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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國防)

국방개념용어

 적국이나 내부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하여 국가가 마련하는 일련의 사상·제도 및 방위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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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의 날 보병 시가행진
분야
국방
유형
개념용어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적국이나 내부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하여 국가가 마련하는 일련의 사상·제도 및 방위활동.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이 방위활동은 국가의 안전과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행해지므로, 국방의 주체는 기본적으로 국가이고 객체는 외부의 무력침략이다.
그러나 국방의 주체가 반드시 국가만인 것은 아니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경우처럼 국가의 구성요건 중의 하나인 영토를 구비하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팔레스타인국가 건설’이라는 정치적 목표달성을 위하여 이스라엘의 침략에 대응하는 것도 국방의 주체라고 본다.
마찬가지로 조국의 광복을 목적으로 군사력을 행사하는 정치단체 등도 국방의 주체가 된다. 국방의 객체는 외부의 무력침략만은 아니다. 침략의 본질은 국가에 의한 군사력의 선제행사이지만, 군사력의 행사는 국가가 아닌 정치적 무장단체 등에 의해서도 행해질 수 있다.
이 경우 반정부단체 등의 군사적 선제활동은 국가에 의한 군사력의 행사가 아니므로 침략이라 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내란 또는 반란이라고 한다. 그러나 내란과 반란이 군사력의 규모나 힘에 있어서 적국에 의한 침략보다 약하지만 국가방위라는 견지에서는 침략과 다름이 없다.
따라서, 내란과 반란도 국방의 객체가 된다. 한편, 한 나라의 평화와 안전 및 번영과 발전을 위하여서는 국방만이 아니라 국가안보도 중요시된다. 국방과 국가안보의 목적은 다 같이 국가의 안전에 있다.
그러나 국방은 주로 외부의 무력침략에 대해 국가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는 데 반해, 국가안보는 무력침략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외부의 정치·경제·사회·심리적인 위협으로부터 국가의 안전을 확보하려는 점에서 다르다.
즉, 국방은 국가안보를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 국가의 안전을 목적으로 하는 부분개념이지만, 국가안보는 종합개념이다. 국방은 군사력을 비롯한 국방력과 이를 수행하는 제도, 그리고 국방사상으로 무장된 의지의 네 요소가 구비되어야 한다.
한 국가의 국방력은 국방사상이나 국방제도에 의해 뒷받침되지만, 그 중심은 군사력에 의한 방위역량이다. 방위역량은 과거에는 군사력만을 뜻하였으나, 제2차세계대전 이후 군사력 일반의 발달, 특히 핵무기와 운반수단의 발달로 전선과 후방의 구별이 없어지게 됨으로써, 민방위역량까지 방위력에 포함시키게 되었다.
그러나 군사력이 방위역량의 필요불가결한 요소인 데 반해 민방위력은 방위력의 필요불가결한 요소는 아니다. 국방을 위한 방위역량은 사전에 적국으로부터의 침략을 억지할 수 있고, 만일 사전 억지에 실패할 경우에 대비하여서 최소한 침략을 격퇴할 수 있는 규모와 능력의 군사력을 갖추어야만 할 것이다.
우리 나라는 지정학적으로 중앙적 위치, 병참적 위치, 기지적 또는 교두보적 위치의 성격을 띠고 있어, 역사적으로 인접국들의 전략지역이 되어 왔으며, 이에 따른 외침을 무수히 받아 왔다. 고조선 이래 많은 왕조의 부침 속에서 나름대로의 호국사상과 국방제도가 있었으나, 국방력의 미약화는 결정적으로 국권침탈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고려 때의 몽고 침략이나 1910년의 일본의 강점이 예이다.
오늘날 한국은 민족항일기를 통하여 의병과 광복군이 국권회복의식에 입각하여 벌였던 무장투쟁활동정신을 계승하여, 주변 강대국 속에서도 자주국방체제의 확립에 매진하고 있다. 그러나 자주국방의 목표가 일차적으로는 우리 동족인 북한공산주의집단으로 설정되고 있어, 분단상황의 특수성을 나타내고 있다.
청동제 무기의 사용과 더불어 성장한 부족연맹체적 성격을 띤 고조선·부여·삼한 등의 군제는 초기에는 주민 전체가 전투구성원이었으므로 별도의 군사조직이 없었다. 그러나 후기에 와서는 군대가 그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아닌 일부 선택된 주민들로 구성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시초는 3세기의 부여나 고구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부여에서는 전쟁이 발발할 경우 제가(諸加)가 전투를 하였고, 하호(下戶)들은 군량을 운반하였으며, 고구려는 가(加) 밑에 대가(大加) 혹은 호민(豪民)이라는 계층이 있어서, 국가의 대외적인 정복사업을 담당하는 무사층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그들이 무장할 수 있는 것을 의무라기보다는 권리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무장의 권리가 일반 양민인 하호에게는 주어지지 않았으며, 그들은 군량을 운반하는 운수병과 같은 구실만을 하였다.
삼국 이전의 국가들은 주변 국가와의 투쟁을 통해 국방의식을 배태시켰으며, 여러 소국 중 백제(伯濟)와 사로(斯盧)는 주변 소국들을 병합하여 백제와 신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삼국이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로 발전하면서 국왕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군대의 편성을 보게 되었고, 국왕은 군대의 총사령관으로서 강력한 군사지휘권을 갖고 있었다.
삼국시대는 정복주의적 전쟁의 시대로서, 삼국은 보다 많은 토지와 사람을 확보하기 위하여 쉴 사이 없이 침략전쟁을 수행하였다. 따라서 삼국시대의 지방조직은 곧 군사조직으로서, 지방의 기본적인 행정단위인 성에는 일정한 수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이들 성의 상부 관할 행정구획은 고구려의 부(部), 백제의 방(方), 신라의 주(州)였다. 그러나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가 도입되면서 성의 군대는 모두 촌락민을 지역공동체적인 유대로 결속시킨 농민군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군제하의 고구려는 국가형성 이후 한족과 투쟁과정 속에서 무를 숭상하고 진취적 기상을 견지함으로써, 정복국가로서 영역을 확장하게 되었다.
612년(영양왕 23)에 을지문덕(乙支文德)은 수나라 양제(煬帝)의 백만대군을 살수(薩水)에서 대패시킴으로써 고구려인의 기백을 떨쳤으며, 수나라에 이은 당나라에 대비하고자 요하(遼河)를 연한 국경선에 천리장성(大連∼農安)을 축조하였다.
한편, 안시성싸움에서는 성주 양만춘(楊萬春) 이하 군·관·민이 일치단결하여 결사항전함으로써 당나라 대군을 물리쳤다. 고구려는 611∼648년까지 약 40년간에 걸친 수나라·당나라의 침략을 물리침으로써 민족적 위기를 모면하게 하였다.
백제는 사비(泗沘)로 천도한 이후 중앙에 22부와 지방에 5부·5방을 설치하여 정치조직과 군사조직의 완비를 보았으며, 지방의 5방에 각각 700∼1,200인의 군인을 주둔시키는 등, 국방에 심혈을 기울였다.
신라는 고구려·백제와 같은 큰 나라를 상대로 투쟁하여야 했으므로, 강인한 전투의지와 다수의 정병(精兵)이 필요하였다. 이를 위해 화랑도를 제도화하고 불교를 정신적인 지주로 삼아 국민적 단합을 꾀하는 한편, 인재양성과 무력강화를 도모하여 가락국을 병합하였다.
진흥왕 때, 한강 유역을 점령하여 반도통일에의 터전을 마련하고, 676년(문무왕 16)에는 당나라의 세력을 역이용하여 삼국을 통일하였다. 당나라의 힘을 빌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다시금 백제·고구려의 유민과 힘을 합쳐 당나라를 축출한 뒤, 민족융합정책의 일환으로 백제·고구려의 유민을 통치체제에 흡수, 일원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앙의 군단인 9서당에 이들 유민을 참여하게 하였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뒤 종전의 6정(停)을 정비하여 9서당과 10정을 설립하였다. 9서당은 신문왕 때에 완성된 중앙군단으로 신라인뿐 아니라 고구려·백제·말갈 등의 이국인까지 포함하여 구성된 것으로, 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직속부대였다.
9서당은 금색(衿色)에 의하여 부대를 구분하였다. 중앙의 9서당에 대하여 지방에는 10정을 설치하였다. 10정은 국방상의 요지인 한산주(漢山州)에만 2개 정을 설치하고, 나머지 8개 주에는 1개 정씩 배치하였다.
전국에 배치된 군단들은 국방뿐만 아니라 경찰의 임무까지 수행하였다. 중앙의 9서당과 지방의 10정을 근간으로 5주당(州幢)·3무당(武幢) 등 여러 군단이 있어, 9주 5소경으로 편성된 신라의 통치조직과 함께 통일신라의 면모를 과시하였다.
고려는 건국 초부터 후백제를 무력으로 통합하는 한편, 북방의 거란과 군사적 충돌이 잦았던 만큼 국방에 대한 인식이 높았다. 태조는 송악 부근의 군사력으로 조직된 강한 직속부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이 직속부대를 근간으로 하여 이군육위의 중앙군 조직이 편성되었다.
6위는 좌우위(左右衛)·신호위(神虎衛) 등의 여섯 부대로 995년(성종 14)경에 형성되었으며, 6위의 임무는 각기 달랐다. 2군은 왕의 친위군으로서 6위보다 우위에 있었다.
이군육위에는 각기 정·부지휘관으로 상장군과 대장군이 있었고, 상장군·대장군들의 합좌기관인 중방은 문신들의 도당(都堂)과 대조되었다.
그러나 문치주의를 표방하는 고려에 있어서는 도당의 권력에 비할 수 없었다. 이군육위는 1천인으로 구성된 영(領)으로 형성되었으며, 영은 병종(兵種)에 따라 구분되었다. 영의 총수는 45영이었다. 영의 지휘관은 장군이었으며, 이들의 합좌기관은 장군방이었다.
북방의 군사조직은 947년(정종 2) 호족들의 군대를 연합하여 중앙에서 통제하는 광군(光軍)이 조직되었으나, 뒤에 주현군으로 개편되었다. 주현군은 도(道)와 계(界)의 성격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계는 국경지대이므로 각 진(鎭)마다
초군·좌군·우군을 중심으로 하는 정규군을 주둔시켰다. 도의 주현군은 보승(保勝)·정용(精勇)·일품(一品)으로 구성되었으며, 보승·정용은 치안과 방수(防戍)의 역을, 일품군은 공역에 동원되었다.
이러한 군제하의 고려는 태조 이후 강력한 북진정책을 추진함에 따라 거란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 993년(성종 12) 고려의 북진정책과 대송(對宋)친교를 구실로 거란의 소손녕(蕭遜寧)이 압록강을 넘어 침입하자 서희(徐熙)의 외교활동으로 압록강 유역에 강동6주를 얻게되었다.
이어서 1018년(현종 9)에 거란이 침입하였을 때는 강감찬(姜邯贊)이 이를 구주(龜州)에서 대파시켰다. 11세기 우야소(烏雅束)에 의하여 통일된 여진족은 고려 변경을 자주 침입하여 왔다.
거란과 여진에 대비하기 위하여 1033년(덕종 2)부터 1044년(정종 10)까지 12년 동안 천리장성(압록강 입구∼동해안 都連浦)을 축조하였던 고려는 1104년(숙종 9) 여진을 물리치기 위하여 별무반(別武班)을 조직하는 한편, 1107년(예종 2) 윤관(尹瓘)으로 하여금 여진족을 토벌, 함흥평야 일대를 점령하고 9성을 쌓게 하였다.
거란이 고려를 침입하자 고려는 몽고와 함께 강동성(江東城)에서 거란을 물리쳤다. 그 뒤 몽고가 고려에 대하여 과중한 조공을 요구하므로 고려의 불만이 팽배해 있던 중, 1225년 몽고 사신 저고여(著古與)의 피살사건을 계기로 몽고는 1231년(고종 18)∼1256년까지 고려를 침입하였다.
그러나 최우(崔瑀)는 항쟁을 결심하고 1232년 서울을 강화로 옮겼다. 이는 바다에 익숙하지 않은 몽고의 약점을 간파한 정책이었다. 1270년(원종 11) 왕의 환도령 발표와 임연(林衍)의 아들 유무(惟茂)가 원종에 의해 살해됨으로써 무인정권의 몰락과 함께 몽고와 강화를 맺게 되었다.
그러나 항몽전의 선두에 섰던 삼별초는 이에 불복하고 난을 일으켰다. 배중손(裵仲孫)을 중심으로 삼별초는 왕족인 승화후 온(承化侯溫)을 왕으로 추대하는 한편, 강화를 떠나 진도·제주 등지로 옮겨다니며 항쟁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이는 민족의 자주성을 과시한 것으로 대몽항쟁의 종결을 뜻하며 동시에 무신정권의 잔영이 사라지게 됨을 의미한다. 원나라·명나라가 교체되는 과정 속에서 공민왕은 배원자주정책(排元自主政策)을 실시하여 고려의 재흥을 모색하였으나, 말기의 실정은 고려왕조의 몰락을 재촉하게 하였다.
원나라 말기의 홍건적은 1359년(공민왕 8) 서경까지 침입하는 등 두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공하였으나, 이성계(李成桂)·최영(崔瑩) 등의 활약으로 격퇴되었다.
한편, 극심한 왜구의 창궐에 금구(禁寇)의 교섭으로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였으나 성과를 얻지 못하고, 최영·이성계 등의 승전에 의하여 왜구의 세력은 악화되었으며, 박위(朴葳)는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그리고 왜구의 퇴치과정에서 최초로 화약이 사용되었다.
화약은 송나라와 원나라가 이미 사용하고 있었으나 그 제조기법이 비밀이었으므로 고려에는 전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1377년(우왕 3) 최무선(崔茂宣)은 왜구의 섬멸을 위해 화약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중국으로부터 그 제조법을 배워서 조정에 건의하여 화통도감을 설치하였다.
화통도감 설치 이후 대장군과 이장군(二將軍) 등 20여 종의 화기가 제조되었으며, 화기발사의 전문부대인 화통방사군(火熥放射軍)이 경외(京外)에 편성, 배치되었다. 최무선은 1380년에 전라도 진포에 침입한 왜구를 자신이 만든 화기를 사용하여 섬멸하였다.
그러나 화기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고려는 1389년(창왕 1)에 조준(趙浚) 등의 상소에 의하여 화통도감을 혁파하여 군기시(軍器寺)에 부속시켰다.
한편, 고려는 잦은 왜구의 침략으로부터 국토를 방어하고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종과 현종 연간에 설립되었던 봉수제를 재편성, 강화하여 해안 요충의 산정에 봉수대를 증설하고, 지방의 긴급사태를 중앙에 알리게 하여 변고에 대비할 수 있게 하였다.
고려의 북진정책을 계승한 조선은 병농일치와 양인개병제(良人皆兵制)를 원칙으로 하여, 1457년(세조 3)에 중앙군으로 5위를 구성하였다. 각 위(衛)는 5부로 하고 각 부는 4통으로 편성하였으며, 그 밑에 여(旅)·대(隊)·오(伍)가 있었다.
5위는 전문군인인 갑사(甲士)와 군역의 교대로 상경한 양민으로 병력을 이루고 있었다. 지방은 각 도에 병영과 수영을 두고 해군과 육군을 통할하게 하였으며 그 밑에 진(鎭)을 두었다.
그러나 함경도와 경상도에는 여진과 왜의 침입에 대비하여 병영과 수영을 둘씩 두었고 전라도에는 수영이 둘 있었다. 이러한 세조 이후의 진관체제(鎭管體制)는 1555년의 을묘왜변을 전후하여 군사적 환경이 변함에 따라 진관체제를 변형시킨 제승방략(制勝方略)의 분군법(分軍法)으로 전환되었다.
분군법은 최전방 방어에 병력을 집중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해당지역에 집결된 병력을 지휘할 중앙에서 파견되는 경장을 기다려야 한다는 시차상의 문제점과 후방지역이 공백화될 취약점을 갖고 있었다.
또한, 봉수제(烽燧制)를 실시하여 지방의 군사적 긴급사태를 중앙에 신속히 상달하게 하는 한편, 역마제를 실시하여 자세한 내용을 문서로 알리게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건국 초의 오위도총부는 사실상 유명무실하게 되었고, 이에 임진왜란중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절강전법(浙江戰法)의 권위자인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 紀效新書』에 따라 포수·사수(射手)·살수(殺手)의 삼수병을 훈련시켰다.
중종 때 설립된 비변사를 비롯해 총융청(摠戎廳)·수어청(守禦廳) 등의 5군영이 숙종 때에 이르러 완비됨으로써 이후 국군의 주력부대가 되었다. 그러나 양민개병제의 원칙이 무너지고 국가재정의 어려움으로 말미암아 군역을 군포의 납부로 대신할 수 있게 됨에 따라, 국가방위력은 전무상태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이러한 군포제는 관리들이 어린이까지도 정남(丁男)에 편입시켜 군포를 징수하는 황구첨정(黃口簽丁)이나 죽은 사람에게서도 군포를 징수하는 백골징포 등으로 많은 폐단을 야기하였다. 다만, 국가의 비상사태 때 정규군이 아닌 의병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이러한 군제의 변경 속에서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국가의 최대 위기를 맞았다. 이이(李珥)의 10만양병설을 도외시하는 등, 당쟁으로 인하여 국방과 민생이 극도로 피폐한 가운데 마침내 조선은 1592년(선조 25)에 일본의 침략을 당하였다.
송상현(宋象賢)·정발(鄭撥) 등의 분전은 죽음으로 끝났고, 기대를 걸었던 신립(申砬)마저 충주에서 분사하고 말았다. 침략 두 달 만에 전국토는 유린당하였고, 선조는 의주로 피난해야만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순신(李舜臣)은 옥포·당포·당항포·한산도 등지에서 연전연승을 거듭하여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시켰다.
한편, 각지에서는 의병이 일어났다. 의병장은 대체로 그 지방에서 명망 높은 선비들이었고, 의병을 일으킨 뜻은 충군애국사상과 민족적 저항의식에서도 찾을 수 있지만 직접적인 것은 향토의식의 발로라 할 것이다.
곽재우(郭再祐)·조헌(趙憲)·정문부(鄭文孚) 등 많은 대소 의병 이외에도 휴정(休靜) 같은 승려들이 승병을 일으켰다. 의병의 구성은 비조직적이었으나, 그 활동은 왜군의 군사활동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한편, 조선의 요청으로 명나라가 5만의 군사를 파병, 평양성을 탈환할 수 있었다.
임진·정유 양란의 피해를 복구하자, 조선은 다시금 대륙을 정복한 청나라의 침략 위협을 받게 되었다. 광해군은 중립정책을 취하였으나 인조는 친명배청정책을 취함으로써, 1627년 정묘호란과 1636년 병자호란을 당하게 되었고, 끝내는 삼전도(三田渡)에 나가 군신의 예를 취하게 되었다.
항복을 반대하였던 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 등 삼학사는 청나라에 잡혀가 죽음을 당하였다.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돌아와 왕위에 오른 효종은 북한산성과 남한산성을 수리하여 국방을 다지며 북벌정책을 폈으나, 이러한 의지를 구현할 수 있는 국방제도상의 조처는 미약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침략 앞에 무너진 민족자존의 상처는 국방의식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 뒤, 영조·정조시대에도 유형원(柳馨遠)이나 정약용(丁若鏞)의 병농일치의 국방사상이 제시되었으나 제도화되지 못하였다.
조선 말기에는 흥선대원군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으면서 군비강화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군령기관을 비롯한 군제를 개편하고, 수군의 강화, 군기 정비, 군자 증액 등의 조처를 단행하였다.
한편, 무비자강(武備自强)의 국방정신을 기조로 한 쇄국정책을 펴면서 국경을 봉쇄하고 외국과의 교섭을 거부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이러한 정책은 개국으로 인한 국가안위를 우려하여 취해진 국가안보책이었다.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뒤 한말의 조정은 부국강병을 정책화하고 갑오경장을 거치면서 신무기 및 군사기술 도입, 신식군대의 창설 등 자주적인 국방개혁을 계속 도모하였으나, 일본의 침략 앞에서 군대해산이라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군대해산은 정치적 무능에 따른 결과이지 결코 호국의지와 국방정신의 약화 때문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 뒤 민족항일기를 통해 치열하게 전개된 국권회복을 위한 항일투쟁에서 여실히 나타나게 된다.
대한제국기에 국권회복을 위하여 전국적으로 봉기하였던 항일의병은 일본군의 소탕작전으로 국내에서의 항쟁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상당수의 의병과 애국청년들은 일제와의 무력항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으로 전환하였다.
1910∼1920년 사이에 북간도 지역을 중심으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대한독립군·서로군정서 등의 독립군 단체가 결성되어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청산리전투에서 대패한 일본군의 독립군 토벌작전 강화 및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수립 등, 만주에서의 독립군의 활동여건이 나빠지자, 독립군 부대들은 중국 본토로 그 근거지를 옮겨야 했다. 3·1운동 직후에 수립된 상해임시정부를 구심점으로 독립군 부대들은 재집결하여 광복군을 조직하였다.
광복군의 목표는 전력을 강화하여 연합군과 협력, 국내로 진입하여 일본군을 축출하고 조국을 광복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표는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나,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이래 광복군이 의병과 독립군의 전통을 이어받아 해외에서나마 조국의 광복을 위해 무장투쟁을 전개한 것은 민족의 정통성을 지키고 국가의 법통성을 이으려는 호국의지의 발로라 할 수 있다.
국토가 남북한으로 분단된 뒤 우리 나라의 국방은 그 대상을 일차적으로 북한공산집단의 침략저지에 두게 되었다.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에 따라 천명된 시정방침에는 침략전쟁을 부인하고 우방국가들과의 유대강화로 국제평화에 기여한다는 국가목표가 명시되었다.
이에 따라 침략이 아닌 방위에 국방의 목표를 설정하고 대북 우위의 국방역량 강화를 추진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여, 6·25전쟁이라는 참화를 당하게 되었다. 그것은 국방역량을 뒷받침하는 정치적·경제적 잠재력의 결핍도 문제였지만 대미의존 국방정책이 가져온 결과이기도 하였다.
사실상, 우리 나라의 국방정책은 광복 이후 20여 년 동안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체결에 바탕을 둔 대미의존의 정책을 펼쳐 왔다. 국가방위의 주체는 우리임에도 불구하고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미국에 의존해 왔다. 그러나 1960년대에 들어와서 북한의 군사력 증강에 따른 위협의 증대와 미국의 대한정책 변화에 의하여, 1960년대 말부터 자주국방론이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북한은 휴전을 계기로 전후부흥계획에 착수함과 아울러 군사력 재건에 박차를 가하였다. 1958년 중공군이 북한지역에서 철수하자 북한은 대중공의존정책을 수정하여 1959년 ‘노농적위대’를 창설하고, 1958년 6월 소련의 군사원조를 획득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군사력 재건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였다.
1962년 10월 쿠바사태가 발생하자, 그 해 12월 노동당 제4기 제5차 전원회의에서 ‘4대 군사노선’을 선언하고 국민총생산량의 20% 이상을 군사비에 투입하는 등 군사력을 증강시키는 한편, 남한을 혼란시켜 공산화통일을 위한 결정적 시기를 마련하기 위하여 울진·삼척 등지에 대규모의 무장공비를 남파시키는 등 대남파괴공작을 전개하였다.
즉, 1968년 1월 21일에는 청와대를 목표로 한 무장공비기습사건이 있었고, 1월 23일에는 동해상에서 푸에블로호피랍사건이 연이어 발생하였다.
그러나 북한의 군사적 위협 증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그 이듬해인 1969년 7월 25일 닉슨독트린을 선포하고 1971년 주한미군 1개 사단의 철수와 함께 군사원조 감축을 단행하였다. 이러한 미국의 대한정책 변화는 우리들로 하여금 자주국방으로의 정책변화를 단행하게 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우리 나라는 1972년 이후 자주국방태세 확립에 노력하고 있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 말 현재 제1·2차 전력증강계획(일명 율곡사업)을 실천에 옮겨 장비의 현대화와 자주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우리 나라 자주국방의 제1차 목표는 호전적인 북한공산주의자들의 남침야욕을 억제하여 한반도에서 전쟁의 재발을 방지하는 한편, 북한공산집단으로 하여금 우리의 평화정착 노력에 동조하도록 하는 데 있다.
구체적으로 북한이 외부의 지원 없이 단독으로 무력도발을 할 경우 우리의 독자적인 힘으로 격퇴할 수 있는 수준까지 국방력을 강화하는 데 있다. 이와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1972년 이래 정부는 군의 장비현대화와 전력증강계획을 마련하고 장비의 국산화를 위한 방위산업을 육성하는 등 자주국방체제를 갖추어 나가고 있다.
육군은 175밀리 자주포를 비롯, 8인치 자주포, 어니스트존 지대지미사일, M48A2C형 전차 등을 도입하여 화력과 기동력을 증가시켰다. 해군은 오랜 숙원이었던 구축함과 대함·대잠 미사일 등을 도입함으로써 현대 해군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며, 공군 또한 세계 최신예 F16전투기를 도입하여 전력을 증강하였다.
한편 방위산업도 그 동안의 경제발전, 과학기술의 진보 및 축적과 신설된 방위세와 국민의 정성 어린 방위성금 등에 힘입어 급속한 발전을 이룩하였다. 북한은 1950년대 후반부터 병기생산에 착수하기 시작하여, 1960년대에 중화기(重火器), 1970년대에 대형장비를 생산하였으나, 남한은 1972년에야 방위산업을 육성하기 시작하였다.
1973년 M16소총을 양산하기 시작하여 전군의 소총을 이로써 교체한 데 이어, 1975년 이후에는 60밀리·81밀리·4.2인치 박격포, 3.5인치 로켓, 106밀리 무반동포, 105밀리 곡사포, 20밀리 발칸포 등 각종 화포·탄약 및 각종 차량과 통신장비 및 고속정을 대량 생산하였다.
또한, 1978년 미국의 최신형 전차 M60A1과 같은 성능을 가진 국산 M48A3을 생산하기에 이르렀고, 1978년 9월 중·장거리 유도탄과 다연장 로켓과 대전차 미사일을 개발, 생산함으로써 우리 나라는 세계에서 일곱번째의 유도탄개발생산국이 되었다.
그리고 1980년부터 첨단기술의 종합체라 할 수 있는 구축함을 건조하는 한편, 1982년에는 국산전투기를 생산한 데 이어 1987년에는 한국형 전차를 생산, 배치하였다. 이처럼 우리 나라는 핵무기를 제외한 거의 모든 재래식 무기를 생산할 수 있게 되어 자주국방의 기틀을 다지게 됨으로써 남북한간의 군사력 격차를 현저히 좁혀 가고 있다.
1980년대 말 남북한의 군사비 대 국민총생산의 비율은 한국이 6%로 북한의 26%에 비해 적었으나 국민총생산의 규모에서 한국은 북한의 4배에 달하므로 실제 군사비의 규모는 한국이 북한의 2.5배나 되었다.
그 이후 1990년대에 들어서는 양측간에 기본적으로 군비통제에 대한 의견에 합의를 보았다. 1990년 9월 4일부터 7일까지 4일 동안에 걸쳐 서울에서, 같은 해 10월 16일에서 19일까지 4일 동안 평양에서 두 차례 남북고위급회담을 개최하여 양측간에 군비확장을 억제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북한의 핵 보유에 대한 국제적인 의혹이 제기되면서 양측간의 합의도출은 무산되고 말았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양측간의 대립적인 정책을 지양하고 유화정책을 표방하는 ‘햇볕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1999년에는 서해안에 소형 잠수함을 침투시키는가 하면 해안 국경선을 넘어 우리 해군과 대치국면까지 가는 북한의 위협적 도발이 그치지 않고 있어, 2000년대에는 더욱 더 자주국방이 요구되는 실정이다.
지정학적 측면에서 보아 한반도는 반도국으로서 하나의 관계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러한 관계적 위치는 그 기능상 중앙적 위치, 병참적 위치, 기지적 또는 교두보적 위치, 완충적 위치로 세분된다.
한반도는 기능적으로 이러한 모든 위치를 종합하고 있어, 역사상 인접국들에게 주요한 전략적 요충지로 인식되어 왔다. 중앙적 위치를 점한 국가는 다른 나라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어느 방향에서든지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중앙적 위치의 국가는 주위 국가들의 강약과 흥망에 따라 지대한 영향을 받게 되고, 이들 세력이 교체될 때마다 교체되는 주변국들간의 전쟁터가 될 개연성이 높다.
그러나 중앙적 위치의 국가가 강력한 자주국방력을 확보할 경우 외부로의 진출에 편리함을 얻게 된다.
고구려는 중앙적 위치를 잘 이용하여 전성기 때 만주까지 세력을 떨칠 수 있었다. 반면, 조선 말기에는 국력의 불비로 인하여 국토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전쟁터가 되고 말았다.
병참적 위치에 놓여 있는 국가는 주변 강대국간의 전장의 배후에 있는 교통·군사상의 요지인 동시에 전쟁물자 공급지가 된다. 몽고는 일본을 정복하기 위하여 고려에서 군선(軍船)을 제조하였으며, 일본은 중국대륙을 진출할 때 한반도를 병참기지로 활용하였다.
기지적 또는 교두보적 위치로서의 한반도의 중요성 역시 매우 높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 강대국간의 극한적 무력충돌의 발생을 상정할 때, 어느 국가가 한반도에서 우위권을 선취하느냐가 전세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중국·러시아 간 전면전쟁을 상정하였을 때, 러시아가 만일 한반도에서 우위권을 선취한다면 중국의 전략자원지인 만주를 시베리아·외몽고 및 연해주와 한반도에서 공격할 수 있는 한편, 동해의 제해권 장악이 용이하게 되고 이를 기반으로 태평양·남지나해·황해에 이르는 해상 교통로를 확보할 수 있는 동시에 중국 해안을 봉쇄하는 한편, 미국·일본의 중국지원을 곤란하게 할 수 있다.
반대로 중국이 한반도에서 우위권을 확보할 경우 러시아의 이점은 불리한 점이 되고 만다. 한반도는 이러한 완충적 위치로 말미암아 동북아시아 국제질서 유지에 중요한 구실을 해왔다. 1885년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하기 위하여 거문도를 불법적으로 점령하여 포대를 구축하였다. 이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영국이 인식한 탓이었다.
또한 일본이 “한국의 안전은 일본의 안전에 중요하다.”는 닉슨·사토공동성명(1969)과 “한반도 전체의 안전이 일본에게 중요하다.”는 신한국조항(新韓國條項, 1975) 등 한반도의 안전을 중시하는 것 또한 한반도가 대륙세력의 위협에 대한 완충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아시아에 있어서 일본의 확보와 일본과의 현상유지를 가장 본질적인 국가이익으로 삼고 있다. 미국은 우리 나라를 이러한 미국·일본관계상의 현상유지를 가능하게 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인식하고 있다.
그것은 한반도가 적화될 경우 일본의 공산화는 시간문제이기 때문이다. 일본이 좌경화하여 친중국·친러시아화 하게 될 경우에는 미국의 안보는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된다.
또한, 한반도의 사태악화로 인하여 일본이 재무장할 경우, 미국이 핵우산을 제공하고 일본은 재래전을 부담한다는 종래의 군사적 분업관계가 깨어질 뿐 아니라, 일본이 오히려 미국의 견제세력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특히 우리 나라는 동북아시아의 균형자(均衡子)로서 일본방위를 위한 방파제 구실을 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와 같은 정치적 측면 이외에도 최근 우리 나라의 경제가 눈부시게 성장함에 따라 과거의 일방적인 처지에서 벗어나 이제는 호혜의 원칙에 따른 경제적·문화적 교류가 활발해짐으로써 그 반사적 이익까지 취할 수 있게 되어, 미국에 있어서 한반도는 더욱 중요시되고 있다.
미국은 남북한 당사자간의 대화를 통하여 ‘두 개의 한국’이 공존하는 평화정립의 협정체제를 구축하려고 한다. 이것은 미국의 기본적 구상이며, 한반도문제에 있어 군사적 해결보다는 정치적 해결에 역점을 두고 있음을 시사한다.
중국의 전통적 한반도관은 한반도가 중국에 대해 우호적 국가로 남아 있는 한, 한반도를 군사적으로 점령하거나 정치적 보호국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은 한반도가 적대국에게 장악되는 것은 중국의 안보를 위협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한반도를 중국의 감독 또는 필요하다면 통제 아래 두려고 하였다.
이러한 중국의 전통적 한반도관은 현재 중국 지도자들에게도 그대로 계승되고 있는 것 같다. 중국은 건국 직후 대외군사행동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도 유엔군이 38선을 넘자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친중국의 북한을 다시 회복시켜 놓았고, 베트남이 공산통일을 성취한 뒤 반중국 친러시아(구 소련)로 선회하자 베트남에 대한 응징전쟁을 벌였다.
그러므로 중국은 앞으로도 한반도에서의 반중국세력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고, 북한의 친러시아화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추론할 수 있다. 특히,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북한지역에 친중국세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치를 결의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중국이 지상과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4화(四化)’의 성취에 기여할 수 있는 절대불가결의 필요요건은 중국 주변의 안정이다. 중국은 한반도에서의 무력충돌사태나 전쟁의 재발은 필연적으로 미국·중국 관계의 변질을 초래할 것이라고 인지하고 있다.
그러한 경우 중국이 현재까지 구축하여 온 4화의 추진·성취를 위한 미국·일본 및 서방국가들과의 협력체제가 붕괴되고 4화정책은 파산될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 한·중관계를 살펴보면 1992년 국교수립 이후 정치·경제·사회·인적교류 등 여러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발전이 있어 왔다. 1994년부터는 군 지도급 인사를 중심으로 꾸준히 군사교류를 증진시켜 왔다. 그리고 군체육 및 국방학술 분야 교류도 연례적으로 추진하여 왔다.
그 뒤 한·중 군 고위급 상호교류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1999년 8월에는 우리 나라 조성태(趙成台) 국방부장관이 지호전(遲浩田) 중국 국방부장의 초청으로 한국 국방장관으로서는 최초로 중국을 공식 방문하였다.
러시아의 대한반도정책 역시 대미·대일·대중국 정책에 종속되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러시아는 한반도의 현상 고정과 남·북 병존을 지지해 왔다. 러시아는 한반도에 통일정부가 세워져 중국이나 또는 다른 강대국에 밀착되는 것보다는, 분단된 채로 남아서 러시아가 한반도에 대해 영향력을 여전히 행사할 수 있기를 원할 것이다.
특히, 미국과의 데탕트를 유지하면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하여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적극 추진하고 있으며, 중국의 군사대국화를 경계하고 있다. 그러나 구 소련이 붕괴하고 구 소련의 여러 민족과 국가가 독립한 뒤로부터는 그 양상이 달라져 가고 있다.
구 소련의 중심 역할을 하였던 러시아는 우리 나라에 대하여 이념이나 군사적으로 대하던 종전의 태도와는 달리 경제적·문화적인 측면을 중요시하면서 우호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더욱이 최근에 이르러서는 군사적인 문제도 상호 협력체제로 접근해 가고 있다.
1997년 11월에는 제1차 한·러 국방정책실무회의를 모스크바에서 개최하였고, 1999년 8월에는 제2차 한·러 국방정책실무회의를 서울에서 개최하였다. 여기서 양국은 최근 한반도 및 아시아·태평양지역 안보정세에 대한 견해를 교환하고, 한·러간의 군사교류를 정례화하는 문제를 논의하였다.
또한 군사당국간 대화의 폭을 다양화해 나감으로써 양국 군간의 상호신뢰를 증진시키는 방안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일본은 북한공산집단이나 중국·러시아 또는 이들의 결합에 의해 한반도가 지배당하게 될 경우, 일본의 안전이 중대한 위협을 받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더욱이 한반도의 불안으로 미국이 군사작전을 전개할 경우, 일본은 미일안보조약에 따라 미국과 협력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사태진전은 국내의 정치적 분열을 조장하고 러시아의 적대행동을 유발하게 되어, 일본·러시아 관계를 파탄에 빠지게 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한반도의 안정 여부는 일본방위의 기본 조건이며, 우리 나라의 존재는 대륙공산세력의 남진 저지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완충지대이다. 또한, 일본의 대아시아 수출의 대부분은 우리 나라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여기에 대북한무역까지 가산한다면 그 폭은 더욱 커지게 되기 때문에 일본은 한반도를 최적의 시장으로 여기고 있으며, 이러한 경제적 실리의 지속적인 추구를 위해서도 일본은 ‘두 개의 한국’을 인정하는 남·북한 등거리외교를 펴나갈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우리 나라와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 4강 중 어느 한 국가도 한반도가 통일되어 특정국가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고 있으며, 또한 남·북한간의 무력에 의한 통일노력을 지지하지도 않고 있다.
이들 4강은 ‘두 개의 한국’을 인정하는 분단의 고착화를 추구하고 있으나, 어느 일방의 세력이 약화될 경우에는 한반도의 전략적 이익을 독점하려 할 것이다.
따라서, 4강의 한반도에 대한 이해관계는 우리의 염원인 통일에 부정적 요인으로 작용하며, 4강의 대한반도정책 변화는 한반도의 안정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국제정세 속에서 우리는 자주국방의 제일차적인 목표를 ‘북한공산집단의 단독도발의 경우’로 상정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이 한반도에서의 무력충돌을 원하지 않는 중국과 러시아의 지원 없이 단독 도발을 감행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한반도에서의 전쟁억지와 평화정착은 자주국방 능력의 확보와 함께 우리 스스로가 자주외교를 펼쳐 강대국과의 유대관계를 이룰 경우에만 가능하게 된다.
우리 나라의 국가안보상 가장 중요한 외교적 변수는 한·미관계이다. 하지만 한·미관계는 역설적으로 우리의 경제력과 국방력이 신장될수록 유대관계가 강화될 것이기에, 자주적 국방력의 신장과 더불어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자주적 외교정책의 견지는 우리 나라의 안보에 있어서 중요한 관건이 된다.
또한, 우리 나라 안보의 일차적인 적은 북한공산집단이지만 북한공산집단과의 대결은 민족 내부의 갈등이므로, 군사적 차원의 대결도 중요하지만 정치·사회적 차원의 대결이 중요한 양상을 띠게 된다. 따라서, 군사력의 증강에 앞서 우리 사회 내의 정치·사회적 단결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국방의 객체는 외부로부터의 무력적 침략이지만 침략에 대처하는 주체는 국가이므로, 어떠한 국제환경의 변화 속에서도 투철한 국방의식을 바탕으로 한 화합된 자주국방력이 강력히 요구된다.
탈냉전 이후 국제사회에서는 안정화를 위한 노력들이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고, 그 가시적인 성과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안보정세를 위협하는 지역분쟁, 대량살상무기의 확산 등의 불안 요소들은 세계가 함께 풀어가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2000년 말 현재의 국제안보는 구 소련의 해체 이후 미국이 유일한 군사적 초강대국으로 남아 국제정세 전반에 방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 유럽연합·러시아·중국·일본 등도 각기 지역적 영향력권을 행사하는 단일다극구조를 보이고 있다.
이에 따라 세계 각국은 이들을 중심으로 전개될 안보질서의 향방에 따라 저마다 국가안보전략을 새로이 모색하고 있다.
한편, 탈냉전 후 국가안보에 대한 인식이 생존 차원뿐만 아니라 국가번영 차원으로 확대되어, 즉 국가안보 이익의 범위가 종전의 정치·군사적 영역은 물론 무역·금융·자원·기술·정보·환경·복지·문화 등 경제 사회적 영역까지도 포함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종래 군사 위주의 전통적인 안보개념이 정치·군사·경제 영역까지 포괄하는 ‘포괄적 안보(comprehensive security) 개념으로 바뀌고 있다.
특히 1996년에 수립된 세계무역기구(WTO)체제가 경제의 세계화를 가속화시키고 있는 가운데 무역과 금융, 자본시장의 국가간 상호의존성이 높아지면서 국가간 갈등이 드러나고 있다.
최근 동아시아의 금융위기와 각 지역에서의 대규모 실업문제 등은 경제 분야에서 발생되는 문제가 국내는 물론 국제적인 안보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21세기의 안보환경과 우리 나라의 국방관도 이에 걸맞는 자세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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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 (1995년)
박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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