위해 상업주의를 추구하다 보니 흥행에만 치중했고, 국립극장은 대구지역에서 수익을 올리지도 못한 채 대중들에게 외면당했다.
1957년 6월에 서울로 환도한 국립극장은 명동에 있는 대지 505평, 건평 749평, 객석 820석의 3층 건물로 된 시공관(市公館)을 국립극장으로 지정하였다. 이들은 ‘민족예술의 수립과 창조’라는 목표를 세우고 신협을 다시 전속극단으로 영입하였고, 연기인 양성소를 설치하여 신인 배우를 길러냈다. 그러나 1년여 만인 1958년에 유치진과 서항석의 갈등으로 인해 유치진을 따르던 신협 단원들이 대거 탈퇴하였고, 국산영화 붐이 일어나 관객들이 급감하면서 국립극장은 적자 운영에 시달린다. 이에 국립극장 해체론까지 거론됐으나, 전속극단 체제를 내세워 1959년 기존의 신협을 재영입하고, 새로이 박진(朴珍)을 단장으로 하는 민극(民劇)이라는 전속극단을 둠으로서 2개의 전속극단 체제로 운영하였다.
그 뒤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이 잇따라 일어나면서 문교부 소관의 국립극장이 공보부로 이관되었고, 설치법도 크게 바뀌었다. 극장건물도 대폭 수리되었고, 1962년에는 국립극장이 새로 바뀐 규정에 따라 기존의 전속극단을 해촉(解囑)하고 새로이 박진을 단장으로 하는 국립극단을 정식 발족시키면서 신협은 국립극장과 완전히 관계를 끊게 되었다.
국립극단 발족에 이어 국립국극단(國立國劇團)·국립오페라단·국립무용단이 발족되어 그 해 3월 재개관 기념 예술제를 열었다. 정부는 부대사업의 실천화와 국립극단의 질적 향상, 연극의 5개년 발전 계획, 부설 예술단체 결성, 관객확보를 위한 방안 등 국립극장 발전5개항을 제시하였다.
1960년대에는 부족한 예산과 민족예술에 대한 인식 부족, 정책 부재 등의 이유 때문에 대관(貸館)으로 겨우 공연장 구실을 한 것 외에는 별다른 공적을 남기지 못하였다. 연중 대부분이 대관극장으로 사용되었고, 자체공연은 연간 2∼3회 정도밖에 없었다. 그러나 창극(唱劇)을 정립시키기 위한 노력이라든가 극작가 발굴사업은 기록될 만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국립극장은 1970년대에 와서 획기적인 변화를 맞이하였다. 정부는 1967년부터 민족문화중흥의 전당으로 장충동 일대에 종합 민족문화센터로서의 국립극장 건립을 착수하여 1973년 7월에 완공하였다. 신축 국립극장은 최첨단 설비와 1,494석의 대극장과 344석의 소극장을 갖추었다. 신축 대극장의 무대 크기만 해도 400평이어서 50평이었던 구 극장에 비해 8배나 컸으며, 무대와 객석의 넓이가 비슷했다. 무대 내에는 지름 20미터의 회전무대와 좌우로 움직이는 이동무대, 2대의 소형 승강무대가 설치되어 있고, 180도 회전 속도가 최고 50초, 최저 3분으로 조절이 가능했다. 프로시니엄(proscenium)에는 연주자 1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오케스트라 피트가 있고, 42.3미터 높이의 무대 탑에는 수·자동 조정이 모두 가능한 2,700개의 조명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 밖에도 실내 확성장치, 음향잔향 부가장치 등을 갖추고 있었다.
장충동 새 국립극장으로 이전한 뒤 산하에 국립극단·창극단·무용단·교향악단·오페라단·합창단·발레단·가무단 등 8개 단체를 두었고, 1973년 10월 17일에 이재현(李載賢) 작·허규(許圭) 연출「성웅 이순신」으로 개관공연을 가졌다. 그리고 8개 전속단체가 대극장·소극장 양쪽에서 번갈아 가며 공연활동을 벌였다. 예산도 과거에 비해서 많이 증액되었고, 기구도 확대되었다.
그러나 교통이 불편한 데다 진입로부터 대중과 차단되어 관객 확대가 어려운 실정이다. 더구나 국립극장이 문화공보부의 주요부서가 되어 레퍼토리나 극장운영 전반에 걸쳐 제약받았다. 1977년에는 가무단이 세종문화회관으로, 1981년에는 교향악단이 KBS로 이관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연습실을 공연장으로 만들었고, 마당놀이를 위한 야외무대도 만들어서 그만큼 공연 공간의 확충을 꾀했으며, 전통예술의 보존과 대중화에 노력하고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현황
1991년 국립중앙극장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1995년 국악관현악단을 창단하였고, 국립중앙극장 분관으로 정동극장을 개관하였다.
2010년 국립극장은 지난 59년간 축적된 우수 레퍼토리를 정련(精鍊)하여 국가 브랜드 작품으로서 세계무대에 선보였다. 그리고 ‘세계 국립극장 페스티벌’과 함께 고객관계관리(CRM)와 홍보·교육을 활성화하고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의의와 평가
국립극장은 우리나라에서 역사가 깊은 극장이자, 공연예술 발전의 중심이 되는 극장이다. 그러나 이 극장은 관립극장으로 시대의 변화를 적극 수용하지 못하고, 목적극적 경향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민간극장이 감당할 수 없는 대형극과 전속단체를 활용한 총체극을 무대에 올려 공연의 다양성을 확보하고, 관객을 찾아가는 순회공연이나 개방공연을 실시하여 문화복지를 구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주석
주01
현 서울시의회 의사당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유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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