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숭배사상, 신수사상(神樹思想)이 배경이 되면서 식물을 영적(靈的)인 것으로 간주하여 신이 내리는 도체(導體)로 삼아온 데서부터 시작되었다([그림 1]). 따라서 숭배하는 대상에게 식물을 바치는 실용적인 목적에서부터 시작하여 몸 가까이에 두고 즐기며 감상하는 욕구로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꽃을 꺾어서 그릇에 담아 즐기게 되었으며, 인간의 조형적인 영감과 예술적인 능력은 변화와 조화의 묘미를 찾게 되어 꽃 자체의 아름다움만이 아닌 인간의 마음과 조형능력을 통한 자연의 표현, 즉 예술로서의 표현을 즐기게 되었다.
우리 나라의 자연관은 모든 것이 우주의 원소로 돌아간다는 공(空)의 사상이었고, 또 공간 속에 사상과 철학을 담은 공백의 미를 으뜸으로 여겼기에 삽화형식(揷花形式)도 선인들의 우주관이 바탕이 된 원형(圓形), 방형(方形), 각형(角形)의 외형을 주로 하면서 꼭 필요한 것 이외에는 없애고 공간을 살렸으며 또 지나친 격식이나 형식에 얽매이는 것을 꺼렸다.
우리 나라의 꽃문화예술은 몇 천년의 역사가 그 뿌리가 되어 왔으며 그 뒤 불교의 전래에 따른 공화형식(供花形式)을 받아들이면서 좌우대칭적이며 인위적인 성격이 가미되게 되었다.
이와같이 우리 나라의 꽃문화예술은 민족신앙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제의(祭儀)에서 식물을 세워 신이 내리는 도체로 삼은 것으로부터 비롯된 자연묘사적 표현과 외래문화인 불전공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생긴 인위적인 표현의 두 경향을 나타내게 되었다.
옛 문헌에서는 삽화(揷花)·삽저(揷貯)·병화법(甁花法)·삽병법(揷甁法) 등으로 칭했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현재는 고등학교 국정교과서인 ‘생활원예’속에 수록되어 있고 대학에서의 여성교양과·미술과 또는 원예과에서 전공필수로 또는 전공선택으로 교육하고 있으며 또는 디자인대학원의 전공으로 선정되어 있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학회도 설립되고 화예(華藝)의 학문적인 정립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학점은행제도에서도 ‘화예과’로서 독립된 과목으로 인정되었으며 대학에서는 ‘화예’ 또는 ‘꽃예술’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고, 원예과에서는 원예장식·화훼장식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종사자 또는 일반적으로는 아직 ‘꽃꽂이’라는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고구려 쌍영총(雙楹塚)의 후실 북벽에는 팔자(八字) 소슬을 사이에 두고 화병꽃이 그려진 그림이 있다. 이 그림으로 볼 때 이 시대에 이미 조형미를 갖춘 품격 높은 꽃작품이 장식으로 등장하였으며 좌우대칭의 구성을 훌륭하게 구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그림 2]).
또 안악2호분의 선녀비천상(仙女飛天像) 벽화에 보이는 수반에 꽂힌 연꽃 배치는 쌍영총벽화의 좌우대칭적 구성과는 다른 선적(線的)인 요소가 돋보이는 자연묘사적 표현을 보여준다([그림 3]).
이와 같이 자연묘사적 표현과 인위적 표현의 두 경향은 시각적으로는 삼국시대부터 보이고 있으며 그릇으로서는 병과 수반이 동시에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상들은 병꽃을 더욱 사랑하였음을 시대가 내려오면서 여러 작품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향가 중 <헌화가 獻花歌>에서 “짙붉은 바윗가에 잡은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 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라는 구절로 미루어 이 시대에는 친애나 사랑, 존경의 표시로 꽃을 꺾어 바치는 풍속이 있었으며, 꽃을 사랑하며 작품화하는 풍습이 종교적 의식의 단계를 지나 이 땅의 문화 풍토에 주체적으로 용해되어 있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또 신라의 막새기와([그림 4])에 그려진 병꽃 그림은 좌우대칭으로 꽂혀 있고 병 입구에서 깨끗하게 한 줄기로 묶여져 있다. 병 입구에서 한 주먹 정도 한 줄기로 보이게 하는 이 기법은 16세기에 확립되었다고 하는 일본 전통화인 ‘릿까(立華)’의 핵심적인 기법이며 쌍영총 벽화 그림에서도 엿볼 수 있고 조선시대에 와서는 많은 그림에 나타나 있다.
18세기에 시작되어 19세기 초에 그 형식이 확립된 또 하나의 전통기법인 ‘세이까(生花)’도 훨씬 앞선 연대인 우리 역사 속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7세기 통일신라시대의 십일면관세음보살입상, [그림 5]).
이로 미루어 볼 때 우리 문화예술이 다른 문화와 마찬가지로 일본꽃문화에 크게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고려사≫ 명종 14년(1184)조에 “왕이 이미 기복(起復)하였으니 예절은 마땅히 고례(古禮)를 따라 채색누각을 짓고 풍악을 연주하며 꽃을 꽂아야 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연회를 받지 않겠다.”라든가, 충렬왕조에 “연회날에 꽃계단을 꾸몄다가 오래 되면 이를 새로 갈아놓았다.”라는 기록을 보면 장식용의 꽃문화가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감상의 대상으로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절요≫의 “5월에 최이(崔怡)가 집에서 잔치를 베풀었는데, 4개의 물통에 붉은 작약과 자줏빛 작약 10여 품을 가득히 꽂았다.”라는 기록도 이를 입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또 이 시대의 시가를 보면, 꽃을 꽃병이나 수반뿐만 아니라 머리·모자·옷 등에 이르기까지 장식으로 꽂았음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이 꽃을 꽂는 풍습이 일반화되었기에 그 양식도 다양하게 발달하였다.
청자상감모란당초문 항아리([그림 6])에 새겨진 그림에서는 대층으로 화반에 꽃줄기를 한 그릇 안에서 나누어 꽂는 현대의 나누어 꽂기 형식을 찾아볼 수 있고, 청자철재화분문병([그림 7])에는 비대칭의 꽃음새도 볼 수 있다. 또 12세기 청자상감수경문경판을 살펴보면 그릇 언저리에서는 줄기를 나누어 꽂으면서 윗 부분을 교차(交叉)시킨 기법도 현대와 동일하다 하겠다([그림 8]).
수덕사 대웅전 안벽의 그림에서는 수생화·야생화를 선과 여백처리가 아닌 수법으로 풍성하게 처리한 좌우대칭의 수반형태를 볼 수 있다([그림 9]).
<관경변상도 觀經變相圖>나 <수월관음도 水月觀音圖>의 공화(供花)에서는 장식성이 강한 옆으로 누인 구성표현을 한 양감적인 좌우대칭의 경향을 볼 수 있다([그림 10]). 또한< 수월관음도>에서 보이는 정병(淨甁)의 버드나무는 중생을 구제하는 대자대비한 관음보살의 표상이며, 재앙을 쫓는다는 종교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는 하나, 꽃문화예술에 있어서는 시대적인 흐름에서 볼 때 넓은 뜻의 기원(起源)적인 의미와 자연묘사적인 표현의 발전과정을 찾아볼 수 있다([그림 11]).
이밖에 해인사 대적광전 벽화(모사도)에는 늙은 가지의 선을 살려 꽂은 꽃작품에서 이 시대의 높은 미감을 읽을 수 있고, 또 같은 곳에 있는 벽화의 꽃바구니 그림은 괴석과 꽃을 조화시킨 문인취향의 차원 높은 꽃바구니 꽃으로 꽃의 색깔과 질(質)의 대비적 처리와 공간처리 등에서 서구적인 감각과의 차이점을 볼 수 있다([그림 12·13]).
뿐만 아니라 불교문화의 융성과 화기로서의 고려청자의 출현은 화예의 표현영역을 확대함에 결정적 구실을 하였기에, 예술로서의 꽃문화의 본격적 발생은 이때부터라 할 수 있다. 또 궁중에서의 꽃문화는 고려시대의 귀족문화적인 생활환경을 배경으로 해서 고려청자의 출현과 더불어 화려하게 꽃피웠던 것이다.
궁중에서는 다음과 같은 의식과 담당관직이 있었다. 고려시대의 궁중의식과 화예를 보면, 먼저 꽃을 사용한 의식으로 ① 왕이나 왕비 왕태자 책봉의례, ② 연군신의례(宴群臣儀禮), ③ 연등회 및 팔관회, ④ 기로연(耆老宴), ⑤ 하사품(下賜品) 등이 있었다.
그리고 화예 장식을 위한 담당 관직으로는 ① 선화주사(宣花酒使) : 왕이 하사하는 꽃과 술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고 있은데 꽃을 권화사에게 전달한다. ② 권화사(勸花使) : 꽃을 꽂는 것을 담당하는 직책인데 선화주사로부터 꽃을 받아서 꽃을 꽂는 대상자들에게 차례로 꽂아 준다.
③ 압화사(押花使)·화주궁관 : 꽃과 술의 운반을 감독하는 사람. 꽃을 간직하는 사람. ④ 인화담원(引花擔員) : 꽃을 가진 사람을 영솔하는 사람. 꽃을 거두는 사람. 등이 있었다.
이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꽃문화와 관계되는 서적이 저술되고, 또 전문서적이 아니더라도 꽃·삽화·분재·분경(盆景) 등을 다룬 저작이 나오고 있다.
세종 때 강희안(姜希顔)이 지은 ≪양화소록 養花小錄≫은 농서(農書)로서 우리 나라 최초의 전문서적이며 더불어 꽃을 배경으로 하는 사상과 철학이 담겨져 있고 ≪산림경제≫·≪오주연문장전산고≫·≪임원십육지≫ 등은 삽화·분재·분경 등을 다루고 있다.
이들 자료는 식물의 성장에 관한 여러가지 문제뿐만 아니라 그 기술적 측면, 즉 꺾어진 꽃들이 병 속에서 그 생명을 오래 유지할 수 있는 과학적 처리에 이르기까지 기술되어 있다.
특히 ≪임원십육지≫에는 화예에 사용되는 그릇과 꽃과의 조화(調和) 관계 이외에 화예의 조형미에 대한 논술과 더불어 기술적인 정수를 소개하고 있어 현대와의 일치성과 연관성을 찾아볼 수 있게 한다.
또 조선시대의 화조도·풍속화·탱화(幀畫)·책거리·병풍그림·문자도(文字圖)·화전지판[木刻] 등에 보이는 꽃작품 그림에는 현대 화예에서 기본틀이 되는 직립·경사·변형·자유형에 이르는 다양한 양식이 보이고 있고 그 형식을 바탕으로 한 창작 작품도 나오고 있어 매우 주목된다. 또 화전지판 목각(木刻)은 십일면관세음보살의 공화와 같은 꽂음새이며 일본 ‘세이까’와 그 모양이 동일하다([그림 14]).
기로연은 경로우대를 목적으로 전직 2품(二品) 이상이 되는 사람 중 70세 이상을 위해 베푸는 것으로서 연로한 왕도 참석한 연회이며 <기로연도 耆老宴圖>([그림 15])에서는 백자항아리 한 쌍에 나뭇가지의 색과 질을 서로 대비, 조화시키면서 나누어 꽂고 있어 오늘날의 거듭꽂기 요소와 동일하여 주목할만 하다.
임경업장군상(林慶業將軍像)([그림 16])에 보이는 병꽃은 매우 맵시있고 정돈된, 완결에 가까운 소품처리를 하고 있으며, 송(松)·죽(竹)·매(梅)의 배합 속에 장군의 높은 인품을 암시하면서 격조 높게 꽂고 있다.
조선시대는 유교가 전래되면서 시각적인 아름다움만으로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인간의 삶의 지표라 할 수 있는 가치관으로 형성되는 조건의 미(지조와 덕성 함양을 표상으로 삼을 수 있는 것.)를 가진 꽃을 사랑하고 교훈적인 고사라든가 과거의 선가자나 철인들이 좋아했던 꽃을 사랑하는 풍조(風潮)로 발전하게 된다.
또 품격까지 정하고 정원구성이나 꽃작품 구성에 있어서도 이러한 경향을 살필 수 있다([그림 17]).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松… 歲寒에 푸르며 굳건한 意志表示
竹 … 風雪을 견디고 節槪를 지키며 德을 쌓는다
梅 … 싸늘한 겨울바람과 寒雪에 홀로 꽃을 피워 은은히 香氣를 퍼뜨린다
또 궁중에서는 많은 수요량을 충족시키기 위해 가화(假花)도 사용하였으며 화장(花匠)이라는 전문직이 있었고, 궁중의식이 있을 때 꽃을 올리고 나누고 꽂고 관리하는 임시관직인 분화관(分花官)도 있었다.
또 이 시대의 꽃문화 발전에 중요한 몫을 차지하는 것은 조선시대의 백자그릇이다. 수반뿐만 아니라 병에 이르기까지 고려자기와 함께 우리 나라 꽃예술 발전에 결정적인 요소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화재(花材)에 있어서는 초화류(草花類)와 나뭇가지는 물론 수초(水草), 마른 소재, 동물의 털, 산호, 괴석(怪石), 괴목(怪木)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도 광범위한 양상을 띠고 있다.
외형적인 구성에 있어서도 한국의 우주관이 담긴 삼각형태([그림 18·19])·사각형태([그림 20·21])·원형태([그림 22·23]) 등을 사용함으로써 철학적인 배경을 뒷받침하고 있으며 현재 사용하고 있는 모든 구성표현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조선시대 특히 장인들을 모두 끌고간 임진왜란 이후는 우리 나라 꽃문화가 쇠퇴해 갔으며 일제 39년 동안은 일본의 민족문화말살정책으로 더욱 암흑기를 맞게 된다.
도자기뿐만 아니라 모든 전문직종의 장인들은 임진왜란 때 모두 끌려간 것으로 짐작된다. 일본의 ‘이께바나(生花)’, ‘다도(茶道)’의 실질적인 역사는 연구 결과 임진왜란 훨씬 후부터로 보고 있다.
광복이 되어 국권을 되찾은 뒤에까지 일본의 이께바나는 잔존하고 그 조직하에 움직이는 것을 자랑으로 아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우리 나라 꽃문화역사연구와 주체운동이 활발히 시작되게 되면서 조금씩 정리되어 갔다.
현재 우리 화예계에서는 개방시대를 맞으면서 국제화라는 명분하에 외국문화조직에 대한 선호도가 다시 고개를 들면서 무비판적으로 해외의 조직과 형식이 활발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양한 표현을 받아들이는 것은 시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되나 자칫 본체를 잊는 듯하는 양상으로 가고 있어 염려되며 사상과 철학이 담긴 우리의 옛 문화예술의 뜻은 사라져가고 상업주의적인 경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꽃을 통해 우리의 사상과 철학을 배우게 된 결과 우리의 모든 미술의 뿌리가 태극사상(太極思想)과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사상과 결부되어 있음을 알 수 있고, 꽃문화예술 역시 그 예외는 아니며 갈등 없이 아름답게 어우러져 있는 조화의 극치를 나타내는 태극무늬의 선은 우리의 전통의 선이라 할 수 있다([그림 24]).
건축의 처마의 선, 한복의 소매배래선과 도련선, 농악의 상모놀이의 움직임선, 한국 춤사위의 움직임 등등의 아름다운 곡선도 여기에서 연유되며 태극의 곡선은 우리의 전통의 선이라 하겠다.
태극무늬는 11세기 중국의 태극도면(太極圖面)이 처음 나오기 몇 백년 전에 이미 우리의 생활속에 자리잡고 있었고 모든 미술적 표현의 뿌리가 되어 있었음을 알게 된다.
우리의 꽃문화는 훌륭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만큼 앞으로 우리의 것을 다듬고 가꾸어서 세계적인 것으로 발전시키고, 외래적인 것도 민족적 문화예술의 주체적인 바탕 위에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본다. 현재 우리 나라 화예계는 수많은 종사자를 배출하고 있어 철저한 교육만 뒤따른다면 우리의 꽃문화예술의 앞날은 매우 밝다고 하겠다.